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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8 20:44:12

혜현황귀비 고가씨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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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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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륭제의 후궁
혜현황귀비 | 慧賢皇貴妃
파일:혜현황귀비 고가씨.jpg
생몰년도 <colbgcolor=#fff,#1f2023>1711년 ~ 1745년 2월 25일(34세)
시호 혜현황귀비(慧賢皇貴妃)
지위 격격 ⇒ 측복진 ⇒ 귀비 ⇒ 황귀비
고가씨
가계 부친 대학사 문정공 고빈(文定公 高斌)
부군 건륭제
자녀 슬하 자녀 없음

1. 개요2. 생애3. 사후 대우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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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후궁이다. 양황기 포의좌령의 기인. 후에 만주 양황기로 기적을 옮겼다. 문연각 대학사 고빈의 딸. 건륭 2년에 귀비로 책봉, 건륭 10년에 병환 중에 황귀비로 봉해졌기 때문에 책봉례는 하지않았다.

2. 생애

혜현황귀비의 출신은 양황기 포의 관료 집안 출신이다. 요양(遼陽)지방에서 살았고, 대대로 고위관료였고, 결혼권은 점차 내무부의 기초범위를 벗어났다. 그러나 고씨 가문은 내무부 삼기(三旗)로 궁궐을 섬길 의무가 있었다. 이 때문에, 고씨는 내무부에서의 수녀선발로 황제(옹정제)의 넷째 아들 홍력에게 보내져 황자사녀(阿哥使女) (즉, 황자격격, 이 두 호칭은 통용되었다.)가 되었다. 과의친왕 윤례의 생모인 성조근비 진가씨는 혜현황귀비의 사촌이모이고, 근비는 고빈의 원배 부인의 사촌여동생이다. 옹정 12년 (1734년) 3월 초하루, 고씨는 옹정제의 성지를 받아들여, 격격에서 측복진으로 봉해졌다. 측복진의 격에 맞는 관복과 그릇, 금박승용차 등을 만들었지만, 보혼례(補婚禮)라는 기록은 없고, 측복진으로 책봉하는 의식만 있었다.

건륭 원년 (1736년) 2월 15일의 《절차상선저서류》에 따르면, 원래 종수궁에 살던 황고귀태비 경씨 (옹정제의 후궁 순의황귀비 경씨)가 육식을 멈춘 것을 보면, 새로 봉해진 귀비 고씨가 아직 이 궁에 입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해 5월에 이르러서야 종수궁을 정리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귀비 고씨는 종수궁에 정식으로 머물게 되었다. 종수궁의 전전(前殿)에는 어서현판을 걸어 "숙신온화"라고 하고, 연을 향해 '篆裊猊爐知日永,風清虬漏報春深' 이라고 한다. 건륭 2년 (1737년) 9얼 9일, 태감모단 교왕진붕회는 조현후를 그리며 두루마리 한권을 그렸다. 전지 : 「함안궁에 화인을 그려 이 현후 도식대로 열벌(폭)을 그리고 화리목변갱구들)에 맞추어 한대를 만들어 먼저 견본을 내고 회시에 다시 만든다. 」 이때부터 매년 12월 장괴문신춘련일에 궁중감에서 종수궁의 수령인 장괘흠정궁훈도 「허후봉안」을 전해듣고 이듬해 2월 문신을 거두어 해돋이를 시작하였다.

귀비로 봉해지며 돈숙황귀비 연씨와 같이 동서궁황비[1]의 예우를 받았고, 귀비 시절 초상화에서도 황후처럼 명황색 용포를 입고 있다.

건륭 2년 (1737년) 8월, 고빈의 처 마씨가 아들 고항을 데리고 베이징에 왔다. 베이징에 있는 동안 고빈의 아내는 궁에 들어가 귀비인 고씨를 뵙고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 그해 10월 고빈은 이 일을 듣고, 바로 11월 13일에 상좌하여 사례를 올렸다. 건륭 5년(1740년) 초, 고빈의 아내는 다시 궁에 들어가 귀비를 뵙고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황제는 고빈의 아내에게 함께 극을 볼 것을 명령하고, 여의와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

제문에 따르면, 귀비 고씨는 항상 사람을 기쁘게 하는 훈계를 내뱉었고, 재주가 있었다. 황후에게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여흥을 만드는데 있어서도 황후와 호흡이 잘 맞아 온화하고 공손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또한 그녀는 태후의 세면 일을 보좌하였는데, 태후는 일찍부터 그녀의 현덕과 효성을 표창하였다. 후궁의 위치는 매우 귀하지만, 다른 비빈들과 잘 어울려서 존숭하는 포상과 명성을 얻었다.

고씨가 죽기 얼마 전, 건륭제는 육도를 위해 권전을 지어 고씨의 금관으로 삼고 잠시 머물렀는데, 그 격이 철민황귀비의 권전보다 높았다.

3. 사후 대우

건륭 10년 (1745년) 3월 3일, 옹화궁 만문기록물 번역편에 따르면, 제후 등은 혜현황귀비 재궁이 정령한 육계도 장례식장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 내무부는 모두 4대의 수레로 후비 밑에 있는 내감을 모셨다. 기록된 한문명세서는 서난전 황후의 태감이 혼자 수레 1대를 탔음을 알 수 있으며, 두번째 수레는 익곤궁 한귀비와 장춘궁 가비의 태감, 세번째 수레는 경인궁 순귀비와 영화궁 유비의 태감, 마지막 수레는 승건궁 서빈, 연희궁 이빈과 영수궁 영빈의 태감들이 탔다.

건륭 10월 (1745년) 3월 8일, 태감 호세걸은 《칙건백의관음암》이라는 현판 한장을 교필하였는데, 이 현판은 어필인 황견 「감(甘),법(法)」과 함께 대련하였다. 또한, 어필인 황견의 「혜현지원」 현판 한장을 교부하였는데, 이 현판은 어필인 황견의 「화(華),향(香)」을 이어 대련 한 장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혜현황귀비와 관련이 있다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파일이 없어 대련 일부만 알 수 있다. 같은 날 건륭제는 대련을 금변벽자포월대로 만들어 각각 못을 받치고, 3월 23일에는 현판을 한쪽 벽면에만 붙이고, 4월 27일에는 백당아성덕이 금변대 2벌을 달아 옹화궁에 봉안하였다.

건륭 33년 (1768년), 고씨의 동생 고항과 조카 고박이 잇따라 탐욕으로 인해 탄핵을 받았다. 고항의 처형에 앞서 대학사 부항은 죽은 혜현황귀비를 생각해서 죽음만큼은 면해달라고 청했다. 건륭은 "황후의 형제가 법을 어기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불쾌해했다. 부항은 효현황후의 동생이었기에 뭐라 하지 못하였다. 고박을 죽이고, 황제는 다시 "고박은 탐욕스럽고 법을 무시하며, 그 부친 고항보다 더 심하여 혜현황귀비의 조카라고 생각하며 조금도 자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4. 대중매체


위의 두 작품은 대체적으로 선/악역이 반전되어 있으나 혜현황귀비만큼은 두 작품 모두에서 악역으로 나온다. 또 두 작품에서 상당히 다른 캐릭터성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모두 옹정황제의 여인에서 나오는 연세란을 연상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1] 청초기의 지위로 황후는 아니지만 정실 취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