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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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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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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 리그 1조 2조 3조 4조
토너먼트 8강 준결승 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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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경기 헝가리 9 vs 0 대한민국3. 2경기 터키 1 vs 4 서독4. 3경기 헝가리 8 vs 3 서독5. 4경기 터키 7 vs 0 대한민국6. 플레이오프 터키 2 vs 7 서독7. 8강 진출팀

1. 개요

순위 팀명 경기수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1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헝가리 2 2 0 0 17 3 +14 4
2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2 1 0 1 7 9 -2 2
3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2 1 0 1 8 4 +4 2
4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2 0 0 2 0 16 -16 0
토너먼트 진출 | 탈락
시드 배정국: 헝가리, 터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개국 본선 16강 조별 라운드의 진행 상황 중, 2조에 대해 정리하는 페이지.

이 대회는 각조당 시드 배정국 2개국이 있어서 시드 배정국은 시드 미배정국들과, 시드 미배정국은 시드 배정국들과 시합을 하는 방식으로 모든 팀이 2경기씩 치렀다. 이 대회에는 조별 리그부터 연장전이 있어서 정규 시간 내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연장전을 치렀고 연장전에서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무승부로 기록되었다. 골득실은 따지지 않았고 만약 2위팀과 3위팀이 승점이 같으면 플레이오프를 치러 승리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만약 플레이오프에서 정규 시간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연장전,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추첨으로 8강 진출팀을 가렸다. 실제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만약 4팀의 승점이 모두 같으면 시드팀간의 플레이오프 1경기와 비시드팀간의 플레이오프 1경기로 플레이오프 2경기가 추가로 진행되었다. 이 경우에도 연장전과 추첨제는 동일했기 때문에 이러면 시드팀 1팀, 비시드팀 1팀이 진출하게 되었다.

2. 1경기 헝가리 9 vs 0 대한민국

파일: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로고.svg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2조 1차전
1954년 6월 17일 목요일 16:30 (UTC+1)
하르트투름 슈타디온 ( 스위스, 취리히)
주심: 파일:UEFA FRA.png 레몽 빈센티
관중: 18,000명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장(1949-1956).svg 9 : 0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UEFA HUN.png 헝가리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12', 89' 푸슈카시 페렌츠[1]페렌츠 푸스카스로 잘 알려진 선수이며, FIFA 푸스카스상이 바로 이 선수의 이름을 땄다.]
18' 런토시 미하이
24', 36', 50' 코치시 샨도르
59' 치보르 졸탄
75', 83' 펄로타시 페테르
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헝가리 선발 명단 3-2-2-3
감독: 셰베시 구스타브
GK
1. 그로시치 줄러
FB
2. 부잔스키 예뇌
FB
3. 로란트 줄러
FB
4. 런토시 미하이 파일:득점 아이콘.svg 18'
HB
5. 보지크 요제프
HB
15. 스조이카 페렌츠
FW
8. 코치시 샨도르 파일:득점 아이콘.svg 24', 36', 50'
FW
10. 푸슈카시 페렌츠 파일:주장 아이콘.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12', 89'
FW
16. 부더이 러즐로
FW
19. 펄로타시 페테르 파일:득점 아이콘.svg 75', 83'
FW
11. 치보르 졸탄 파일:득점 아이콘.svg 59'
FW
8. 최정민
FW
10. 성낙운
FW
11. 정남식
FW
9. 우상권
FW
17. 박일갑
HB
16. 주영광 파일:주장 아이콘.svg
HB
4. 강창기
FB
3. 박재승
FB
6. 민병대
FB
2. 박규정
GK
1. 홍덕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선발 명단 3-2-2-3
감독: 김용식
대한민국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경기이자 아시아 대륙 소속 주권국가[2]첫 월드컵 본선 경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첫 상대는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는 최고의 유럽 선수로 평가받던 페렌츠 푸스카스를 필두로 산도르 코츠시스, 난도르 히데구티, 요제프 보직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다수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을 그대로 내보낸 2년 전 올림픽에서 헝가리는 금메달을 따고 왔고 축구종가 잉글랜드 세기의 경기를 포함해 부다페스트에서 그들을 7:1로 박살내는 굴욕[3]을 안겨주기도 했다. 당시 헝가리는 이렇게 28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던 팀이었다. 대부분의 해외 언론은 20:0 내지 그 이상의 스코어를 점쳤고 어쩌면 이 게임은 앞으로도 FIFA 월드컵 역사상 가장 승부 예측이 쉬웠던 게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의외로 대한민국의 우상권 성낙운이 경기 극초반에 기회를 잡으려고 했지만 줄러 그로시치 골키퍼를 위협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전반 12분, 푸슈카시가 홍덕영 골키퍼를 상대로 슈팅을 때렸고 홍덕영은 이를 막아냈지만 다시 푸슈카시가 공을 잡고 골키퍼를 제치며 선제골을 뽑아냈다.

