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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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대회 이전 | 지역 예선 · 참가팀 정보 | |||||||||||
조별 리그 | 1조 | 2조 | 3조 | 4조 | |||||||||
토너먼트 | 8강 | 준결승 | 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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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8강에 대하여 정리하는 페이지.1954년 월드컵 8강은 1954년 6월 26일부터 시작되었고 경기 순서는 치러진 날짜와 조의 순서, 순위순으로 서술했다.
1.1. 진행 방식
1954년 월드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월드컵 대회 진행의 기본적인 틀인 조별리그+상위 2팀의 토너먼트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한 역사적인 대회였다. 그런데 현재의 방식과 당시의 방식에는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바로 토너먼트 대진표 작성 방식이다.경기 | 대진표 | 경기 | 대진표 | 경기 | 대진표 |
A |
8강 1경기 1조 1,2위 중 추첨 VS 2조 1,2위 중 추첨 |
E |
4강 1경기 A,C 승자 중 추첨 VS B,D 승자 중 추첨 |
G |
결승 E 승자 VS F 승자 |
B |
8강 2경기 3조 1,2위 중 추첨 VS 4조 1,2위 중 추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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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 |
8강 3경기 1조 1,2위 중 추첨 VS 2조 1,2위 중 추첨 |
F |
4강 2경기 A,C 승자 중 추첨 VS B,D 승자 중 추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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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8강 4경기 3조 1,2위 중 추첨 VS 4조 1,2위 중 추첨 |
H |
3위 결정전 E 패자 VS F 패자 |
위의 대진표가 바로 이 대회에서 쓰인 대진표인데,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지 않는가? 지금은 강팀들이 대진표의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을 방지하고 약간의 이점을 주기 위해 조별리그 이후 토너먼트의 첫 경기는 1위 팀은 다른 조의 2위 팀과 서로 맞붙게 한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는 1조와 2조의 조 상위 2팀끼리 추첨을 거쳐 맞붙고 3조와 4조의 상위 2팀끼리 마찬가지로 추첨을 거쳐 맞붙는 8강전을 치렀다. # 즉, 추첨 결과에 따라서는 조 1위가 2위에 비해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었다 또 8강이 끝나면 4강전 또한 재추첨으로 대진표를 결정했는데, 간단히 말해 조별 리그 1,2조에 속했던 8강전 승자들은 조별 리그 3,4조에 속했던 8강전 승자 2팀 중 1팀을 추첨으로 뽑아서 준결승을 벌이는 구조였다. #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대진표가 만들어진 데에는 당시 월드컵 본선 진출국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약체에 속했던 개최국 스위스가 자신들이 토너먼트에 진출하더라도 조 1위보다는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서 의도적으로 개최국인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진 방식을 만들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스위스가 개최국의 지위를 이용해 규정을 주무른 것은 그렇다 쳐도 정작 이러한 대진 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원래는 조별리그에서 1위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전력이 되는 우승후보급 강팀이 고의적으로 조별리그에서 주전들을 다 빼고 져주기 게임을 하여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해도 그것이 추후 토너먼트 일정에서 2위팀과 붙게 되면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시나리오를 예측한 서독의 헤르베르거 감독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 와의 경기 때 주전 선수들 중 7명을 빼면서 체력을 안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패배,[1] 서독이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도록 했다. 추첨은 6월 20일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6월 21일 아침에 치러졌는데 결과가 얄궂게도 죄다 각조 1위 팀들끼리와 2위 팀들끼리 붙는 것으로 나와버렸다. 결국 헝가리를 포함한 조 1위 팀들은 조 2위 팀들에 비해 유리한 부분이 전혀 없고 오히려 불리한 일정을 맞게 됐다.
