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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13:57:47

피트 도허티



존 하셀
게리 파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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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피트 도허티
Pete Doherty
파일:Pete-Doherty.jpg
본명 피터 도허티
Peter Doherty
출생 1979년 3월 12일 ([age(1979-03-12)]세)
잉글랜드 노스이스트잉글랜드 노섬벌랜드 헥섬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신체 189cm, 80~90kg[1]
학력 니콜라스 체임벌린[2] (졸업)
퀸 메리 런던 대학교 ( 영문학 / 중퇴)
가족 부모님
누나 에이미 조 도허티
여동생 에밀리 도허티
배우자 카티아 드 비다스
아들 아스틸 도허티(2003년 7월 13일생)[3]
딸 아이슬링 도허티(2011년 12월 26일생)[4]
딸 빌리-메이 도허티(2023년 5월 31일생)[5]
직업 가수, 배우, 작곡가, 작가
소속 리버틴즈 (1997-)
베이비솀블즈 (2004-)
포지션 리더, 메인보컬, 기타리스트
레이블 EMI, 팔로폰
종교 성공회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커리어
2.1. 수상 및 노미네이트
3. 상세
3.1. 출생과 유년기 그리고 대학 입학까지3.2. 칼 바랏과의 만남과 리버틴즈3.3. 베이비솀블즈3.4. Grace/Wastelands, 전격적인 솔로 전향
4. 음악 스타일
4.1. 타 뮤지션들의 평가
5. 기타
5.1. 패션계에 미친 영향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markallanphotography.co.uk/mark-allan-TOTP-500px-001.jpg
2005년 TOTP 中

영국 록 음악 가수. 베이비솀블즈의 리더이자 솔로 아티스트다. 리버틴즈의 천성. 칼 바랏 평생의 베프이자 소울메이트.

국내에서는 인식이 미미하지만 2000년대 초중반 혜성처럼 나타나 영국 인디 음악 씬에 큰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다. 싫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영국에서는 이래저래 사회적으로도 참 말이 많았던 당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2. 커리어

2.1. 수상 및 노미네이트

3. 상세

3.1. 출생과 유년기 그리고 대학 입학까지


어렸을 때부터 장신이었다. 또래 남자애들이 소년 시기에는 키가 소녀들에 비해 작은 것에 비해 항상 반에서 앞에 설 정도로 키가 컸다고 한다. 신기한 건 피트의 아버지도 피트만큼 장신은 아닌데, 피트가 특히 키가 크다.

책에 의하면 피트가 전형적인 강아지 눈매에 순수하게 생긴 얼굴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이나 모델 하라는 제안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물론 도허티의 어머니는 아직 성장이 미숙한 아이의 정서상 좋지 않다고 판단해 절대로 그런 사진 촬영이나 연예 관련 일은 시키지 않았다고. 피트 도허티는 1992년~1997년 중고등학교 시절을 잉글랜드 워릭셔의 Nicholas Chamberlaine School에서 다녔다. 참고로 위키피디아에 이 학교를 검색하면 피트 도허티가 동문으로 걸린다.
파일:external/pbs.twimg.com/2114369267_e9ec2bf8e5_o.jpg 파일:j99c0lq.jpg

출생지는 영국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주(Northumberland) 헥삼(Hexham). 본가는 아일랜드다. 영국군의 장교였던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군 간호사였던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원래 도허티(Doherty)는 아일랜드어로 오 도허티(Ó Dochartaigh)라고 읽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영어화가 되면서 도커티라고 읽는다[15]. 그러므로 현지인[16]들은 도허티라 쓰고 도커티라 읽는다[17]. 그러나 본인의 정체성은 철저한 런더너다. [18]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집을 여러 번 옮겨 다녔는데, 런던부터 도싯, 리버풀, 요크셔, 벨파스트, 서독, 키프로스 등 안 다닌 데가 없다보니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실제로 늘 외로워해서 항상 마음이 맞는 친구를 갈망했다고. 다만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불우한 거리의 아이, 천상 음악가라는 건 가공된 이미지이며 공부 열심히 하고 착실하고 적당히 놀던 우등생이었다. 피트 도허티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어쩔 수 없이 음악에 몰두하게 된 노동계급이 아니라 되려 중산층 출신이며, 학창시절에는 나름 계급에 맞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본인의 의지와 철저한 노력으로 음악에 입문했다고 보는 게 맞다. 여담으로 어렸을 때 장래희망은 시인이었다 한다.

