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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4 23:30:26

프리드리히 니체/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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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언3. 저서
3.1. 읽는 순서3.2. 한국어판 전집에 대해3.3. 위작
4. 관련 강의 영상5. 영향력6. 기타

1. 개요

프리드리히 니체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명언

나는 언젠가 사람들이 나를 신성시할까 봐 두렵기 그지없다. 이제 사람들은 내가 왜 이 책을 먼저 출간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헛소리를 하는 것을 막고 싶은 것이다. ⋯ 나는 성자가 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어릿광대가 되고 싶다. [1]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선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2]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3]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4] [5]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잘못된 것이다.[6]
모든 글 중에서 나는 누군가가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8]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9]
삶의 여로를 걷는 우리들은 여행자다. 가장 비참한 여행자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간이며, 가장 위대한 여행자는 습득한 모든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하여 스스로 목적지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10]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11]
젊은이를 망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대신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존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12]
깊이있는 모든 사상가들은 오해받는 것보다 이해받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13]
그대의 몸은 그대의 철학보다 더 많은 지혜를 품고 있다. [14]
더러운 것에 대한 혐오가 지나치면, 스스로를 정화시키고자 하거나 정당화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 있다. [15]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에 의해서 멸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가지는 것이다. [16]
옛사람들이 '신을 위해서' 행했던 것을 요즘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 행한다. [17]
나는 욕구가 소박한 예술가를 사랑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 두 가지, 자신이 먹을 빵과 자신의 예술이다. [18]
우리는 정말 우리 삶의 시인이 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사소하고 가장 평범한 일에서부터. [19]
결혼 생활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우정의 결핍이다. [20]
아이들이냐 아니면 책이냐. [21]
친구를 최고의 적으로 삼아야 한다. 친구에게 반대할 때, 너는 마음속으로 그를 더없이 가깝게 여겨야 한다. [22]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견뎌낼 수 있다. [23]
오늘 가장 잘 웃는 자가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 [24]
기억력이 나쁜 것의 장점은 동일한 좋은 것을 여러 번이나 마치 처음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25]
인간의 성숙 : 어렸을 때 놀이에서 가졌던 진지함을 다시 발견하는 것. [26]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27]) :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28]
이것이 삶이었나?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29]
모두 그리고 각자에게 하는 질문: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하길 원하는가?" 는 마치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동 위에 얹힐 것이다! [30]
깊이 있는 사상가라면 누구나 오해되기보다는 이해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오해받는 것으로 인해 그가 괴로워할 경우 이는 아마도 그의 허영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받는 것으로 인해 그가 괴로워할 경우 이는 그의 동정심 때문이다. 그의 동정심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아아, 그대들은 왜 나처럼 어렵게 살려고 하는가?"[31]
『선악의 저편』 中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 홀로 가련다! 그대들도 이제 홀로 떠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아니 차라리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그대를 속였을 수도 있으니... 언제나 제자인 채로 머문다면, 그대들은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명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아라.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3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내가 기록하고 그린 그대 사상들이여, 내가 많은 색깔과 다양한 터치와 50가지의 황색, 갈색, 녹색, 적색으로 그려낸 것은 그대들의 오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려낸 것들로부터 어느 누구도 그대들이 아침에 어떤 모습을 했는지를 알아낼 수는 없다. 나의 고독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꽃과 기적이여, 나의 오래고도 사랑스런 나쁜 사상들이여!
『선악의 저편』 中

그대들은 그대들의 내면에서 역사를, 큰 동요를, 지진을, 오랫동안 지속되는 큰 슬픔을, 섬광 같은 행복을 체험했는가? 그대들은 크고 작은 바보들과 함께 바보로 존재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선량한 인간들의 광기와 아픔을 정말 체험했는가? 그리고 최악의 인간들의 아픔과 행복을 체험했는가? 그렇다면 내게 도덕에 대해 말해도 좋다. 하지만 그런 적이 없다면 내게 도덕을 말하지 말라!
『아침놀』 中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 것ㅡ 이런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은 취향이다. 이것은 가능한 한 부정을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계속 되풀이되는 부정을 필요로 하게 될 만한 곳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분리하라고 명령한다. 아주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 하더라도 규칙적이 되고 습관적이 되며 엄청나면서도 전적으로 불필요한 빈곤을 유발시킨다는 합리적 이유에서다. 우리가 하는 가장 큰 지출은 지극히 자주 거듭되는 작은 지출들이 모인 것이다.

가시를 갖는다는 것도 일종의 낭비이고, 가시가 아닌 너그러움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을 때에는 가시는 심지어 이중의 사치인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中

소년이었을 때 나는 와인을 마시는 것은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젊은 남자들의 공허한 허상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나쁜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좀더 정신적인 본성들을 소유한 사람들 모두에게 알코올을 무조건 금하라고 충고한다.

든든한 식사가 너무 양이 적은 식사보다 소화가 더 잘된다. 위 전체가 활동을 한다는 것은 소화가 잘되기 위한 첫 번째 전제 조건이다. 누구든 자기 위의 크기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래 질질 끄는 식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간식도 하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말라 : 커피는 우울하게 만든다.

차는 아침에 마셔야만 건강에 이롭다. 약간만이되 강하게 마셔라; 차는 조금만 약해도 건강에 아주 좋지 않으며, 하루 종일 힘들게 만든다. 차를 마실 때는 누구든 자기의 한도가 있는 법이며, 그것들 사이의 경계는 종종 아주 좁고도 미묘하다. 심한 자극성 기후에서 차는 하루의 시작으로는 권할 만하지 않다 : (마시려면) 차 마시기 한 시간 전에 기름을 뺀 진한 카카오 한 잔을 먼저 마시게 해야 한다.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말라 ;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ㅡ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ㅡ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ㅡ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번 말했었다ㅡ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
『이 사람을 보라』 中
이게 철학자야 헬스트레이너야

에피쿠로스는 이미 이런 종류의 선행 형식과 싸운 적이 있었다. 에피쿠로스가 무엇과 싸웠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루크레티우스를 읽어보라. 그는 이교도와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 그리스도교'에 맞서 싸웠다. 말하자면 죄 개념에 의한, 벌과 불멸 개념에 의한 영혼의 타락에 맞서 싸웠다.ㅡ 그는 지하적 제의들, 잠복하고 있던 그리스도교 전체와 맞서 싸웠다ㅡ 불멸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진정한 구원이었다.ㅡ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이겼을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전부 에피쿠로스주의자였기에.

그때 바오로가 등장한 것이다. 바오로, 로마의 '세상'에 대한 찬달라적 증오의 육화이자 찬달라적 증오의 천재인 바울, 유대인이며 영원한 유대인의 전형인 바울...... 그가 알아차렸던 것, 그것은 어떻게 유대교 변두리의 작고도 종파적인 그리스도교-운동을 이용하여 '세계적인 불길'을 일으킬 수 있을지, 어떻게 '십자가의 신'이라는 상징을 가지고서 하부에 있는 모든 것, 은밀히-반항하는 모든 것,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아나키적 책동의 유산 전체를 거대한 힘에 이르게 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진리에 가차 없는 폭압을 가하면서 그 찬달라적 종교들의 매혹 수단이었던 표상들을 자신의 고안물인 '구세주'의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단 입 안에만 넣은 것이 아니다ㅡ그는 구세주를 미트라의 사제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때가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던 때였다. 그는 '세상'의 가치를 빼앗아버리기 위해서는 불멸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해 냈다. 그는 '지옥' 개념이라면 로마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ㅡ'피안'이 삶을 죽여버린다는 사실을 파악해 냈다.
『안티크리스트』 中

1. 신의 탄생

스스로를 믿고 있는 민족은 자기네의 고유한 신 또한 갖는다. 신 안에서 그 민족은 그들을 정상에 위치시키는 조건들, 즉 그들의 덕을 숭배한다. 자신에 대한 기쁨을,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존재에 투사한다. 풍요로운 자는 베풀기를 원한다. 긍지에 찬 민족은 희생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전제들 안에서 종교는 감사하는 형식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한다. 이를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2. 선하며 악한 신

그런 신은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어야 하며, 친구일 수도 적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는 선한 점으로나 악한 점으로 인해 반드시 경탄받는다. 신에게는 반자연적인 거세를 가해 한갓 선한 신으로 만드는 것은 여기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악한 신을 선한 신만큼이나 필요로 한다. 그들 고유의 존재는 관용과 박애 덕분만은 아니니까. 복수와 분노와 질투와 조소와 간계와 폭력을 알지 못하는 신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승리와 파괴의 황홀한 열정조차 알지 못할 그런 신, 누구도 그런 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 왜 그런 신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3. 거세, 선한 신과 악마

한 민족이 몰락할 때, 미래에 대한 믿음, 자유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느낄 때, 복종이 가장 이로우며, 복종한 자의 덕목이 보존 조건이라고 그들이 의식할 때, 그들의 신 또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신은이제 음헌한 위선자가 되고 겁도 많아지고 겸손해져서 '영혼의 평화'를, 더 이상-증오하지-않기를, 관용을, 친구와 적마저도 '사랑'하기를 권할 것이다. 신은 계속해서 도덕화하고, 모든 개인적인 덕의 동굴로 기어 들어가, 모든 이를 위한 신이 되고, 사인(私人)이 되며, 세계인(cosmopolitan,코스모폴리탄)이 된다. 신은 예전에는 한 민족, 한 민족의 강력한 힘, 한 민족의 영혼에서 나오는 공격적인 모든 것과 모든 힘에의 갈망을 표현했었다. 이제 신은 한갓 선한 신일 뿐이다.

