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생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주영광(축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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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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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정휘 |
2대 이영민 |
3대 이유형 |
4대 김화집 |
5대 김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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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배종호 |
7대 김용식 |
8대 주영광 |
9대 김성간 |
10대 김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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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김규환 |
12대 민병대 |
13대 정남식 |
14대 김용식 |
15대 민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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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주영광 |
17대 김용식 |
18대 김규환 |
19대 민병대 |
20대 김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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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박규정 |
22대 민병대 |
23대 박일갑 |
24대 김규환 |
25대 정남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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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한창화 |
27대 안종수 |
28대 장경환 |
29대 박일갑 |
30대 김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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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강준영 |
32대 한홍기 |
33대 홍덕영 |
34대 박병석 |
35대 함흥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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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민병대 |
37대 문정식 |
38대 최영근 |
39대 함흥철 |
40대 문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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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최정민 |
42대 김정남 |
43대 함흥철 |
44대 장경환 |
45대 김정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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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 최은택 |
47대 조윤옥 |
48대 박종환 |
49대 문정식 |
50대 김정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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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박종환 |
52대 이회택 |
53대 이차만 |
54대 박종환 |
55대 고재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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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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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광 朱榮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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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년
12월 1일 일제강점기 조선 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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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2년 9월 28일 (향년 61세) | |
국적 | 대한민국 | |
직업 |
축구선수(센터하프[1]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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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평양 선발팀 (?) 해군 축구단 (1954)[2] |
감독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56)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59)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60) 연세대학교 축구부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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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대한축구협회 선수선발위원 (1966) 1968 서울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조직위원 (1968) MBC 축구 해설위원 (1970~1982) 대한축구협회 상임이사 (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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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0경기( 대한민국 / 1950~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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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1970년대와 80년대 MBC의 축구 해설위원으로 올드팬들에게 유명하다.2. 선수 생활
1920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평축구대항전에서 평양 팀의 센터하프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고[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1950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뽑히기 시작했다.일제강점기 시절이 축구선수의 전성기 시점이라 현재까지 많이 알려진 선수는 아니지만, 수비적 능력이 좋은 선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3. 국가대표 경력
이후 그는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당시 16강 조별리그에 진출하는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다. 본선 대회 헝가리전에서 출전해 헝가리의 주장 페렌츠 푸스카스와 악수를 나누는 사진은 꽤 유명하다. 이미 이 때 30대가 넘은 노장이었기 때문에 주영광은 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역 생활을 정리한다.
4. 은퇴 이후
선수 은퇴 이후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에 나서는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 4년 뒤에 한번 더 대표팀 감독을 맡아 메르데카컵 대회를 지휘했다. 60년대 중반 부터는 감독직이 아닌 행정직 위주로 축구계에서 일했는데 대한축구협회 내부의 여러 직책을 두루 맡으며 행정 업무를 봤다.70년대 들어 월드컵 중계가 국내에 시작되고, 그는 MBC의 축구 해설위원으로써 명성을 쌓게 된다.[4] 70년대의 국가대표 경기와 월드컵 등 국제대회 경기, 그리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 후에는 분데스리가 해설도 맡아 자세한 해설로 올드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80년대 연세대학교의 총감독을 맡아 대회를 지휘하며 일선에 잠시 복귀하기도 했다.
5. 별세
그러나 1982년 9월 24일~ 9월 25일에 열린 연고전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난 뒤 9월 26일 급성 과로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져서 9월 28일 오후 7시 40분에 사망하였다. 향년 61세.
[1]
오늘날의 수비수와 미드필더의 중간 쯤 되는 역할이다. 즉 수비형 미드필더.
[2]
1954 스위스 월드컵 출전 당시 소속팀이었다.
[3]
당시 경성 팀의 핵심이었던
민병대씨와 자주 비교되곤 했다.
[4]
현재 업계 탑으로 불리는
한준희 해설위원이 항상 존경하는 해설위원으로 꼽는 인물이다.
2006년 기사,
2018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