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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7:12:36

고바야시 요시노리

1. 일본의 만화가
1.1. 우익 활동1.2. 작품
1.2.1. 우익 관련
1.3. 그 외
2. 일본의 언어학자

1. 일본의 만화가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c8d80f5d.jpg

小林よしのり/(코)고바야시 요시노리 ( 1953. 8.31. ~) 小林吉規 와 읽는 법은 같지만 이름 표기가 다르다.
일본의 만화가. 본인의 유튜버 채널[1]을 운영하는 유튜버

#강연 사이트 겸 블로그 / #공식 사이트

1948년 2월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의 사원에서 우체국 직원의 2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에도 막부 말기에 도사 근왕당을 탄압한 도사 번사 고바야시 덴시치(小林伝七)이고, 부친은 1945년 일본군 복무 시기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다가 본토 결전을 위해 미야자키현에 배치되다가, 종전 후 일본군 해체로 복원 조치되어 우체국 공무원이 된 후, 노조에 들어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모친은 진언종 승려의 딸로써 부부 간에 사상 갈등이 생겼다. 이는 <신 고마니즘 선언 SPECIAL 전쟁론>에서도 언급되었다.

어릴 적 천식으로 인한 허약 체질 때문에 '콩나물', '황금박쥐' 등으로 불렸고, 부모는 자립심을 명분으로 별실에서 살게 했다. 여름방학 등 휴가 때는 조부이자 주지승 시노하라 류조[2]에게 맡겨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교사의 엄격한 지도와 허약한 체질에도 학급 반장을 맡았고, 중학생 땐 수제 만화잡지 <변덕쟁이(きまぐれ)>를 만들었다. 시립 후쿠오카 상업고등학교(현 시립 후쿠쇼 고등학교) 진학 후[3] 잡지에 만화를 투고하는 등 아마추어 활동을 했다. 그러나 후쿠오카대학 불어학과 4학년 때 소년 점프에 응모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이후 1976년에 주간소년점프에 <동대일직선[4]>으로 데뷔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6년에는 <오봇챠마군(왕괴짜 돈만이)>로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었다. 만화가로서는 1994년 오봇챠마군 종료 이후에는 특별히 히트작을 내지 못했으며 이것이 만화평론서를 내게 된 실질적인 이유이다. 1992년부터 <고마니즘 선언>으로 그럭저럭인 직설적 우익사관론으로 출발한 고바야시는 그러나 점점 전형적인 강경 우익적인 발언을 거듭하게 되었고 꽤 팔린 고마니즘을 우려먹기 시작한다.

신 고마니즘, 고마니즘 스페셜 등으로 시리즈화되어 전개되는 와중에 점점 정신줄을 놓은 망언이 늘어났고 마침내 자국 내 우익에게서조차 까이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문제점은 일본을 치켜올리기 위해서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것. 똑같은 문제가 있더라도 일본의 경우 사실을 왜곡하여 칭찬하는 반면 한국과 미국, 중국 등은 깎아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자신과 사상이 다른 자국인을 비하하는 경우도 있었다. 덕분에 일본 내에서는 실명을 부르지 않고 그냥 더블 스탠다드 선생이라고 조롱하는 경우도 있다.

1.1. 우익 활동

고마니즘 선언 같은 게 전혀 힘을 못 쓰는 한국에서는 혐한류를 비평한 것 등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개념 잡힌 우익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고바야시 요시노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만화 전쟁론을 보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한 조상을 둬서 행복하다느니, 지구에 괴수(소위 귀축영미)가 쳐들어 와서 울트라맨(일본)이 괴수와 싸워주는데 건물 한두 채 무너진 게(아시아 국가 식민통치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병크) 뭐 대수냐 라는 개소리를 하는데 이것만 봐도 어떤 사상을 가진 인간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다만 해당 발언이 어째서 나왔는지 정도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하면 고바야시 왈, 당시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하는 세력(서양)에 대항해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한국 중국 등등) 싸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희생"(식민지 등지에서 자행한 전쟁범죄 등)이 대수냐? 라고 말한 것. 애초에 일본의 전쟁을 바라보는 고바야시의 시각 자체가 이런 식으로 비틀려 있기에[5]