런토시는 프리킥으로 대한민국의 골문을 다시 열었다. 코치시는 전반이 끝나기 전까지 2골을 넣어 스코어는 0:4로 벌어졌다.

후반에 대한민국 선수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쥐가 나서 경기를 제대로 뛰지 못하는 선수들이 계속 나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투혼을 발휘해서 최선을 다해 헝가리 선수들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코치시는 한 골을 더 추가해 해트 트릭을 완성했고 치보르 졸탄은 드리블과 슈팅으로 대한민국 수비진을 다시 뒤흔들었다. 스코어는 0:6. 이후에 펄로타시 페테르가 2골, 푸슈카시가 1골을 더 넣어 스코어는 0:9로 마무리되었다.

이 경기는 지금까지도 월드컵 역사상 본선 역대 최다 점수 차 승리가 기록된 경기로 남아있다.[4] 그러나 당시 헝가리의 전력이 어땠는지[5], 대한민국의 나라 상황과[6]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이 스위스에 오면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당시 대표팀 선배 선수들이 말 그대로 투혼을 불사르며 최선을 다했던 결과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 월드컵을 지켜보던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축구팬들은 대한민국 선수들의 사정을 중계나 뉴스로 듣고 선수들이 묵던 호텔로 어마어마한 양의 선물들을 보냈고 이를 본 대한민국 선수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3. 2경기 터키 1 vs 4 서독

경기장 방크도르프 슈타디온
베른 - 스위스
경기일[7] 1954년 6월 17일 16:30
(1954년 6월 18일 00:30)
심 판 주제 다코스타 비에이라 (포르투갈)
국 가 터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서독
파일:독일 국기.svg
득 점 1 4
득점자 수아트 마마트 (2') 한스 셰퍼 (15')
베르니 클로트 (52')
오트마르 발터 (64')
막스 모를로크 (80')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선발 명단 3-2-2-3
감독: [[산드로 푸포|{{{#ffffff 산드로 푸포}}}]]
GK
1. 투르가이 셰렌 파일:주장 아이콘.svg
FB
2. 르드반 볼라틀르
FB
5. 체틴 제이베크
FB
3. 바스리 디리믈리리
HB
4. 무스타파 에르탄
HB
6. 로베르 에르욜
FW
8. 수아트 마마트 파일:득점 아이콘.svg 2'
FW
10. 부르한 사르군
FW
7. 에롤 케스킨
FW
9. 이스마일 페르둔
FW
11.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
FW
20. 한스 셰퍼 파일:득점 아이콘.svg 15'
FW
15. 오트마르 발터 파일:득점 아이콘.svg 64'
FW
14. 베르니 클로트 파일:득점 아이콘.svg 52'
FW
16. 프리츠 발터 파일:주장 아이콘.svg
FW
13. 막스 모를로크 파일:득점 아이콘.svg 80'
HB
8. 카를 마이
HB
6. 호르스트 에켈
FB
3. 베르너 콜마이어
FB
7. 유프 포지팔
FB
2. 프리츠 라반트
GK
1. 토니 투레크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선발 명단 3-2-2-3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000000 제프 헤르베르거}}}]]

