|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우당(愚堂) |
본관 | 삼척 김씨[2] |
출생 | 1901년 3월 4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1965년 1월 31일 (향년 63세)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1가 35-9번지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88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군인,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및 한국광복군 소속 군인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받았다.2. 생애
1901년 3월 4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해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물을 몰래 배포했다. 그러나 그해 3월 23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곧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1921년 10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해 이듬해인 1922년 이준식 등 10여 명과 함께 운남 육군강무당에 입학했고, 1924년 졸업 후 광동성 광저우 주둔 국민혁명군 제43군[3]에서 복무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중앙훈련단에서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소련과의 외교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방순희(方順熙)와 결혼했다. 1941년 한국독립당 중경지구당 위원장에 취임하는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 고등(고급)부관을 거쳐 194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초대 경위대장에 취임해 임시정부 청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경호를 담당했다. 1942년 6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위원에 선임되어 대내외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고, 그해 10월 25일 개최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강원도의원에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28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이상정· 심광식· 이상만(李象萬)· 최동오· 엄항섭· 조경한· 조시원· 이복원(李復源)· 유동열· 유자명(柳子明)·방순희· 박건웅(朴健雄)· 신건식(申健植)· 이정호(李貞浩) 등과 함께 중국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의 취소를 요구하는 제의안에 연명해 제출하기도 했다.
1943년 3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장에 임명돼 경찰총수로서 동포사회를 보호하며 전반적인 경찰 업무를 총괄했고, 그해 8월에는 개편된 '광복군총사령부 직제'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임명되었다. 1944년 12월 9일 당시 광복군 정령(正領)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1945년 6월에는 광복군 참모처 제2과장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광복군 주항지대장에 임명돼 권준· 김학규· 박시창· 최용덕과 함께 저장성 항저우시에서 국민혁명군 또는 일본 제국 육군에 소속돼 있던 조선인 사병들을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킨 뒤 훈련을 담당했다. 1946년 4월 26일 미합중국 해군의 전차상륙함을 타고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함께 귀국해 인천항에 도착했으나, 당시 한반도에 콜레라가 돌고 있어 부산항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에야 상륙 수속이 끝나 비로소 귀국했다. 이후 백범 김구 밑에서 애국단을 조직해 비밀활동을 하였다. 1947년 조소앙이 회장으로 있는 국민의회에서 문교위원을 맡았고, 그해 10월 대한의열당을 창당해 부위원장 겸 중앙상무위원을 맡는 등 정치활동을 했다.
1948년 장흥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특7반에 입교했고, 임관 후 1949년 제21보병연대 연대장으로 태백산지구에서 이호제, 김달삼 등의 공비 수괴를 사살하는 등 공비들의 활동을 봉쇄하였다. 1950년 6월 국방부 방위국 고문에 임명되었고, 1950년 10월 3군단 예하 유격사령관으로 춘천-삼척 지역의 공비 및 패잔병을 소탕했고, 이후 105노무사단장을 맡아 전쟁 물자 지원 및 운송에 기여했다.
1953년 준장에 진급했고, 1954년에는 노무사단장 당시 미8군을 지원하며 세운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자유훈장(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1957년 12월 예비역 소장 진급 후 퇴역하였다. 퇴역 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받았고, 독립동지회 상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5년 1월 31일 밤 10시에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1가 35-9번지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유해는 2002년 10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
아내 방순희 여사는 임시정부에서 유일한 여성 의정원의원(함경도)이자, 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아들 김종화는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냈다.4. 여담
-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의 육군사관학교 추천서를 작성해주었다. 당시 추천서를 본 생도대장이 "소위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란 건가?" 물었고, 이를 들은 민영구 제독이 이종찬 장군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 사건과 무관하게 민영구 제독이 이를 듣기 전에 합격이 되었다한다.
- 1955년 이종국(李鍾國) 준장 아동학대사건 관련 군사재판에서 심판관을 맡았다. 이종국은 해방 전 김관오와 국민혁명군에서 복무하였고,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 육군본부 병무감 재직 중이던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당시 범인 중 한 명인 김상붕(金相鵬)이 김관오의 집에 동거인으로 기록된 바 있으나, 당시 1956년 10월 5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관오는 형인 김상봉(金相鳳)이 105노무사단에서 연락병으로 복무할 때 약 3개월 간 자신의 집에서 생활한 적이 있으며, 정작 김상봉은 만나 본 적이 없고 김상봉의 가족들이 자신의 동거인으로 기록돼 있던 것은 5.30 정·부통령 선거 당시 유권자 조사 중에 있던 반장을 통해 확인을 받아 즉시 기록에서 빼달라는 신청을 냈다고 말했다. 또한 김상봉의 가족들이 자신의 동거인으로 기록돼 있던 것에 대해서는 군에서 지급하는 배급을 타기 위해 허위가족신고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증언했다.
- 김상붕의 형 김상봉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모의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으며, 신문기사에 따르면 당시 김관오가 군을 동원하기로 되었다고 하나, 해당 기사가 사건 발생 후 20여 년 뒤에 나왔고, 사건 당시 기사에 언급이 안된것을 보면 연관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