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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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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colcolor=#000> 택견
Taekkyeon[1]
발따귀를 시도하는 택견 선수
스포츠 정보
이명 한국어: 태껸
영문: Taekyun, Taekkyon
종류 입식격투기
공격 방식 타격, 그래플링
공격 강도 세미컨택트
경기 장소 택견 경기장
참여 인원 2인
신체 접촉 가능(격투기)
종주국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문화재 등재 정보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1983.06.01)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2011년 등재
파일: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로고.svg [[인류무형문화유산|{{{#1da3b2 인류무형문화유산}}}]]
<colbgcolor=#1DA3B2><colcolor=#fff> 택견, 한국의 전통 무술
Taekkyeon, a traditional Korean martial art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지정번호 452
등재연도 2011년
목록구분 대표목록

1. 개요2. 소개
2.1. 역사2.2. 어원2.3. 기술2.4. 수련 과정2.5. 이크 에크?
3. 단체4. 경기5. 대중문화 속의 모습6. 외부 링크7. 같이보기
7.1. 인물7.2. 자료7.3. 서적7.4. 기타

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苦今之탁견
(변 수박위변 각력위무 고금지탁견)

변, 수박(手搏)은 변(卞)이라고 하고 각력(角力)은 무(武) 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이것을 탁견이라고 한다.
조선 정조 22년(1798) 이만영(李晩永)이 집필한 재물보(才物譜)의 기희조(技戱條)에 나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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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송덕기시범.jpg 파일:external/www.taekyun.org/5_1.jpg
택견 전승자 송덕기(오른쪽)와 무술인 김병수 사범(왼쪽) 조선 후기에 택견 하는 아이들을 프랑스 선교사가 찍은 사진
택견은 한국 서울 사대문 안팎 도심 지역에서 전수되어온 전통 무술이자 여럿이 편을 나눠 겨루는 단체 민속 스포츠이다. 태껸[2], 각법(脚法)이라고도 한다. 유파나 별도의 강습 기관의 형태가 아닌 민간의 사제 관계 형태로 전승되어 왔으며 구한말 시대에는 특히 우대와 아래대라고 하여 오늘날의 종로 왕십리 일대에서 두 파로 나뉘어 성황을 이뤘다.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무술로서는 최초로 한국의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으며[3], 2011년 11월 28일 제6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도 무술로서 최초로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4][5]

1998년 '국민생활체육전국택견연합회'의 출범과 함께 2001년에는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인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면서 택견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스포츠로서 자리 잡고 있다.

2. 소개

택견은 다리를 사용한 타격과 스탠딩 유술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술이다. 옛법, 쌈수, 살수, 결련수 등으로 불리는 호신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손을 이용한 타격, 박치기, 꺾기 등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고 무력화시키기 위한 기술들이 존재한다.[6] 1:1 싸움을 기본 진행 방식으로 하고 여러명이 팀을 이루어 1:1전을 연속하는 단체전의 형식도 갖고 있으며, 이 두가지 형식은 오늘날의 택견 경기에서도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서울 강북 지방의 고유 무술로서, 후술될 《 재물보》에 따르면 수박과 각력이라는 두 전통 무술을 통틀어 일컫는다. 창시자와 기원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재물보》에 수록된 택견에 대한 첫 언급 이후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 편찬된 문서들에 의하면 별도의 유파나 단체, 교육 조직 없이 민간에서 개개인들의 사제관계 형태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별다른 구심점이 없는 이유 탓에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택견판 금지 정책으로 공식적으로 대련과 수련이 금지되며 활동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거의 멸절되었으나, 해방 이후에도 택견 수련을 홀로 해온 윗대 택견꾼 송덕기가 생존하여 다행히 후대에 전승될 수 있었다.[7]

오늘날의 택견은 이 송덕기의 제자 혹은 그 제자의 밑에서 수련한 2대 제자들이 각기 조직을 형성하여 협회 단위로 나뉜 것이다. 주요 단체로는 결련택견협회, 대한택견회, 한국택견협회, 윗대태껸협회가 있다. 국내 택견 단체들은 각기다른 특색과 비전을 가지고 서로 반목과 경쟁, 일시적 협조를 반복하며 택견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노력해오고 있다.