가장 남성적인 덕목과 충동들을 제거당한 데카당스의 신은 이제 필연적으로 생리적으로 퇴행한 자들, 약자들의 신이 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약자라고 부르지 않고, '선한 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힌트도 필요없이 역사의 어느 순간에 선한 신과 악한 신이라는 이분법적 허구가 비로소 가능해졌는지를 이해하고 있다. 자기네(피정복자)의 신을 '선 그 자체'로 끌어내리는 피정복자들의 본능이 정복자들의 신의 선한 속성을 삭제해버린다. 이들은 자신의 지배자들에게 그들의 신을 악마로 만들며 복수하는 것이다. 선한 신 그리고 악마, 양자 모두 데카당스의 소산이다.

4. 선한 신의 여행

신 개념이 지친 자들을 위한 지팡이라는 상징으로, 물에 빠진 모든 자를 위한 구조대라는 상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침몰해간다면, 신 개념이 가난한 자들의 신, 죄인의 신, 병자의 신의 전형이 된되면, 그리고 구세주, 구원자라는 술어가 말하자면 신에 대한 술어로 남게 된다면.. 이런 변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적인 것의 이러한 환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ㅡ신의 왕국은 그렇게 해서 좀더 커졌다. 예전에 신은 단지 그의 민족, 그의 선택된 민족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민족과 같이 외국으로 나가 사방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어디서든 가만히 눌러 있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마침내 온갖 곳에 본거지를 틀고 위대한 세계인(cosmopolitan)이 되기에 이르도록. 그가 '대다수'를 그리고 지구의 반쪽을 자기편으로 얻기에 이르도록 말이다.

5. 신의 붕괴 (철학자를 만난 신)

창백한 자들 중에서 가장 창백한 자인 형이상학자 제씨들, 이 개념의 백색증 환자들마저 그 신을 지배하게 되었다. 신이 그들이 짓거리에 최면이 걸려 한 마리 거미가, 형이상학자가 되어버릴 때까지 그들은 신의 주변에 오랫동안 그물을 쳤다. 이제 신은 세계를 다시 자기 자신에게서 짜냈으며ㅡ스피노자적으로ㅡ 이제 스스로를 점점 더 얇게 점점 더 창백하게 변모시켜, 그는 '이상'이 되었고, '순수정신'이 되었으며, '절대자'가 되었고, '물자체'가 되었다. 신의 붕괴 : 신이 '물자체'가 되었다.
『안티크리스트』 中

여전히 기쁨은 부족하다.
더 기뻐하라.
사소한 일이라도 한껏 기뻐하라.

기뻐하면 기분이 좋아질 뿐 아니라,
몸의 면역력도 강화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참지 말고, 삼가지 말고
마음껏 기뻐하라.

웃어라, 싱글벙글 웃어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라.

기뻐하면 온갖 잡념을 잊을 수 있다.
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도 옅어진다.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즐거워할 만큼 기뻐하라.

기뻐하라.
이 인생을 기뻐하라.
즐겁게 살아가라.
『니체의 말』 中[33]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이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확신은 감옥이다. 확신은 충분히 넓게 보지 않고, 발 아래를 보지 않는다. 위대한 것을 원하고, 그것을 위한 수단을 원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자다. 온갖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강한 힘에 속한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들을 묶고 고정시키는 외부의 규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강압이나 좀더 고차적인 의미에서의 노예제가 어떻게 해서 의지박약의 인간을 번성시키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조건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확신이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확신하는 인간에게 확신은 그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많은 것을 보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공평하지 않고, 철저히 편파적이며, 모든 가치를 고정적이고 자기에게 필요한 시각으로 보는 것 ㅡ 이것만이 확신하는 인간 종류를 존재하게 해주는 유일한 조건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그는 진실한 인간의 반대이자 적대자이고ㅡ진리의 반대이자 적대자이다.

믿는 자는 '참'과 '거짓'이라는 문제에 대한 양심을 자기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이때 정직하면, 그는 즉시 몰락해버릴 것이다. 확신하는 자의 시각의 병적 제약성은 그를 광신자로 만든다ㅡ사보나롤라, 루터, 루소, 로베스피에르,생시몽처럼ㅡ강하고 자유롭게 된 정신의 반대 유형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런 병든 정신들, 이런 개념의 간질병자의 거창한 태도는 많은 대중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광신자들은 그림처럼 아릅답게 보인다. 인간은 근거를 듣느니보다 제스처 보기를 더 좋아한다.
『안티크리스트』 中

나는 비할 바 없이 끔찍한 미증유의 인간이다

; 그렇다고 이것이 내가 비할 바 없이 좋은 일을 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다 : 그래서 나는 파괴자 중의 파괴자인 것이다.

선과 악의 창조자이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파괴자여야만 하며 가치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렇게 최고악은 최고선에 속한다 : 하지만 이것이 창조적 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中

비도덕주의자라는 내 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부정을 내포한다.

첫째, 나는 이제껏 최고라고 여겨졌던 인간 유형, 즉 선한 인간, 호의적인 인간, 선행하는 인간을 부정한다.

둘째, 나는 도덕 그 자체로서 행사되고 지배적이 되었던 도덕 유형을 부정한다 - 즉 데카당스 도덕,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 도덕을.
『이 사람을 보라』 中

비도덕주의자라는 말을 나는 다른 의미로서도, 즉 내 자신에 대한 표지이자 휘장으로서 선택했다

;나를 전 인류와 구분짓는 이 말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데에 나는 긍지를 느낀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교적 도덕을 자기 밑에 있는 것으로 깨닫지 않았다 ; 그러기 위해서는 높이와 멀리 바라보는 시각과 이제껏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심리적인 깊이와 심연성이 필요하다.
『이 사람을 보라』 中

나를 특정짓는 또 하나의 것은 싸움이다. 나는 기질상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이다. 적수일 수 있다는 것, 적수라는 것ㅡ이것은 아마도 강한 본성을 전제할 것이고, 어떤 경우라도 모든 강한 본성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저항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저항을 찾는다. 복수심과 뒷감정이 필연적으로 약함에 속하는 것처럼 공격적 파토스는 필연적으로 강함에 속한다.

공격자가 어떤 적수를 필요로 하는지는 그의 힘을 측정하는 일종의 척도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좀더 강력한 적수를 찾는다는 데서ㅡ또는 좀더 강력한 문제를 찾는다는 데서 드러난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또한 문제들에 결투를 신청하지만, 그의 과제는 적수들을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전 역량과 유연함과 싸움 기술을 힘껏 발휘하면서 전력을 다해야하는 적수를 이겨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ㅡ 대등한 적수를 이겨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적과의 대등함ㅡ정직한 결투를 위한 첫 번째 전제, 적을 경멸한다면 싸움을 할 수 없다. 명령을 하거나, 어떤 것을 자기 밑에 있다고 얕잡아보면 싸움은 이루어질 수 없다.

내 싸움 방식은 첫째: 나는 승리하고 있는 것들만 공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린다. 둘째: 나는 내 우군이 없을 만한 것, 나 홀로 싸우는 것ㅡ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태롭게 하는 것만을 공격한다.
『이 사람을 보라』 中

디오니소스의 열성적인 숭배자는 주로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마이나데스라고 불렸다. 마이나데스는 '광란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표범 등 짐승의 가죽을 걸친 그녀들은 나뭇가지로 만든 관을 쓰고, 한 손에는 뱀이나 포도송이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표지인 지팡이를 든 채 노래하고 춤추면서 산과 들을 뛰어다녔다. 디오니소스 신에 의해서 접신이 되었을 때 이 여자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산기슭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괴력을 발휘하여 나무를 뿌리채 뽑는가 하면, 야수를 갈갈이 찢어 피가 뚝뚝 흐르는 날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이 여자들을 거느리고 리디아, 프리기아, 그밖의 동방 여러나라에서 자신을 포교했다.

일반적으로 그녀들은 디오니소스 숭배의 본고장인 트라키아나 프리기아에서 디오니소스 제의가 있을 때 열광적으로 난무하던 여신도들의 신화적 반영이 아닌가 보고 있다. 사람들은 이 제의가 행해지는 동안 자신 속에서 신을 느끼면서 일상의 습관이나 금기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을 맛보았다.
『비극의 탄생』 中

“나는 조금 홀가분해졌다. […]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내게는 하나의 운명이었으며 ; 이후에 무언가를 다시 기꺼워하게 된 것은 하나의 승리였다.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짓거리와 하나가 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강력하게 그것에 저항하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 […] 내가 도덕주의자라면, 어떤 명칭을 부여하게 될지 알겠는가! 아마도 자기극복이라는 명칭일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 中

