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기욤 드 발랑스 Guillaume de Val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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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27년에서 1231년 사이 | |
프랑스 왕국 뤼지냥 인근 발랑스 수도원 | ||
사망 | 1296년 5월 16일 |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브라본 | ||
아버지 | 위그 10세 드 뤼지냥 | |
어머니 | 앙굴렘의 이자벨 | |
형제 | 위그 11세, 아네스, 아델라이드, 기, 조프루아, 에메르, 이자벨, 마르그리트 | |
배우자 | 조안 드 먼첸시 | |
자녀 | 장, 기욤, 에메르, 마르그리트, 아네스, 이자벨, 잔 | |
직위 | 초대 웩스퍼드 남작, 초대 펨브로크 백작(자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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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헨리 3세 편에 서서 시몽 드 몽포르에게 대적했고,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전쟁에 참여했다.2. 생애
2.1. 초년기와 잉글랜드 이주
1227년에서 1231년 사이에 프랑스 왕국 뤼지냥 인근 발랑스 시토회 수도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위그 10세 드 뤼지냥은 라마르슈와 앙굴렘 백작이며, 어머니 앙굴렘의 이자벨은 존 왕의 미망인이다. 형제로 위그 11세[1], 아네스[2], 아델라이드[3], 기[4], 조프루아[5], 에메르[6], 이자벨[7], 마르그리트[8]가 있었다.1241~1242년, 기욤의 부모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봉기는 앙굴렘의 이자벨이 존 왕과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장남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3세의 지원을 받았으나 끝내 진압되었고, 루이 9세에게 항복한 위그 10세는 모든 영지를 자식들에게 분할 상속해야 했다. 이때 기욤은 앙굴렘에서 몽티냐크를, 라마르슈에서 벨락과 샹파뉴를 상속받았다. 그 후 아버지의 반란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사는 게 힘들어지자, 1247년 헨리 3세의 부름을 받아들여 형제 기, 에메르, 아델라이드와 함께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들은 교황 특사인 사비나 주교 굴리엘모와 함께 도버에 도착했다. 반면 위그 11세와 조프루아는 자기들의 영지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헨리 3세가 자신의 이부 형제들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인 건 푸아투의 유력 가문이었던 뤼지냥 가문이 프랑스의 압력에서 벗어나 잉글랜드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가스코뉴의 안보를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잉글랜드 왕실을 강화하려면 이부 형제들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기욤은 잉글랜드에 도착한 직후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외손녀인 조안 드 먼첸시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기욤은 펨브로크 성을 받았다. 또한 아일랜드의 웩스퍼드 영지를 받았으며, 1258년 이전에 바이퍼드와 에센던 영지의 보안관으로서 굿리치 성을 포함한 잉글랜드의 여러 부유한 영지를 받았고, 헤리퍼드 성의 무관장이 되었다. 1251년 기욤의 통제하에 있던 바이퍼드, 에센던 및 하트퍼드가 장원으로 승격되었고, 그는 500 마크의 연금을 받았고, 추가로 500 마크를 할당받았다. 이렇듯 잉글랜드에서 여러 영지를 보유하게 된 기욤은 몽티냐크를 조프루아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기욤은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내의 외할아버지 윌리엄 마셜이 누렸던 광활한 영지를 확보하고 펨브로크 백작이 되기 위해, 마셜 가문이 누렸던 영지를 분할 상속한 클레어 및 보훈 가문과 갈등을 벌였다. 기욤이 펨브로크 백작에 선임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아내 조안의 상속 재산의 보호자로서 종종 '펨브로크 백작'으로 일컬어졌다. 1251년부터 공식 문서에서 백작으로 일컬어졌으며, 종종 출생지를 따서 '발랑스 백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펨브로크 백작이라고 칭하지 않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왕의 형제(그리고 헨리 3세가 죽은 후에는 에드워드 1세의 삼촌)인 기욤 드 발랑스 경"으로 자주 불렸다. 한편, 기욤은 아내의 상속 재산을 늘리기 위해 아내의 이복형제 윌리엄 드 먼첸시를 상대로 상속 소송을 걸었다. 분쟁은 1289년 기욤이 윌리엄 드 먼첸시의 딸인 디오니시아가 상속받지 못하게 하려고 시도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2.2. 헨리 3세의 총애와 잉글랜드 대귀족과의 갈등