현대화된 택견은 다른 무술들과 마찬가지로 스포츠 격투기로서 심판이 참관하고 정해진 규칙에 의거한 겨룸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부상의 위험 및 스포츠화된 오늘날 택견 경기 관람에서 재미를 떨어트리는 손을 사용한 타격 기술과 찌르기 및 상대방의 옷을 붙잡는 기술 등은 사용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며, 택견을 격투기로 간주하여 입문시부터 손질을 가르치는 윗대태껸협회를 제외하면 이들은 각 협회별로 옛법 혹은 쌈수, 결련택견 등의 이름으로 별도로 교습하여 전통을 잇고 있다.[8]

2.1. 역사

조선 정조 22년(1798) 이만영(李晩永)이 집필한 《 재물보(才物譜)》에 있는" 수박(手搏)은 변(卞)이라고 하고 각력(角力)은 무(武)라고 하는데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 하는 구절이 택견이 최초로 언급된 사료이다. 19세기 민속화에 씨름하는 옆에서 택견하는 민초들의 모습이 나오고 20세기 초 탁견희라는 한시가 존재하는 등 한국의 기록물에서 '택견' 관련 기록이 꾸준히 나온다. 한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 '덕견이' 라는 무술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조선상고사》 외에는 덕견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어 '덕견이'가 구한말 택견을 가리키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고려사부터 시작해 국내 역사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 수박'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무술계 단체별로 여러 의견이 있다. 문화재 지정 보유자가 소속된 한국택견협회 측에서는 위의 《 재물보》를 인용해 수박이 택견으로 변했다는 입장이다. 실제 택견을 나타내는 탁견희 이전에 가장 비슷한 기록상의 예시로 수박을 유희용으로 사용했다는 수박희가 있다. 하지만 《 재물보》 이외에 교차검증이 가능한 추가 사료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아직까진 직접적인 관계성을 단정할 수 없으며, 대한수박협회의 송준호 회장은 이런 주장에 반발하면서 많은 토론과 성명문을 배포한 바 있다. 다만 송준호의 수박은 항목에도 있듯 그 실체가 불분명한 무술을 자기들이 직접 수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기 때문에 이쪽 역시 확실한 신뢰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운 형국이다.

송덕기의 언급과 기술의 형태로 보면 서울 사대문안의 마을들에서 주로 행해진[9] 민속 스포츠 겸 한량들의 무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 그 중에서도 현대의 우리가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택견은 구한말에서 오늘날로 이어지는 근대의 윗대 택견 뿐이다. 구한말 택견계는 경복궁 근방의 우대 계열과 청계천 이남의 아래대로 패가 나뉘었는데, 송덕기는 윗대(우대)에 속한 택견인이었기 때문. 현재 아래대 택견을 표방하는 충주택견의 경우 송덕기에게 사사하고 기타 몇몇 택견꾼에게도 지도받았다는 신한승의 택견을 다루기 때문에 결련택견협회 같은 곳에선 송덕기의 원형이 아니라고 까기도 한다.[11][12] 다만 이는 매우 엄격하게 표현했을 때의 이야기로, 당시 윗대나 아랫대나 택견꾼들 개인의 성향차, 좋아하는 기술 차이 정도는 있었을지 몰라도, 기술체계나 원리가 크게 달랐다는 증언이나 자료는 없기 때문에 현재로선 윗대와 아랫대를 통틀어 (비록 협회별로 모습은 다르더라도) 택견 자체는 끊기지 않고 전승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랫대와 윗대는 순전히 각 택견꾼들의 거주 지역과 그들의 모임 장소에 따라 구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울 왕십리의 까기, 평양의 날파람, 경상도의 잽이[13], 전라도의 채비, 제주도의 발찰락 등 택견과 비슷하게 발로 까고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거나 때리고 넘어뜨리는 무술 혹은 유희들이 전국 각지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택견이 최소한 18세기부터 확인되며 서울이라는 지역이 인적교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영향 정도는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를 확인하긴 어렵다.

세 개 협회에서는 '전쟁시 살상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 돌팔매질을 장려했듯, 옛날 택견도 신체 격투기술을 갖추게 하기 위해 나라에서 장려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상기한 재물보 기록의 수박과 각력[14]을 계승했다는 식의 기록을 신뢰할 경우 해당되는 말로 사실 18세기 이전 문헌엔 택견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는다.[15] 때문에 교차검증이 현재로선 불가능하고, 지금도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수박은 '오늘날의 택견과는 별개의 원시적 맨손 박투였다.' 혹은 '택견이 아니라 모든 맨손 격투기의 총칭이다.'는 식으로 다른 주장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어 여러 논쟁이 있는 상황이다.