예술이 있으려면, 어떤 미적 행위와 미적 인식이 있으려면 특정한 생리적 선결 조건이 필수 불가결하다. 도취라는 것이. 도취는 우선 기관 전체의 흥분을 고조시켜야만 한다. 그러기 전에는 예술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양한 기원을 갖는 온갖 종류의 도취는 모두 예술을 발생시키는 힘을 갖추고 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원적인 성적 흥분의 도취가 특히 그러하다. 온갖 큰 욕구들, 온갖 강한 격정들의 결과로 생겨나는 도취도 마찬가지다. 축제나 경기, 걸작과 승리 밑 극단적인 움직임 전부에 따르는 도취, 잔인함에 따르는 도취, 파괴 시의 도취, 기상적 영향을 받아 생기는 도취, 이를테면 봄날의 도취, 또는 마약의 영향으로 생기는 도취, 의지의 도취, 가득 차고 팽창된 의지의 도취 ㅡ 도취에서 본질적인 것은 힘이 상승하는 느낌과 충만함의 느낌이다. 이런 느낌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물에 주입시키고, 우리로부터 받기를 사물에게 강요하며, 사물을 폭압한다. 이런 과정이 이상화라고 불린다. 여기서 편견 하나를 없애자. 이상화는 보통 믿는 바와는 달리 자질구레하거나 부차적인 것을 빼내버리거나 제해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주요 특징들을 엄청나게 내몰아버리는 일이 오히려 결정적인 것이어서, 그 때문에 다른 특징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충만함으로 인해 만사를 풍요롭게 만든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원하든 사람들은 그것을 부풀려서 보고 절실한 것으로 보며 강하고 힘이 넘쳐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사물이 그의 힘을 다시 반영해낼 때까지 사물을 변모시킨다. 사물이 자기의 완전함을 반영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완전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ㅡ 바로 이것이 예술인 것이다.
『우상의 황혼』 中

어느 누구도 인간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도 아니고 사회도 아니고 인간의 부모나 선조도 아니며, 인간 자신도 자신의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특정환 상황과 특정환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책임이 없다. 그의 존재의 숙명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특정 의도나 특정 의지나 특정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을 실현시킬 도구도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넘겨주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란한 일이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다. 사실 목적이라는 것은 없다.
『우상의 황혼』 中

과거에 대해서는 나는 다른 모든 인식자들처럼 아주 관용적으로 대한다. 말하자면 도량 있는 자제력을 가지고서 : 전 세기에 걸친 정신병원-세계를, 즉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적 신앙', '그리스도교적 교회'를 나는 암울한 신중함을 가지고 통과해간다.ㅡ나는 인류에게 그들의 정신병에 대한 책임을 지우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지만 내가 현 시대로, 우리의 시대로 들어서자마자 곧 내 감정은 뒤바뀌고 폭발해버린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학자와 사제와 교황이 하는 모든 말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짓이라는 사실이다ㅡ 그들이 '순진'해서나, '무지'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이가 알고 있듯이 사제 또한 '신', '죄인', '구세주'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피안', '최후의 심판', '영혼의 불멸', '영혼' 자체라는 개념들이 말이다 : 이것들은 사제들을 지배자로 만들었고 지배자로 남게 했던 고문 기구들이자, 잔인함의 체계들이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티크리스트』 中

’기쁜 소식(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된 삶이, 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는 것ㅡ이런 삶은 약속되지 않는다. 이런 삶은 거기,너희 안에 이미 있다: 사랑하며 사는 삶으로서. 누구든지 다 신의 자식이다ㅡ 예수는 결코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ㅡ신의 자식으로 누구든 다 서로 동등하다.

'복음'이란 바로 아무런 대립자도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 하늘나라는 아이들의 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싸워서 획득한 신앙이 아니다. ㅡ 이 신앙은 거기, 시작부터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신적인 것으로 아이 같은 천진함이 되돌아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기적에 의해서든 보상이나 약속에 의해서든 입증하지 않는다. '성서'에 의해서는 더욱 아니다 : 신앙 그 자체가 매 순간마다 신앙의 기적이고, 신앙에 대한 보상이나 증거이며 '신의 나라'인 것이다. 이런 신앙은 자신을 공식화하지도 않는다.

첫 사도들은 온통 상징과 불가해성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 존재에 관하여 어떤 것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그네들의 조잡성으로 예수를 번역해버렸다. ㅡ 그들 머리속에서 예수라는 유형은 좀더 잘 알려져있는 형식으로 변형된 후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선지자, 구세주, 미래의 판관, 도덕의 설교자, 기적을 행하는 자, 세례자 요한ㅡ 예수라는 유형을 오해할 계기는 이처럼 많았다.

그것은 살아 있고, 공식들에는 저항한다...... 인도인 사이에서라면 샹캬 개념을, 중국인 사이에서라면 노자의 개념을 이용했을 것이다ㅡ그러면서 아무런 차이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표현을 자유롭게 해보자면 예수를 '자유정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ㅡ 그에게는 고정된 것은 죄다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 말은 죽이는 것이고, 고정된 것은 모두 죽이는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개념인 '삶'의 경험은 그에게서는 온갖 종류의 말, 공식,법칙, 신앙,교의와 대립한다. 그는 단지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아왔고, 그가 가르쳤던 대로 죽었다ㅡ '인간을 구원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것은 바로 실천이었다: 재판관과 호위병과 고발자와 온갖 종류의 비방과 조소앞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ㅡ 십자가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 않는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태를 도발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그들안에서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도적에게 그가 한 말은 복음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신적인 사람이었구나. '신의 자식'이었구나"라고 그 도적은 말했다. "네가 그것을 느끼면ㅡ구세주가 답하기를ㅡ 그러면 너는 낙원에 있는 것이다. 너 역시 신의 자식인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책임 지우지 말라. 또한 악한자에게도 저항하지 말고ㅡ 그를 사랑하라......
『안티크리스트』 中

어디서든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더구나 자기의 전 역량을 요청하는 위대한 과제를 풀어야 하는 자에게는 선택 영역은 더 제한된다. 풍토는 신진대사에, 그 방해와 촉진이라는 면에서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 장소와 풍토 선택에서 실패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과제에서 멀어지게 될 뿐 아니라, 아예 과제가 억류당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 그 과제가 그에게 알려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진대사의 속도는 정신의 발이 움직이느냐 아니면 무기력 하느냐와 정확히 비례한다: '정신' 자체가 진정 신진대사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명민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존재했던 곳, 위트와 예민함과 악의가 행복을 이루었던 곳, 천재가 거의 필연적으로 자기의 안식처로 삼았던 곳을 모두 모아보자 : 그곳들의 대기는 모두 아주 탁월하게 건조하다. 파리, 프로방스, 플로렌스, 예루살렘, 아테네ㅡ 이 장소들은 무언가를 입증하고 있다: 천재는 건조한 대기와 맑은 하늘을 전제하고ㅡ 신속한 신진대사를 전제하며 거대하고도 어마어마한 양의 힘을 항상 다시 공급할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것을.나는 탁월하면서도 자유로운 소질을 갖춘 정신이 풍토를 선택하는 섬세한 본능을 갖지 못해서, 오그라들고 움츠러버리는 전문가나 유머 감각 없는 뚱한 자가 되어버렸던 경우를 하나 목도했었다.
『이 사람을 보라』 中

내 작품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도대체 다른 책들을 더 이상은 견뎌낼 수 없게 된다.

배움의 진정한 황홀경을 체험한다: 나는 어떤 새도 이르러보지 못했던 높은 데서 왔고, 어떤 발도 길을 잃어보지 못한 심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내 책 중 어느 하나를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고 ㅡ 내가 밤의 휴식마저 설치게 한다고 말했다...... 내 책보다 더 긍지에 차 있으면서 동시에 더 세련된 종류의 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기법이 바로 독일어로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할 사항으로 남겨져 있었다 : 나라도 예전에는 그 가능성을 혹독하게 배척했었을 것이다. 나 이전에 사람들은 독일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으며ㅡ 언어를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ㅡ 숭고하고도 초인간적인 열정의 거대한 상승과 하락을 표현하는 위대한 리듬 기법, 복합문의 위대한 문체가 나에 의해 비로소 처음 발견되었다 ; <차라투스트라> 3부 마지막 장인 <일곱 개의 봉인>이라는 표제의 송가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시라고 불리어온 것의 위로 천 마일이나 높이 날아올랐다.
『이 사람을 보라』 中

아주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오만 가지 배려를 주고받는 우리 현대인은 우리가 제시하는 이런 섬세한 인간성, 그리고 관용과 친절과 상호 신뢰에 있어 이르게 된 의견 합일이 하나의 긍정적인 진보라고 믿어버리고, 이 점으로 인해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신경은 르네상스적 실재성을 견대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근육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현대인의 이런 무능은 진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것, 즉 필연적으로 사려로 가득 찬 도덕을 발생시키는 더 약하고 더 유약함과 더 상처받기 쉬운 더 말기적인 소질을 증명해줄 뿐이다.

강렬한 시대와 고상한 문화는 동정과 '이웃 사랑'과 자아와 자의식의 결여를 경멸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ㅡ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적극적인 힘들에 의거해 측정될 수 있다ㅡ이럴 때 르네상스라는 그토록 풍요롭고 그토록 숙명적인 시대는 위대했던 최후의 시대로 드러나고, 우리 현대는 자기에 대한 소심한 염려와 이웃 사랑, 노동과 겸허와 공정성과 과학성이라는 덕을 가지고서ㅡ수집적이고 경제적이며 기계적인ㅡ약한 시대로 드러난다

'평등권' 이론에서 그 표현을 얻는 '평등'은 본질적으로 쇠퇴에 속한다 :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 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강한 시대의 특성이다. 오늘날에는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긴장과 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ㅡ극단적인 것들은 희미해져 결국은 모두 유사하게 되어버린다
『우상의 황혼』 中

정신적인 문제에 냉혹할 정도로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와 민족 이기주의의 천박한 시대적 헛소리를
자기의 발 아래의 것으로 내려다보는 법을 익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가 그에게 이득을 줄지 손해를 줄지 물어서도 안 된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물어볼 용기가 없는 문제들을 선호하는 강건함
금지된 것에 대한 용기
미궁으로 향하는 예정된 운명
일곱 가지 고독에 의한 한 가지 경험
새로운 음악을 위한 새로운 귀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위한 새로운 눈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진리들에 대한 새로운 양심
그리고 위대한 양식의 경제성을 추구하려는 의지
그 힘과 열광을 흩어지지 않게 한데 모으려는 의지
자신에 대한 존경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 자유을 가져야 한다.