1247년 10월 13일, 기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리 3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1249년까지 다양한 기사 토너먼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에도 유럽 대륙을 돌며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1249년 10월 2일 프랑스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프랑스를 다녀왔으며, 1250년 3월 6일 헨리 3세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십자군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할 때 함께 약속했지만, 실제로 십자군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1250년, 아버지 위그 10세가 십자군 전쟁 중에 사망했고, 기욤은 2만 마크에 달하는 수입을 상속받았다.1252년 1월, 헨리 3세는 가스코뉴 반란을 초래한 가스코뉴 세네샬 시몽 드 몽포르를 규탄한 의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기욤은 이후로 왕이 자신을 처벌하지 않을 거라 믿고 오만하게 행동하고 거물들과 다퉜다. 1252년 10월, 그는 하트퍼드셔에 있는 엘리 주교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리고 그해 연말에 윈체스터 주교로 선임된 형제 에메르와 합세해 캔터베리 대주교 사보이의 보니파시오의 궁전을 습격해 약탈했다. 그는 예상대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뤼지냥 가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253년 10월 헨리 3세의 가스코뉴 원정을 돕기 위해 기사 100명 이상을 제공했다. 이후 베르주라크와 젠삭 시간의 국경 분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시몽 드 몽포르와 베아른 자작 가스통 7세 간의 분쟁을 중재했다. 1254년 겨울, 그는 왕과 함께 가스코뉴에서 파리를 거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55년 기욤의 장인인 워렌 2세 드 먼첸시가 사망한 뒤, 헨리 3세는 기욤에게 워렌 2세 드 먼첸시의 아들이자 아내 조안의 이복형제인 윌리엄 드 먼첸시의 후견권을 수여했다.
1255년 9월, 기욤은 헨리 3세와 함께 북쪽으로 여행했고,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후견권을 헨리 3세가 가지는 문제에 관해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협상했다. 한 달 후, 윈저에서는 국왕이 시칠리아 문제에 관한 기욤의 조언을 수락했음을 확인하는 문서가 발행되었다. 1256년 크리스마스,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의 리처드가 독일왕이 될 때 그가 직접적으로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1257년 봄,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펨브로크를 침공해 카마르덴 성을 공격했다. 당시 런던 궁정에서 헨리 3세의 헌장에 서명했던 그는 웨일스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영지로 돌아갔고, 군대를 독자적으로 소집한 뒤 데간위에서 헨리 3세가 직접 이끌고 온 부대와 합세했지만, 웨일스 원정은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연대기 작가 월링포드의 존에 따르면, 기욤은 이 원정 동안 제2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갈등을 벌였다고 한다.
1258년, 기욤은 클레어 성의 세네샬인 월터 드 스코트니를 포섭해 리처드를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계획은 발각되었고, 월터 드 스코트니는 체포된 뒤 모든 걸 밝혔다. 기욤은 왕의 이부형제인 점이 감안되어 죄를 묻지 않았지만, 월터 드 스코트니는 1259년 초에 교수형에 처했다. 그해 4월,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헨리 3세와 맺었던 휴전 기간이 끝나자마자 웨일스 변경지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 때문에 피해를 본 기욤은 의회에서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가 허웰린과 내통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헨리 3세는 양 진영을 화해하려 시도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시몽 드 몽포르와 리처드 드 클레어 등은 1258년 6월 옥스퍼드 의회에서 뤼지냥 가문, 특히 기욤 드 발랑스의 오만하고 위협적인 언행을 규탄하면서, 헨리 3세에게 옥스퍼드 조례를 강요했다. 헨리 3세는 대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했고, 24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설립되어 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기로 했다. 헨리 3세와 장남 에드워드 왕자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이를 이행하겠다고 맹세했지만, 뤼지냥 가문은 거부했다. 기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추종자들과 함께 윈체스터 주교이자 자기 형제인 에메르 소유의 울브시 성으로 피신했지만, 그해 7월 5일 귀족들의 사병대에 포위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한 뒤 7월 14일 추방당했다.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한 후, 기욤은 형제들과 함께 불로뉴로 피신했다. 그들이 불로뉴에 도착할 무렵, 시몽 드 몽포르의 장남 앙리 드 몽포르는 비밀리에 불로뉴로 가서 민들을 선동해 뤼지냥 가문 인사들이 항구에 막 내렸을 때 공격하게 해 여러 사상자를 양산하도록 했다. 이후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허락을 받아 프랑스를 거쳐 푸아투로 이동한 그는 잉글랜드 내 자금을 푸아투로 옮기려 노력했다. 1258년 11월, 그의 청지기인 윌리엄 드 뷔세가 자금을 챙겨 돌아오려다 체포된 뒤 다음 달에 기욤의 세네샬과 함께 투옥되었다.