20세기 초중반 들어 택견은 쇠퇴일로에 접어드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공식적으로 택견판을 금지한 이유도 크다. 이에 대해선 '한민족의 전통무술을 말살시키려 했다.'라는 학설과 '단순히 조선인들의 집회를 막으려는 이유였을 원인이 더 크다.'는 학설로 의견이 나뉜다.

전자는 당시 일제의 편집증 아닌가 의심될 정도의 택견판에 대한 금지와 택견꾼들에 대한 탄압을 근거로 든다. 문화재 보호법 제 961호로 지정된 사료 중 송덕기의 구술자료에 따르면 어찌나 일제가 지독하게 굴었던지 자신에게도 일제가 순사들을 붙여 한동안 밀착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또한 김명곤의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이라는 기사 인터뷰에서 김홍식은 당시 일본놈들이 태껸한다는 말만 들어도 모조리 때려잡았다며 이 때문에 택견을 배우기가 힘들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택견을 배우는 것을 극구 말렸다고 구술하였다.

한편, 후자측은 일제 치하 동안 택견판이 죽은건 맞지만 택견꾼 자체에 대한 내용은 신문에 종종 나오는 것으로 보아 택견 자체를 탄압했다기보단 택견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모이니 조선인 집회를 막으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16] 다만 무단통치 문화 통치의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듯 시기에 따른 탄압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므로 두 주장 중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 단언하기엔 무리가 있으며, 의도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택견판이 일제강점기 시절 음지로 숨어버린건 사실이므로 택견의 쇠퇴에 일제의 식민통치가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각에선 택견은 민속놀이 무술로 보긴 어렵다는 경우도 있는데[17] 20세기 초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오히려 택견을 확실하게 무술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8]
각종 무도의 시합은 만장관중에 대하여 무도에 대한 자극을 여한바이 다대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최종 권충일군의 택견과 나주연군의 권투는 과연 장쾌를 극하여 만장갈판을 박하고 오후 다섯시에 성황리에 폐회하였다.
인천에서 열린 무도대회에 대한 1928년 7월 23일자 기사 중에서[19]
이 세계에 어떠한 나라 어떠한 민족에게든 무기를 가지지 아니하고 빈 손으로 적을 대항하는 법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야 조선에도 택견이니 날파람이니 씨름이니 돌단이니 압단이니 하는 이름들이 있어서 우리도 옛날에는 나로라하든 면영을 남긴 것들이라 하겠다. 일본 유술이라는 것도 역시 맨손 혹은 단소한 무기로 적을 대항하는 무적기술인데 (...)
일본 유도를 소개하는 1929년 10월 17일자 기사 중에서
조선에서 고래로 전해왔고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무술로 택견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1937년 1월 4일자 신문에 실린 기고문 중에서

광복 이후 1950년대에 일부 무술인들이 택견에 관심을 가져서 송덕기와 만나기도 했으나 진지하게 배우지는 않았고 주요 제자들은 한참 이후부터 등장한다. 같은 동네에 살던 고용우가 1969년부터 송덕기에게 택견을 오랫동안 배우다가 198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1990년대부터 그곳에서 택견을 가르쳤으며 2010년대부터 한국에도 전수가 되기 시작했고 이게 윗대태껸협회다. 신한승도 송덕기에게 1970년대 초부터[20] 수년간 택견을 배웠는데 그는 특히 택견의 무형문화재 등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문화재관리청에서 송덕기의 택견이 기술의 갯수가 얼마 되지 않으며[21] '형'[22]이 없이 낱기술들로만 이루어져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힘들다는 답장을 보내자 자신이 몇 가지 기술을 창안, 추가하고 본때뵈기, 동과 째라는 다른 무술들에 흔히 있는 투로와 수련 체계를 만들어 1980년대 무형문화재 선정에 성공한다.[23]

