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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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오스만 전쟁 | ||
시기 | 1897년 4월 18일 ~ 5월 20일 | |
장소 | 그리스 본토, 에피루스, 테살리아, 크레타 섬 | |
원인 | 그리스의 고토회복 의욕 | |
교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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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압뒬하미트 2세 에뎀 파샤 아메트 헤프제 파샤 등 |
콘스탄티노스 1세 |
피해 | 672명 전사 | 1,111명 전사 |
결과 |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승리, 그리스의 외교적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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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e Petit Journal 표지에 실린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 그리스 왕국이 전쟁을 일으켰으나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였다.
2. 배경
이 전쟁은 크레타 섬에 대한 그리스 왕국의 관심이 커지면서 일어났다. 당시 크레타 섬은 오늘의 튀르키예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무슬림 주민과 기독교 주민들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전쟁 자체는 오스만 제국이 선전포고를 먼저 했으나, 이는 그리스가 오스만 곳곳에 살던 그리스계들의 재통합과 고토회복( 메갈리 이데아)을 계속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자신들이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옛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스탄불)을 비롯한 고대 동로마 영토를 모두 되찾는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며 오스만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왔다. 그리스는 오스만을 쉽게 보았지만, 그리스는 외부 열강들의 지원을 받았을 때, 오스만에게 독립했듯이 그리스의 국력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이 전쟁도 초반부터 그리스에게 꼬이기 시작했다.
3. 전개
4월 17일 선전포고를 오스만 제국이 먼저 하자, 그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7만 5천여명 병력으로 오스만 제국 국경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겨우 하룻만인 4월 18일에 벌어진 밀로나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패해 물러났고 연이어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를 넘어와 그리스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했다.5월 들어 오스만 군의 연승으로 그리스는 항구도시 볼로스에서 필사적으로 오스만군을 물리쳤으나 12만에 달하는 오스만군의 공격에 결국 열흘만에 볼로스가 함락당하고 만다. 오스만군이 연승을 거두며 그리스 곳곳으로 쳐들어오자, 그리스는 다급해져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열강에게 지원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했다. 대신, 전쟁을 끝나게 하겠다는 열강들이 중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스만도 당시 온갖 사정으로 영 어려운 상황이라 전쟁을 길게 끌 힘이 없었고 결국, 5월 20일 열강들 중재로 이스탄불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4. 결말
그리스는 전쟁 배상금으로 400만 튀르크 리라를 내줘야했으며 큰소리치고 전쟁을 일으켰더니만 한달동안 여러 곳이 쑥대밭이 되고 큰 피해를 당해서 그리스 왕국 군주정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그리스 여론과 군대에게 강제 휴전은 치욕적이었고, 메갈리 이데아를 이행할 준비가 되지 않은 국가임을 강조했다. 전쟁을 이기리라 크게 선전하던 국왕 요르요스 1세는 온갖 욕을 먹고 심지어, 암살까지 겨우 피해야 했다. 더불어,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 총사령관이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도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다.이후 1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 왕국와 여러 동맹을 이뤄 오스만 군을 물리치면서 30일 전쟁 당시 목표로 하던 크레타, 테살로니카,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땅을 다시 빼앗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러번에 무리한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야했기에 반감도 커졌고 결국 요르요스 1세는 1913년에 알렉산드로스 스히나스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만다.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뒤를 이어 콘스탄티노스 1세로 재위하였지만, 그도 아버지처럼 여러 전쟁을 무리하게 벌인 끝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에 경도되었다가 쫓겨나고 콘스탄티노스 1세의 차남 알렉산드로스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연합국의 지원으로 장남 요르요스 2세를 제치고 즉위하여 연합군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에 승리하고 트라키아 전역과 스미르나를 오스만과 불가리아에게서 획득하고 더 나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회복하려 하여 메갈리 이데아를 실현할 뻔했으나 원숭이에게 물려 패혈증으로 사망해버리고(...) 부친 콘스탄티노스 1세가 다시 즉위하여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계속 밀어붙였다가 끝내 참패하고 퇴위하여 메갈리 이데아는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반면에 승전한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별로 좋은 소득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테살리아까지 내려왔으나 배상금을 받는 대가로 점령지들을 도로 뱉어내야했고, 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크레타 섬의 경우 오스만 제국 산하이지만 자치를 누리는 "크레타국"의 형태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크레타국의 총리는 에노시스운동의 거두이자 그리스 민족주의자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였고, 군주는 그리스의 왕자였다. 오스만 제국의 언론들은 내각과 압뒬하미트 2세를 성토했고, 오스만 제국의 반동정치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