학창시절의 성적은 그의 지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영국 GCSE에서 총 11과목에서 7과목은 A+, 4과목은 A를 받았고, GCE Advanced Level 4과목을 쳐서 2과목은 통과, 2과목은 A를 받았다. 런던 대학교 소속 퀸 메리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19] 그러나 이 시기 마찬가지로 브루넬 대학 연극학과 신입생이었던 칼 바랏을 만나게 되고 무려 1학년 때 중퇴한다. 그리고 리버틴즈 결성

학창시절에는 중산층 입지에 걸맞게 살았다고 볼 수 있으나, 밴드 결성 전후 몇년간 겪은 숱한 일화를 바탕으로 분석해보면 도허티가 노동계급 취급을 받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보인다.

16살이던 1995년에는 영국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에 시 부문으로 입상하여 국비장학생으로 러시아에 유학 간 적도 있다. 그 때 시상 받은 시가 Albion. 사실 노래 가사만 봐도 공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일단 대단한 책벌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춘기 때부터 이미 마약을 달고 살았으며[20] 그리고 그렇게 중독자의 인생을 시작한다. 크랙 코카인 헤로인을 동시에 했다고[21]. 거의 만성적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칼 배럿도 약은 했지만 도허티의 이 습관은 정말 싫어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2013년 들어 재활에 성공해서 마약은 이제 손도 안댄다고.

원래 끊을 때 딱 끊고 다시 시작할 때 폭풍 흡입하는 식으로 마약을 해대는 스타일인데, 헤로인이나 코카인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게 심장마비가 오기 쉬운 방법이다. 이런 스타일로 복용하던 가수들이 지미 헨드릭스, 키스 리처즈, 시드 비셔스, 커트 코베인, 그리고 도허티 본인의 절친이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있다. 그리고 이 여섯 중 셋이 심장마비 및 그 후유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버렸다.

난잡하고 화려한 매스컴의 조명 한편으로 피트 도허티라는 뮤지션은 젊었을 때 여느 뮤지션과 똑같듯, 97년 첫 밴드를 결성했을 때부터 음반사와 계약을 맺기 위해 무려 5년간이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숱한 좌절과 실패를 다 겪어본, 그래서 데뷔 당시부터 노련할 수밖에 없었던 베테랑이었으며, 2000년대에 스트록스에 대항할 영국의 실낱같은 희망이었으며, 당시 숱한 영국 십대 록 키드들에게 기타를 치게 만들게 해준 대단한 사람이다.

스트록스의 Is This It과 리버틴즈의 Up the Bracket은 사실상 런던 인디 씬을 통째로 바꿔버린 앨범들이며, NME가 리버틴즈에 대한 병적 집착을 시작하기 이전에, 왜 그들이 리버틴즈가 뜨기 한참 전인 1999년부터 눈독을 들이며 주목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답이 나올 것이다. NME는 분명 하이프 전문 잡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이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씬에 발휘한 안목은 가히 영국 인디만 50년간 다룬 인디 대가의 솜씨였다. 다시 말해 리버틴즈 역시 런던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많은 과오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피트 도허티가 영국 인디 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유는 본인이 그만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지 수려한 외모나 뽐내며 마약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미지와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 뒤에는 모든 뮤지션들이 다 그렇듯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 리버틴즈를 비롯해 스트록스도 그렇고 후발주의자 악틱 몽키즈도 그렇고 모두들 데뷔 전에는 가난과 실패에 매달려야 했다. 설사 그들이 가난한 서민 출신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일 년에만 수십 개씩 작고 큰 규모의 공연을 돌며 감을 유지하는 현역 뮤지션이라는 것이다.[22]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이 페이지는 피트 도허티의 마약과 과오에 대해 정확하게 서술하는 바, 마찬가지로 그 때문에 가려진 리버틴즈 및 베이비솀블즈 등 피트 도허티 본인의 음악적 가치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방향으로 편집되어야 할 것이다.


(인터뷰어): 소시지 크라상까지 준비해놓고, 얼마 동안 줄 서 있었어요?
(피트): 최소한 17분요.
(인터뷰어): 오늘 처음 와서 줄 선거죠? (피트: 네.)
(인): 한 문장으로 오아시스에 대해 설명해보실 수 있겠어요?
(피트): 네, 움베르토 에코[23]식으로 말하자면, 노엘은 시인이고 리암은 타운크라이어(타운 크라이어는 바보라는 뜻이 아니고, 마을에서 벨을 울리고 목청떠나가라 공고 및 뉴스를 전파하는 사람이다.)죠.(인터뷰어 웃음) 덤앤더머 콤비 같은 거죠.
(다시 카메라를 향해 크게 말함)
(인): 한 문장으로 오아시스를 요약하자면?
(피트): 바지요.[24]
(인): (웃음) 나중에 MC같은 거 하고 싶어요? (피트: 끄덕끄덕) 이거 똑똑한 친군데?

