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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8 13:58:19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라틴어: Marcus Antonius Primus
전체이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Marcus Antonius Primus
생몰년도 서기 20-35년 사이 출생~ 서기 81년 이후 사망
고향 로마 제국 갈리아 톨로사(오늘날의 프랑스 툴루즈)
지위 원로원 의원, 야전 사령관
가문 안토니우스 가문, 옥타비우스 가문[1]
참전 네 황제의 해
종교 로마 다신교
가족 율루스 안토니우스(조부)
대(大)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조모)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아버지)
별명 베쿠스(Beccus, " 부리")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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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방계 황족, 원로원 의원, 야전 사령관. 로마 공화정 말의 그 유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직계 후손이다. 또한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네로와 그 측근들에게 찍혀, 누명을 쓰고 로마에서 추방됐다가 갈바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누명을 벗고 복직. 판노니아 주둔의 7군단 클라우디아 군단장이 되었다가, 갈바 몰락 후 베스파시아누스를 도와 플라비우스 왕조 창건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2. 생애

이름에서 드러나듯, 아우구스투스의 매형이자 숙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직계 후손이다. 고향은 갈리아 지방의 도시 톨로사(오늘날의 프랑스 툴루즈). 아버지는 소 옥타비아의 양자, 사위인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의 장녀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차남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이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아버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생전, 키케로 아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통과시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후손은 개인이름으로 마르쿠스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법령을 폐지시키고 그 일가를 옥타비우스 가문 개인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 증조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자랑스러운 이름을 물려받았다. 실제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프리무스"는 "최고", "최상"을 뜻한다.

조부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다면,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뒤이어 오를 테니 애인 역할을 해주면 섭정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받은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불륜 죄목으로 노황제의 진노를 사서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강제 이혼당한 뒤 사형선고를 받고 곧 자살했다. 이 사건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가 일찍부터 남성편력이 심하고, 난잡한데다 율루스를 꼬셔 불륜관계가 됐다는 것이 정설이나,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이 일로 아우구스투스의 진노를 제대로 산 나머지 강제 이혼당한 뒤 곧바로 처형됐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어쨌든 누나의 외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 율루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손녀 율라 안토니아의 재산을 뺏지도, 목숨을 거두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사회적 파장이 컸고, 원로원 안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일가를 혐오한 귀족들이 많아 아우구스투스는 미성년자가 아닌 20대 초반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보호하고자, "아이의 나이가 어려 추방형에 처해야 하나, 본인 잘못도 없고 아이의 미래가 중요하다. 하여 이 아이를 마실리아로 유학보내겠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며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부부와 안토니우스 가문의 모든 재산과 지위를 유지시켜줬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아버지 루키우스는 마실리아로 건너가 로마법, 수사학을 공부한 뒤 법학자로 살다가 죽었고, 프리무스는 툴루즈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서기 25년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향년 45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는데, 당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대 율리아의 남편이었던 티베리우스였다. 이때 티베리우스 황제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내 고모( 소 옥타비아)의 손자이고, 내 아버지의 혈육이다. 그는 황족이므로 죽어서라도 로마에 묻혀야 된다."며 그 시신을 아우구스투스 본가인 옥타비우스 가문 묘지에 안장케 하고, 키케로 아들이 통과시킨 안토니우스 일가 처벌법을 모조리 무력화시켰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로마로 건나와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자손이 아니라 그 집안의 클리엔테스 출신인 갈리아 혈통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상당수 있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젊을 적부터 자신의 조상 안토니우스를 쏙 빼닮기로 유명했다. 그는 키가 크고 완력이 대단했던 안토니우스를 붕어빵 수준으로 닮아 또래 귀족과 원로원에게 "베쿠스(새 부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리무스는 네로 시대때 원로원 의원으로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뜬금없이 발레리우스 파비아누스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재판 없이 로마에서 추방됐다. 그러다가 네로가 몰락하고 갈바가 즉위하는데, 이때 갈바와 원로원은 네로 시대때 피해를 입은 이들을 구제하면서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의석도 되찾아준다.

증조부의 외모와 재능을 쏙 빼닮아, 일찍부터 용감하고 무술 실력이 출중한 용장이면서도 심리전, 협상술에 상당히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복직 직후, 판노니아 주둔의 7군단 클라우디아 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러다가 갈바가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게 암살되고, 이어 비텔리우스가 이탈리아를 침공. 네 황제의 해가 터진다. 이때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황제를 선포받은 베스파시아누스 지지를 선언하고, 다누비우스 전선에 주둔 중인 휘하 군대를 이끌고 본국 이탈리아를 들이친다.

네 황제의 해 기간 내내 프리무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며 친구였다. 따라서 그는 이탈리아로 진격한 10월 베드리아쿰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안기고, 같은 날 크레모나를 습격, 함락해 네 황제의 해 승기를 완전히 잡는다. 이때 그는 크레모나를 약탈하고 불태웠음에도 주민들의 노예화를 엄격히 금지했다. 그렇지만 그는 비텔리우스를 끝까지 지지한 포로들을 색출해 모조리 제거해 반란의 불씨를 없앴다. 그 후 그는 아벤티노 언덕을 건너 그대로 로마로 입성. 협상을 통해 비텔리우스 퇴위를 이끌어냈다. 그렇지만 비텔리우스는 곧 프리무스를 속여 탈출할 궁리를 했고, 그 과정에서 비텔리우스 동생, 지지자들이 시가전을 벌여 5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사가전으로 확대된다. 그렇지만 프리무스는 침착하게 자신이 이끄는 군대를 이끌며 비텔리우스 군을 제압하고, 비텔리우스 동생 등을 죽였다.

비벨리우스 제압 후 비텔리우스를 처형한 직후부터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로 오기 전까지 로마를 통제하면서 원로원과 협상해, 플라비우스 왕조 창건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래서 원로원은 그에게 집정관 계급과 휘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가 곧 이어 로마에 입성하자, 자기 부임지로 홀연히 떠났다. 이런 행보는 후일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후에도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가 도미티아누스때 편히 잠들 수 있는 비결이 됐다.

3. 평가

"행동에 있어서는 용감하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을 심사장에 끌어들이는데 영리하며, 내란과 반란의 시기에 강력하고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워, 평화기에는 나쁜 시민이 되고 전시에는 멸시받을 수 없는 휼륭한 위인이 된다."
타키투스

동시대 사람 타키투스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증조부 안토니우스와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이런 평 그대로의 능력을 선보이며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혼란에 빠진 로마시 치안을 정리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입성하기 전 평화를 가져왔고, 도미티아누스 시대까지 살면서 천수를 누린 배경이 됐다.


[1] 2대 황제 티베리우스 키케로 아들이 입안해 통과시킨 반(反) 안토니우스 법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아우구스투스가 꼼수로 율루스 안토니우스 일가를 보호해준 조치를 공식화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친가인 옥타비우스 가문에 포함시킨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