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한진산(韓震山)·한헌산(韓憲山) |
필명 | 한생(恨生), 한만양(韓挽洋) |
호 | 동해(東海)·진산(震山, 辰山) |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885년 11월 25일 |
경상도
동래도호부 읍내면 신향교동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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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년 8월 6일[2] |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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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사.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이자 음악가인 한형석의 부친이다.2. 생애
2.1. 초년기
한흥교는 1885년 11월 25일 경상도 동래도호부 읍내면 신향교동(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서 아버지 한규용(韓奎容)과 어머니 연주 현씨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한규용은 동래에서 담뱃대 공장을 경영하고 농사지을 논도 제법 가지고 있어 가계는 넉넉한 편이었다. 그리고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자식들의 신식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07년 5월 21일 일본고학생들의 어려운 형편을 돕고자 결성된 재일본 단지유학생 학자금 모집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1918년 동래 원로들의 단체인 기영회에 가입하기도 했다.한흥교는 이러한 부친 밑에서 7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부터 14세까지는 사서삼경과 자치통감을 통달하고 한시를 지었다. 16살 때 두 살 연상인 이인옥(李仁玉)과 혼인한 후에도 학업을 계속해 19세에 동래 지역 신학문의 진원지였던 삼락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 유학을 결심한 그는 1904년 일본 오사카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오사카에 도착한 뒤 도쿄로 가서 동경 세이소쿠(正則)중학교 보습과 및 야간 영어학교에 입학했으며, 2년간 수학한 뒤 1906년 세이소쿠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한흥교는 의학에 전념하는 한편 한인 유학생들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유학생들이 결성한 대한유학생회, 대한학생회, 대한흥학회 등에 참여했고, 회보 등에 글을 기고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애국과 근대 문명적 생활 방식 등 계몽에 힘쓰기를 강조했다. 그러다가 1910년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의사 자격을 취득하여 부산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한일병합 후 자신의 진로를 확신하지 못한 한흥교는 1년 동안 내과생리학 연구에 몰두할 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해혁명 소식을 접한 그는 중국인 의학도들이 혁명에 참가하는 이야기를 듣고 중국에서의 혁명과 조선의 독립은 서로 긴밀하다고 판단하고 자신 역시 신해혁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중국인 동창생 쑨칭시(孫卿溪)와 치우쓰싼(邱肆三)과 함께 동경으로 가서 쑨원이 영도하는 혁명군적십자사에 가담하였다.
2.2.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11년 도쿄에서 요코하마,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 한흥교는 상하이적십자사에서 대원 30명과 간호원 10명 등으로 구성된 상하이적십자사 전적(前敵)구호대에 편성되어 구호의장으로 쑤저우, 전장 등 전선에 참전하였다. 며칠 후, 그는 대원 중의 한 사람인 타오주(陶鑄)의 소개로 중국 혁명의 지도자 쑨원을 만났다. 한흥교는 쑨원에게 조선 독립을 도와줄 것을 부탁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그가 속한 상하이 적십자 구호대가 처음 간 곳은 쑤저우였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민병(民兵)들에 의해 점령된 뒤여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나서 바로 난징으로 갔다. 난징에서는 매일같이 밀려드는 수백 명의 부상병들을 밤새워 치료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다. 게다가 의무대장으로 있던 장쯔신(蔣志新)이 저장성 군의관으로 전출되자 부대장이었던 한흥교가 대장으로 승격되어 지휘감독까지 담당해야 했다.
난징에서 2개월쯤 지났을 때, 마침 난징에 주둔하고 있던 황싱 장군은 한흥교의 헌신적인 치료에 감사를 표하며 상금으로 은 500냥과 훈장을 주었다. 1911년 12월, 독립당의 지도자인 신규식과 조성환이 난징혁명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러 왔다가 황싱 장군으로부터 조선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흥교를 찾아와 조국의 독립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후 이들은 함께 황싱 장군과 쑨원을 방문하여 한국 독립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한흥교는 신규식, 조성환과 의기투합하고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2년 초, 한흥교는 적십자회대장으로서 혁명군과 함께 우창, 한커우, 뤄양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료활동을 계속하였다. 뤄양에서 시안으로 가는 도중 허난성 협석산서 비적에게 잡혀 3일 만에 풀려난 적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적십자대원들이 더 이상의 행군을 거부하자, 할 수 없이 회의를 거쳐 시안행을 포기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에 도착한 적십자 대원들은 각자 고향으로 흩어졌고, 한흥교는 오카야마 의전 동창인 장쯔신의 도움으로 상하이 적십자사에서 일자리를 얻어 난징분원에서 근무했다.
그 해 여름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신규식, 조성환을 통해 신채호, 조소앙, 신석우, 박찬익, 신무(申武) 등과 만나 1912년 이들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중국과의 상호 우호 증진을 위해 중국인 동지들과의 규합을 위해노력하였다. 1913년 중몽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육군 3등 군의정에 임명되어 열하 전선에 참전해 열하위술술(熱河衛戌)병원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몽고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무고한 고발로 인해 상하이로 몸을 피해야 했고, 1914년 7월 상하이에 돌아온 뒤 신규식과 함께 살며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했다.