또한, 대회 규정에 토너먼트에서 연장전 30분까지 승부가 갈리지 않을 경우, 8강전에서는 추첨을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으나 # 추후에는 재경기가 치러지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
2. 1경기 우루과이 4 vs 2 잉글랜드
경기장 |
장크트 야코프 슈타디온 바젤 -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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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2] |
1954년 6월 26일 15:30 (1954년 6월 26일 2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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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판 | 카를 슈타이너 (오스트리아) | |
국 가 |
우루과이 |
잉글랜드 |
득 점 | 4 | 2 |
득점자 |
카를로스 보르헤스 (5') 옵둘리오 바렐라 (39') 후안 스키아피노 (46') 하비에르 암브로이스 (78') |
냇 로프트하우스 (16') 톰 피니 (67') |
우루과이 선발 명단
2-3-2-3 감독: [[후안 로페스(1908)|{{{#000000 후안 로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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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로케 마스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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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3. 윌리암 마르티네스 |
FB 2. 호세 산타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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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4.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 |
HB 5. 옵둘리오 바렐라 39' |
HB 17. 루이스 크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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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9. 하비에르 암브로이스 78' |
FW 10. 후안 스키아피노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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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7. 훌리오 아바디에 |
FW 9. 오스카르 미게스 |
FW 11. 카를로스 보르헤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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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1. 톰 피니 67' |
FW 9. 냇 로프트하우스 16' |
FW 7. 스탠리 매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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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5. 데니스 윌쇼 |
FW 8. 아이보 브로아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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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6. 지미 디킨슨 |
HB 14. 빌 맥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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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3. 로저 번 |
FB 4. 빌리 라이트 |
FB 2. 론 스태니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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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길버트 메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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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선발 명단
3-2-2-3 감독: [[월터 윈터보텀|{{{#003462 월터 윈터보텀}}}]] |
바젤에서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가 서로의 자존심을 건 대결을 펼쳤다. 잉글랜드는 지난 경기에서 빠졌던 냇 로프트하우스와 스탠리 매튜스가 복귀했고 우루과이는 큰 변화 없이 경기에 임했다.
우루과이는 빠른 공격으로 경기 시작 5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고 주인공은 우루과이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카를로스 보르헤스였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골은 오심이었다. 보르헤스는 잉글랜드의 페널티 구역 오른쪽 깊숙이까지 돌파해 들어오면서 훌리오 아바디에에게 패스했다. 아바디에는 공을 잡아 중앙의 동료에게 다시 패스했지만 동료는 공을 백힐로 처리하려다 놓쳤고 공은 아바디에가 패스하던 순간 골라인 밖으로 나가있던 보르헤스가 다시 들어와서 논스톱으로 골을 넣었다. 동료가 공을 건드리려고 할 때조차 보르헤스가 있던 곳은 잉글랜드의 수비수들보다 골라인에 더 가까웠다. 잉글랜드 수비수들의 항의도 없었고 심판 역시 골로 인정해서 잉글랜드는 더 불리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잉글랜드가 바라던 동점골은 전반 16분에 나왔다. 데니스 윌쇼의 패스를 받은 로프트하우스는 우루과이의 오프사이드 라인이 무너진 틈을 타 왼발로 마스폴리 골키퍼의 왼쪽으로 쉽게 골을 넣었다.
훌리오 아바디에와 로저 번은 잉글랜드의 페널티 라인 근처에서 위험하게 충돌했다. 페널티 킥이 나올 수도 있던 상황이었지만 주심은 우루과이의 프리킥을 선언했다. 그리고 윌쇼는 마스폴리가 슈팅을 방어한 이후에 나온 루즈 볼을 잡아 슈팅을 했지만 윌쇼의 슈팅은 골문을 살짝 벗어났다. 로프트하우스는 역전을 위해 여러 차례 마스폴리와 공중볼 경합을 벌였지만 골과는 연관이 없었다.
전반 39분에 바렐라의 중거리 포가 나왔다. 바렐라가 페널티 아크 바깥에서 잉글랜드 골문의 왼쪽을 보고 날린 중거리 슈팅은 길버트 메릭 골키퍼의 방어를 뚫었고 이제 우루과이가 앞서가게 되었다. 전반은 2:1로 우루과이가 리드한 채로 끝났다.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스키아피노가 추가골을 넣었다. 스키아피노는 자신의 주 위치가 아닌 오른쪽에서 약간의 돌파 후 오른발로 슈팅을 날렸다. 코스가 워낙 구석이라 메릭 골키퍼는 막아낼 수 없었다. 3:1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튜스가 힘을 내서 루이스 크루스에게 알까기도 시전했지만 그의 크로스는 우루과이의 수비수에 걸렸다. 라이트와 메릭은 집념으로 미게스를 막아냈다.