그리고 진짜 문제는 이게 그의 개인적 생각에서 끝난 게 아니라 당시 그 비틀린 시각과 그로부터 출발된 잘못된 결론을 주장하는 만화에 현혹된 독자가 많았고, 이는 분명 일본의 우경화 가속에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이 전쟁론을 단순히 잘못된 역사관을 담은 만화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전쟁론을 직접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실제 벌어진 사건을 바탕으로 펼치는 주장, 마지막장에 기재된 참고 문헌, 인용 문헌 등을 보면 흡사 논문과 뺨친다. 전쟁론이 단순히 1차원적인 헛소리를 감정에 대고 호소하는 우익 만화는 아니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정성들인 개소리 그렇기 때문에 고바야시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타파하기 위해선 먼저 일본 내부에서 과거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그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식량,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식견을 갖춰야 비로소 가능하다. 실제로 전쟁론은 이미 여러 지식인들을 통해 발행 당시부터 그 주장의 모순고 문제점이 제기되고, 논문이나 칼럼 등으로 꾸준히 반박당하고 있단 점에선 그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비틀린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틀린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주장이 당시 일본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005년 백내장을 앓았기 때문인지 그 때부터 점차 공격적인 발언이 수그라들어서 온건해졌기 때문에 좌익으로 재전향했다는 말도 듣는다. 사실 온건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2채널 넷우익이나 재특회의 정신나간 혐한 발언을 듣다 보니 이 양반의 발언들은 별로 강하게 들리지 않게 되는 착시효과라는 우스개스러운 얘기도 있다. 아키모토 오사무와도 친구이다.(아키모토가 극우인 건 아니고, 그저 소년점프 동기) 새역모의 일원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고바야시는 반미우익이었기 때문에 친미 우익 멤버들과의 대립으로 현재는 일단 새역모에서는 탈퇴한 상황이라고 한다. 넷 우익이 발생과정에 있어 이 사람의 고마니즘 선언에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넷 우익의 실질적인 창시자라고 할 수 있으나, 정작 이런 본인조차도 넷 우익은 싫어한다고 한다. 아니, 싫어하는 선을 넘어서 혐오한다. 다음은 넷 우익들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글이다.
옛날부터 있어왔던 바보(넷우익)가 수십 번이나 같은 말을 쓰니까, 많은 수로 보일 뿐 실제로는 별로 많은 수는 아닌 것 같다.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전 하류층과 그 아이들은 이번에는 계급 투쟁이 아니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 되면서 배타주의가 되어갔다. 지금의 넷 우익이 대표적이며, 변변한 벌이도 없는 주제에 인터넷으로 하루종일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일상생활이 되었다. 배타주의가 된 것은 이 하류층은 머리를 쓰지 않는 생활이 길었기 때문에 무엇을 공격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생활 보호나 외국인이나 자신이 모르는 것이긴 한데 약해보이는 것들이 눈에 띄면 조건 반사로 공격하고 있을 뿐, 머리가 너무 나빠서 무엇을 하면 될지 몰라서 그렇게 하고 있다.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백인에게는 도저히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 하나만 봐도 분명하다.

결국 이념의 좌우가 아니라, 자신이 약하니까 더 약해 보이는 놈을 찾아서는 괴롭히는 것 밖에는 능력이 없다는 매우 전형적인 근성 없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노동자라든가 좌익, 우익이 아니라 단지 바보일 뿐이다.

에가와 타츠야의 행보가 이 사람과 비슷하다. 초창기에는 도쿄대로 대표되는 학력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사회파적인 작품을 그리다 점차 맛이 가서 우익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유명세를 얻어 더 이상 만화를 그리기 보다는 방송이나 강연 등으로 밖으로 싸돌아 다니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에가와 타츠야를 두고 고바야시 요시노리 흉내를 낸다고 비아냥거린다.