튀르키예 스페인을 떨어뜨리고 그들의 시드를 대신 가지고 올라왔다. FIFA 지역 예선이 끝나기도 전에 시드 배정국을 이미 정해놨었고 나머지 팀들은 FIFA의 예상대로 본선에 진출했지만 스페인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력상 서독이 시드를 받는 것이 맞았겠지만 FIFA는 스페인의 시드를 스페인을 떨어뜨린 튀르키예에 그대로 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튀르키예는 당시 공포의 대상이자 최강팀 매직 머저르를 피할 수 있었다. 서독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으로 지난 대회의 출전권을 박탈당했었고 이번이 복귀 대회였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터키의 수아트 마마트가 첫 골을 넣었다. 두 명의 서독 수비수를 제친 마마트는 잠시 비틀거리면서 공의 소유권을 잃는듯 싶었지만 다른 서독 수비수들이 다시 자신에게 달라붙기 전에 재빨리 슈팅을 쏴서 서독의 골문을 열었다.

하지만 서독이 동점골을 넣는 데에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반 15분에 한스 셰퍼 막스 모를로크의 패스를 받아 속도를 냈다. 셰퍼는 터키 수비수들의 접근을 스피드로 제치고 투르가이 세렌 골키퍼와 1대1로 맞선 후 왼발로 가볍게 동점골을 넣었다. 전반은 1:1로 종료되었다.

후반은 서독의 시간이었다. 샬케 소속의 베르니 클로트는 후반 7분, 투르가이 골키퍼와의 1대1 상황에서 니어 포스트로 낮게 슈팅을 날렸고 터키의 골키퍼 투르가이 세렌은 자신의 왼쪽 다리로 슈팅을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서독이 역전에 성공했다.

오트마르 발터는 후반 15분, 튀르키예 진영 오른쪽 구석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받아 간단히 골을 넣었다. 튀르키예 골키퍼와 수비수들은 크로스 차단에 실패했고 오트마르 발터와 한스 셰퍼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프리츠 발터는 패스를 받아 아무도 없던 터키의 골대에 왼발로 슈팅을 해봤지만 슈팅은 다소 약했고 투르가이 골키퍼가 달려들어와서 슈팅을 잡아냈다.

막스 모를로크가 후반 35분,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모를로크는 오트마르 발터의 크로스를 터키 수비수 앞에서 오른발로 잘라먹었고 공은 골포스트를 맞고 들어갔다.

4:1 서독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4. 3경기 헝가리 8 vs 3 서독

경기장 장크트 야코프 슈타디온
바젤 - 스위스
경기일 1954년 6월 20일 15:20
(1954년 6월 20일 23:20)
심 판 윌리엄 링 (잉글랜드)
국 가 헝가리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서독
파일:독일 국기.svg
득 점 8 3
득점자 코치시 샨도르 (3', 21', 69', 78')
푸슈카시 페렌츠 (17')
히데그쿠티 난도르 (52', 54')
토트 요제프 (75')
알프레트 파프 (25')
헬무트 란 (77')
리하르트 헤어만 (84')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헝가리 선발 명단 3-2-2-3
감독: [[셰베시 구스타브|{{{#ffffff 셰베시 구스타브}}}]]
GK
1. 그로시치 줄러
FB
2. 부잔스키 예뇌
FB
3. 로란트 줄러
FB
4. 런토시 미하이
HB
5. 보지크 요제프
HB
6. 저커리아스 요제프
FW
8. 코치시 샨도르 파일:득점 아이콘.svg 3', 21', 69', 78'
FW
10. 푸슈카시 페렌츠 파일:주장 아이콘.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17'
FW
7. 토트 요제프 파일:득점 아이콘.svg 75'
FW
9. 히데그쿠티 난도르 파일:득점 아이콘.svg 52', 54'
FW
11. 치보르 졸탄
FW
17. 리하르트 헤어만 파일:득점 아이콘.svg 84'
FW
16. 프리츠 발터 파일:주장 아이콘.svg
FW
12. 헬무트 란 파일:득점 아이콘.svg 77'
FW
19. 알프레트 파프 파일:득점 아이콘.svg 25'
FW
6. 호르스트 에켈
HB
9. 파울 메부스
HB
7. 유프 포지팔
FB
3. 베르너 콜마이어
FB
10. 베르너 리프리히
FB
4. 한스 바우어
GK
22. 하인츠 크비아트코브스키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선발 명단 3-2-2-3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000000 제프 헤르베르거}}}]]