이런 자들만이 나의 독자이고, 나의 정당한 독자이며, 예정된 독자이다.
『안티크리스트』 中

오늘날 도덕적인 문제를 연구하려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영역의 연구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모든 종류의 열정들이 하나하나 고찰되고 시대와 민족, 크고 작은 일들이 낱낱이 추적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이성과 가치 평가 전체, 사물들에 대한 조명에 빛이 가해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현존재에 색채를 부여하는 모든 것이 아직 그 역사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사랑, 소유욕, 질투, 양심, 경건, 잔혹의 역사가 도대체 어디에 그려져 있는가 ? 심지어 법의 비교사나 아니면 단지 형벌의 비교사조차도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하루를 구분하는 다양한 방식, 노동과 축제와 휴일을 규범적으로 확정해놓은 결과가 연구된 적이 있는가 ? 음식의 도덕적 영향에 대해 알고 있는가 ? 섭생의 철학이 존재하는가 ? (채식주의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벌어지는 소란이 이미 그러한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공동체 생활의 체험, 예를 들어 수도원의 체험이 수집되어 있는가 ? 결혼과 우정의 변증법은 서술되어 있는가 ? 학자, 사업가, 예술가, 수공업자의 윤리에 대해 연구한 사상가는 있는가 ?

지금까지 인간의 실존의 조건으로 고찰되어온 모든 것, 그리고 이러한 고찰에서 나타나는 모든 이성, 정열, 미신 등이 궁극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탐구되었는가 ? 상이한 도덕적 풍토에 따라 인간의 충동이 각기 다르게 나타났고, 또 아직도 나타날 수 있는 성장의 다양한 가능성을 관찰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장 근면한 연구자에게조차 과도한 연구거리가 될 것이다. 이 연구의 관점과 자료를 모두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세대를 총망라하는 학자들이 계획적으로 공동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도덕적 풍토가 상이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증명하는 연구도 마찬가지다(왜 여기에는 이러한 도덕적인 근본 판단과 주요 가치판단의 태양이 빛나고 저기에는 다른 태양이 빛나는가 ?).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유가 지닌 오류와 지금까지의 모든 도덕적 판단의 본질을 확증하는 것은 다시금 또 다른 연구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연구가 행해진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우선 학문이 인간의 행동을 받아들이거나 근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모든 종류의 영웅주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험,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모든 위대한 연구와 희생이 그 그늘에 가리게 될 수세기에 걸친 실험이 행해질 차례가 온다. 아직까지 학문은 자신의 거석을 건설하지 못했다. 그것을 위한 시대도 올 것이다.
『즐거운 학문』 中

풍습은 이익이 되거나 해를 끼친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예전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끼는 풍습에 대한 감정은 그러한 경험 자체가 아니라 풍습의 오래됨, 신성함, 자명함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감정은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고 풍습을 수정하는 것에 반발한다. 즉 윤리는 새롭고 좀더 나은 풍습의 발생을 저해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다.
『아침놀』, '풍습과 풍습에 대한 감정'

기원전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이후 대체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모든 공동체들은 '풍습의 윤리'에서 비롯된 저 가공할 중압속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이단적인 사상과 가치 평가, 그리고 충동이 거듭 출현할 때마다, 이는 무시무시한 현상들을 수반하면서 일어났다. 거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어주면서, 존중되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은 광기다.

그대들은 왜 그것이 광기여야만 했는지 이해하는가? 날씨와 바다의 악마적인 변덕처럼 소리와 몸짓이 전율을 일으키는 불가해한 것, 그 때문에 그러한 날씨와 바다와 유사하게 경외할 만하고 관찰할 가치가 있는 그런 어떤 것을 그대들은 이해하는가? 간질 환자한테서 나타나는 마비 증상과 거품처럼, 전혀 자유의지를 갖지 않은 상태의 징후를 현저하게 보이게 하면서 광인을 이처럼 신성의 가면이자 확성기로 나타나게 하는 어떤 것을? 새로운 사상의 소유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외경과 두려움을 갖게 하고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게 하면서 그를 새로운 사상의 예언자이자 순교자가 되도록 몰아대는 어떤 것을?

오늘 날에도 여전히 천재에게는 한 알의 소금 대신 광기를 일으키는 약초가 주어진다고 거듭 이야기되지만, 이전의 모든 인간들은 광기가 존재하는 곳에는 약간의 천재성과 지혜, 즉 사람들이 서로 속삭이는 것처럼 '신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였다. 아니, 사람들은 속삭이는 것을 넘어 강력한 이러한 사상을 표명했다. "광기를 통해 그리스는 최대의 자산을 갖게 되었다"라고 플라톤은 고대의 인류 전체와 함께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어떤 윤리의 질곡을 부수면서 새로운 법을 부여하려는, 거역하기 어려운 유혹에 사로잡혔던 저 탁월한 모든 인간들에게는 그들이 실제로 미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을 미치게 하거나 미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종교적 영역이나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실로 모든 영역의 혁신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시의 운율을 혁신했던 사람들마저 광기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

"미치지도 않았고 미친 것처럼 보이게 할 용기도 없을 경우 어떻게 자신을 미치게 할 것인가?" 고대 문명의 중요한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무서운 사상을 따랐다. 이와 관련해 감정을 깨끗하게 하고 생각과 기도를 성스럽게 하는 것 외에 여러 비결들과 식이 요법에 대한 은밀한 가르침이 전해졌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마술사가 되기 위해, 중세 기독교인들이 성자가 되기 위해, 그린란드인들이 안게코크가 되기 위해, 브라질인들이 파헤가 되기 위해 취했던 처방은 본질적으로 같다.

즉 무의미한 단식, 성욕의 지속적인 억제, 사막으로 가거나 산에 오르거나 기둥에 오르는 것, '멀리 호수가 보이는 오래된 버드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황홀경이나 정신의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는 처방들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시대의 가장 생산적인 인간들이 아마 겪었을 가장 쓰라리면서도 황량하기 짝이 없는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누가 감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인가? 저 고독하고 어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한숨을 누가 감히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아아, 그대 하늘에 있는 자들이여, 광기를 주소서! 마침내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주소서! 황홀경과 마비, 섬광과 암흑을 주소서! 일찍이 죽어야 할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 없는 혹한과 뜨거운 열로 나를 겁에 질리게 하소서! 포효하며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형태로 나를 겁에 질리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울부짖고 신음하게 하시고 동물처럼 기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게만 하소서! 의심이 나를 파먹어갑니다. 나는 법을 파괴했습니다. 시체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내가 법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면, 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타락한 자입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정신이 당신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가 당신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디 나에게 증명해주소서, 광기만이 나에게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은 지나칠 만큼 자주,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그 목표에 도달했다.
― 《아침놀》, '도덕의 역사에서 광기의 중요성'

수녀의 순결, 그녀는 그 얼마나 강한 비난의 눈길로 다르게 사는 여인들의 얼굴을 쳐다보는가! 그녀의 눈에 얼마나 많은 복수와 쾌감이 존재하는지! 주제곡은 짧고 변주곡은 수없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지루해지지는 않는다. 우월의 도덕은 근본적으로 세련된 잔인성에 대한 쾌감이다.
― 《아침놀》, '고상한 잔혹함'

첫째,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하면서 가능한한 오랫동안 불만족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충동을 약화하고 시들게 할 수 있다.

둘째, 충동을 만족시킬 때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을 부과할 수 있다. 이렇게 충동 자체에 규칙을 부과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시간을 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충동에 의해 교란되지 않는 시간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통해 첫 번째 방법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의도적으로 충동을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만족시키면서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역겨움을 통해 충동을 이겨내는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경우 죽을 때까지 말을 몰아대다가 결국 자신의 목마저 부러뜨리고 마는 기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방법에서는 그 기수처럼 되는 것이 보통이다.

넷째, 지적인 책략이 있다. 매우 고통스러운 생각을 만족 전체와 확고하게 결부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약간 연습한 후에는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생각 그 자체가 늘 즉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다섯째, 무언가 특히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을 자신에게 부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에 몸을 맡기는 방식으로 생각과 육체적인 힘의 움직임을 다른 길로 유도함으로써 많은 힘의 방향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여섯째, 육체와 정신의 조직 전체를 약화시킴으로써 개별적인 격렬한 충동을 약화한다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예를들어 고행자처럼 자신의 감각을 철저히 굶기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육체와, 종종 자신의 지성도 함께 굶김으로써 육체와 정신을 쓸모없게 만드는 사람의 방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떤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이 방법으로 효과를 거두는가 못 거두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오히려 이 과정 전체에서 우리의 지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격렬한 충동의 경쟁자인 다른 충동의 맹목적 도구일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이 안식에 대한 충동이든지, 치욕이나 다른 나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이든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충동의 격렬함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사실은 다른 충동에 대해 어떤 충동이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충동의 격렬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충동과 똑같이 격렬하거나 훨씬 더 격렬한 다른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의 지성이 어느 쪽이든 편을 들어야만 하는 투쟁이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 《아침놀》, '충동을 극복하기 위한 여섯 가지 방법'

가련한 인류.- 뇌 속의 피가 한 방울 더 많거나 더 적으면 우리의 인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지고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가 그의 심장을 쪼아 먹는 독수리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것 이상으로 이 한 방울의 피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저 한 방울이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지도 못하면서 '악마'라든가 '죄'가 원인이라고 생각할 때 가장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다.