기욤은 처음에 푸아투에서 발판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1259년 3월 2일 리모주에서 영지를 구입한 뒤 형제 위그 11세로부터 몽티냐크를 돌려받았다. 이때 그는 자신을 발랑스와 몽티냐크의 남작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잉글랜드로 돌아가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그해 12월, 기욤은 파리에서 다른 귀족들과 다투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시몽 드 몽포르와 만났다. 그들은 몽포르의 새로운 동맹엔 에드워드 왕자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권력을 회복하려 했다. 그들의 계획은 에드워드 왕자의 거부로 좌절되었지만, 몽포르와 기욤 간의 동맹은 여전히 유효했다.
1260년 8월부터 11월까지 에드워드 왕자의 지시에 따라 비고르 영지 소유권을 주장한 몽포르를 위해 다른 주장자인 비고라, 아르마냑, 프렌작 백작 에스카비아 4세 드 샤비네를 상대로 루르드와 타르브를 방어했으며, 10월 2일 타르브에서 몽포르와 샤비네 간의 평화 협상에 임했다. 11월 27일 파리에서 에드워드 왕자를 만났고, 다시 잉글랜드 귀환에 대해 논의하려 했지만, 12월 4일 형제 에메르가 사망하면서 지연되었다.
2.3. 제2차 남작 전쟁
1261년,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항을 준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이 덕분에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헨리 3세는 처음에는 기욤이 시몽 드 몽포르와 가까워진 것을 경계해 그의 귀환을 막으려 했지만, 에드워드 왕자가 그를 지지하자 철회했다. 기욤은 4월 24일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잉글랜드에 돌아왔다. 4월 30일 로체스터에서 헨리 3세를 알현했고, 헨리 3세는 그가 잃었던 모든 영지를 돌려줬다. 그 후 기욤은 자기 재산을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궁정에 자주 출석해 권력을 회복하려 했지만, 헨리 3세의 왕비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를 위시한 사보이아 가문 인사들의 방해로 실패했다.그 후 기욤은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 등을 위시한 대귀족들 간의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고 지켜봤다. 그러다가 헨리 3세로부터 클레어 가문 영지에서 발생한 수입의 일부를 자기에게 이체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자, 그는 1263년 시몽 드 몽포르 등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헨리 3세에게 충성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해 2월, 기욤은 루이 9세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파리로 찾아갔다. 그 후 푸아투로 가서 왕을 대신해 튀렌 자작 및 다른 영주들로부터 경의를 받았다. 그해 10월 불로뉴로 가서 루이 9세와 만나려던 헨리 3세를 접견했다.
1264년, 기욤은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에 맞서는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264년 4월 5일 노샘프턴 공방전에 참여했고,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과 함께 에드워드 왕자 휘하 부대를 이끌었다. 루이스 전투가 왕실군의 참패로 끝난 뒤, 기욤은 페번시 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유럽 대륙으로 망명했다. 그의 영지는 몰수당했고, 펨브로크 일대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험프리 드 보훈에게 돌아갔다.
1265년 5월, 기욤은 존 드 워렌 및 많은 뤼지냥 가문 인사들과 함께 사병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상륙했다. 이들이 상륙하자, 시몽 드 몽포르에게 불만을 품었던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이후 포로 신세였던 에드워드 왕자가 케닐워스 성에서 탈출해 그들과 합세했고, 기욤은 케닐워스 성에서 소 시몽 드 몽포르를 기습 격파한 전투와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 참여해 시몽 드 몽포르 등을 패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2차 남작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케닐워스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존 드 워렌과 함께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에서 반군을 처벌하는 데 참여했다.
기욤은 반란 토벌에 기여한 공으로 시몽 드 몽포르의 추종자들로부터 압수한 토지들을 대거 받았는데, 특히 험프리 드 보훈, 로저 베르트랑, 윌리엄 드 먼첸시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는 반란에 가담했던 영주들이 벌금을 지불하면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게 한 케닐워스 조약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반란에 가담했다가 에드워드 왕자 편으로 넘어간 덕분에 영지를 잃지 않았던 길버트 드 클레어와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1269년, 기욤은 존 드 워렌, 알메인의 헨리와 동맹을 맺어 반군 귀족인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스의 땅을 점령하고 헨리 3세의 둘째 아들인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에게 넘겨줬다.