서독은 지난 경기에서 터키를 4:1로 잡아 한결 여유가 있었다. 서독의 감독 헤르베르거 매직 머저르를 상대하는 이번 경기를 앞두고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주전 선수들을 모두 출전시킨다고 해도 서독이 헝가리를 잡는다는 보장은 없었고 혹시라도 90분 내로 승부를 보지 못하면 저 껄끄러운 상대와 30분 더 진을 빼야 했다. 선수들이 다치면 그것만으로 전력에 누수가 생긴다. 대회 시스템상 앞으로 토너먼트에서 붙을 상대들도 생각했을 때 헝가리를 잡고 조 1위가 되면 오히려 더 험난한 일정이 펼쳐질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튀르키예야 어차피 대한민국을 잡을 것이고 서독이 크게 이긴 적이 있으니 플레이오프에서 튀르키예와 다시 붙어도 또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헤르베르거는 주전들 일부에게 휴식을 주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고 튀르키예전의 라인업과 비교하면 7명이 바뀐 라인업을 들고 왔다. 반면 헝가리는 주전 선수들을 대부분 출전시켰다.

전반 4분에 코치시는 선제 득점을 기록했다. 토트의 코너킥을 처리하려 하인츠 크비아트코브스키 골키퍼와 한스 바우어가 달려들었지만 둘은 겹치면서 공을 놓쳤고 코치시는 공을 쫓아가 왼발로 골을 넣었다. 서독도 얼마 안 가 반격의 찬스를 잡았다. 파울 메부스가 코치시의 골이 들어간 지 3분 후에 왼쪽에서 크로스를 받아 그로시치가 지키는 헝가리의 골문을 열었지만 메부스의 위치가 오프사이드로 선언되어 득점이 인정되지 않았다.

17분에는 푸슈카시의 개인기와 오른발이 번뜩였다. 푸슈카시는 서독 수비수들 두명의 틈을 뚫고 서독의 페널티 박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푸슈카시는 서독 수비수를 한 명 더 따돌린 후 하인츠 크비아트코브스키 골키퍼의 앞에서 오른발로 슈팅, 골을 넣었다.

전반 21분, 코치시와 푸슈카시의 왼발이 골을 만들어냈다. 푸슈카시가 서독 수비수를 제치고 코치시에게 준 왼발 스루패스는 정확히 코치시의 앞에 배달되었고 코치시는 왼발로 오른쪽을 겨냥해 정확한 슈팅을 구사했다. 스코어는 3:0.

전반 25분에 드디어 서독에서 첫 골이 나왔다. 주인공은 알프레트 파프. 파프는 그로시치만을 앞에 둔 상황에 헝가리 수비수가 옆에 가까이 붙자 왼발 슈팅으로 그로시치의 왼쪽을 뚫었다. 히데그쿠티, 푸슈카시, 보지크 등 헝가리 선수들은 돌아가면서 서독의 골문을 두들겨 봤지만 슈팅들이 골문을 살짝식 벗어나 전반에 더 이상의 득점은 나오지 않았다. 전반은 이렇게 3:1, 헝가리가 리드하는 스코어로 끝났다.