다만 이 과정에서 신한승식 택견의 느낌이 송덕기의 그것과 상당히 달라져버렸기 때문에 택견 원형 논쟁이 생기고 택견 협회들의 분파가 생기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이 신한승에게서 택견을 배운 정경화 박만엽이 만든게 오늘날 한국택견협회이며, 마찬가지로 신한승에게서 택견을 배운 이용복[24]이 만든 것이 대한택견회[25]다. 결련택견협회는 1980년대에 송덕기에게 다년간 택견을 배운 도기현이 만들었다. 결련택견협회는 한국택견협회와 대한택견회의 택견이 송덕기의 원형 택견이 아니라는 비판 의식에서 형성된게 크다.[26] 그리고 2010년대 이후 상술된 고용우 윗대태껸협회가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전수를 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어느 단체건 '우리 단체가 킹왕짱이니 여기 와서 배우세요'가 된 것. 다만 택견계에서도 이들 사이를 조정하려는 시도가 아예 없는건 아니다.

2.2. 어원

어원에 대해서는 협회별로 의견이 나뉜다. 대한택견회 이용복 前 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탁견(托肩)[27] 서울 사투리의 영향을 받아 택견으로 변형되어 발음되는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대한택견회 측의 주장에 대해서 탁견이 이두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대사전'에는 '택견'이라 했고 '한쪽발로 서로 넘어뜨리는 유희, 각희'로 풀이 되어 있다. 한편, 예용해 문화재위원에 따르면 송덕기가 "태껸도 아니고 택견도 아니며 탁견이요, 한자로는 卓見이라고 쓰며 탁견을 하는 사람을 말할때 택견꾼이라 했다"고 한다. # 다만 송덕기는 평상시 자신의 기예를 태껸으로 지칭했는데, 문서 기록으로도 신한승과 왕래하던 서편에서 송덕기는 태껸이라고만 적었다. 윗대태껸협회에서도 본래 송덕기는 '태껸'이 맞으며, 윗대태껸 전승자에게 '윗대태껸'이라고 가르치라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복잡하다

이에 기존에는 표준어 규정 제5항에 근거하여 태껸을 표준어로 삼았고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011년 8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에서 주관하는 국어심의회에서 국민들 다수가 태껸이 아닌 택견을 사용하는 점(사회성 부문)을 들어 택견 또한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또한 택견계를 이끌고 있는 핵심 조직인 3대 협회에서도 '택견'을 정식 명칭으로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본 문서와 나무위키의 택견 관련 문서에서는 국민들 다수가 택견을 사용한다는 점, 택견을 취급하는 주류 단체에서 택견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둘 모두에 명칭이 택견으로 등록되어있다는 행정상의 이유 등으로 어원이나 문화재로서의 탁견, 태껸을 언급할 때 외에는 택견으로 통일하고 있다.

2.3. 기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택견/기술 및 구성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4. 수련 과정

전통적인 수련 체계는 택견의 뼈대인 품밟기가 0순위인 점을 제외하면 어떤 특정한 교육과정이 보편화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택견 전승의 주체는 독립적인 민간 개개인이었기 때문이다.[28] 이 때문에 택견꾼들 사이에 두루 시행된 특정 순서로 엮여진 커리큘럼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택견의 수련 과정은 교습자의 바로 윗대 스승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시대에 따라 택견판에서 유행 수준의 경향성은 있었더라도 대부분은 학습자의 특징과 성향에 맞는 맞춤형 커리큘럼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으로 송덕기가 그러하다. 직계 제자들로부터 확인이 가능한 송덕기의 커리큘럼은 입문생에게 가장 먼저 굼슬르기 및 품밟기를 가르치고 어느 정도 숙달된다면 다음 과정으로 넘어갔는데, 이 다음 과정이란 것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제도화된 택견은 협회를 이끄는 네 수장들 모두 근본적인 뿌리는 송덕기의 택견이나 제각기 달랐던 각 협회장들의 수련 환경과 택견에 대한 철학, 협회 설립 후 협회 내부의 정치적 변화에 의해 협회별로 커리큘럼이 상이하다. 다음은 4개 협회의 커리큘럼이다.[29] 전수관의 교습자별로 세부 내용은 약간씩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대한택견회
앞엣거리 - 품밟기 - 딴죽 - 차기 - 홀새김 - 맞대거리 - 본때 - 연단 18수
한국택견협회
품밟기 - 손질 - 발질 - 태기질 - 앞에거리 여덟 마당 - 뒤에거리 네 마당 - 별거리 여덟 마당 - 결련수
결련택견협회
품밟기,활개짓 - 아랫발길질 - 태기질 - 윗발길질 - 마주메기기 - 택견꾼마당[30]
윗대태껸협회
굼슬르기[31] - 품밟기 - 겨누기 - 얼르기 - 손질 - 발길질 - 걷어내기 - 막음다리 - 활개짓 - 태기질 - 신주 - 풍수 등의 고급 기술 - 태껸무고춤 12마당[32]