후반 22분에 톰 피니가 잉글랜드 선수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피니는 마르티네스와 헤더 경합을 했고 공은 둘을 지나쳐 마스폴리가 쳐냈지만 그 공은 하필 로프트하우스에게 날아갔다. 로프트하우스는 왼발로 슈팅을 했고 공은 마스폴리의 왼다리에 맞아 피니에게 갔다. 피니는 같이 헤더 경합을 했던 마르티네스의 다리 사이로 오른발 슈팅을 날려 만회골을 넣었다.
잉글랜드가 한골 차이로 따라붙자 충돌 장면도 나왔다. 로프트하우스와 크루스가 볼다툼을 하다 크루스가 뒤에서 로프트하우스를 밀었다. 그러자 로프트하우스는 뒤돌아서 크루스를 세게 밀어서 응수했고 경기는 잠시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경기장에 관중이 한 명 난입하기도 했다. 그 관중은 관계자에 의해 금방 나갔다.
쐐기골은 후반 33분에 나왔다. 암브로이스는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스코어를 다시 2점차로 벌렸다. 코스가 정확하기도 해서 메릭은 몸도 제대로 날릴 수 없었다.
양팀은 이후에도 득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득점이 나오지 않아 결국 우루과이가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디펜딩 챔피언의 자존심이 축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누른 셈이 되었다. 그러나 주장 바렐라가 후반에 허벅지 부상을 입은 것은 우루과이에 분명히 큰 손실이었다. 그리고 잉글랜드 역시 모처럼 FIFA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약간은 회복할 수 있었다.
3. 2경기 오스트리아 7 vs 5 스위스
경기장 |
스타드 올랭피크 드 라 퐁테즈 로잔 -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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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3] |
1954년 6월 26일 15:30 (1954년 6월 26일 2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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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판 | 찰리 폴트리스 (스코틀랜드) | |
국 가 |
오스트리아 |
스위스 |
득 점 | 7 | 5 |
득점자 |
테오도르 바그너 (25', 27', 53') 알프레트 쾨르너 (26', 34')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32') 에리히 프롭스트 (76') |
로베르트 발라만 (16', 39') 제프 휘기 (17', 19', 60') |
오스트리아 선발 명단
3-2-2-3 감독: [[발터 나우슈|{{{#000000 발터 나우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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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쿠르트 슈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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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2. 게르하르트 하나피 |
FB 3. 에른스트 하펠 |
FB 4. 레오폴트 바르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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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5.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32' |
HB 6. 카를 콜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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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9. 테오도르 바그너 25', 27', 53' |
FW 10. 에리히 프롭스트 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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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7. 로베르트 쾨르너 |
FW 21. 에른스트 슈토야스팔 |
FW 11. 알프레트 쾨르너 26',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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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7. 재키 파통 |
FW 18. 제프 휘기 17', 19', 60' |
FW 15. 키키 앙테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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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6. 로베르트 발라만 16', 39' |
FW 22. 로제 폰란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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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9. 샤를 카잘리 |
HB 10. 올리버 에기만 |
HB 14. 빌리 케르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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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4. 로제 보케 |
FB 7. 앙드레 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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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2. 외젠 파를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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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선발 명단
2-3-2-3 감독: [[카를 라판|{{{#ffffff 카를 라판}}}]] |
스위스는 개최국 다음 라운드 진출 징크스[4]라는 스위스에 아주 좋은 징크스의 영향이 있었는지 이탈리아와 플레이오프까지 치른 끝에 8강에 진출했다. 상대 오스트리아는 지금과 달리 헝가리의 뒤를 이어 우승 후보로 꼽힐만한 강호였다.
경기는 매우 더운 환경에서 치러졌다. 습도가 80퍼센트를 넘었고 체감 온도가 거의 40도에 육박할 정도였다. 양팀 모두 살인적인 더위에 대한 대비책은 전무했다. 오스트리아가 1주일을 쉰 반면, 스위스는 플레이오프로 인해 3일을 쉬어서 체력면에서도 오스트리아가 더 유리했다. 이렇게 이웃나라간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양팀은 서로 빨리 리드를 잡으려는듯 공격적으로 플레이했다. 오스트리아의 쿠르트 슈미트, 스위스의 외젠 파를리에 골키퍼는 안정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차단했다. 전반 16분까진 그랬다.