97년 오아시스 3집 Be Here Now 발매일 당시 앨범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중에 영국 MTV에서 구매자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의 18살의 영문학도 대학생 피트 도허티. 시기적으로 칼 바랏과 만난 지 채 1년이 좀 안 되었으며 이즈음 벌써 리버틴즈를 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2007년에 BS 2집 프로모를 돌 때 프랑스 프로그램에서 저 화면을 강제공개(..)당한 적이 있는데 피트 도허티는 흑역사로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도 알았을까. 불과 5년 후면 노엘 갤러거한테 친히 평가받게 될 줄을.그리고 리암 갤러거의 여자 친구랑 사귀게 될 줄을[25]

군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러디아트 키플링을 비롯한 영국 군대 문학 인용을 찾아볼 수 있다.

3.2. 칼 바랏과의 만남과 리버틴즈

"처음 피트를 만났을 때, 난 어영부영 노심초사하는, 참 겁이 많았던 어린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알렉 기네스가 주연하던 그 라벤더 힐 몹이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모든 감정이나 상황을 참고 가둬버리려고 도망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왜 그래야 해? 왜 너 자신이 못났다고 벼슬처럼 여기고 옛날 일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데? 넌 잘 생기고 인기 많고 재능 많아. 난 네가 부러우면 부러워. 또 한심하기도 하고. 과거 따윈 때려치워." 피트와 친해지고 들었던 말인데, 그 이후에 우린 미래 그리고 지금 당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고, 세상에 도약해보자고 결심했다. 세상이랑 한 판 싸워보자고. 피트는 간단한 일을 머리 돌려가며 복잡하게 보지 않는다. 그 친구의 가장 빛나는 점은 주변 사람들을 누구보다 아끼고, 또 같이 아파해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 바랏
파일:1omenkB.jpg

메인 항목: 리버틴즈, Up the Bracket, NME

1997년 리버틴즈를 결성, 런던 인디 전설의 시작을 알린다. 2000~2001년부터 슬슬 인디계에서 인지도를 얻어가며, 마침내 2002년 6월 리버틴즈 첫 싱글 "What A Waster"의 경쾌한 UK 싱글차트 #37를 기록, 같은 해 10월 데뷔앨범 Up the Bracket이 UK 앨범차트 #35를 비롯해서 3~4개의 차트에 좋은 성적으로 진입한다. 등장 당시 우리 세대 비틀즈부터 차세대 오아시스나 섹스 피스톨즈와 MSP의 재림이라는 등 참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당시 영국 록계 몰락의 위기의식을 느낀 여론의 과한 기대 여론이 많이 적용한 것도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리버틴즈는 스트록스에 대항한 런던의 자존심이 되어주었다. 스트록스의 데뷔 앨범과 함께 런던 개러지 록의 교과서로 등극한 리버틴즈의 데뷔 앨범은 이후 우후죽순 솟아날 온갖 런던 포스트 펑크 인디 카피밴드들의 시초가 된다.

그러나 고질적으로 안고 살던 마약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해지기 시작하고 칼과의 불화가 극에 달해 2004년 영국 차트 #1에 가뿐하게 진입한 리버틴즈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을 내고 밴드에서 쫓겨난다. 얼마 안 가 리버틴즈도 자연스레 해체된다. 그 당시 리버틴즈는 이미 런던 내에서 스트록스보다도 핫 했던 밴드였음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안타깝지만, 실질적으로 밴드 유지 자체가 불가능했으며 NME와 밴드의 지인들이 말하길 "(밴드 내부적으로 망가진 정도가) 섹스 피스톨즈 때를 보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렇게 자신의 데뷔밴드에서 쫓겨난 피트 도허티는 본디 리버틴즈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염두에 둔 베이비솀블즈를 대안밴드로서 결성, 탈도 많고 사고도 많지만 현재까지 발매하는 앨범마다 모두 영국 앨범 #10 안에 들며 십년이 넘게 이어지는 꾸준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3.3. 베이비솀블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byshambles_-_Doherty.jpg
메인 항목: 베이비솀블즈

