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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15:22:41

양비 위씨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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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의 황후
※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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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강희제의 후궁
양비 | 良妃
출생 <colbgcolor=#fff,#1f2023> 1662년
사망 1711년 11월 20일 (향년 49세)
시호 양비(良妃)
지위 양(良)빈⇒양비
각선씨(한성 위씨)[1]
가계 부친 내관령 아포내(內管領 阿布鼐)
부군 강희제
자녀 황8자

1. 개요2. 생애3. 출신4. 자녀5. 미디어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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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성조 강희제의 후궁이며 내관령 아포내의 딸이다. 부친 대까지 줄줄이 관령 출신으로 집안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양비의 형제 중 가다훈이 내무부 총관으로 출세했다.만주 정황기 포의 제3참령 제2관령하인으로 이름은 수왕졔(雙姐; suwang jiye)이다.

2. 생애

강희 14년(1675년) 정월에 말우( 효공인황후), 뇨뇨(정비 만류합씨)와 궁녀로 입궐하여 강희 20년(1681년) 2월 초에 황8자 윤사를 낳았다. 강희 28년(1689년)에 빈으로 봉해졌고, 강희 39년(1700년) 12월에 책봉례하고 봉호를 어질 량(良)이라 했다. 강희 50년 11월 20일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2], 강희 52년 2월 17일에 능경릉비 원침에 봉안되었다.

강희제는 윤사가 황위에 야심을 보이자 생모의 출신이 빈한하다고 모욕하며 핍박했지만, 그 전까지 양비를 총애했다. 양비는 같은 내무부 관령 출신 후궁 중에서 승진이 가장 빨랐고[3],성비 대가씨(황7자 윤우 생모), 경민황귀비( 이현친왕 윤상의 생모), 근비 진씨(17황자 생모)와 같은 내무부 좌령 출신보다도 승진이 빠른 편이었다.[4]

그러나 양비는 강희제가 자신의 출신을 비하하며 윤사를 책망하자 이를 견디지 못했다.
윤사의 모비가 위독할 때, 윤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네 황부께서 내 출신을 미천하다 하시며 나를 손가락질하고 너를 책망하시니 나는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다. 내가 매일매일 너에게 누를 끼치기에 약을 복용하지 않는 것이다.
<강희유지>
이는 비록 옹정제가 윤사에게 불효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빌드업으로 밝힌 비화지만 이런 일이 있었던 건 사실로 보인다.

양비가 죽자 강희제는 효성인황후의 여동생 평비 혁사리씨와 동격으로 상을 치러주고 양비의 영전에서 친히 애도를 표혔다. 또한 드물게도 강희제가 제문을 지어준 후궁이다.

강희제는 윤사에게 안국사를 가묘로 하사하였고 윤사는 양비의 위패를 안국사에 모셨다. 그리고 윤사가 양비의 유언에 따라 천동사의 선사를 안국사의 주지로 초청하였다.

옹정제가 즉위하며 양비의 집안을 정황기 포의 제1참령 제2관령하인으로 올려주었다가 만주 정람기로 대기시켜주었다. 윤사의 사후 정람기 도통이 양비의 일가를 포의[5]로 낮출지 상주하자 옹정제는 불쾌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후 어머니와 비 어머니께서는 같이 입궁하셨고 비 어머니께서도 짐의 어머니다.[6] 가다훈은 미천한 포의였으나 짐의 명령으로 포의에서 기하로 옮겼으며 내무부총관으로 등용하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가 어찌 은혜를 모르겠는가?
정사에선 이 이후로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건륭시대에 작성된 팔기씨족통보에선 각선씨가 정황기 포의로 기재되어 있다.

3. 출신

죄를 지은 포로들과 포의들이 섞여 있던 신자고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양비는 엄연히 후자에 속했다.[7] 다만 전자의 이미지가 더 강렬하고, 강희제가 윤사를 신자고 천한 년의 혈통이라고 비방한 탓에 매체 속에서 양비는 진짜 '신자고 노비'로 나오는 일이 많다.

4. 자녀

5. 미디어믹스



[1] 청사고에서는 한인 위씨로 오기되었으나 팔기씨족통보, 내무부 기록 등으로 인해 만주족으로 밝혀졌다. 손자인 홍왕이 저술한 <황청통지강요>에서도 양비가 위씨라고 나오는데, 만주족 중 일부는 원래 명나라와 교역할 때 한성을 쓰기도 했고, 청나라가 세워진 이후로도 한성을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사망 직전에 양비로 책봉된다. [3] 입궁 동기인 뇨뇨도 관령 출신이고(양비보다 집안은 조금 좋았다) 12황자를 낳았는데도 강희 말년에서야 정빈이 됐다. [4] 경민황귀비 장가씨는 자식 세 명이나 낳았음에도 사후에야 민비로 추존되었으며, 근비 진씨는 옹정제 즉위 후 비의 자리에 올랐다. [5] 여기서 포의는 내무부 포의가 아니라 정람기 포의를 말한다. [6] 이 부분은 사서에서 빠졌고 사초에만 남아있다. [7] 옹정제의 후궁 겸비 유씨, 건륭제의 후궁 효의순황후도 양비와 같은 포의 관령 출신이다. 효숙예황후도 본래 신자고 출신이었다가 소속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