한편 택견은 서울 및 근교에서 거주중인 계층에 속한 한량들이나 개인의 민간에서 전승되어져 온 것이므로, 중국 무술이나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 무술의 도장 및 유파와는 달리 특별히 통일된 복장이나 도구가 없다. 수련자 모두가 조선 시대 개인의 사복이었던 한복을 입고 수련을 했었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진 및 영상 자료에도 확인할 수 있는데, 송덕기의 영상 및 사진 자료들을 보면 단지 깨끗한 고의적삼과 대님, 미투리를 신은채 별도의 보호장구나 추가 장비 없이 수련한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의 택견 경기에서 보이는 선수들의 복식과 전수관의 관원들이 입는 수련복은 이 고의적삼을 현대적으로 약간 변형하여 정립된 것이다.[33] 이에 협회별로 복식도 차이가 있는데 행전과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디자인된 고의적삼을 제외하면 선조들의 복식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세 협회 공통적으로는 조상들로부터 전해져오는 전통 무술의 정체성을 표하는 한복의 고의적삼을 입으며 발에는 대님을 매고 정강이에는 아랫발질에 의한 부상을 막기 위해 행전을 한다. 실내에서는 버선을, 실외에서는 미투리를 신는다. 이런 신발을 신음으로서 지면과 몸 사이에 마찰력을 줄여 균형잡기를 힘들게 하고, 기술을 사용할 시 지면과의 마찰력에 의한 추가 에너지를 싣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는 균형 감각과 유연성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대한택견회는 최근 고의적삼 대신 철릭을 입게하도록 복장 규정을 바꾸었다. 대택의 철릭은 전통 철릭을 택견 수련에 맞춘 개량형으로, 행전이 아예 바지에 붙어있고 신발도 대님이 붙어있어 따로 맬 필요가 없다. 이외에도 협회별로 허리띠 등을 통하여 복장으로 택견꾼들의 수준을 나타내는 방식도 다르다.

2.5. 이크 에크?

대중들에게 택견이라 하면 흔히 '이크 에크'라는 기이한 기합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무술로 알려져있는데 이는 대한택견회, 한국택견협회의 원인이 크다. 송덕기는 '에크'라고 한 적이 없다. '이크'의 경우도 하복부에 힘을 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기합소리로 '익!', '이익!'이 강하게 나오고 그 뒤에 바람 새는 소리가 '흐'로 나오면서 '잌ㅎ' 같은 식으로 되는 것이지 '이.크.'처럼 한자 한자 무슨 정해진 단어처럼 발음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한택견회, 한국택견협회에서는 '에크'라는 발음까지 집어넣어서[34] '이크 에크'라는 식으로 하는데 이 단체가 택견협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한체육회에도 가입되어 있는 단체이다 보니 미디어에도 많이 등장하면서 '이크 에크'라고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대한택견회에서도 기합을 '이크 에크'라는 단어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닌 단전에 힘이 들어가서 익! 소리가 나오고 호흡을 내뱉어 힘을 빠뜨려 의 발음이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협회 차원에서는 대한택견, 한국택견(구 충주택견), 결련택견 협회 모두 기합에 대해 해석이 동일하다. 즉 이크 에크는 의도적으로 인지하면서 내뱉는 구호가 아니라 그냥 대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지르는 기합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미디어에선 이크! 에크! 라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협회적 차원에서의 차이라기보단 개인의 차이일 확률도 있다. 이런 기합을 사용하던 일개(?) 스승에 의해서 전달된 모습이거나 개인의 사용이 부각되었다는 주장. 허나 개인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그 범위가 이미 미디어를 통해 대중적으로도 통용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형성된게 사실이라[35], 진짜 개인 차원의 문제면 협회에서도 기다 아니다 정리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3.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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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요 택견 단체
4대 분파
대한택견회
구 대한택견협회
결련택견협회
구 택견계승회
한국택견협회
구 충주택견보존회
윗대태껸협회
구 위대태껸회
4대 분파 외 조직
노들택견
파일:택견협회.png