2004년 리버틴즈 2집 발매 직후부터 베이비솀블즈를 결성하여 칼 바랏의 밴드 더티 프리티 씽(DPT)과는 리버틴즈 팬은 환장하는 재능낭비라고 밖에 볼 수 없는본의 아닌 경쟁을 하게 되어 1년 간격을 두고 발매된 DPT의 데뷔 앨범에 상업적으로도 평적으로도 밀리는 데뷔 앨범을 발매하게 되나[26], 최종적으로 피트의 작곡 실력이 칼을 압도하는 건[27] 분명했기에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던 DPT와 달리 BS는 2집에서 전세를 역전시킨다. 그리고 2013년에는 3집까지 무난히 발매. 그렇지만 사실상 2009년 도허티 솔로 앨범 발매 이후로 BS는 어째 조금씩 피트의 캐리어에서 두 번째로 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3.4. Grace/Wastelands, 전격적인 솔로 전향

파일:fz0hlPt.jpg

2007년 BS의 두 번째 앨범 'Shotter's Nation' 이후 피트 도허티는 유난히 유럽 대륙에서 인기를 얻는데, 특히 프랑스에서 상업적으로 영국보다 차트 성적이 잘 나올 정도로 흥한다. 2009년 발매한 솔로 앨범부터는 사실상 모국보다 외국에서 더 잘 나가는 뮤지션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단순히 앨범 세일즈만 호황을 누린 게 아니라, 프랑스를 포함해서 유럽에서는 피트 도허티를 본격적으로 유망한 뮤지션으로 대우해줬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피트 도허티는 영국 스케줄을 반으로 줄이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 그리고 러시아까지 활발하게 투어를 다니는 중이다. 피트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반응은, 안방인 영국에서는 사실상 수호천사 NME(..)와 몇몇 친리버틴즈 매체를 빼면 거의 일 년 내내 마약 중독자로 낙인 찍혀 여기저기서 공격받는 데 지쳐있는 까닭에 연유한 것이기도 했다.[28] 그렇다고 영국 스케줄을 대폭 줄이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열성 리버틴즈(현지에서는 Hard-Libertinees') 팬들의 모국이 어디 가겠는가. 피트 도허티는 결국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욕 먹는 가수다.

4. 음악 스타일



본 라이브는 영국 금요일 심야 시간대 유명 인터뷰 프로인 조내선 로스쇼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무대로서, 베이비솀블즈의 1.5집이라 할 수 있는 'The Blinding EP'의 수록곡 'Beg Steal or Borrow'이다. 제목이 단순하게 Pete Doherty로 올라온 이 영상은 사실상 피트 도허티의 모든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데, 음악성 이전에 고의로 스타일링 받는 것처럼 정리되지 않아 보이면서도 균형 잡힌 헤어, 수트 간지, 측은하고 애처로운 강아지 눈, 불안정한 음정을 커버하는 여린 목소리, 싸구려 기타 하나로 청중을 휘어잡는 아우라 등 영국에서 도허티하면 떠올리는 클리셰같은 이미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29]

곡 자체는 꾸준히 마이너 리프를 써주며 즉흥 애드립으로 가사를 바꾸는 식으로 자주 연주하며, 곡 자체가 크게 기교가 필요하지도 않다. 대체로 뽕짝느낌이 심하다.

그러나 피트 도허티의 강점은 바로 분위기와 가사의 서정성에 있다. 평소 말투는 약때문에 혀가 꼬여 어눌한 편이나 마치 컨셉이라는 듯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가사 전달력이 확실하며, 관중에서 함께 노래 부르기를 유도할 수 있도록 빠른 템포의 곡이라도 한 템포 늦춰서 연주하거나 코러스를 한 번 더 연주하는 식으로 센스가 굉장히 좋은 편이다. 특히 가사가 좋다는 평을 많이 받는데 ' Time for Heroes'같은 경우 리버틴즈 데뷔 자체가 사기 적으로 좋은 평을 받는 것을 감안해서도 평론가나 팬들로부터 입을 모아 극찬을 아낌없이 받은 노래다.
그리고 위에 적어놓았듯 개러지 록을 구사하는 뮤지션이지만, 어쿠스틱에 유난히 강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포크와 재즈를 가미한 곡 편곡이 뛰어난 편이라서, 절대 발라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만의 피트 도허티표 어쿠스틱 넘버가 유명하다. 이를 잘 정리해놓은 팬 메이드 컴필레이션 앨범이 밥 딜런의 "Free Wheelin'"앨범 제목을 오마주한 "Free Wheelin' Pete Doherty". 들어보면 알겠지만 도저히 개러지 락 싱어가 불렀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포크를 가미한, 발라드 넘버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굉장히 거칠다. 절대 똑같은 연주 스타일로 공연하지 않는다거나, 앰프를 최대로 올려놓고 즉석적인 세션으로 치러내는 레코딩 방식 등.