2.4. 십자군 원정
1268년 6월 24일, 노샘프턴에서 열린 의회에서, 기욤은 에드워드 왕자, 존 드 워렌, 알메인의 헨리와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맹세했다. 그는 2,000 마크를 군비에 충당하고 기사 19명을 모집하겠다고 약속했다. 1271년 8월 20일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그가 이 원정 동안 어떤 행적은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는 그곳에서 에메랄드가 박힌 황금 베이스가 있는 십자가를 획득했다. 아크레에서 에드워드 왕자에 대한 암살 시도가 벌어진 후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기욤은 1272년 6월 18일 에드워드 왕자의 유언 집행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자가 회복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1272년 8월 십자군이 끝나기 전에 에드워드의 진영을 떠났다. 그는 아마도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자기가 없는 동안 영지를 빼앗을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1273년 1월 11일에 런던에 도착했을 때, 헨리 3세는 이미 사망했고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그해 6월 7일, 기욤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햄프셔에서 국왕의 허락 없이 불법 사냥을 벌여서 세간의 지탄을 받았지만, 에드워드 1세가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2.5. 에드워드 1세 치세에서의 행적
1273년 9월 3일, 기욤은 에드워드 1세의 대표로서 리모주 주민들로부터 가신 맹세를 받았다. 그 후 에드워드 1세와 함께 가스코뉴에 한동안 머물렀고, 1274년 7월 도시를 보호하겠다는 왕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리모주로 돌아와 도시 방어를 조직했다. 8월 19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에드워드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9월 4일 수행원들과 함께 햄프셔에서 열린 불법 사냥에 다시 참여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1275년 2월, 기욤은 에드워드 1세 측 대표로서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던 베아른 자작 가스통 7세의 파리 법정 소송전에 참여했다. 이때 가스통 7세는 에드워드 1세와 결투 재판을 벌이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재판은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1275년 5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기욤은 킬게란 성의 순경으로 선임되었고, 왕의 빚 중 일부를 지불하는 목적으로 로저 드 서머리의 후견인 자격을 받았다. 1277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징벌하기 위한 웨일스 원정에 참여하여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와 함께 펨브로크 해안을 따라 진군했으며, 7월 25일 애버리스트위스에 도착한 뒤 새로운 성을 세웠다. 그 후 그들은 북쪽으로 달아난 허웰린을 스노도니아까지 추격했고, 결국 허웰린은 에드워드 1세에게 굴복했다.
1278년 자기 영지에서 순행 판사로 활동한 그는 1279년 6월 에드워드 1세의 지시에 따라 가스코뉴로 가서 아미앵 조약의 조건에 따라 잉글랜드에 양도된 아쟁을 가스코뉴에 합병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8월 8일 아쟁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다가 초대 베나쥬 자작 장 1세 드 그레일리를 아쟁의 세네샬로 선임했다. 그해 11월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 사절로 파견되어 평화 협약을 맺었고, 1280년 1월 아쟁으로 돌아와서 투르농과 발랑스다겐 성채를 세웠다.
1280년 6월 6일 런던으로 돌아온 후 2년간 휴식을 취하던 기욤은 1282년 7월 잉글랜드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토벌하기 위한 웨일스 서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이와 동시에, 에드워드 1세는 기욤의 딸과 결혼한 에버게브니 남작 존 드 헤이스팅스의 양육권을 기욤에게 1년간 부여했다. 이후 벌어진 원정 도중인 12월 6일, 기욤의 차남 기욤이 란데일로에서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추종하는 웨일스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피살되었다. 이에 분노한 기욤은 12월 11일 카마던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은 뒤 허웰린을 추격했고, 1283년 1월 세레디기온에서 허웰린을 처단했다.
1283년 4월, 기욤은 1,000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애버리스트위스에서 출발해 다비드 압 그루퍼드의 마지막 요새인 베레 성을 10일간 포위한 끝에 공략했다. 이리하여 웨일스 전역이 평정된 뒤, 기욤은 그해 9월부터 1284년 크리스마스까지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개선 여행에 동행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평정에 큰 공을 세운 그를 포함한 공신들에게 웨일스의 토지와 특권을 특별히 나눠주지 않았다.
