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신천 강씨[1] |
출생 | 1899년 3월 9일[2] |
전라남도
대정군 좌면 중문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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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6년 7월 12일 |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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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장로회 목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문호는 1899년 3월 9일 전라남도 대정군 좌면 중문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아버지 강이석(康利錫)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효정(金孝貞)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어 전라북도 옥구군의 영명중학교에서 공부했다. 1919년 영명중학교 고등과 4학년을 재학하고 있던 그는 3월 5일 군산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영명학교 교사 및 학생 30여 명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정에 찾아가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간수에게 끌려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자리에서 벌떨 일어나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많은 방청객들이 호응하여 재판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었고, 대구고등법원에서 법정 소란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학업을 재개해 서울 경성신학교,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932년 장로회 목사가 되어 경상남도 거창군, 전라남도 무안군, 제주도 서귀면· 한림면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했으며, 일제가 요구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했다가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수시로 가택수사를 당했다.
1942년 한림교회에 부임했고,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제주도지사 취임을 종용받았지만 정치에 뜻이 없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1953년 제주대학교에서 종교학 강의를 했고, 1966년 제주노회(濟州老會) 초대 이사장이 되어 문태선 목사와 함께 <제주선교 70년사>를 집필했다. 1986년 7월 12일 한림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강문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