그런데 이걸 통기타 하나들고 하면 또 완전 다른 노래가 된다. [30]






마찬가지로 1집에 실린 back from the dead다.
라이브 연주뿐만 아니라 이렇게 피트는 노래를 스튜디오 버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것들을 찾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라이브 공연의 경우, (리버틴즈건 BS건)밴드의 혁신적이다 못해 미친 것 같은 공연 스타일[31]은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32] 이는 수많은 뮤지션들이나 후배 밴드에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끼치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더 뷰나 더 패딩튼즈.

또한 리버틴즈는 최초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팬덤을 키워나간 밴드로 정식으로 기록된 밴드이기도 하다. 피트 도허티는 인터넷의 팬덤 사이트를 이용하여 공연 일정[33]를 안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술관이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긴 사적인 이야기들[34] 도 풀어내면서[35] 팬들과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사항은 역시 리버틴즈 항목 참고.

4.1. 타 뮤지션들의 평가

"리버틴즈 내가 인정하고 그 녀석들이 락스타 아이콘이라는 것도 다 인정해. 내가 다 해봐서 알지. 그렇지만 마약을 끊지 않는 한 놈에게는 몰락밖에 없어."
리암 갤러거
"왜 (내 인터뷰어로) 이 친구를 골럈냐고요? 매력 있고 재능이 많았어요. 요즘 영국 뮤지션 중엔 저 아이를 가장 좋아합니다."
폴 매카트니[36]
"마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리버틴즈 역시 한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을 했고 그와 함께 할 수 있어 기쁘다. 먼저 하늘에 간 조 스트러머에게 'Up the Bracket'을 보내줬다.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믹 존스
"피트 도허티의 문제는 본인만의 문제다. 타인들이 뭐라고 참견 할 일이 아니다. 피트 도허티는 재능 많은 아티스트고 그거면 충분하다."
폴 웰러
"재결합한다고요? 옷장에 넣어둔 빨간 자켓이나 다시 꺼내볼까. 어렸을 때 참 많이 들었죠, 'Up the Bracket'."
알렉스 터너
"그를 처음 만나자마자 바로 빠져버렸다. 단순히 시인이나 가수로서가 아니라, 그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아우라가 나를 사로잡았다."
에디 슬리먼[37]
"사적으로 정말 피트를 좋아해요. 재밌고, 남 웃기는 걸 좋아하고, 유명세에 연연하는 타입이 아니고, 무엇보다 착했어요. 항상 그 자신보다는 주변에 거머리 꼴통들이 달라붙어 망가진 친구에요... 불행한 점은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레이엄 콕슨[38]
"그 젊은 친구 왜 깽판치고 사고치고 아주 난리를 떠는지 난 다 이해해요. 사람들은 다 구제불능이라고 말하지만, 대중이야말로 뭘 모르는 거요. 저 친구 자기 행동을 영악할 정도로 잘 인식하고 있어요."
피트 타운젠드[39]
" 에이미 양과 피트 군 두 사람은 우리가 한창 때랑 약하는 스타일이 똑같더군.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요.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면, 마약은 재미로 남는 시간에나 하는 것이지 그렇게 24시간 달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라네. 피트 군 한테 개인적으로 얘기도 해줬지만 소용없었소. 그런 식으로 죽은 친구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저 현명하게 대처하길 바랄 뿐입니다...."
키스 리처즈[40]

"날 칭찬해주는 놈들, 충고해주는 놈들, 욕하는 놈들. 다 똑같아요. 말만 그러지 다 나 X되면 비웃느라 바쁜 거 누가 모를것 같나요? 사람들이 뭐라 지껄이건 관심 없어요. 저한텐 카를로스밖에 없어요. 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그 친구 웃는 모습도 자주 보고 싶다고요. 근데 난 그놈을 자꾸 울게 만들었어요.... 이제 상처 주느니 포기하기로, 모든 걸 그만두기로 했어요."'
본인[41]