전반 16분에 스위스의 로베르트 발라만이 첫 골을 넣었다. 발라만은 패스를 받고 페널티 아크 근처로 드리블해 들어오다가 그대로 오른발로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공은 골포스트를 맞고 들어가 슈미트 골키퍼가 어찌 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킥오프가 시작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숏패스로 스위스의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파고들려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롱킥으로 오스트리아의 패스를 차단하고 하프라인에서 한번 더 롱패스를 뿌렸다. 이 롱패스는 휘기에게 갔고 휘기는 하펠의 방해에도 슈미트의 오른쪽을 겨냥했다. 슈미트는 오른다리를 뻗어봤지만 공은 다리보다 더 멀리 굴러가 오스트리아의 골문 안에 들어갔다.
전반 19분, 휘기의 추가골로 스위스는 3:0으로 달아났다. 왼쪽에서 날아온 공을 앙테넨이 다시 휘기에게 패스, 휘기는 오른발 논스톱슛으로 오스트리아의 크로스바 밑을 맞추며 멀티골을 기록했다. 이번에도 하펠이 앞에서 휘기의 슈팅을 방해해보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로잔의 홈팬들은 스위스가 3골차로 앞서나가자 더운 날씨 이상으로 열광했고 스위스가 편하게 4강에 갈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발터 나우슈 감독이 새로운 전술을 선수들에게 지시했다. 바로 카를 라판의 스위스 볼트에 균열을 주기 위해 중거리 슈팅의 비율을 높인 것이었다. 다시 양팀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전반 25분, 테오도르 바그너의 골을 시점으로 오스트리아의 대역전극이 펼쳐졌다. 바그너는 스위스의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그대로 왼쪽 파포스트를 겨냥해 중거리 슈팅을 때렸고 파를리에 골키퍼가 몸을 날려봤지만 공의 속도가 살짝 더 빨랐다.
1분 후, 알프레트 쾨르너의 강력한 왼발 중거리 슛이 스위스의 골포스트를 맞추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그너의 중거리 슛이 또 1분 후에 파를리에의 왼쪽 사각지대를 통과하면서 첫 만회골이 나온지 단 2분 만에 스코어가 동점이 되었다.
스코어는 이제 원점이 되었고 경기가 이런 양상이 되면 동점을 만든 오스트리아가 기세면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상술했듯 오스트리아는 체력면에서 스위스보다 훨씬 유리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주장 오크비르크의 중거리 슛으로 전반 32분에 역전에 성공했다. 로베르트 쾨르너가 올린 크로스가 휘어서 페널티 에어리어 밖으로 나가자 다른 오스트리아 선수가 오크비르크에게 패스, 오크비르크는 정확한 땅볼 중거리 슈팅으로 파를리에의 오른쪽을 뚫었다.
전반 34분, 알프레트의 추가골이 나왔다. 형 로베르트 쾨르네의 크로스를 알프레트가 파를리에 골키퍼의 앞에서 바로 슈팅으로 연결했고 파를리에의 몸을 맞고 흐른 공을 따라가 다시 슈팅해서 오스트리아의 5번째이자 자신의 2번째 골을 넣었다. 오스트리아는 9분 만에 5골을 넣었다.
발라만의 만회골이 나온 것은 전반 39분이었다. 발라만은 크로스를 왼발 로빙 슛으로 연결해 슈미트의 키를 넘겨 스코어 차이를 1점차로 좁혔다. 슈미트 골키퍼는 날씨가 더운지 발라만의 골에 기분이 나빴는지 머리를 감싸쥐었다. 양팀 합쳐 9골이 나오는데 걸린 시간은 23분에 불과했다.
휘기는 중거리 슈팅으로 다시 동점을 노려봤지만 이 슛은 슈미트 골키퍼의 방어에 걸렸고 전반 42분에는 로제 보케가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슈토야스팔을 심하게 몸으로 미는 파울을 범해 페널티 킥을 얻었다. 키커로는 로베르트가 나섰고 로베르트는 왼쪽으로 킥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골포스트를 벗어나는 실축이었다. 전반은 5:4로 오스트리아의 리드하는 상황에서 종료되었다. 월드컵 역사상 전반에만 9골이 나온 경기는 사상 처음이었다.
하프 타임에 오스트리아의 슈미트 골키퍼는 열사병 증세를 보여 치료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후반 8분, 바그너는 해트 트릭을 완성하는 동시에 승부의 추를 오스트리아로 가져오려 했다. 오스트리아의 중거리 슈팅이 스위스 수비수의 몸을 맞고 멀리 나갔지만 오스트리아 선수가 센터 서클 주변에서 헤딩으로 다시 스위스의 문전으로 보냈다. 공은 헤더 경합하는 양팀 선수를 지나쳤고 바그너가 따라가서 그 공을 잡아 스위스의 골문을 열었다.