1914년 가을, 그는 신규식의 도움으로 상하이 잉따마루에서 천동동제의원(天東同濟醫院)을 개업했다. 그는 동지들의 지원과 국민당 요인들의 도움으로 병원 운영을 어느정도 무난하게 할 수 있었지만, 1915년 12월 호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병원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장쯔신의 도움으로 저장성 자싱에 있는 장씨가의 빈민 구호 사업 일환으로 설치된 진료소에서 일을 하던 그는 진료소에서 나오는 적지 않은 수입을 발판삼아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1915년 10월 중순 동생 한정교가 동래에 있던 그의 부인과 한원석, 한형석 두 아들을 데리고 한흥교를 찾아오면서 가족과 5년 만에 상봉했다. 하지만 1916년 3월 고향에 있던 부친 한규용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흥교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부친과 가족에 권유로 동래에 살고 있던 석천(昔泉) 오종식(吳宗植)의 사랑채를 빌어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자 1917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베이징에서 중국 재정부 인쇄국 의무실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가족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고, 그는 3.1 운동 직전에는 김규식, 장덕수, 이태준 등 국내외 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직후, 그는 북경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중국 경사전염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신채호 등과 함께 신문사 중외통신사(中外通信社)와 신광신보사(晨光新報社)를 건립하고 한글과 한문으로 <중외통신>과 <신광신보>를 간행하여 중국, 조선, 러시아, 구미 각지로 발송했다. 그는 신문에 한생(恨生)이라는 필명으로서 글을 게재해 일본의 침략상과 민족독립의 타당상을 호소했으며, <앞잡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해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려 노력했다.
1919년 4월 16일 신채호와 함께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했으며, 임시정부로 들어오는 통신이나 서류의 전달을 담당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큰아들 원석을 통해 부산에서 활동하던 안희제와 연락해 임시정부 소식을 전달하고 자금을 송금받았다. 당시 일제의 정보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한흥교를 독립후원회 회장 및 의열단 단원으로 파악하고 요시찰 인물로 간주했다. 1921년, 일제는 중국내 항일인사들을 검거하기 위해 일인을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중국인과 함께 다니며 한인 집을 수색하게 했다. 이때 한흥교의 집이 수색당하자, 그가 직접 중국 경찰에 신고해 일본인을 체포하게 하기도 했다.
한흥교는 이러한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1924년 북경한교동지회를 결성해 배일운동을 전개하고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1925년에는 보다 직접적 행동을 위해 결성한 의열투쟁 단체인 다물단에도 참여했으며, 베이징에서 국치일 및 3.1 운동 기념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2.3. 국내와 만주에서의 활동
1927년 부친 한규옹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그는 차남 한형석만 중국에 남기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한흥교는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 한형석에게 명주 태극기 한 폭과 고향에서 가져온 한 줌의 흙을 건네줬다. 귀국 후, 한흥교는 대동병원을 다시 운영하면서 가계를 돌봤다. 그러면서도 동래 지역의 민족, 사회운동에 관여했다. 당시 동래 지역의 사회운동은 청년 운동가들의 계속되는 검거로 침체되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어려운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1930년 2월에 결설된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에 참여했고 1931년 2월 간사로 선출되어 지역 사회의 일에 적극 참여했다.한편 그는 삼천포에서도 대동의원을 개설하여 인술을 베풀었고, 그곳에서도 동지구락부를 설치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32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향한 그는 1933년 만주 랴오둥성 좡허현 대고산에서 의원을 개업했으나 1936년 6월 폐업하고 그해 7월 조선민회 만주 통화성 류허현 주재 촉탁의로 임명되었다. 그러다 12월 공의(公醫)로 임명되었다. 공의는 일제강점기 말기 지원병 신체검사 등을 수행하며 일제의 녹봉을 받던 의사를 가리키던 명칭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한흥교에게 있어 불명예스러운 자리였다. 그가 이 일을 맡은 것은 곤궁한 살림을 타개하고 일제의 감시를 회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8년 9월 공의를 사임한 그는 1939년 8월 중국 산시성 타위안 청경루에서 태평의원을 개업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무료 의료 활동으로 명망을 쌓았다. 그러던 중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의 마하화복적후공작대와 접촉하면서 차남 한형석이 제2지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서로 연락이 닿았다.
2.4. 해방 후의 행적
1945년 8.15 광복 후, 그는 임정 화북특파원으로 파견된 조성환, 최용덕 등을 만났고, 산시성 주석의 환영 초대를 받아 동포 귀국 문제에 대한 편의를 약속받았다. 1946년 5월 타이위안지구에 있던 300명의 한인 동포들과 함께 조국으로 귀환한 그는 고향 동래로 돌아와 한동안 쉬다가 1946년 10월 마산도립병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 1월 원장을 사퇴한 뒤 1948년 부산 충무동에 한내과를 개업했다.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반감을 품고 진보당 초대 경남위원장 겸 경남도당 의장단 겸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진보당 당수인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후 당국의 탄압을 받고 자택에 은거하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 1967년 8월 6일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흥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