5. 기타

파일:d6TpV3t.jpg
축구 QPR 팬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한때 박지성이 이적했을 때 알 만한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은 별 관심 없는 듯 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열렬한 팬으로 한창 문학에 관심이 많던 시절 QPR 팬진을 직접 만들어서 발간한 적도 있는 등 QPR 서포터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팬 중 하나이다. 공연할 때도 종종 "QPR! QPR!" 하면서 단체 제창을 시도하는데 그의 모든 노래에 열렬히 따라 부르는 팬들도 "QPR"만 나오면 조용해진다.(...) 다만 예전에 로프터스 로드 화장실에서 헤로인을 하다 걸린 전적 때문에 출입금지를 먹은 바 있었다.(...)
파일:rbOuX89.jpg
솔로 앨범 발매를 기점으로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더니 기어코 염원하던 영화계에 진출, 상대역을 샤를로트 갱스부르로 한 19세기 낭만파 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 원작의 역사물 Confession of a Child of the Century에 나와 '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영화였기에 흥행은 못했고,[42] 팬들은 영화보다는 엔딩 부분에 나온 도허티 솔로 2집의 데모곡들에 더 관심을 보이는 등 영화 자체가 묻혔다. 팬들은 어딜 가나 똑같다

2019년 11월 파리에서 48시간동안 두 번이나 체포되는 진기한 기록을 썼다. 코카인을 구매하고 소지하다가 적발되어 구금되었고 4300파운드 가량의 벌금을 선고받고 풀려난 뒤 취한 상태에서 19살 남성과 싸우며 폭력을 휘두르다가 또 다시 체포된 것이다.

최근엔 살이 엄청 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약도 끊은데다 원래 식성이 매우 좋아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5.1. 패션계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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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피트 도허티 인지도가 낮은 한국에서 그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건 케이트 모스와 함께 찍힌 화보 같은 일상 파파라치 컷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그가 지금 한국 남성 패션에 알게 모르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천년대 디올 옴므의 디자이너였던 에디 슬리먼극단적인 스키니 핏을 추구하기 시작한 게 이 피트 도허티의 패션 스타일에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각각의 항목을 참고하면 스키니 핏이 어떻게 해서 서유럽에서 시작해서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

복잡한 과정을 다 생략하고 간단히 정리하자면, 개러지 락 붐→ 스트록스를 위시한 스키니 패션 시도→피트 도허티의 극단적 스키니 고집을 통한 유럽 스키니 열풍→ 에디 슬리먼을 통한 디올 옴므로 2000년대 유럽 중하반기 지배→일본→마침내 한국으로 와서 강동원 등을 통한 확고한 패션 스타일로 자리매김→한국 남녀 중고등학생 및 20대 패션 정착에 이르렀다고 보면 정리 끝. 물론 2010년대 들어선 예전에 비해 슬림해진건 맞지만, 극단적인 스키니 핏은 한국에서도 특히 남자라면 별로 입지 않는 편이긴 하다.

에디 슬리먼은 2천년대 당시 아예 피트 도허티의 광빠를 자처했다. 심지어 도허티를 두고 "다른 록 스타들은 패션 브랜드까지 차릴 정도로 열심이지만, 피트 도허티는 패션 디자이너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매력적인 존재"라고 평했다. 물론 피트 도허티의 사진도 엄청 많이 찍어줬다. 에디 슬리먼이 패션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피트 도허티 패션은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60년대 모드 족 비틀즈를 카피하여 극단적으로 마른 몸에 쫙 달라붙는 블랙 앤 화이트 수트 패션. 가장 기본적이지만 실로 피트 도허티한테 가장 잘 맞는 옷이기도 하고, 위의 어렸을 때 사진에서 이미 새싹이 보이기 시작하듯 기럭지가 사기적이라[43] 대강 뭘 걸쳐도 모델 포스가 난다. 에디 슬리먼이 왜 환장했을지 이해가 가는 부분.[44]

리버틴즈 3집부터는 피트 도허티가 증량하면서 한창때 소화했던 패션들은 못하고 있다. 2020년에는 과거에 비해 굉장히 살이 많이 쪄서 과거의 깡마른 모습과 비교되는 짤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게 마약을 더이상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팬들은 안심 중.