후반에도 헝가리의 위력적인 공격은 계속되었다. 코치시의 헤더는 크로스바를 맞고 나왔고 푸슈카시가 리바운드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후반 7분에 히데그쿠티가 후반전 첫 골이자 자신의 대회 첫 골을 넣었다. 서독 수비진은 헝가리의 계속된 공격에도 버텨냈지만 문전 혼전 상황에서 코치시가 뒤로 흘려주고 뒤이어 나온 히데그쿠티의 중거리 슈팅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히데그쿠티의 골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푸슈카시의 강력한 왼발 슈팅이 나왔지만 공은 서독 골키퍼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히데그쿠티는 2분 만에 다시 서독의 골망을 흔들었다. 히데그쿠티는 패스를 받고 서독의 골대쪽으로 유유히 드리블해 들어갔다. 베르너 콜마이어가 뒤늦게 히데그쿠티를 저지하기 위해 달라붙었지만 히데그쿠티는 간단한 발재간으로 콜마이어를 무력화시켰다. 슈팅각을 좁히려 앞으로 나오던 크비아트코브스키를 본 히데그쿠티는 간단히 오른발로 크비아트코브스키의 왼쪽으로 슛을 쐈고 헝가리의 5번째 득점이 완성되었다.

리프리히는 벌어진 스코어에 화가 났는지 1분 사이에 토트와 푸슈카시에게 페널티 에이리어에서 위험한 반칙을 저질렀다. 두번 다 페널티 킥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링 주심은 그냥 넘어갔다. 콜마이어도 토트에게 반칙성 플레이를 했지만 이번에도 링 주심은 호루라기를 불지 않았다. 결국 리프리히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리프리히가 뒤에서 가한 충돌로 푸슈카시는 발목 부상을 입고 만 것이다. 푸슈카시의 발목은 심하게 부어올랐고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푸슈카시는 이 부상으로 한동안 스쿼드에서 빠져야 했다.

후반 24분에 다시 헝가리의 골이 나왔다. 코치시는 스루패스를 받고 크비아트코브스키와 맞섰다. 크비아트코브스키가 코치시를 향해 달려나왔지만 코치시에겐 크비아트코브스키가 막을 수 없는 곳이 너무 빤히 보이는 듯했다. 코치시는 왼쪽으로 슈팅을 했고 공은 당연한듯 골문 구석으로 향했다. 6:1이었다. 이렇게 코치시는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2경기 연속 해트 트릭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후반 30분에 토트는 자신의 대회 첫 골이자 헝가리의 7번째 득점을 올렸다. 토트는 서독의 왼쪽 측면을 파고들면서 안쪽으로 들어와 강력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7:1로 승부는 거의 갈렸다.

서독은 이 후반 32분에 득점함으로써 약간의 자존심을 찾았다. 그로시치는 란을 막기 위해 페널티 라인 밖까지 나왔고 란은 골라인까지 드리블해서 그로시치를 더 깊이 끌어냈다. 란은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드리블해서 슛각을 만들었고 왼발 로빙슛으로 득점했다. 그로시치는 다시 골대쪽으로 이동했지만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란의 슈팅을 막을 수 없었다. 7:2.

란의 만회골이 터진지 1분 후, 코치시가 나서서 점수차를 다시 벌렸다. 코치시는 치보르의 땅볼 크로스를 왼발로 차 넣어 자신의 4번째 골을 기록했다. 코치시는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 아데미르에 이어 FIFA 월드컵 역사상 세 번째로 한 경기에 4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다. 코치시는 얼마 안 가 득점 기회를 다시 잡아 월드컵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쓸 뻔했지만 크비아트코브스키가 이것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이 경기의 마지막 득점자는 리하르트 헤어만이었다. 헤어만은 서독이 잡은 역습 찬스에서 원투 패스로 그로시치만을 상대하게 되었다. 헝가리 수비수들은 체력이 떨어진 것도 있고 1골이 들어가도 대세에 영향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헤어만을 쫓는 것을 포기했다. 그로시치는 멀리 나왔지만 헤어만을 저지하지 못했고 헤어만이 이렇게 마지막 득점을 올렸다.