육체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자들.- 단지 위, 내장, 심장의 고동, 신경, 담즙, 정액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ㅡ즉 저 모든 불쾌감, 무기력, 과도한 긴장,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계(육체)의 우연성 전체! ㅡ 파스칼과 같은 기독교인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 신인가 악마인가, 선인가 악인가, 구원인가 저주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이 모든 것을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오, 얼마나 불행한 해석가인가!
― 《아침놀》, ‘가련한 인류, 육체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자들'

광인이 있었다.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나는 신을 찾고 있다! 나는 신을 찾고 있다!'라고 외쳤다는 광인. 그 광인이 시장에 등장했을 때 신을 믿지않는 사람들이 모여있었기에 그 광인은 웃음을 자아냈다. 광인은 비웃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노려보며 말했다.

"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대답하지. 우리가 신을 죽였다. 그대들과 내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신을 죽일 수 있었지? 어떻게 이 피를 닦아낼 수 있을까? 무엇으로 이 피를 닦아낼 수 있을까?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때... 그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거지?'

" 어디로 가는 거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모든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건가? 우리는 계속 추락하고 있는 걸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위와 아래라는 것이 이제 있기는 한 걸까? 무(無) 속을 끝없이 방황하기만 하는걸까? 빈 공간의 숨을 느끼지 못해? 추위를 느끼지 못해? 밤이, 계속된 밤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해? 이제 아침에도 등불을 켜야만 하는 것 아니야? 신을 땅에 묻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아? 신도 썩어! 신은 죽었어! 되돌아갈 수도 없어! 우리가 신을 죽였어!"

"최악의 살인자인 우리를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가장 신성한, 가장 힘 있는 존재가 우리들의 칼에 죽었어. 누가 이 피를 닦아내지? 무슨 물로 이 피를 씻어내지? "

광인은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조용히 광인을 쳐다보았다. 광인은 등불을 바닥에 던졌다.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졌다.

' 너무도 이른 시간에 왔구나.' 광인은 속으로 말했다. '아직 내 시간은 오지 않았어. 이 사실이 아직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았어.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해. 별빛이 사람들에게 닿기까지 시간이 필요해. 이 사실이 그들에게는 아직 가장 먼 별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 자신이 저지른 일인데도 말이야!'
― 《즐거운 학문》

최대의 중점 ー 만일, 어느 낮밤에, 악령이 그대의 가장 외딴 고독 속으로 숨어들어와 이렇게 말한다면: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았던 이 삶을 다시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며, 모든 고뇌와 욕망, 모든 상념과 탄식이, 네 삶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작고 큰 모든 것들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네게 돌아오고, 여기 거미와 나무 사이의 달빛과 이 순간과 나마저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현존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매번 거듭해서 티끌 중의 티끌인 너와 함께 뒤집히리라!" 그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이를 갈며 그런 말을 한 악령을 저주하지 않겠는가? 혹은 언젠가 한번 이렇게 답했을 압도적인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신성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 생각이 그대를 사로잡는다면 지금의 그대는 바뀔 것이며, 어쩌면 부서질 것이다. "너는 이것을 다시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모든 각개의 행동을 끔찍한 무게로 짓누르리라! 아니면 이 최후의, 영원한 증명과 봉인만을 원하기 위해선, 어떻게 네 자신과 삶에 좋아져야 하겠는가?
― 《즐거운 학문》

사람이란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해 책을 쓰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철학자가 '최종적이며 고유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모든 동굴 뒤에 한층 더 깊은 동굴이 있지 않을까? 표면적인 세계를 넘어선 곳에 좀더 광대하고 낯설고 풍요로운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근거의 배후에, 모든 '근거를 마련하려는 작업' 아래 하나의 심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는 의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철학은 전경의 철학이다.

철학자가 여기 서서 뒤를 돌아보고 자신의 주위를 살펴본다는 것에는, 그리고 그가 여기에서 더 이상 깊이 파고들어 가지 않고 삽을 내던져버린 것에는 무언가 자의적인 것이 있다. 거기에는 무언가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 모든 철학은 또 하나의 철학을 숨기고 있다. 모든 생각도 하나의 은신처이고, 모든 말도 하나의 가면이다.
― 《선악의 저편》

칸트는 추론한다. 1.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만 타당한 주장들이 있다. 2. 이 조건은 경험으로부터가 아니라, 순수 이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렇다. 그러한 주장들의 진리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그 근거를 가져온단 말인가? 그 믿음은 후험적 데이터뿐만 아니라 경험 이전의 선험적 데이터 역시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필연성과 보편성은 결코 경험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들이 경험없이 있다는 것은 무엇에 의해 명백하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인식이 아니다! 규제적 신조(믿음)인 것이다. 선천적 종합판단이라는 것이 있다면, 순수이성에 의한 사물 인식인 형이상학도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
― 《유고 1888년 초~1889년 1월 초》

비판은 한 번도 이상 자체로 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어디서 이상에 대한 대립이 생기는 것인지, 왜 이상은 아직도 도달되지 않는지 혹은 왜 이상은 일의 대소를 불문하고 입증되지 않는지라는 문제로만 향할 뿐이다.
― 《유고 1888년 초~1889년 1월 초》

존재자를 가정하는 것은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하다. 논리학은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에 대한 공식만을 취급한다. 따라서 존재자라는 가정은 실재에 대한 증명력을 여전히 갖지 않으리라. '존재자'란 우리의 광학에 속한다. 주체, 실체, 이성 등의 날조된 세계는 필요하다. 조정하고 단순화하고 위조하고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힘이 우리안에 있다
― 《유고》

역사와 민속학적 연구가 알고 있는 모든 가치 목록, 모든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에는 어떤 경우에도 심리학적 탐구나 해석보다도, 먼저 생리학적 탐구나 해석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의학이 비판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러한 혹은 저러한 가치 목록과 '도덕'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 《도덕의 계보》

상이한 도덕적 풍토에 따라 인간의 충동이 각기 다르게 나타났고, 또 아직도 나타날 수 있는 성장의 다양한 가능성을 관찰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장 근면한 연구자에게조차 과도한 연구거리가 될 것이다. 이 연구의 관점과 자료를 모두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세대를 총망라하는 학자들이 계획적으로 공동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도덕적 풍토가 상이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증명하는 연구도 마찬가지다(왜 여기에는 이러한 도덕적인 근본 판단과 주요 가치판단의 태양이 빛나고 저기에는 다른 태양이 빛나는가 ?).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유가 지닌 오류와 지금까지의 모든 도덕적 판단의 본질을 확증하는 것은 다시금 또 다른 연구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연구가 행해진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우선 학문이 인간의 행동을 받아들이거나 근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모든 종류의 영웅주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험,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모든 위대한 연구와 희생이 그 그늘에 가리게 될 수세기에 걸친 실험이 행해질 차례가 온다. 아직까지 학문은 자신의 거석을 건설하지 못했다. 그것을 위한 시대도 올 것이다.
― 《즐거운 학문》

여성들은 조상들이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리학적 병증과 마주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등권의 요구이다. 이 동등을 위한 투쟁은 가히 병적 징후에 가깝다. 나를 미쳤다고 판단한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도 이를 시인했다.

이 같은 투쟁에 뛰어든 여성들은 양성 간의 싸움에서 우선권이 자신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대체 왜 여성들은 남자의 사랑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그 권리마저 찬탈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여성을 치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들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그녀들은 어린아이가 필요하다. 즉, 그녀들에겐 임신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여성에게 남자란 항상 수단에 불과했다. 거리에 나부끼는 저 ‘여성 해방’의 목소리, 이것은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여성들의 분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임신에 필요한 남자를 얻지 못했다는 상실감의 표현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들의 ‘수단’을 강탈한 같은 여성들에 대한 증오이다.

여성 해방론자들이 적으로 상정한 남성은 그저 수단일 뿐이며, 전술에 불과하다. 그녀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이며, 말이 통하는 고급 창녀이며, 이상주의자라고 내세움으로써 동시대의 같은 여성들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고등 교육과 양복 바지, 그리고 참정권은 여성에 대한 여성의 투쟁에 필요한 무기일 뿐이지 요구가 아니다. 따라서 남자로부터 해방된 여성들은 여성적인 세계마저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 이 사람을 보라 中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이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학문성과 자기 폭로의 이러한 서툰 시도가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여성에게는 현학적인 것, 천박한 것, 학교 선생 같은 것, 하찮은 오만, 하찮은 무절제와 불손이 많이 숨어 있다.ㅡ여성이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를 살펴보라!ㅡ이러한 것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잘 억제되고 제어되어 왔다. 만일 '여성에게서의 영원히 권태로운 것'이ㅡ여성에게 이것은 풍부하게 있다!ㅡ과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일 여성이 우아하고 장난스럽고 근심을 없애주고 마음의 짐을 벗어나게 하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현명함과 기교를, 만일 여성이 유쾌한 욕구를 처리하는 섬세한 솜씨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맹세코 말하는데, 지금은 이미 경악하게 하는 여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며,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의학적인 확실함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여성이 이와 같이 학문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니겠는가? […]
선악의 저편 中

[…] 여성은 진리를 바라지는 않는다 : 여성에게 진리가 무슨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여성에게는 처음부터 진리보다 낯설고 불쾌하고 적대적인 것은 없다.ㅡ여성의 큰 기교는 거짓말이요 그 최고의 관심사는 가상이며 아름다움이다. 우리 남성들은 고백하도록 하자 : 우리는 여성의 바로 이러한 기교와 이러한 본능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 우리 남성들은 여성이 계몽에 의해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가 '여성은 교회 안에서 침묵해야만 한다!'고 선언했을 때, 이는 남성이 여성을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이었다. 나폴레옹이 너무 말이 많은 드 스탈 부인[34]에게 "여성은 정치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고 시사했을 때, 이는 여성의 이익을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ㅡ그리고 오늘날 "여성은 여성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고 여성에게 소리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여성의 친구라고 나는 생각한다.[35]
선악의 저편 中