4.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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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격투기에서 쓰는 개념으로 분석하면 현대 택견 경기는 근중거리에서의 발차기와 노기 스탠드 그래플링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형태라 할 수 있다.[36]

백기신통비각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인해 언뜻 생각하기에 택견의 경기장은 발차기로 유명한 태권도와 같이 굉장히 넓은 범위를 사용할 것 같지만, 실제론 3개 협회 모두 각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태권도보다 좁은 범위의 경기장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경기가 지루해지지 않고 태질(유술) 싸움과 발차기 공방이 지속적으로 오가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각 협회가 택견 경기판에 대한 사료들의 연구와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을 갖고 있는 현대 스포츠의 흐름을 반영하여 만든 결과물이다.

실제로 송덕기는 젊은 시절 길거리 싸움이 벌어지면 드잡이질과 더티복싱[37]을 이용해 상대를 구석(예컨데 담벼락)까지 몰아붙이고 거기에서 발기술을 이용해 말 그대로 밟아버려 끝내는 식으로 싸웠다고 회고하였는데, 비록 여러 문제들 때문에 경기에서 택견의 손기술들이 금지된 상황이긴 하지만 상술한 것과 같이 태권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경기장과 상대방과의 거리를 벌리는 행위가 계속될 경우 주심이 가까이 붙으라는 경고를 주는 등, 현대 택견 경기는 나름의 방식들을 통해 여전히 선수들에게 고증대로의 인파이팅 스타일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제1회 전국택견경기대회는 1985년 6월 30일 부산구덕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대회에는 초대 인간문화재인 송덕기, 신한승이 모두 참석했을 뿐 아니라 93세의 송덕기는 막뵈기를, 58세의 신한승은 본때뵈기를 직접 선보이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는 대한택견회가 명문화된 최초의 택견경기규칙을 제정하였다. 이후 이어진 대회에서는 신한승이 주심을 맡았으며, 송덕기가 직접 서울팀의 뒷배(코치)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1985년 역사적인 첫 택견대회가 개최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송덕기, 신한승의 건강이 악하됨에 따라, 이 대회는 초대 인간문화재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택견대회가 되었다. 이 대회에는 송덕기, 신한승 뿐 아니라 현대 택견을 대표하는 이용복, 정경화, 도기현 세 사람이 모두 참석했다.
파일:제1회 전국택견경기대회.jpg

이후 최초로 택견경기규칙을 명문화 시킨 대한택견회가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인 대한체육회 정회원 종목으로 승격됨에 따라, 현재 택견은 대한민국 최대스포츠 축제인 전국체육대회(엘리트), 전국생활체육대축전(생활체육)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있으며, 국내 최고권위의 스포츠대회인 대통령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전국택견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구체적인 기술의 설명은 택견/기술 및 구성, 결련택견협회에서 따로 반칙 기술로 분류해 사용하지 않는 기술들은 옛법 문서 참조.