2.6. 말년
1286년 9월부터 1289년 6월까지 에드워드 1세와 함께 가스코뉴로 이동해 그곳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1289년 9월 솔즈베리에서 에드워드 왕자와 새로운 스코틀랜드 여왕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의 결혼 협상을 이끌었지만, 마르그레트가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건너가던 중 뱃멀미 탓에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1290년 가을,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이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헤리퍼드 영토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글로스터 백작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웨일스를 포함해 4명의 판사를 임명했다. 재판은 1291년 1월부터 3월까지 진행되었으며, 웨일스 일대의 모든 영주가 소집되었다. 글로스터 백작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해 9월, 에드워드 1세는 에버게브니에서 의회를 연 뒤 헤리퍼드 백작과 글로스터 백작 모두 사사로운 전쟁을 벌인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고 투옥과 재산 몰수를 단행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용서를 빌자, 그는 형량을 완화하여 몇 가지 재산만 종신 몰수하고 벌금을 부과했다. 기욤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이러다가 자신의 특권 역시 왕에게 몰수당할 것을 우려해, 비슷한 우려를 품은 귀족들과 힘을 합쳐 왕에게 두 사람의 형을 집행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귀족들의 집단 압력에 시달리다가, 또다시 내전이 터질 것을 우려해 두 사람의 영지를 돌려주고 벌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
1291년 12월 10일, 기욤은 헨리 3세의 심장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퐁트브로 수녀원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는 행사에 참여했다. 1292년 2월 5일, 기욤은 무기법에 따라 토너먼트를 규제하는 위원회의 5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에드워드 1세와 함께 노엄으로 갔다. 에드워드 1세는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은 잉글랜드 법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선언했고,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했다. 1294년 10월 마독 압 허웰린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웨일스 남부로 파견되었다.
1296년 1월, 기욤은 후계자인 에메르와 함께 캉브레에 사절로 파견되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휴전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도버로 도착했을 때 중병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되자, 아내가 보내준 들것에 실려 켄트주에 있는 브라본 사유지로 갔고, 5월 16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본래 자녀들의 무덤 옆에 있는 참회왕 에드워드 예배당에 안치되었지만, 성 에드먼드와 순교자 성 토마스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사후 셋째 아들 에메르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조안 드 먼첸시(? ~ 1307): 스완스컴 남작 워렌 2세 드 먼첸시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손녀인 조안 마셜의 딸.
- 장 드 발랑스(? ~ 1277):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 기욤 드 발랑스(? ~ 1282): 몽티냐크와 벨락 영주. 1282년 12월 6일 란데일로에서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추종하는 웨일스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피살되었다.
- 에메르 드 발랑스(1270 ~ 1324): 펨브로크 백작.
- 마르그리트 드 발랑스: 유년기에 사망.
- 아네스 드 발랑스(? ~ 1310): 담팔리즈의 여성 영주. 제3대 오펄리 남작 모리스 피츠제럴드와 초혼, 보웰 남작 휴 발리올과 재혼, 보몽 영주 장 데봉과 삼혼.
- 이자벨 드 발랑스(? ~ 1305): 헤이스팅스 남작, 에버게브니 영주 존 헤이스팅스의 부인.
- 잔 드 발랑스: 바데녹과 로카버의 영주 존 3세 코민의 부인.
[1]
1221 ~ 1250, 라마르슈와 앙굴렘 백작.
[2]
? ~ 1269, 샤토루와 라 샤트르 다르장통의 영주 기욤 2세 드 샤비니의 부인
[3]
1224 ~ 1256,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부인
[4]
? ~ 1281, 카우치, 코냑, 아르키악, 머핀, 페이라와 프론테네이의 부인
[5]
? ~ 1274, 자르낙, 샤토-라르셰, 브륄렌, 샤토네프, 생 헤르맹의 영주
[6]
? ~ 1259, 윈체스터 주교
[7]
? ~ 1300, 크라옹 영주 모리스 4세와 초혼, 타이부르 영주이자 푸아투 세네샬 조프루아 6세 드 랑콘과 재혼
[8]
? ~ 1288, 툴루즈 백작 레몽 7세와 초혼, 투아르 자작 아이머리 9세와 재혼, 샤토브리앙 영주 조프루아와 삼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