"생각된다 ; 따라서 생각하는 어떤 것이 있다" : 데카르트의 논변은 이렇게 귀결된다. 하지만 이것은 실체 개념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미리 '선험적 참'이라고 설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된다면 '생각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에 행위자를 덧붙이는 우리의 문법적 습관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요약하면 여기서는 이미 논리적-형이상학적 요청이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요청은 확인되고 있을 뿐만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취한 방식으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어떤 것에 이르지 않고, 아주 강한 어떤 믿음의 사실에만 이를 뿐이다. 저 문장을 "생각된다. 그러므로 생각된 것이 있다"는 면제로 환원시켜 보면, 단순한 동어 반복만을 우리는 얻을 뿐이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바로 그것, 즉 '생각된 것의 실재성'은 건드려지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이런 형식으로는 생각된 것의 '가상성'은 물리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데카르트가 원했던 것은 생각된 것이 단지 가상적 실재성뿐 아니라, 실재성 그 자체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 《유고 1887년 가을~1888년 3월》

보라, 우리의 주위가 얼마나 풍만한가를! 이와 같이 넘쳐흐르는 자연 속에 먼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신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Übermensch)'을 이야기하라고 가르친다.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나는 이 억측이 그대들이 창조하려는 의지를 넘어서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들은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있었는가 -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간구하노라. 모든 신에 대해 침묵을 지켜라. 그대들은 능히 초인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들이 '도덕에 논리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불렀고, 알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은, '적절한 조명에 비추어 봤을 때', 그저 당시 지배적인 도덕에 대한 '맹신'의 배운 형태이며, 그것의 새로운 '표현 방식'에 불과해, 결과적으로 확고한 도덕이라는 하나의 구체 내부의 '사실문제(matter-of-fact)'에 불과하며, 그것의 궁극적인 동기에서, 이러한 도덕에 대한 '그것의 정당함에 대한 의문'의 어떤 종류의 부정이다──또한, 이러한 맹신에 대한 검증, 분석, 의심, 그리고 해부하려는 행동들과 정반대의 것이다…
― 《선악을 넘어서》

이제 나를 떠나보내고 자신을 찾으라. 그리고 그대들이 나를 모두 부정했을 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가리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36]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라 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다 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 테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인간을 죽임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을 '정의'로 정의한다. 니체는 정의라는 진리를 죽임으로써 정의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진리의 말살은 곧 진리.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신을 죽인다. 하지만 니체는 외친다.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우리는 신을 죽인 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 즉 삶의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신은 이미 죽었다. 신이 된 우리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우리는 풀 수 없다. 우리는 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들 외친다. 하지만 우리가 죽인 신이 만들었던 영원불멸의 시스템은 행복과 슬픔, 분노, 공포, 모든 감정 느낌을 허무하게 만든다.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비극의 탄생[37]
Die Geburt der Tragödie
<colbgcolor=#fff,#1f2023> 1872년
반시대적 고찰[38]
Unzeitgemäße Betrachtungen
1873년
~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78년
아침놀
Morgenröte
1881년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39]
1882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40]
Also sprach Zarathustra
1883년
선악의 저편[41]
Jenseits von Gut und Böse
1886년
도덕의 계보[42]
Zur Genealogie der Moral
1887년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년
우상의 황혼[43]
Götzen-Dämmerung
안티크리스트[44]
Der Antichrist
1894년[45]
이 사람을 보라[46]
Ecce homo
1908년[47]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년[48]
권력에의 의지[49]
Der Wille zur Macht
1901년

3.1. 읽는 순서

흔히 니체의 저서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잘 알려져 있으나, 니체 철학에 익숙하지 않으면 그 안에 담긴 은유를 다 읽어내기에 무리가 있으므로 그저 산문시를 읽는 것에 불과하다.[50] 그래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 선악의 저편〉을 읽는 것이 필수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잘 안 팔리자,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그 책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나름 학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저술한 책이 바로 〈선악의 저편〉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선악의 저편〉의 도덕 부분을 확장해서 논문형식으로 쓴, 〈 도덕의 계보〉를 보통 읽는다. 이 두 책을 독파하고 나면 〈 우상의 황혼〉, 〈 즐거운 학문〉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4권의 책[51]을 읽었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어느 정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지만, 너무 많은 상징과 패러디가 들어 있기 때문에 쉽게 다가가긴 힘들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전문해설서를 끼고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니체 사상에서 핵심 개념들의 초기 아이디어가 어떠했는지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 반시대적 고찰〉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는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힘에의 의지, 강자와 약자, 위버멘쉬 등 후기 텍스트만으로는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든 핵심 개념들이 초기에 어떤 의미와 맥락에서 쓰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서 니체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니체가 여러 책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면, 그의 초기 저작 〈 비극의 탄생〉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깊게 받은 초기 저술이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를 강조하는 후기 철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부분이 '힘에의 의지'로 계승되므로 〈비극의 탄생〉은 후기 철학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데도 도움된다.

니체가 지은 책들에 대한 니체 자신의 평가를 보고 싶은 사람은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읽는 것도 괜찮다.[52] 이 책은 또한 '어떻게 자기를 확신하고 긍정하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니체의 생각도 함께 쓰여져 있어서 이런 부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깊은 이해를 원하거나 관련 전문가의 경우에는, 이 저서들과 같은 시기에 쓰인 『유고』를 함께 보는 것이 좋다. 유고에는 니체가 출간한 저서들의 발생과정 및 숨겨진 의도와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1885~1888년 사이에 쓰인 유고(책세상판 전집 기준 19~21번)는 책 『힘에의 의지』를 기획하기 위한 글 모음이기 때문에 니체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이 유고를 읽어야 한다. [53]

3.2. 한국어판 전집에 대해

니체 전집은 휘문출판사판(1969년), 청하출판사판(1982년), 책세상 니체전집 (2000년) 총 세가지가 있다. 원고의 방대함과 치밀함은 책세상판이 높지만 번역 질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청하판은 80년대에 나왔고 중역이 많지만 그럼에도 니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책세상판과 달리 중요한 서문/평이 실려있으며 번역의 질이 우수한 작품도 있다. 대표적으로 니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선악의 피안』[54]이 그렇다. 책세상판도 일부 단권으로 된 책은 서문이 달려있으며(ex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의 뒤에 해설이 달려있다.

책세상판 전집이 나온 이후, 아카넷 대우고전총서에서 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니체의 저작들을 모아 니체 선집을 구성했다. 박찬국 교수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워서 최근에는 박찬국 교수의 번역본을 많이 참고하는 편이다.

3.3. 위작

니체와 여동생, 50년간 숨겨져 왔던 두 사람 사이의 수상한 관계가 마침내 그 위대한 철학자 자신의 고백으로 드러났다. 뛰어난 철학자, 무섭도록 야심만만한 그의 여동생,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눴고, 그 사랑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돼 그들의 삶에서 다른 이성이 배제됐다. 독자들은 몇 페이지만 읽어도 깨닫게 될 것이다. 숨 막힐 듯 긴장감을 선사하는 이 책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금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19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무서우리만치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게 고백한다. 어쩌다가 동생과 그런 위험한 관계에 빠졌는지. 왜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 수밖에 없었는지. 동생의 남편을 어떻게 자살로 이르게 했는지. 《여동생과 나》는 니체가 예나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 때 쓴 책이다.
책 《여동생과 나》의 광고 중에서...
니체가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 때 쓴 자서전이라고 알려진 《여동생과 나》라는 책에서, 니체가 여동생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눴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월터 카우프만은 각종 증거를 제시하며 그 책 자체가 위작임을 밝혀냈다. 그 책의 실제 저자는 '새뮤얼 로스[55]'로,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사기꾼이었다. 그는 다른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도 빌려, 비슷한 위작을 만들었고 그렇게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던 전과범이다. 그런 사실이 일찍이 밝혀졌음에도 지금도 영국과 미국에서는 《여동생과 나》가 표지에 사기꾼의 이름이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로 적힌 채,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물론, 방대한 문헌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출간하여 현재 정본으로 평가받는 '비평판 니체 전집'에서는 이 책을 당연히 포함시키지 않는다.

니체의 자서전은 《 이 사람을 보라》 단 한권 뿐이며, 이 책에서 니체는 자신의 유년기와 가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식으로 악평을 써놨다. 거기다가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를 싫어했는데, 바로 니체의 여동생이 그 반유대주의자였다.