5. 대중문화 속의 모습

6. 외부 링크

7. 같이보기

7.1. 인물

7.2. 자료

7.3. 서적

7.4. 기타



[1] 이외에 협회나 단체에 따라 Taekyun, Taekkyon 등이 쓰이기도 하지만 로마자 표기법으로도, 유네스코에 등록된 이름으로도 Taekkyeon이 정식 표기이다. [2] 이전에는 태껸이 표준어였고 택견은 비표준어였으나, 2011년 8월 31일에 국립국어원이 '다른 표기를 인정한 세가지 단어'로 '짜장면', '품세'와 함께 택견을 선정하여 택견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받게 되었다. [3]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 문화재청, 1983.6.1,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7,00760000,33&flag=Y [4] 유네스코 뉴스, 「줄타기, 택견, 한산모시짜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unesco.or.kr, 2011.12, http://www.unesco.or.kr/front/ebook/201112/667.html [5] 유네스코, 「Decision of the Intergovernmental Committee: 6.COM 13.44」, unesco.org, 2011.11.28, http://www.unesco.org/culture/ich/en/decisions/6.COM/13.44 [6] 일반적인 전통 택견에선 넘어지면 게임이 끝나기에 그라운드 기술 체계는 없다. 그러나 밝터에서 출판한 태견책에는 업킥과 같이 그라운드 타격기가 존재한다. [7] 송덕기 외에도 이경천 등 택견꾼은 남아있었다. 국내 태권도 원로인 이원국, 황기도 어릴 적 택견을 약간이나마 접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까지 택견을 익힌 택견꾼은 송덕기가 유일했으며 실제로 제자육성과 택견 교육을 시행한 대가(Grandmaster) 역시 송덕기 뿐이었다. [8] 송덕기에 의하면 결련택견은 호신술로 하는 막 차는 택견으로 언급된다. [9] 김홍식 왈 문밖에서 도전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걸 보면 밖에서도 배운 사람이 있긴 했던 모양. [10] 전근대 사회에서는 유희와 무술의 경계가 애매한 경우가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서양에서 레슬링이 그러했고, 동양에선 조선의 씨름, 일본의 스모, 몽골의 부흐가 그러했다. 유희와 무술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는 것은 근대에 들어 생겨난 현상이다. 석전 문서 참조. [11] 택견 분란(紛亂)의 시작 잘못된 택견의 문화재 지정 참조 [12] 사실 신한승의 인간문화재 지정 당시 관련 법령 문제로 그의 스승인 송덕기도 당연히 인간문화재에 지정되었는데, 이때 송덕기의 택견을 웃대(윗대) 택견, 신한승의 택견을 아랫대 택견이라고 구분하여 인간문화재로 등록하였다. [13] 혹은 잽이수라고도 한다. [14] 씨름으로 추정되나 현재의 씨름과 같은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15] 수박과 각력(혹은 각저)에 대한 언급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제법 찾아볼 수 있다. ... "병조(兵曹)와 의흥부(義興府)에서 수박희(手拍戲)로 사람을 시험하여 방패군(防牌軍)을 보충하였는데, 세 사람을 이긴 자로 방패군에 보충하였다.(兵曹義興府以手拍戲試人, 補防牌軍, 用勝三人者。) - 태종 10년(1410) 1월 21일", "미리 수박(手搏)을 잘하는 자 50여 명을 뽑았다가, 누하(樓下)에서 승부를 겨루는 것을 관람하게 하니, 갑사(甲士) 최중기(崔仲奇)가 6사람을 이겼으므로, 정포(正布) 3필을 하사하고, 한유(韓宥)는 4사람을 이기매, 정포 2필을 하사하였다.(預選善手搏者五十餘人, 角勝于樓下而觀之。 甲士崔奇勝六人, 賜正布三匹; 韓宥勝四人, 賜正布二匹。 旣罷乃獻壽, 宗親及兵曹堂上、代言等侍宴, 各以次進爵。) - 세종 1년(1419) 7월 1일", "내가 잘못 헤아린 일이 있는 것은, 군관(軍官)으로 봉급을 주는 자는 매우 수효가 적은데, 무사(武士)는 반드시 여력(膂力)이 있는 자를 뽑아야 하기 때문에, 모래 20말(斗)을 공석(空石)에 넣어서 들어올리게 하였는데, 능히 드는 자는 전연 없고 혹시 반(半)쯤 드는 자가 있으면 문득 부료 군관(付料軍官)에 뽑아 넣었으며, 혹은 각저(角觝)[43] 잘하고 혹은 초거(超距)가 조금 나으면 또한 뽑혔으니(후략)( 積有錯料事, 軍官給料者, 甚爲數少, 而武士必取膂力者, 故盛沙卄斗於空石, 使之擡擧, 則能擧者絶無。 或有半擧之人, 則輒爲抄入付料, 或善角觝, 或超距稍勝, 則亦爲見抄, 此不過或有出戰之事, 則欲以此爲身邊親近之兵, 皆出於爲國選士之意, 而聞有謗言, 旋爲停抄。) - 숙종 6년(1680) 4월 10일" ... 보면 당시 조정이 이 무술들을 장려 차원을 넘어 때때론 관직 선발 기준으로까지 여겼음이 언급되고 있다. [16] SOMA, <일제시대에도 택견은 있었다> [17] 사실 놀이식 '서기택견', 격투식 '결연택견'처럼 위험도에 따른 구분 때문에 해석이 갈라진다고 봐도 될듯. 