[1] 2015년 기준 추정치. 1급 마약에 의존하고 있었을 때는(...) 저 키에 몸무게가 60kg대 후반이어서 앙상했다. 물론 평상시엔 통통한 경우가 많은 편이다. [2] 초중고 통합 칼리지. 그 전에는 아버지 직업상 잦은 이사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중학교 3학년부터 정착하였다. [3] 리사 무리시 소생. [4] 린디 힝스턴 소생. [5] 카티아 드 비다스 소생. [6] UK #17으로 차트 성적은 가장 저조하나 평은 리버틴즈 데뷔 앨범 다음으로 높다. 평론가 점수란 게 절대 믿을 게 못 되지만 평이 그렇다는 요지. 팬덤 사이에선 피트가 마침내 기다리던 어쿠스틱 솔로 앨범을 내줬구나 정도. 그 전에 무수한 세션을 통해서 들은 바가 있어 이미 이 앨범의 가사를 줄줄이 꿰고 있으므로... [7] 리버틴즈 드러머. [8] 사실상 활동 2년차 데뷔 밴드로. 참고로 영국 콘서트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이 오아시스의 96년 넵워스 공연으로 12만 5천 명. [9] UK #10. 항목 작성 기준으로 작년 말에 발매되어 아직 골드 써티피케이션이 찍힐 여력이 없을 듯. 15년은 가봐야 알 듯하다. 다만 평은 영 좋지 못하다. 당장에 메타스코어만 봐도 59점으로 1집 "Down In Albion"(56점) 이후 최저점이다. [10] 당시 UK 차트의 정상 자리는 아이언 메이든 스테레오포닉스 브링 미 더 호라이즌과 리버틴즈의 사파전. 이 중 아이언 메이든을 선두를 잡고 리버틴즈와 스테레오포닉스가 기싸움을 벌이고 브링 미 더 호라이즌이 마지막으로 밀렸다. [11] 앨범이 아티스트의 전체적인 기량을 말해준다면, 싱글은 '대세' , 소위 리즈 시절을 연상하면 되겠다. 도허티의 경우 데뷔 후 2005,6년까지 저 차트 기록을 섭렵했다. 월드와이드 판매고는 150만 장 이상.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특히 많이 팔렸다. [12] 결국 노미네이트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도허티 커리어 최고의 영예로, NME Awards나 Q Awards와는 그 가치나 수준이 비교를 불허하는 상으로 브릿 어워즈에 버금가는 시상식이다. 노미네이트만으로도 도허티의 송라이팅 능력이 공인된 셈이다. [13] 그러나 이런 피트 도허티도 알렉스 터너에 비하면 양반이다. [14] 싱글 Gunga Din [15] 아일랜드의 성씨에서 20위권 안에 들어갈 정도로 많은데 특히 얼스터 지방의 도니골 주에 가장 많다. 참고로 오닐(O'Neill), 갤러거(Gallagher), 도허티(Doherty), 매클로플린(McLaughlin), 오도널(O'Donnell), 보일(Boyle), 스위니(Sweeney), 도널리(Donnelly), 케인(Kane)도 얼스터 지방에 많은데 특히 오닐, 도널리, 케인을 제외한 나머지 성씨는 모두 도니골 주(오닐과 도널리는 티론 주, 케인은 런던데리 주)에 가장 많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9개의 성씨 모두 하나의 조상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6] 주의! 여기서 이야기하는 현지인은 아일랜드 사람들. 마찬가지로 갤러거란 성도 갤러라 읽는다. [17]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인 섀넌 도허티도 역시 같은 성씨다. 물론 어디까지나 성씨만 같은 뿐이지 실상은 서로 남이다. [18] 애당초 리버틴즈란 밴드 자체가 잉글랜드성을 추구한다. [19] 런던 대학교 영문학과에서는 선배 취급 안 해줄 것 같지만 엄연히 선배로 인정해준다. 여담으로 해당 대학은 타임스 조사 예술 및 인문학 분야 세계 21위 대학교. [20] 데뷔 초기 독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말 부끄러워하며 고백했다. [21] 이건 마약 복용 습관 중 가장 막장이라고 볼 수 있는 위험한 복용법이다. [22] 참고로 리버틴즈가 데뷔했던 2002년에는 한 해 동안 약 100개 공연을 소화해냈다. 이 정도면 아이돌 그룹 굴리는 혹사 수준이다. [23] 움베르토 에코는 리암 갤러거를 신랄하게 까기 위해 괜히 점잖은 척 집어넣은 것이다(..) [24] 바지라고 대답한 이유는 바지 자체가 같은 프레임을 공유하지만 양쪽으로 나뉘어 져서 노엘과 리암의 차이점을 비유 한것이지, 농담은 아니다. [25] 심지어 피트 도허티의 아들을 낳은 여자는 리암 갤러거의 딸을 낳았다. [26] 그렇지만 이 때 이미 피트 도허티는 전국급 스타가 되어서 스폿라이트는 베이비솀블즈가 압도적으로 많이 받았다. 