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후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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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륭제의 후궁 이빈 | 怡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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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colbgcolor=#fff,#1f2023>1721년 음력 4월 6일 ~ 1757년 5월 15일(37세) | ||
시호 | 이빈(怡嬪) | ||
지위 | 귀인 ⇒ 이(怡)빈 | ||
성 | 백씨 | ||
가계 | 부친 백사채(柏士彩) | ||
부군 | 건륭제 | ||
자녀 | 슬하 자녀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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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후궁이다. 처음엔 한족 민인 출신, 후에 정황기 포의 제4참령 제1기고좌령하인으로 입기했다. 쑤저우 평민 백사채의 서장녀이고, 건륭제의 백귀인의 친언니이다.2. 생애
백씨는 건륭 4년 전에 입궁하였는데, 평안이 소주의 직조를 맡았을 때, 백가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방 관원을 위해 건륭제에게 진상해야한다고 했다. 옹정 13년 11월, 하이바오 지회 강녕과 쑤저우 두 곳에서 《후사 후 혼행하여 여자를 찾아다니며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다》라는 직조를 만들었다. 강녕직조 이영(李英)은 성지(聖志)를 받들어 3년 동안 단 한 사람도 밖에서 구하지 못하였고, 석복 후에도 어떤 여자도, 우동을 진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건륭제 3년 5월 건륭제가 건륭 2년 11월 복역한 뒤 소주가 직조하여 해보를 두 여자로 들여보냈는데, 이 여자가 백씨인지 아닌지를 간접적으로 지적했다.건륭 4년 4월 6일, 백씨의 생일로, 궁궐감부사 유옥 등 전내용에는 단자 1토, 소단 1토, 관용단2토, 화춘편집2토, 능2토, 등이 사용되어 《국조궁사(國朝宮史)》에서 정한 귀인급(貴人級)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건륭 6년 2월 13일, 황태후의 의지를 받들어, 가빈을 비로 진봉하고, 귀인 백씨는, 해귀인과 귀인 엽혁륵씨와 함께 빈으로 진봉하고, 백씨는 위분에서 승진했을 뿐만 아니라, 궁중생활에서도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건륭 6년 2월 15일, 성경이 보내온 젖병과 약과 산사, 검은 대추를 황후, 귀비, 빈 등 고종의 보살핌을 받았다. 건륭제는 4월 10일 "내정(內政)의 아들이 백(白)이며, 본관은 소주(蘇州)이며, 지조(知造)가 이부모를 방문하여 상경(上京)에 왔으며, 저서를 찾으면 저자가 돌봐서 상경(上京)에 오거나, 그 나이 든 영자제가 한 사람을 따라와도 괜찮지만, 방문하여 이부친이생(異生)이 아니라서 밀경(密京)을 방문하여 상경(上京)을 하였다. " 그해 11월 계미일(啓未)에는 예부시랑(禮部詩郞) 목화림을 정사로, 내각학사 얄호달(雅爾胡達)을 부사(副使)로 하여 귀인 백씨를 이빈으로 정식 책봉하였다.
건륭 10년 (1745년), 이빈의 친여동생인 백씨가 내무부 상삼기 여인으로, 내무부 수녀선발을 통해 입궁했고, (늦어도 건륭 13년 1월, 백상재로 봉해졌다.) 3월 3일, 연희궁 이빈은 황제와 황후 등을 따라 혜현황귀비의 금관이 안치된 육계도 빈궁으로 향했다. 연희궁 이빈, 승건궁 서빈, 그리고 영수궁 영빈의 환관이 같은 수레에 올라 육계도 빈궁에 묵었다. 그해 12월 25일, 이빈의 형제인 백영길이 한자문서 한개를 들고왔다. 공찰 : 「현재 가비, 서빈, 이빈의 칠분의장에는 각각 붉은 비단 손잡이 우산이 하나 추가되어야하며, 이에 따라 귀하의 부서에 문의하여 속히 조송위 응용 등이 이루어져야합니다."
건륭 17년 10월 17일, 고 효현순황후, 고 혜현황귀비, 고 철민황귀비의 관이 유릉에 묻혔고, 건륭제는 당시 황후 휘발나랍씨, 가귀비 김씨, 이빈 백씨, 영빈 파림씨 등과 함께 청동릉으로 가 봉안식에 참석했다.
건륭 22년 (1757년) 5월 15일 사시(巳時), 이빈이 병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건륭제는 조정을 2일간 정지하였고, 화석친왕 이하, 내대신 공후백 도통관 이상이 제사에 참여하였고, 그해 11월 2일에 청동릉 유릉비원침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