경기는 이렇게 헝가리가 서독을 8:3으로 뭉개버리는 것으로 끝났고 90분 경기로 한정하면 FIFA 월드컵 역사상 최다골이 나온 경기[8]가 되었다. 서독 국민들은 헝가리에게 참패하는 대표팀을 보면서 대표팀과 헤르베르거 감독에게 화가 단단히 났다. 헤르베르거는 고국에서 날아온 나라 망신 그만 시키고 당장 돌아오라는 식의 비난과 전쟁에서 진 우리가 그럼 그렇지라는 식의 냉소적인 내용의 편지를 한가득 받았다.[9]

그리고 헤르베르거의 예측은 거의 다 실제로 맞아떨어져서 이 경기는 월드컵 역사에 남은 논란의 경기 중 하나가 되었다.

5. 4경기 터키 7 vs 0 대한민국

파일: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로고.svg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2조 2차전
1954년 6월 20일 일요일 15:30 (UTC+1)
스타드 드 샤르밀 ( 스위스, 제네바)
주심: 파일:UEFA URU.png 에스테반 마리노
관중: 17,150명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7 : 0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UEFA TUR.png 터키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10', 30' 수아트 마마트
18'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
37', 64', 70' 부르한 사르군
76' 에롤 케스킨
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선발 명단 3-2-2-3
감독: 산드로 푸포
GK
1. 투르가이 셰렌 파일:주장 아이콘.svg
FB
2. 르드반 볼라틀르
FB
5. 체틴 제이베크
FB
3. 바스리 디리믈리리
HB
4. 무스타파 에르탄
HB
6. 로베르 에르욜
FW
8. 수아트 마마트 파일:득점 아이콘.svg 10', 30'
FW
10. 부르한 사르군 파일:득점 아이콘.svg 37', 64', 70'
FW
7. 에롤 케스킨 파일:득점 아이콘.svg 76'
FW
20. 오나르즈 네즈미
FW
11.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 파일:득점 아이콘.svg 18'
FW
20. 정국진[10]
FW
7. 이수남
FW
9. 우상권
FW
19. 이기주
FW
18. 최영근
HB
15. 김지성
HB
4. 강창기
FB
13. 이종갑
FB
14. 한창화
FB
2. 박규정 파일:주장 아이콘.svg
GK
1. 홍덕영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선발 명단 3-2-2-3
감독: 김용식
헝가리와 경기를 치렀던 대한민국 1진 선수들의 몸은 말 그대로 천근만근이었다. 결국 김용식 감독은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 터키와의 2차전을 준비해야 했다.

대한민국은 터키를 상대로도 전반 10분에 수아트 마마트에게 골을 허용하기 전까지는 잘 버텼다. 마마트는 왼쪽에서 땅볼 패스를 받아 오른발로 강하게 깔아찼고 공은 홍덕영 골키퍼의 바로 오른쪽 옆을 파고들었다. 홍덕영 골키퍼는 급히 몸을 숙여봤지만 마마트의 슈팅은 골키퍼가 처리하기엔 너무 빨랐다.

8분 후,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는 발리 슈팅으로 골을 뽑아냈다. 대한민국 수비수가 헤더로 클리어한 공이 퀴취칸도냐디스에게 날아가자 그는 바로 왼발로 슈팅을 때렸고 공은 대한민국의 골문 구석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홍덕영 골키퍼가 힘껏 점프를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취재대신 누워서 자는 기자들도 보일 정도로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반 30분에 마마트의 추가골이 나왔다. 마마트는 패스를 받아 홍덕영 골키퍼와 1대1 찬스를 맞이했고 홍덕영 골키퍼는 마마트에게 달려 나오려다 미끄러진듯 넘어졌고 마마트는 쉽게 골을 넣었다.