후반 15분, 바그너의 해트 트릭에 휘기도 해트 트릭으로 응수했다. 휘기가 오스트리아의 페널티 아크 근처에서 쏜 왼발 중거리 슛은 슈미트 골키퍼의 손에 걸렸지만 공은 오스트리아의 골문으로 들어가버렸다. 6:5로 스위스는 턱밑까지 오스트리아를 추격했고 6일 전 경기와 월드컵 역사상 최다 득점 타이 기록이 나왔다. 그리고 1938년 월드컵에서 레오니다스와 빌리모프스키가 기록했던 양 팀 모두에서 해트 트릭이 나온 진기록도 재현했다.
역대급 열전의 방점은 프롭스트가 찍었다. 후반 31분, 프롭스트는 앞으로 나오는 파를리에 골키퍼를 두고 왼발 슈팅으로 파를리에의 방어를 피했다. 스코어는 7:5. 월드컵 역사상 최다 득점이 나온 경기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래도 더 확실한 리드를 바랐던 오스트리아와 동점을 만들고 싶었던 스위스는 서로의 골문을 열심히 두들겼지만 더 이상의 득점은 나오지 않았다.
타임 라인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경기 시작: 오스트리아 0 - 0 스위스
- 16분: 오스트리아 0 - 1 스위스
- 17분: 오스트리아 0 - 2 스위스
- 19분: 오스트리아 0 - 3 스위스
- 25분: 오스트리아 1 - 3 스위스
- 26분: 오스트리아 2 - 3 스위스
- 27분: 오스트리아 3 - 3 스위스
- 32분: 오스트리아 4 - 3 스위스
- 34분: 오스트리아 5 - 3 스위스
- 39분: 오스트리아 5 - 4 스위스
- 전반 종료: 오스트리아 5 - 4 스위스
- 53분: 오스트리아 6 - 4 스위스
- 58분: 오스트리아 6 - 5 스위스
- 76분: 오스트리아 7 - 5 스위스
- 경기 종료: 오스트리아 7 - 5 스위스
이 경기는 로잔의 열전(Hitzeschlacht von Lausanne)으로 월드컵 역사에 남은 경기로 그야말로 날씨만큼 뜨거웠던 난타전에 야구 스코어라고 해도 믿을 만한 경기가 되었다. 12골이 나와 월드컵 역사상 1경기 가장 많은 골이 터진 경기이며 이 경기는 7골로 월드컵 역사상 개최국이 최다 실점을 기록한 경기였다. 정확히 60년 후 충격과 공포의 경기가 나오며 타이 기록은 있었지만 깨질 확률은 꽤 낮다.
스위스가 탈락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경기가 스위스의 수비수이자 주장 보케의 은퇴 경기가 되었다. 보케는 대회 개막 이전에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당연히 의사는 보케의 월드컵 출전을 말렸다. 그러나 보케는 인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월드컵이라 생각하고 출전을 강행, 스위스의 모든 경기에 나서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는 대회 후 바로 선수 은퇴 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다행히 매우 성공적이어서 그 후로 보케는 40년을 더 살았다.
