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학규(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광복군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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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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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백파(白波) |
본관 | 안동 김씨[1] |
출생 | 1900년 11월 24일 |
평안남도
숙천군 평리면 사산리[2] (현 평안남도 숙천군 사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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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년 9월 20일 (향년 66세)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 57-188번지 자택 | |
학력 |
신흥무관학교 (졸업) 문회고급중학교 (졸업) |
복무기간 | 1940년 ~ 1946년 |
주요 경력 |
동명중학교 교사 조선혁명당 군사령부 참모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한국광복군 제3지대대장 한국광복군 주상해판사처처장 한국독립당 동북특별위원회 위원장, 당수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50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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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안동(安東).2. 생애
1900년 11월 24일 평안남도 숙천군 평리면 사산리(현 숙천군 사산리)에서 아버지 김기섭(金基燮)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만주 통화현 이밀에서 개간을 하면서 지내다 신흥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만주 봉천 신민현의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뒤 동명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1929년, 양세봉 등이 조직한 조선혁명군에 들어가서 양세봉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 남경 통일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게 된다.
이후 조선혁명당 등을 거쳐 1940년 광복군이 결성되자, 광복군 제3지대장에 임명되었다. 미국 OSS와 연계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지만, 1945년 8.15 광복이 이뤄지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3. 광복 이후
광복 후 중국 내 동포들의 국내 귀환을 추진해서 동포들의 귀국에 일조했고, 1948년이 되어서 10살에 떠났던 조국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직전까지 광복군 평진지대(平津支隊)[3]의 지대장을 역임했다. 일본군,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인 병력을 대거 받아들여, 해방된 조국에서 창설될 군대의 기반을 닦을 심산이었지만... 고의적으로 일체의 정치 단체를 인정하지 않던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이후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을 맡았다.1949년, 서북청년회 단원 홍종만의 소개로 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게 소개시켜 준다. 덕분에 안두희는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김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김구 암살 직후 열린 재판에서 홍종만은 김학규가 군내에 한독당의 비밀당원을 늘리기 위해 안두희를 가입시켰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김학규는 김구의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60년 5월, 허정 과도 정부는 김학규를 석방해주었다. 이후 1960년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여 최고 대표위원을 지냈고,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독당 후보로 경기도 화성군 을에 출마했으나 서태원에 밀려 낙선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1967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 57-188번지 자택에서 신병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68년 9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4. 선거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화성군 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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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표 (4.26%) | 낙선 (9위) |
5. 기타
Hearts of Iron II에서 중화민국 육군 소장으로 등장하며 책략가 특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