옛법 항목 참조. [18] 상술했듯이 전근대 사회에서는 유희와 무술의 경계가 애매한 경우가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19] 최종전이 택견과 권투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종격투 경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20] 신한승 본인은 김명곤과의 인터뷰에서 송덕기를 1970년 초봄 무렵부터 만나서 택견을 배웠다고 했다. [21] 물론 이것은 틀린 말이다. 당시 문화재청의 조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 수 있다. [22] 중국에서 투로, 일본에서 카타라고 부르는 것. 태권도로 치면 품새. [23] 신한승의 택견을 계승한 한국택견협회측은 활개들기, 이하 각 지역의 기술들을 신한승이 수집하였다고 말한다. [24] 원래는 태권도계 출신. 부산태권도협회 전무까지 했다. [25] 당시 대한택견협회. [26] 도기현은 한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반에 서울택견계승회(결련택견협회의 전신)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없으면 이제 송덕기 할아버지의 택견 모습은 다 사라진다고 얘기한 적이 있으며, 대한택견은 할아버지가 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품을 밟고, 충주는 신한승 식이니 우리가 아니면 송덕기 할아버지의 몸짓이 끊어진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게 있었다고 말했다. [27] 《재물보》, 이성지. [28] 비슷한 사례로 대동류 합기유술이 있다, 다만 대동류의 경우 훗날 제자들이 기술을 정리하며 체계화를 시켰다. [29] 커리큘럼의출처 https://youtu.be/ZVM9Onr3QgI [30] 이하 결련택견꾼 - 비각택견꾼 - 옛법택견꾼 - 지도자 과정으로 반복되며 다시 기본 동작의 심화와 여러 기법을 익히게 된다. [31] 결련택견협회의 오금질, 대한택견회의 굼실 등의 택견의 힘쓰는 방법을 위대태껸회에서는 굼슬르기라 하며, 굼슬르기는 오금질과 굼실과는 힘의 원리 자체가 다르다. [32] 송덕기에게 고용우, 이준서 두 제자가 배운 것이며, 태견 책에도 수록되어 있다. 윗대택견협회에서는 태껸무고춤이 태껸을 배우는데의 마지막 단계라고 말한다. [33] 단, 결련택견협회에서 주최하는 택견배틀은 타 택견협회는 물론이고 타무술 수련자들도 제한없이 참여할 수 있다. 타무술 수련자는 그냥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 같이 편한 복장을 입고 나오거나 아예 해당 무술의 도복을 입고 오기도 한다. 유의할 것. [34] '에크'라는 것 자체는 신한승이 집어넣었다고 하는데 대한택견회도 신한승에게서 갈라져 나온 곳이라 그런것 같다. [35] 실제 대한택견회 택견꾼들도 유튜브나 방송에서 이크에크라고 버젓이 언급하고 있다. # 개인의 문제라고만 하긴 좀 넌센스한 상황. 다만 대결할 땐 이들도 '잌ㅎ' 기합만 넣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걸 보면 상황에 따른 편리한 발음을 추구하다보니 이런 차이가 생겨난게 아닌가도 싶다. 실제 그냥 기본 동작처럼 굳이 뱃심을 안줘도 되는 상황에선 이크 에크가 이크 이크보다 좀 편하게 발음되는건 있고, 반대로 진짜 뱃심을 줘야되는 상황에선 에크라는 단어는 발음하기 불편하다. [36] 1985년 6월 30일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송덕기 신한승의 자문을 받고 치러졌던 제 1회 전국택견경기대회까지만 해도 장타를 이용한 타격이 허용되었으나파일:제1회 전국택견경기대회 참여자.jpg "상대를 넘어뜨리던가 균형을 잃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격을 목적으로 하는 공격은 금지한다.아니 그럼 발차기는?!" 규정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판정 시비와 선수들의 안전 문제 등으로 인해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경기에서의 맨손 타격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다. [37] 태견과 더불어 송덕기가 시연한 둘 뿐인 서적 가운데 하나인 박종관의 전통무술 택견에 나온 시연들 또한 택견의 손기술들의 상당수를 상대를 붙잡고 치거나 거는 것으로 묘사한다. [38] 차미마케팅에서 운영하는 애니메이션 채널이니 여기에 기재함 [39] 주인공 역의 배우 장태식은 실제로 복싱 선수 출신의 결련택견협회 소속 택견꾼이다. [40] 택견에 감명받았음에도 쿵푸를 연마한 이유는 당시 자신이 택견 전수관을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41] 사이트가 만료됨 [42] 택견 커뮤니티 사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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