4. 3경기 브라질 2 vs 4 헝가리
경기장 |
방크도르프 슈타디온 베른 - 스위스 |
|
경기일 |
1954년 6월 27일 15:30 (1954년 6월 27일 23:30) |
|
심 판 | 아서 엘리스 (잉글랜드) | |
국 가 |
브라질 |
헝가리 |
득 점 | 2 | 4 |
득점자 |
자우마 산투스 (18')(
PK) 줄리뉴 보텔류 (65') |
히데그쿠티 난도르 (4') 코치시 샨도르 (7', 88') 런토시 미하이 (60')( PK) |
브라질 선발 명단
3-2-2-3 감독: 제제 모레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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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카스칠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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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2. 자우마 산투스 18' |
FB 5. 피녜이루 |
FB 3. 니우통 산투스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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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4. 브란당지뉴 |
HB 6. 바우에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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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8. 지지 |
FW 18. 움베르투 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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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7. 줄리뉴 65' |
FW 19. 인지우 |
FW 17. 마우리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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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20. 토트 미하이 |
FW 9. 히데그쿠티 난도르 4' |
FW 7. 토트 요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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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1. 치보르 졸탄 |
FW 8. 코치시 샨도르 7', 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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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6. 저커리아스 요제프 |
HB 5. 보지크 요제프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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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4. 런토시 미하이 60' |
FB 3. 로란트 줄러 |
FB 2. 부잔스키 예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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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그로시치 줄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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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선발 명단
3-2-2-3 감독: [[셰베시 구스타브|{{{#ffffff 셰베시 구스타브}}}]] |
헝가리는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 푸슈카시가 서독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입은 발목 부상으로 경기에 결장했다. 하지만 푸슈카시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건재했기 때문에 지난 대회 준우승의 아픔을 딛고 사상 첫 우승을 이루려는 브라질 입장에서 헝가리는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경기장에는 비가 내렸고 보지크가 푸슈카시 대신 주장으로 헝가리 선수들을 인솔해서 경기장에 나왔다. 헝가리의 킥오프로 경기가 시작되었고 젖은 피치에서 양팀 선수들은 기술을 구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트 요제프의 바지가 지지에 의해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지지는 넘어지던 상황에서 토트의 바지를 잡았기 때문에 고의로 바지를 찢은 것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토트는 브라질 선수들의 기세에 밀리기 싫었는지 한동안 바지가 찢어진 채로 계속 뛰었다.
전반 4분, 헝가리의 히데그쿠티가 선제골을 넣었다. 히데그쿠티는 페널티 라인 근처에서 왼발 슈팅을 날렸는데 공은 다른 선수를 맞고 피녜이루에게 갔다. 피녜이루는 멀리 걷어내는 대신 드리블로 더 안전하게 걷어내는 것을 선택했지만 히데그쿠티가 뒤에서 공을 빼앗아 다시 왼발로 슈팅을 했다. 히데그쿠티의 2차 슈팅은 카스칠류 골키퍼에게 걸렸지만 공은 치보르쪽으로 굴러갔다. 치보르 역시 슈팅을 날렸지만 이 슛도 카스칠류의 몸에 맞고 루즈볼이 되자 집념의 히데그쿠티가 3번의 시도 끝에 선제골을 넣었다.
히데그쿠티는 얼마 안 가 다시 골 찬스를 잡아 다시 브라질의 골문에 슛을 했지만 공은 자우마 산투스의 발에 막혀 골라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3분 후, 히데그쿠티는 코치시에게 아웃프런트로 크로스를 올려줬고 코치시는 헤더로 추가골을 만들어냈다.
다급해진 브라질은 공격에 치중해야했다. 대체로 브라질 공격수들은 헝가리 수비진의 높은 수준에 고전하면서도 줄리뉴가 개인기로 헝가리의 골문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줄리뉴의 왼발 슛은 그로시치의 방어에 막혔다.
전반 18분에 드디어 브라질에 만회골 기회가 찾아왔다. 인지우는 부잔스키 예뇌와 충돌해서 쓰러졌고 페널티 킥이 선언되었다. 자우마 산투스가 키커로 나섰고 그는 왼쪽으로 킥을 해서 만회골을 넣었다.
헝가리 선수들은 이후에도 브라질의 골문을 위협했다. 헝가리의 공격수가 얼리 크로스를 처리하려다 실패했지만 카스칠류 골키퍼의 바로 앞에서 있던 일이다보니 카스칠류는 공을 흘렸다. 이번에는 피녜이루가 뒤에서 골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공을 걷어냈다.
이 무렵부터 젖은 피치와 다르게 슬슬 경기의 양상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전반 초반에 있었던 민망한 일로 화가 나있던 헝가리 선수들은 조금씩 플레이가 거칠어졌고 브라질 선수들 또한 이에 질세라 맞불을 놓으면서 이때부터 난투극의 징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헝가리에게는 불운하게도 토트가 햄스트링 부상을 입었다. 1966년 대회까지는 FIFA 월드컵에 선수 교체가 없었기 때문에 토트가 빠지든 계속 피치에 있든 헝가리의 오른쪽 측면 공격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토트에게는 말 그대로 최악의 하루였다.