그리고 공연 분위기도 완전 그린데이나 마릴린 맨슨은 애들 장난 급으로 보일 정도로 막장이었는데 자세한 사항은 베이비솀블즈 및 리버틴즈 항목 참고. [27] 물론 드물게나마 DPT를 베이비솀블즈보다 선호하는 팬들도 있다사실 뭘 해도 둘 모두 리버틴즈 때만 못하므로 결론은 재결합해야 합니다 [28] 여러 매체나 시사지 등이 리버틴즈랑 피트 도허티를 분리해서 깐다. 한마디로 Up the Bracket은 웬만해서는 안 까는 것이다. 사실 그게 앨범의 저력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29] 여담으로 매카트니 옹이 직접 이 퍼포먼스를 보고 피트 도허티를 자기 인터뷰어로 친히 골랐다. [30] 참고로 기타는 국내 브랜드인 성음악기 ' 크래프터' 기타 [31] 리버틴즈 항목 참고 [32] 특히 베이비솀블즈 초기 활동들은 70~80년대 분위기의 광란이었다. 예컨대 그린데이가 예전에 관객과 싸우고 하는 등 그런 해프닝들은 BS의 수많은 펍, 클럽 공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인 수준(..) [33] 높은 티켓 값을 지불해야하는 정식 밴드 공연이 아니라 자신과 칼이 같이 살던 알비온룸(albion room), 혹은 그 외의 지인들의 집이나 펍에서 소소히 하는 비공식 공연들이었다. 그렇기에 피트 본인이 안내한 것. 일명 하우스 긱(house gig)이라고 불렸던 공연 스타일인데, 이건 피트와 칼이 리버틴즈로 데뷔하기 전부터 해왔던 것이다. 피트의 이러한 공연 스타일은 피트가 스스로 인터뷰, 개인적인 글, 또는 가사 (예로 Killamangiro의 Why would you pay to see me in a cage? 같은 부분)을 통해 설명하는 자신의 음악관 및 예술관과 관련이 있는데, 실제로 피트는 그러한 공연을 더욱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역시나 자세한 이야기는 리버틴즈 항목 참고 [34] 피트는 스스로를 musician 뿐만이 아니라 poet이라고 자처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써놓은 글들을 보면 일상어투보다는 시적인 비유나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것들이 많다. [35] 분량이 매우 많다. 리버틴즈로 데뷔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총 10+n년치(..)의 기록들을 인터넷에 풀어놓았는데, 이 또한 팬들과 자신의 예술관을 소통하기 위한 의도의 일환으로 보인다(뿐만 아니라 팬들도 팬 포럼 게시판이나 포스트의 댓글에 자신들의 자작시를 올려놓기도 했다. 현재 피트가 글을 올리고 있는 개인 블로그에서도 마찬가지.) [36] 'Would you like to do an interview? And who would you like to do, and I said: 'Pete'. 'Cause otherwise it's just some real boring person who you're not interested in. 그리고 피트 도허티는 가디언지의 맥옹 인터뷰이로 낙점된다. [37] 사진 실력도 전문사진작가 급이라 사진집도 펴냈는데 책의 내용의 반 이상을 도허티에게 할애하고 있다. 수트 입은 도허티에게 환장한다. [38] Tell The King과 Time for Heroes를 커버하고 솔로 앨범에 기타리스트로 참여했으며 라이브 투어를 같이 돌았다. # # 참고로 블러 데이먼 알반은 피트 도허티를 영 안 좋게 생각한다. [39] 반대로 같은 밴드 보컬이었던 로저 달트리는 마약으로 인생 허비한다며 안타까워했다. [40] 하는 말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도 젊었을 때 보통 막장이 아니었다. [41] 그러나 이 중에서 진심으로 피트 도허티를 존중해줬던 건 갤러거 형제나 믹 존스, 콕슨과 타운젠드 정도며, 나머지는 그의 한창 막나가는 애티튜드와 재능에 개인 소견을 말했을 뿐이다. 알렉스 터너는 미묘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골수 리버틴즈 팬이니 이만 넘어가도록 하자. [42] 사실 평 자체도 별로였다. 그 해 최악의 초청작(...)이라는 극언까지 있었을 정도. [43] 전성기 때는 무려 '189/72'까지 간 적도 있었다. [44] 참고로 에디 슬리먼은 아예 'London Birth Of a Cult'라는 사진집을 발매했는데 표지부터가 피트 도허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