2019년에 들어서도 인터넷 니코나마 공개 강연 「偽善者にはわからない!本当の韓国」(위선자는 알지 못해!진짜 한국)에서는 " 한일기본조약으로 일본이 한국한테 엄청난 돈을 줘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는데, 한국은 이런 사실을 감추고 한국 학생에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배은망덕하다"고 한국인을 비하하고, "한국인의 (恨)의 정서는 남을 미워하는 '우라미'[6]. 홧병(火病)은 화를 못 참아서 발광하는 정신병"이라고 헛소리를 하면서 혐한을 퍼트리는 짓을 여전히 하고있다. 괜히 ' 넷우익의 사상적 시조'가 아니다. 《망가 혐한론》같은 것을 읽고 혐한에 빠져서 인터넷에서 우익활동을 하는 넷우익과 자신을 동일취급하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 넷우익을 비판했는데, 그 실상과 하는 짓은 거기서 거기다.

1.2. 작품

1.2.1. 우익 관련

1.3. 그 외

월간 코로코로 코믹에서 원시인 일러스트를 그렸는데 그것이 라이브 어 라이브의 시초가 되었다. 원시편의 주인공 포고의 일러스트가 그 원시인 일러스트.

과거, 사이비 종교인 옴진리교와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가장 많이 비판하며 사카모토 츠츠미 살인사건에 대한 추리를 해서 아사하라 쇼코의 지시에 따라 암살 대상이 되었지만 계획에만 그치고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다.[10]

마사코 황태자비가 자식을 못 가지는 문제 때문에, 마사코 황태자비가 군중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일러스트가 있었는데 당연히 실리지 못했다. 그래서 가로에다 게재해 버렸다는 무서운 일화가 있다.

어렸을 적에 천식으로 고생했다.

골수 AKB48 덕후이기도 하다. 관련 대담을 하거나 칼럼을 발표한 적도 많고, 각종 행사에도 초청돼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한다. 오시맨은 이치카와 미오리.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활동을 할때는 딱히 정치를 연관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송이나 인터뷰 등에서 AKB의 팬을 넘어서 주제 넘은 언행을 일삼아대는 바람에 AKB오타들 사이에서도 평가는 좋지 않다. 방송에 출연해서 "AKB48의 멤버들은 여자로 보지 않지만, 오오시마 유코 정도라면 나도..." 따위의 성희롱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발언의 뉘앙스가 오오시마 유코를 마치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라서 문제가 되었고, 항의가 빗발치자 트위터에서 사과하기는 했다. 그리고 주간춘문 같은 찌라시에 AKB 관계자마냥 인터뷰를 싣거나 하고 마에다 아츠코의 만취 사건 당시에도 '실망했다'느니 '용서하지 못한다'느니 운운하는 글을 공식 블로그에다 써서 기사화 되는 등 마치 자기가 AKB오타 대표인 것처럼, 자신의 의견이 모든 팬들의 의견인 것인 양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좋게 보이지 않을 수 밖에.

김성모의 만화 '체인 빡'에도 9권에 동명의 야쿠자가 엑스트라로 나오기도 했다. 주인공인 박사와 대결 중에 같은 야쿠자에게 '머리가 썩은 꼴통'이라고 비웃음받다가 박사의 체인에 발리고 리타이어. 10권에선 아예 히로인인 소냐가 박사에게 일본인 모두가 한국인을 싫어하지 않다는 주장을 했는데, 본문의 고바야시 요시노리[11]를 예시로 들먹이며 완벽히 디스를 했다.

최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자유민주당은 보수가 아닌 미국을 추종하는 세력이 되며, 아베 신조 정권이 폭주하는 가운데 희망의 당도 자민당과 다를바 없이 친미보수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는 연설을 하며, 민주주의가 저지른 권력의 폭주를 입헌주의가 막을 수 있다며, 보수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입헌민주당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였다.[12]

2020년 4월 12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으로 다들 야외 활동을 자제하던 상황에서 블로그를 통해 「自粛を止めて、経済を回す!それしかない!『集団免疫』で必ず感染も止まる!」 활동자제를 그만하고, 경제를 돌려! 그거밖에 없다! 집단감염(을 통한 자연 집단면역 발생)으로 반드시 감염도 멈춘다!라고 주장했다.