후반전에도 경기는 거칠게 흘러갔다. 후반 15분, 헝가리에 페널티 킥이 주어졌고 런토시 미하이가 3:1로 달아나는 페널티킥 골을 넣었다. 그러나 이 페널티 킥의 배경이 상당히 묘했는데 치보르가 코치시에게 크로스를 올렸고 코치시의 앞에 있던 피녜이루가 크로스를 끊었다. 그런데 코치시가 피녜이루를 밀면서 피녜이루의 손이 공에 닿았는데 엘리스 주심이 페널티 킥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개판으로 흘러가는 경기였다. 인지우는 히데그쿠티를 뒤에서 걷어찼다. 자우마 산투스가 거친 파울을 당해 피치에 쓰러지자 브라질 기자들과 팬들이 그라운드 난입을 시도했다가 스위스 경찰에 의해 경기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후반 20분, 줄리뉴가 트레이드 마크인 아웃프런트 슛으로 추격골을 넣어 스코어가 3:2가 되었다. 그러나 경기 분위기는 이제 걷잡을 수 없었다. 치보르는 인지우를 심판이 보는 앞에서 강하게 밀었고 인지우는 치보르에게 보복을 가했지만 심판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후반 26분,
그래도 브라질 선수들은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줄리뉴는 계속 드리블로 헝가리 수비진에 균열을 내려 노력했으며 지지의 슈팅은 헝가리의 골대를 때렸다. 그리고 후반 34분, 움베르투도 로란트 줄러에게 가한 양발 태클로 퇴장을 당해서 브라질은 9명만이 피치에 남게 되었다.
결국 후반 43분, 코치시가 치보르의 크로스를 받아 쐐기 헤더골을 터뜨렸다. 경기는 4:2 헝가리의 승리로 끝났고 그로시치 골키퍼는 옆구르기를 하며 기쁨을 표시했다. 이 날 경기에서 양측은 42번의 프리킥과 2번의 페널티킥을 찼으며 4명이 경고를 받고 3명이 퇴장당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여진은 계속되었다. 브라질 축구팬들은 스위스 경찰을 폭행하기도 했고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브라질 선수들은 헝가리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순간을 노려 일제히 헝가리 라커룸에 쳐들어가 헝가리 선수들과 난투극을 벌였다고 한다. 거의 모든 헝가리 선수들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푸슈카시는 피녜이루의 머리에 병을 던졌다는 소문도 돌았고 셰베시 구스타브 감독은 선수들을 지키다가 축구화에 얼굴이 찢어져 4바늘을 꿰맸다. 한 외국 기자는 이걸 보고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나중에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까지 했다.
제가 심판을 봤던 경기 중 가장 위대한 경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꼭대기에 있었죠. 정치와 종교가 이 게임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끔찍한 경기였습니다. 확실히 영국 선수들과 팬들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 경기를 빨리 끝내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들은 스포츠맨십을 배워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남미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흥분하고 열정적입니다. 이탈리아인들보다 더 심하죠. 영국인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충동적으로 미친 짓을 하고 몇 분 후에 진심으로 그리고 깊이 사과를 합니다.
아서 엘리스(당시 경기의 주심)
그들은 스포츠맨십을 배워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남미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흥분하고 열정적입니다. 이탈리아인들보다 더 심하죠. 영국인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충동적으로 미친 짓을 하고 몇 분 후에 진심으로 그리고 깊이 사과를 합니다.
아서 엘리스(당시 경기의 주심)
여담으로 브라질은 보르도의 전투에 이어 월드컵 역사에 남은 두 난투극 모두에서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헝가리측에서는 이 경기를 문제 삼아 보호 요청을 했고 이로 인해 6월 27일 일요일에 열릴 준결승 조추첨이 연기되었다고 한다. 해당 기사 마지막 줄에 언급된다.