4. 관련 강의 영상

[navertv(19450214)]

5. 영향력

니체는 20세기 지성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며, 그의 사상은 현대에도 그 적시성으로 인해 여전히 철학 담론의 중심에 서 있다. 경직된 학문들은 니체의 영향으로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로 넘치게 되었다. 이성에서 감성과 그 표현으로, 주류에서 그간 외면받아왔던 비주류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옮겨갔으며, 이들은 수많은 이론과 사조를 터놓았다. 이는 철학에만 그치지 않고 정신사와 문화사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니체는 예술가로 이해되었다. 니체 사후에 학계는 그에 대해 침묵했으나 1940년 전후 하이데거에 의해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 전통으로 등재된다. 이후 1960년대 프랑스에서 니체는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 이때, 니체의 사상은 철학 이외에도 사회학, 신학, 심리학, 문학, 음악 그리고 조형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수용되면서 20세기의 주요 철학자로 우뚝 떠올랐다.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의 그림자를 밟은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니체만 아는 니체'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니체가 모르는 니체'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 헤겔 이후에 새로운 철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근거였다. 그 답변들이 1980년대 이후 국내 학자들에게도 적극 수용되었다. 하이데거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은 니체와 함께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호출했다.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를,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그리고 질 들뢰즈는 니체를 불러냈다. 이 탈근대 사상가들은 저마다 다른 무기를 통해 유럽 모더니즘의 척추인 기원과 중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을 적극 수용하여, 선형적이고 연속적인 역사 인식을 비판한다. 대신 우연, 단절, 투쟁을 통해 역사를 독해하며 권력과 지식의 관계, 그리고 주체화에 대해 탐구했다. 데리다는 니체를 해체적 해석학의 선구자로 니체를 평가하며, 현전의 형이상학과 로고스 중심주의를 공격한다. 그는 해체(또는 탈구축)를 통해 전통 형이상학이 상정하는 실체,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고, 음성언어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암묵적인 전제를 텍스트 내부로부터 폭로하였다. 들뢰즈는 기존의 서양철학사를 새롭게 읽어내며 차이와 생성의 존재론을 구상한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등의 개념을 헤라클레이토스 전통의 생성철학으로 재구성했다.

니체는 지금도 다양한 모습으로 세계 정신사에 등장하고 있다. 현대 정신사의 최전선이나 역사적 사회적 현장에 니체가 나타나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가 해석되어 나타나는 모습은 매우 다양해서 언뜻 보기에 그의 사상이라 단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이성적 권위를 해체하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 가운데는 서양 근대 문명의 병리 현상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56], 자본주의, 인간 왜소화 현상 등 서양 근대 이념과 제도, 근대 문명을 비판하는 모습도 있고, 권력화되고 세속화된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있다.

니체를 읽는 시각은 다양하다. 점차 속물화되고 천민화되는 현대 인간에게서 정신적 깊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주창자로 니체를 읽기도 하고, 인간 영혼의 내부를 최초로 심도 있게 해부한 현대 심층심리학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떤 이들은 니체를 인간 사유의 한계를 깨뜨리며 사유 기호의 자유로운 놀이 세계를 열어 놓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보기도 하며, 이전에 몰랐던 인간의 강인한 면모를 부각시키고 개별자로서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라고 주장한 점에세는 현대 철학의 아버지이자, 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우주적 무아(無我)를 주창함으로써 자기 자각을 추구하는 서구적 불교사상으로 읽기도 한다.[57]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니체를 자신들의 지적 선구자로 제시한다. 여기서 니체가 비체계적 관점주의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였음을 상기하자. 니체가 제시하는 주제들 중 몇몇은, 그들의 관심사와 일견 유사성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니체의 특성상 포스트모던 철학만이 그에 후계자라고 자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니체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깨쳤다.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는 니체의 반이성주의적 성향을 계승하면서 전통적 진리에 대해 비판하는 니체를 원하였고,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강조하는 니체를 원하였다. 그들은 니체 철학의 주제인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 허무주의, 위버멘쉬 등에 초점을 맞춰 니체의 텍스트들을 해석의 전거(典據) 또는 대상으로 삼았고, 니체를 각자의 철학적 입장을 옹호하는 데 이용했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의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의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니체가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제1장 中
음악에서는 지금까지 약 219명의 작곡가가 420개 작품에서 니체의 텍스트나 시에 음악을 붙여 작곡하거나 그의 음악 이념 혹은 예술정신에 영향을 받으며 작곡했다. 니체의 주저 제목을 그대로 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작곡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프레더릭 딜리어스(F. Delius), 구스타프 말러, 안톤 베베른, 카를 오르프, 파울 힌데미트 등 수많은 작곡가가 니체의 기독교 비판이나 삶의 예술, 혹은 극복의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작곡했다. 또한 불협화음을 해방시킴으로써 무조음악을 창시한 아르놀트 쇤베르크도 니체와 친근한 거리에 있었다. 표현주의 음악을 선도했던 그는 음열 구성에서 복잡성이나 점묘성을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12음 기법을 체계화하는 ‘신음악(Neue Musik)’을 주도하며 그의 제자인 베르크나 베베른에게 영향을 미치는 등 20세기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는 현대미술의 탄생에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아르 누보의 독일적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유겐트스틸(Jugendstil)의 잡지 <판(PAN)>은 그 정신적 이념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져왔고, 이 양식을 ‘차라투스트라-양식’이라고 불렀다. 또한 움베르토 보초니(U. Boccioni), 지노 세베리니(G. Severini), 카를로 카라(C. Carrà), 루이지 루솔로, 자코모 발라(G. Balla) 등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들은 니체 사상에 나타난 삶의 역동성을 기반으로 기계 문명이나 거대 도시, 젊음, 운동, 힘, 속도 등 새로운 시대의 역동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초래한 서양 문명을 비판하며 합리적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회의를 품고 삶의 개혁을 추진하며 일상의 예술작품을 보여준 반(反)예술운동으로서 다다이즘도 실상 니체의 그늘에 있었다.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가브리엘레 뮌터(G. Münter) 등 청기사파 그룹의 표현주의 작가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L. Kirchner), 에리히 헤켈]E. Heckel) 등 다리파 화가들은 그 예술 모임의 명칭을 <차라투스트라>에게서 빌려 왔다. 이들의 뒤를 이어 나온 뭉크(E. Munch)는 시대적 불안이나 병리 현상 및 그것을 극복하는 빛과 힘, 에너지의 모습을 형상화했고, 딕스(O. Dix)는 전후(戰後) 일상의 어두운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추의 미학을 표현주의적으로 묘사했다.

니체는 더 나아가 초현실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자아의 생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경련의 아름다움을 그려냈고, 몸의 리비도가 정신화되어 세계로 유출되는 과정을 수수께끼 같은 영상적 언어로 표현한 살바도르 달리는 아리아드네, 마스크, 기만, 관점주의, 가치전도, 놀이 등 니체적 주제를 변주하며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그려냈다. 조르조 데 키리코(G. de Chirico)는 니체에 의존해 자신의 ‘형이상학적 회화’를 만들어냈으며, 막스 에른스트(M. Ernst)는 가면과 정신을 통해 인간의 이면을 탐구했고, 안드레 마송(A. Masson)은 생성소멸의 과정 속에서 인간 존재의 자각 모습을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음악과 연극, 미술의 영역을 넘나들며 행위의 자발성이나 즉흥성, 즉 해프닝을 통해 기존의 인습적 형식 예술을 깨뜨리고 비형식적 현실을 찾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플럭서스 운동 역시 니체적 영감을 조형한 것이었다. 현대무용의 새로운 무대도 니체적 영향 아래 펼쳐졌다. 현대무용을 창시한 이사도라 덩컨은 니체를 ‘최초의 춤추는 철학자’라고 부르며 <차라투스트라>를 평생 자신의 침대 곁에 놓고 보았으며, 니체에게서 신체의 자연성, 몸의 긍정, 그리스적 세계관, 자유정신을 체현하는 몸의 율동을 얻었고 이를 통해 현대 무용의 문을 연 것이다. 그녀는 기존의 무대에서 벗어나 바다로 나가 춤을 추거나 그리스 신전을 찾아가 춤을 추었고, 전통적 발레 형식을 벗어나 벌거벗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자유로운 신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각성된 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이와 동시에 우주의 춤에 인간이 참여한다는 ‘운동의 합창’ 개념을 만들고 음악 기보법을 최초로 정립한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그의 제자이자 ‘무(無)음악의 무용’이라는 표현주의 무용을 만든 마리 뷔그만(Mary Wigman), ‘열린 장’의 개념으로 ‘새로운 춤’을 만든 포스트모더니즘 무용의 아버지 머스 커닝엄 등도 니체적 실험 정신의 표현자로 볼 수 있다. 커닝엄은 무용에서 우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춤의 주제, 주인공, 사건을 떠나 ‘춤의 본질’ 자체에 눈을 돌리게 했다. 몸의 긍정이나 자유정신, 자유로운 움직임이나 우연의 강조 등 현대 무용의 탄생 과정이나 그 전개 과정 역시 니체와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 무용의 문을 연 최승희 역시 일본의 이시이 바쿠에게서 무용을 배웠는데, 그 역시 니체주의자 마리 뷔그만의 표현주의의 우산 속에 있었다. 문학에 끼친 니체의 영향은 너무 지대한 것이어서 소수의 작가만이 그의 영향권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독일 문학에서는 자신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를 니체적 소설이라고 부른 토마스 만이나 니체의 미학적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은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특성 없는 남자>의 저자인 로베르트 무질 등이 있으며, 토마스 만과 동시대에 활동한 헤르만 헤세도 니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영미 문학에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D. H. 로렌스, 제임스 조이스 등이, 프랑스 문학에서는 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앙드레 말로와 같은 작가가 있고, 이탈리아와 그리스 문학에서는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 d'Annunzio)나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T. Marinetti),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이, 러시아 문학에서는 막심 고리키 상징주의 작가 안드레이 벨리(А. Белый, A. Bely) 등이 있었다. 니체는 현대의 심층 심리학이나 다양한 심리치료이론이 탄생하고 형성되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나 카를 융 분석심리학, 알프레드 아들러 개인심리학, 오토 랑크(O. Rank)의 의지심리학 등 인간 영혼의 내면 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시도한 심층심리학의 탄생 역시 니체의 영향이 있었다. 스스로를 위대한 심리학자로 규정하며 서양 정신사 전체를 해체하고 이를 심리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니체의 작업은 인간 영혼의 내면을 탐색하는 수많은 심리학적 자원을 남겼다. 니체사상은 현대의 심층심리학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조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빅토르 프랑클 의미치료, 어빈 얄롬(I. Yalom)의 실존적 심리 치료, 아헨바흐(G. Achenbach)의 철학 실천(철학 상담), 임상 철학 등이 형성되고 발육되는 데도 풍부한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또한 철학 영역에서도 실존주의, 해석학, 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페미니즘 등 현대사상의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니체의 정신적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하이데거 야스퍼스, 뢰비트, 핑크와 같은 실존철학자는 니체에게서 인간의 실존과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단서를 발견했고,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같은 비판이론가들이나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등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 더 나아가 사라 코프만, 브롱델, 이리가레, 엘렌 식수 등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서양 근대의 병든 문명을 비판하거나 새로운 탈근대적 사유문 법을 찾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이후의 인간의 모습을 진단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중심에도 니체의 마지막 인간과 극복인 사상이 놓여있으며, 페터 슬로터다이크(P. Sloterdijk)의 현대사회의 문화투쟁론 및 자기 긍정의 언어학으로서의 복음론에도 니체는 여전히 진행형의 이념 논쟁을 제공해 주고 있다. 니체는 서양 지성사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한국에도 깊이 침윤되기 시작했다. 니체와 한국의 중요한 만남 가운데 하나가 독일 바이마르에서 일어났는데, 예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던 안호상이 1928년에 철학자 오이켄의 미망인과 함께 니체문서보관소(Nietzsche-Archiv)를 방문해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Elisabeth Förster Nietzsche)를 만났던 것이다. 안호상은 엘리자베스의 안내로 니체의 유고를 보았고, 이때 니체의 위대성을 느끼며 니체를 한국에 소개하기로 약속했다. 귀국 후 1935년에 그는 < 조선중앙일보>에 7차례 연재형식으로 <니-최 부흥의 현대적 의의>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에 니체를 소개하겠다는 니체 여동생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후일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 교육의 초석을 놓았으며 한국에 니체를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니체가 처음 소개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1909년 박은식이 주필로 있는 <서북학회월보>에서였다. 여기에 실린 작자미상의 ‘윤리총화(倫理叢話)’라는 글에서 ‘니체주의’는 ‘톨스토이주의’와 비교되었는데, 전자는 자애(自愛)를 강조하는 개인주의를, 후자는 타애(他愛)를 강조하는 이타적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1893년 이후 일본의 니체 담론과 1902년 이후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와 왕궈웨이(王國維)의 니체 논의는 모두 사회진화론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이러한 동아시아의 지성사적 논의가 개화, 자강, 애국 계몽 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대한 제국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그 후 니체가 다시 다루어진 것은 1920년 천도교의 월간지 <개벽>의 창간호에서였다. 니체는 1920년대에 김기전, 박달성[58], 이돈화, 김억, 이대위 등 지성인에 의해 사회진화론, 개인과 사회, 개인(자아)해방과 사회 평화 등 사회철학적 물음 속에서 소개되면서 개화, 근대화, 항일 운동, 신문화 운동과 연관되어 한국의 정신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초기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니체는 민족주의적 의상을 입은 한국적 니체였고, 식민지 시대의 시대적 고민을 넘어서려는 강력한 힘의 철학, 의지의 철학을 표명하는 사회철학자로서 니체였다. 이후 시대를 거듭하며 전원배, 박종홍, 하기락 등에 의해 니체가 체계적으로 소개되고 철학적으로 논의되었다.

