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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2:54:42

경복궁 기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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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기별청
景福宮 奇別廳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세종로)
건축시기 1867년 (창건 추정)
2001년 (복원)
파일:기별청.png
<colbgcolor=#bf1400> 기별청[1]
1. 개요2. 역사3. 특징4. 여담

[clearfix]

1. 개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곳[2]

흥례문 서쪽 행각에 있으며 유화문의 북쪽에 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했던 ‘ 조보(朝報)’를 만들던 곳이다. 조보는 일종의 신문으로 지금의 관보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시험 날짜나 신하들이 올린 상소 및 그에 대한 의 답변, 그리고 조정 인사 이동과, 외국 소식, 심지어 날씨까지 적히는 등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매체였다. 조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보 문서 웹툰 《조선왕조실톡》의 163화를 참조.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奇別紙)’라 했다. 기별지를 내는 곳이 바로 ‘기별청(奇別廳)’이다. 기별청 뿐 아니라 조보를 담당하는 몇몇의 관리들 역시 직책에 기별이란 이름이 붙었다. 매일 아침마다 각 관청에서 조보를 베껴 쓰라고 보낸 서리들을 ‘기별서리(奇別書吏)’라 했으며 지방에 조보를 배달할 전령을 ‘기별군사(奇別軍士)’라 했다.

즉, 엄밀히 말하면 관청기구의 이름이며 건물의 이름이 아니다. 당연히 다른 궁궐에도 기별청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사라졌고, 현재는 복원해 둔 경복궁의 기별청만이 존재한다.

현판 글씨는 예서체로, 서예가 현암 정상옥 선생(玄庵 鄭祥玉, 1946~)이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吳玉鎭, 1935~2014)이 새겼다.

2. 역사

언제 처음 세웠는 지는 모른다. 조선 전기에도 조보가 있었으니 그 때도 기별청은 있었겠지만 지금 자리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1868년( 고종 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현 자리에 지은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 시기인 1892년( 고종 29년) 4월에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기별청 건물을 다룬 게 아니고, 도목정사[3] 때에 농간을 부린 죄인 김두형을 문책하던 중 기별청에서 일했다는 진술로만 등장한다. # 승정원일기》에는 정조와 고종 시기를 합쳐 기별청이 3번 나오는데, 정조 때는 경복궁이 없었고, 고종 때의 내용은 《 조선왕조실록》과 같다. 그러니 공식 기록에 경복궁 기별청에 대한 내용은 저 이외에는 없다.

1894년( 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조보가 사라지고 근대식 관보가 생겼다. 이 때 기별청이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관보를 발행했는지, 아니면 기별청에서 계속 관보를 내었는지는 모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흥례문 및 주변 행각과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에는 일제가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졌다.

8.15 광복 후인 1990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01년 10월 26일에 흥례문과 같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특징

4. 여담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정말로 저 기별이 이 '기별(奇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3] 都目政事. 매년 2회 또는 4회씩 이조 병조에서 행하던 인사행정. [4]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 [5] 먹은 음식량이 적어 뱃속에 소식이나 갔겠냐(음식이나 도달하겠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