5. 4경기 유고슬라비아 0 vs 2 서독
경기장 |
스타드 드 샤르밀 제네바 -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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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 |
1954년 6월 27일 15:30 (1954년 6월 27일 2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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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판 | 졸트 이슈트반 (헝가리) | |
국 가 |
유고슬라비아 |
서독 |
득 점 | 0 | 2 |
득점자 |
이반 호르바트 (9')(
OG) 헬무트 란 (85') |
유고슬라비아 선발 명단
3-2-2-3 감독: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ffffff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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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블라디미르 베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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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2. 브란코 스탄코비치 |
FB 5. 이반 호르바트 9' |
FB 3. 토미슬라브 크른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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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4.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
HB 6. 부야딘 보슈코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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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8. 라이코 미티치 |
FW 9. 베르나르드 부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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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8. 밀로스 밀루티노비치 |
FW 10. 스체판 보베크 |
FW 11. 브란코 제베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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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20. 한스 셰퍼 |
FW 15. 오트마르 발터 |
FW 12. 헬무트 란 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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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6. 프리츠 발터 |
FW 13. 막스 모를로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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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8. 카를 마이 |
HB 6. 호르스트 에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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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3. 베르너 콜마이어 |
FB 10. 베르너 리프리히 |
FB 2. 프리츠 라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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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토니 투레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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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선발 명단
3-2-2-3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000000 제프 헤르베르거}}}]] |
유고슬라비아와 서독의 경기는 브라질과 비기고 프랑스를 이긴 유고슬라비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조금 더 우세했다.
그러나 그 예측은 전반 9분에 나온 호르바트의 자책골로 빗나갔다. 유고슬라비아의 진영에서 서독 선수들이 패스를 돌리다가 스탄코비치가 높게 차서 걷어냈지만 공은 유고슬라비아 진영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모를로크와 토미슬라브 크른코비치의 헤더 경쟁에서 공은 모를로크의 머리를 맞고 유고슬라비아의 골문쪽으로 날아갔다. 뒤에서 달려오던 셰퍼가 공을 건드리려 하기 전에 호르바트는 머리로 공을 걷어내려 했지만 공은 골문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첫 골이 들어갔지만 아직 승리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고 한 골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헤르베르거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보이지 않았다. 동점골을 목표로 한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은 더 거세졌지만 리프리히와 토니 투레크 골키퍼를 축으로 한 서독 수비진도 유고슬라비아 공격수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투레크는 제베츠의 슈팅을 멋진 다이빙 캐치로 잡아냈다. 반대편에서도 베아라 골키퍼가 힘을 내서 서독 공격수들의 도전을 막아냈다. 전반은 더 이상의 득점이 없이 종료되었다.
후반전에도 투레크의 선방쇼가 이어졌다. 투레크는 패스를 받아 자신과 1대1 기회를 잡으려던 보베크의 발밑으로 파고 들어 공을 몸으로 막아 밖으로 보냈다. 투레크는 이후에도 온 몸으로 유고슬라비아 공격수들의 득점을 저지했고 그 와중에 잠시 고통으로 플레이를 멈출 때도 있었다. 하지만 투레크는 계속 서독의 골문을 든든하게 지켜냈고 투레크가 뚫려도 다른 수비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베르너 콜마이어는 골문 구석으로 날아가는 유고슬라비아의 슈팅을 다이빙 헤더로 걷어냈다.
후반 40분에 서독 수비수들의 투지에 드디어 공격수들이 화답했다. 란이 페널티 라인에서 쏜 슈팅은 그대로 유고슬라비아의 골문 안으로 향했고 이미 다리를 다친 베아라 골키퍼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서독은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누르고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경기가 이야깃거리들이 많았던 이 대회 8강전에서 가장 조용한 경기가 되었다.
6. 준결승 진출팀
이후 정보는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준결승에서 기재.
[1]
다만 이 당시의 헝가리는 서독이 주전 선수들을 내보내더라도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팀이었기 때문에 헤르베르거의 결정은 스포츠맨십을 저버린 얍삽한 행위라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영리한 선택에 가까웠다. 그런데 져도 3:8로 너무 크게 져서 헤르베르거는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2]
괄호 안은 한국시간
[3]
괄호 안은 한국시간
[4]
사실 이 월드컵 전까지
1938년 대회의 개최국
프랑스를 제외하면 최소한 준우승은 거뒀었다. 이후에 대회가 계속 개최되면서 우승후보급이 아닌 나라에서도 개최가 되어왔지만 개최국의 국가대표팀은 거의 다 1라운드는 계속 통과해왔다.
2010년의
남아공과
2022년
카타르만 예외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
[5]
당시 규정은 지금처럼 전문적이지도 엄격하지도 않았기에 만약 현재와 같은 규정을 그때 적용했다면 시합을 뛰었던 선수들 대부분이 퇴장당해서 사후 징계를 받거나 어쩌면 둘 중 한 팀이
몰수패 처리를 당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