2. 일본의 언어학자

小林芳規. 1929년 3월 26일생. 위의 1번과 동명이지만 이 쪽은 한자이고, 1번과는 달리 이 쪽은 절대 혐한이 아니다.

야마나시현 출신이다. 도쿄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1957년 토요대학 문학부 전임 강사, 1959년 조교수, 1965년 히로시마 대학 문학부 조교수 등을 거쳤고 1970년에 도쿄교육대학(현재 쓰쿠바대학)에서 박사학위[13]를 취득했다. 1972년에는 히로시마대학 문학부 교수, 1992년에는 도쿠시마 문리대학의 교수직을 역임했다. 훈점학을 비롯한 언어학 연구에 있어서 상당한 권위자로 평가받으며, 현재는 히로시마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어, 2000년 7월에 자료조사를 통해서 고려시대의 각필구결의 존재를 최초로 발견해 연구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日학자 "일본문자 가타카나 신라서 유래 가능성"

‘가타카나 신라 유래설’ 제기한 일본 학자…“신라 입말 표기 ‘각필’ 볼수록 확신”

하지만 무엇보다 이 학자가 주목받은 이유는, 일본 고유의 문자로 알려진 가타카나 신라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을 최초로 제기 학자였기 때문이다. 한국 연구진과 함께 제시한 이 학설은 국내와 일본 현지에서도 전례가 없던 사례로 큰 주목을 받았고, 일본 현지에서는 기존 헤이안 시대 유래설이 부정되었다며 큰 반향이 있었다. 다만 이후 2010년을 전후해 원시적인 가타카나와 히라가나가 쓰인 6세기와 7세기 초 아스카 시대 공문서들이 출토되며 기존의 가타카나 자체가 신라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사장되었다. 대신 구결이 가타카나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고고학적, 문헌학적 증거가 부족하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2019년에는 일본 문화공로자 수상을 했다.


[1] 유튜브 커뮤니티 가이드 위반으로 계정 해지. [2] 태평양전쟁 당시 뉴기니 전선에서 배우 카토 다이스케와 같이 위문공연을 열었는데, 그 일화는 1961년 소설 <남쪽 섬에 눈이 내린다(南の島に雪が降る)>로 각색되었으며 같은 해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다. [3] 그의 동급생이 가수 카이 요시히로였다. [4] 여기서 '동대'는 도쿄대를 의미한다. 고로 주인공 명칭인 '토다이 토오루(東大通)'도 '도쿄대 전문가'를 의미함. [5] 한 마디로 과거 일본이 벌인 아시아 침략 전쟁 자체를, 그때 당시엔 서양 각국이 앞다퉈 식민지를 차지하려 하고 있었고 아시아 각국(한중대만 등등)도 그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일본이 그 위협으로부터 대신 지켜주기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 [6] 이는 일본 우익사관에서 보이는 '한'에 대한 전형적인 오독으로, 한국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인 요구가 아니라 단순 감정론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 같은 것이다. [7] 어느 일본 만화 소개서에는 '거만한 사상 선언'이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8] 마사코 황태자비에 다룬 만화에 대해서는 불경스럽다며 싣는 것을 보류했다. 이에 대해 고바야시는 일본의 미래가 암담하다며 잡지사를 까버리고 가로에 원고료 없이 연재해버렸다. [9] 조선으로 비유하면 김두한이 항일운동의 전부인양 호도한셈. [10] 일본어 위키백과 고바야시 요시노리 문건도 참고해 볼 것. 앞서 문건은 한국어 위키백과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가족 몰살사건 문건이며, 여기 하단에 고바야시가 암살위기에 몰린 이력이 나와 있다. [11] 본작에선 '고바야시 요노XX'라고 표현했지만 대사상 그 인간 맞다. [12] 심지어 유세를 같이 해 준 후보가 사회민주당 출신의 거물인 쓰지모토 기요미였다! [13] 박사학위논문 : 平安鎌倉時代における漢籍訓読の国語史的研究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