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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21:16:02

경복궁 자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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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자미당
景福宮 紫薇堂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세종로)
건축시기 1449년 (창건 추정)
1554년 (중건)
1868년 (중건)
1875년 (중건)
1888년 (중건)
1907년 이전 (철훼 추정)
파일:자미당 터.png
<colbgcolor=#bf1400> 자미당 터

1. 개요2. 역사3. 구조

[clearfix]

1. 개요

경복궁의 건물 중 하나로 아미산의 동쪽, 자경전의 서쪽에 있었다.

2. 역사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세종때 지어진 걸로 추정된다.
이 때의 위치는 교태전을 중심으로 함원전과 대칭을 이루던 인지당의 동편에 있었다.

자미당에 대한 첫 기록인 《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임영대군의 집으로 이어하면서 동궁 문종이 법궁인 경복궁 경내에 어디에 머물고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세종의 직접적인 지시사항에 관한 내용이다.
"강녕전(康寧殿)·만춘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 같은 것은 이른 바 정궁(正宮)이고, 함원전(咸元殿)·교태전(交泰殿)·자미당(紫薇堂)·종회당(宗會堂)·송백당(松栢堂)·인지당(麟趾堂)·청연루(淸燕樓)는 내가 세운 자그마한 집인데 정궁(正宮)이 아니니"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6월 18일자 첫 번째 기사
이를 보면 세종이 거주할 곳으로 지은걸로 보이며 말년에는 이곳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그래서 계유정난 이후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이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는지 경복궁 자미당 난간을 보더니 서서 "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이를 전해들은 수양대군과 그 부인 윤씨도 울었다고 실록의 이 날(1454년 11월 25일)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단종이 세종을 떠올리고 울었던 것은 수양대군에게 핍박받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데, 정작 그 가해자이자 앞으로의 계획을 이미 다 짜 놓은 수양대군 윤씨가 피해자인 단종을 순수하게 동정하여 눈물을 흘릴 리가 없다. 그저 가증스러운 악어의 눈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예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기도 하고 명종때 화재를 입어서 1554년( 명종 9년)에 재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사라지고 270년 이후에 흥선대원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경궁 자경전을 이건해서 1868년( 고종 5년)에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고 인지당은 자미당의 남쪽에 지어지는 등 조선 전기와는 건물 배치가 약간 달라졌다.

지어진 이후로는 고종이 신하들과 경연을 하거나 접견하던 곳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873년( 고종 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875년( 고종 12년)에 재건 과정 중 고종은 자미당과 자경전을 기존 위치보다 더욱 교태전에 가까이 해서 재건하려 하고 신하들은 예산을 이유로 옛 터에 그대로 짓자 주장하지만 결국 고종의 의견이 반영되어 재건했고 1876년( 고종 13년)에 또 화재를 입어서 1888년( 고종 25년)에야 겨우 재건했지만 1907년( 광무 11년) 이전에 인지당과 함께 철거되어서 1907년( 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문의 위치를 제외한 본채와 행각이 '현재는 없음' 이라는 '금무(今無)'로 표시하고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아마도 자미당은 고종 아관파천 이후 환궁할 곳으로 경운궁(현 덕수궁)을 택하여 경운궁을 제대로 된 궁궐로 만드는 공사를 시행했을 때 사실상 경운궁은 건물 2채만 있던 곳이여서 궁궐을 하나 세우는 수준의 대공사였고 국가 재정 상황 때문에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온 것도 많아서 이때 이건되었거나 아니면 1904년( 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재건으로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되고 나서는 어떤 건물이 되었는지는 불명이다.[1]

이후 자미당 터는 조선물산공진회 일제 수족관을 설치해 유구가 크게 망가졌고
수족관이 철거된 이후에는 빈 터로 방치되었다가 2022년에 발굴조사를 한뒤 잔디로 터를 정비해 두었다.

원래의 경복궁 2차 복원 계획에선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복원계획 축소로 취소되었다.
아마도 건물의 고증 자료가 부실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3. 구조

※ 현재는 없는 건물이기 때문에 《북궐도형》의 모습을 토대로 서술하였다.
파일:경복궁 자미당 배치도.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자미당 및 행각 내부 구성도


[1] 다만 원래 보통 이렇게 전각을 옮긴 후엔 창덕궁 경훈각 정도를 제외하면 원래 용도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원래 자미당이 창경궁의 대비전인 자경전을 이건해 지은걸 보면은 경운궁의 태후전인 수인당이 제일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