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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09:00:02

돈숙황귀비 연씨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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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옹정제의 후궁
돈숙황귀비 | 敦肅皇貴妃
생몰년도 <colbgcolor=#fff,#1f2023>?[1] ~ 1725년 12월 27일
시호 돈숙황귀비(敦肅皇貴妃)
지위 측복진⇒귀비⇒황귀비
연씨
가계 부친 순무 연하령(年遐齡)
오빠 연희요(年希堯), 연갱요(年羹堯)
부군 옹정제
자녀 황4녀, 황7자, 황8자, 황9자

1. 개요2. 생애3. 자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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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세종 옹정제가 매우 총애한 후궁이며 순무 연하령의 딸이자 청나라 육군 군인 겸 정치가 연갱요 장군의 이복 동생이다.

2. 생애

강희 48년, 옹정제가 양백기 옹친왕이 되면서 연갱요 일가가 옹정제의 속인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연씨는 불과 12~13살의 나이로 옹정제와 혼인했다. 연씨가 처음부터 측복진이었는지 격격이었다가 측복진이 되었는지는 불명이다. 옹정제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하지만 4명의 자식들은 모두 유산하거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고, 그나마 자식들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아들 복혜(福惠)도 불과 8살에 죽었다.[2]

1722년 강희제가 붕어하고 옹정제가 보위에 오르자 그녀 또한 귀비로 책봉했다.

옹정 3년 11월 8일 옹정제가 "황고승하숙조삼재(皇考升遐倏周三载)"때문에 경릉을 알연하여 제사를 위해 북경 교외의 원명원에서 어가가 허베이성 준화시로 갔다. 당시 그녀는 병이 깊었기 때문에 따라 갈 수 없었고 11월 14일 옹정이 경성으로 돌아와 동짓날에 지낼 제사를 준비했다. 옹정제는 병이 아주 깊은 그녀에게 매우 비통한 감정을 표시했다.

옹정 3년 1725년 11월 15일. 옹정은 명을 내려 그녀를 황귀비로 책봉했지만, 8일 뒤인 1725년 11월 23일에 불과 서른 안팎의 나이로 원명원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옹정제는 직접 그녀의 시호를 돈숙황귀비(敦肅皇貴妃)로 내렸다.

옹정제는 그녀가 죽은 이후 그녀의 오빠인 연갱요의 직위를 박탈하고 92가지 죄를 물어 자결하게 했지만, 그녀의 다른 형제들은 무사했고 부친 연하령의 장례는 일등공의 예로 치러졌다. 이후로도 연씨 가문은 양황기 한군 가문으로서 계속 권세를 누렸다.
그녀의 아들 복혜 역시 옹정제가 무척 사랑해서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친왕의 예로 장례를 치렀고,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가 즉위한 후 회친왕(懷親王)으로 추봉하며 부황이 각별히 사랑하셨다고 언급한다. 옹정제의 서재에는 미인도 12첩이 있었는데 그 모델이 돈숙황귀비로 추측된다.[3]

3. 자녀

4. 대중매체에서


[1] 1697년 11월 23일이란 말이 있으나 중문 위키나 중국 포털사이트 등엔 알 수 없다고 써져 있다. 추정상 1690년대 출생. [2] 훗날 건륭제가 되는 홍력의 어머니인 효성헌황후 뉴호록씨도 후궁시절에는 자식이 4황자 홍력 하나밖에 없었으며 다른 후궁들도 자식이 적었는데, 연씨는 비록 요절했어도 자식을 4명이나 낳았다는 걸 보면 이 돈숙황귀비 연씨에 대한 옹정제의 총애가 엄청났다는 걸 알 수 있다. [3] 미인도의 주인공이 한푸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