전반 37분부터 부르한 사르군이 대한민국의 골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사르군은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한 골을 추가했다. 4:0이었다. 그리고 전반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후반에도 대한민국은 딱히 달라질 수 없었다. 사르군은 후반 19분과 25분에 오른발 강슛으로 2골을 추가해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후반 31분, 에롤 케스킨은 오나르즈 네즈미에게 패스를 받아 터닝 후 오른발로 튀르키예의 7번째 골을 완성시켰다. 경기는 7:0. 터키의 대승으로 끝났다.

대한민국의 선배 선수들은 첫 FIFA 월드컵 무대에서 투혼을 보여줬지만 투혼만으로 상대팀을 잡기엔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고 실력의 격차도 컸다. 대한민국의 첫 FIFA 월드컵 참가의 역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터키는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대한민국이 다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는 데에는 무려 32년이 걸렸으며 터키는 무려 48년이 걸렸다. 이 두 팀은 48년 후의 월드컵 3위 결정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때도 승리한 팀은 터키였다. 다만 대한민국은 그 이후로도 월드컵에 개근하고 있지만, 터키는 2002년을 끝으로 월드컵에 다시 나오지 못하고 있다.

6. 플레이오프 터키 2 vs 7 서독

경기장 하르드투름
취리히 - 스위스
경기일[11] 1954년 6월 23일 16:30
(1954년 6월 24일 00:30)
심 판 레몽 빈센티 (프랑스)
국 가 터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서독
파일:독일 국기.svg
득 점 2 7
득점자 무스타파 에르탄 (21')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 (82')
오트마르 발터 (7')
한스 셰퍼 (12', 79')
막스 모를로크 (30', 60', 77')
프리츠 발터 (62')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선발 명단 3-2-2-3
감독: [[산드로 푸포|{{{#ff0000 산드로 푸포}}}]]
GK
12. 쉬크뤼 에르소이
FB
2. 르드반 볼라틀르
FB
5. 체틴 제이베크
FB
3. 바스리 디리믈리리
HB
17. 나지 에르뎀
HB
6. 로베르 에르욜
FW
4. 무스타파 에르탄 파일:득점 아이콘.svg 21'
FW
11.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 파일:주장 아이콘.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82'
FW
7. 에롤 케스킨
FW
20. 네즈미 오나르즈
FW
22. 코쉬쿤 타쉬
FW
20. 한스 셰퍼 파일:득점 아이콘.svg 12', 79'
FW
15. 오트마르 발터 파일:득점 아이콘.svg 7'
FW
14. 베르니 클로트
FW
16. 프리츠 발터 파일:주장 아이콘.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62'
FW
13. 막스 모를로크 파일:득점 아이콘.svg 30', 60', 77'
HB
8. 카를 마이
HB
6. 호르스트 에켈
FB
4. 한스 바우어
FB
7. 유프 포지팔
FB
2. 프리츠 라반트
GK
1. 토니 투레크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선발 명단 3-2-2-3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000000 제프 헤르베르거}}}]]

터키의 입장에서 6일 전에 대패했던 서독과 다시 8강 진출을 놓고 시합을 하는 것은 분명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터키는 흰색, 서독은 녹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들어왔다.

터키는 전반 7분 만에 오트마르 발터에게 골을 허용하고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갔다. 서독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한스 셰퍼가 터키 진영의 오른쪽을 파고들다가 오트마르에게 땅볼로 패스했고 오트마르는 간단히 골을 넣었다. 오트마르는 기쁨에 겨웠는지 터키의 골네트에까지 달려들었다.

5분 후, 셰퍼의 골이 나왔다. 셰퍼는 패스를 받아 만든 오픈 찬스에서 직접 왼발로 마무리했다.

전반 21분에 터키는 만회골을 넣었다. 무스타파 에르탄은 서독 수비수들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으면서 왼쪽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정확히 머리에 맞혔다. 토니 투레크 골키퍼가 왼쪽으로 몸을 날려서 공을 왼손으로 막으려했지만 공은 투레크의 손을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1:2가 되었다.

서독 공격수들은 공격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에켈은 상대 골키퍼 쉬크뤼 에르소이와 1대1 찬스를 맞아 슈팅까지 해봤지만 에르소이 골키퍼의 선방에 걸렸다. 그리고 30분에 모를로크의 골이 나왔다. 모를로크는 동료의 헤더 패스를 받아 터키 수비수들의 방해를 뚫고 오른발로 득점을 올렸다. 전반은 서독의 3:1 리드로 종료되었다.

후반 15분, 모를로크의 추가골이 나왔다. 모를로크는 에르탄을 뒤에 두고 슬라이딩으로 튀르키예의 골문을 다시 열었다.

2분 후, 서독의 주장 프리츠 발터가 득점을 올렸다. 프리츠는 페널티 라인 중앙쪽에서 패스를 받아 오른발 인사이드 킥으로 왼쪽을 겨냥해 슈팅을 날렸고 에르소이 골키퍼의 도전은 무력했다. 이렇게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발터 형제는 한 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은 형제가 되었다.

후반 32분에 모를로크는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모를로크는 오른발 슈팅으로 튀르키예의 왼쪽 골문 구석을 정확히 뚫었다.

모를로크의 해트 트릭이 나온지 2분 후, 셰퍼의 쐐기골이 나왔다. 셰퍼는 오른쪽에서 건너온 땅볼 크로스를 마무리지어 경기 종료 10분여를 남기고 7:1까지 스코어를 벌렸다. 8강 진출 팀은 서독으로 거의 확정되었다.

후반 37분, 퀴취칸도냐디스의 추격골이 나왔다. 퀴취칸도냐디스는 공을 받아 투레크의 방어를 뚫고 골을 넣었다.

경기는 7:2로 서독이 승리했다.

7. 8강 진출팀

이후 정보는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8강에서 기재.

[1] 영어식 표기인 [2] 주권국가라는 조건이 붙는 이유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대륙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경기를 치렀기 때문이다. [3] 이 경기가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상 최다 스코어 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4]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헝가리는 엘살바도르를 상대로 10:1로 승리, 타이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 본선에서 한 팀이 10골을 넣은 경기도 이 경기가 유일하다. 헝가리는 이후 경기에서 1무 1패를 기록했는데 결국 3경기에서 12골을 넣고도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불멸의 기록이 나오고 말았다. [5] 대회 시작 전부터 압도적인 우승후보로 꼽혔고,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까지 있었다.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져서 우승에 실패한게 월드컵 역사에 남는 역대급 이변일 정도다.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하고도 우승팀 이상으로 주목받는 팀은 이 당시 헝가리 대표팀과 1974년 네덜란드 대표팀 말고는 없다. [6] 6.25 전쟁이 끝난지 1년밖에 되지 않아서 나라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수가 없는 상태였다. [7] 괄호 안은 한국시간 [8] 1938년 월드컵에서 120분간 브라질 폴란드가 11골을 넣은 경기도 있었다. [9] 대표적인 편지의 내용중 하나를 소개하면 헤르베르거는 고국에서 밧줄선물로 받았는데 동봉된 편지엔 이렇게 써있었다. "헤르베르거씨, 당장 이 밧줄로 목을 매 죽되 밧줄은 재활용해야하니 돌려주시길." 영화 베른의 기적에서도 헤르베르거가 이 편지를 선수들에게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10] 일부 자료들에서는 정국진이 주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1] 괄호 안은 한국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