1930년대에는 니체사상을 토대로 김오성(본명 김형준)이 문학이란 새로운 능동적 실천적 창조적 인간 유형을 창조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보며 ‘네오휴머니즘’의 문예 비평 사상을 주창했다. 이 당시 문학의 영역에서 니체 수용의 또 하나의 결실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시인 그룹 ‘생명파’의 탄생이었다. 서정주 유치환 오장환 윤곤강 등 생명파 시인들은 생명·의지·초극·휴머니즘이라는 공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니체 철학의 한국적 시적 변주였던 것이다. 김오성의 네오휴머니즘은 이후 김동리의 ‘제3휴머니즘’으로 이어지게 된다.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의 발굴에 있다는 김동리의 순수문학론에는 근대성 비판, 자기극복, 인간성의 발굴, 아름다운 삶의 조형 등 니체 사상이 깃들어 있는데, 이는 195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문학계의 이념적 지형도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 90년대를 지나며 정동호, 이진우와 원광대 김정현 교수를 비롯해 독일에서 니체를 연구한 연구자들이 배출되고, 여러 연구자의 노력으로 세계 표준판 <니체비평전집>이 출간되었다. 이러한 연구 흐름 가운데 다양한 니체 사상의 주제가 다루어지고 새로운 해석이 나오게 되었으며, 여러 학문 영역을 가로지르며 현재까지 니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6. 기타



[1]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235. 강조는 책 내에서의 강조. [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로서, 원문은 Man muss noch Chaos in sich haben, um einen tanzenden Stern gebären zu können. [3] 직역하면 '죽이지 않는 것'이지만 '못하는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문은 우상의 황혼에 나오는 말로서,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이 사람을 보라』에도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4] 웹상에는 '괴물'을 '악마'로 바꾸어 놓은 인용도 자주 보인다. 하지만 독일어 Ungeheuer은 "괴물, 괴수, 난폭한 인간. 거대한 것, 초대형"을 뜻하지, 악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어로 악마를 뜻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Teufel, Kụckuck, Satan, Pfeifer 등이 '악마'로 쓰인다. [5]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말로서, 원문은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e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6] Ohne Musik wäre das Leben ein Irrtum. [7] Von allem Geschriebenen liebe ich nur das, was einer mit seinem Blute schreibt. Schreibe mit Blut: und du wirst erfahren, daß Blut Geist ist. [8] Der Mens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soll. [9] Gefährlich leben! Baut eure Städte an den Vesuv! (『즐거운 학문』 283절 Vorbereitende Menschen.) [1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中에 비슷한 맥락의 내용은 나오는데 '구체적'인 독일 원문은 확인 되지 않는다. 아마도 니체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는 요약문을 마치 니체가 했던 말인 것처럼 쓴 것처럼 보인다. [11] denn wer von seinem Tage nicht zwei Drittel für sich hat, ist ein Sklav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83절) [12] "Man verdirbt einen Jüngling am sichersten, wenn man ihn anleitet, den Gleichdenkenden höher zu achten als den Andersdenkenden." (아침놀 297절) [13] Jeder tiefe Denker hat mehr Angst davor, verstanden zu werden als missverstanden zu werden. [1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15] Der Ekel vor dem Schmutze kann so groß sein, daß er uns hindert, uns zu reinigen – uns zu »rechtfertigen«. (『선악의 저편』 119절) [16] 유고(1888년 봄-여름, KSA 16 (40 〈7〉))에 나오는 말이다. 철학자가 진리를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면 매를 맞아야(!) 된다면서 하는 말이다. 원문은 Die Wahrheit ist häßlich. Wir haben die Kunst, damit wir nicht an der Wahrheit zu Grunde gehen. [17] 『아침놀』 204절에 나온다. 주식시장과 그곳에 있는 돈에 목숨 건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원문은 und was man ehedem "um Gottes willen" that, thut man jetzt um des Geldes willen. [18] Das ist ein Künstler, wie ich Künstlerliebe, bescheiden in seinen Bedürfnissen: er will eigentlich nur zweierlei, sein Brot und seine Kunst. (우상의 황혼) [19] wir aber wollen die Dichter unseres Lebens sein, und im Kleinsten und Alltäglichsten zuerst. (Die fröhliche Wissenschaft, 299.) [20] "Es ist nicht ein Mangel an Liebe, sondern ein Mangel an Freundschaft, der zu unglücklichen Ehen führt." [21] 원문은 라틴어로 "Aut liberi aut libri." 아이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책을 지을 것인가? 라는 뜻으로서, 아이를 가지면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어려우니 독신으로 살지 말지를 결정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말을 유고(1885년 가을 ~ 1887년 가을, 2(22))에서 1번, 우상의 황혼(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27)에서 1번 말한다. [22] In seinem Freunde soll man seinen besten Feind haben. Du sollst ihm am nächsten mit dem Herzen sein, wenn du ihm widerstrebst. (Also sprach Zarathustra, Vom Freunde) [23] 이 말은 『우상의 황혼』에 나오는 말로써, 원문은 이렇다. "Hat man sein warum? des Lebens, so verträgt man sich fast mit jedem wie?" 여기서 물음표는 바로 앞의 단어를 강조하는 용법으로 쓰였다. 직역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모든 삶의 '방식'을 견딜 수 있다." 한국에서는 빅터 프랭클이 인용한 니체의 말로 잘 알려져 있다. [24] wer heute am besten lacht, lacht auch zuletzt. (우상의 황혼) [25] Der Vorteil des schlechten Gedächtnisses ist, daß man dieselben guten Dinge mehrere Male zum ersten Male genießt.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580) [26] Reife des Mannes: das heißt den Ernst wiedergefunden haben, den man als Kind hatte, beim Spiel. (『선악의 저편』 94절) [27] 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해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니체는 이 부분만 의도적으로 라틴어를 사용했다. [28] Amor fati: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 Ich will keinen Krieg gegen das Häßliche führen. Ich will nicht anklagen, ich will nicht einmal die Ankläger anklagen. Wegsehen sei meine einzige Verneinung! Und, alles in allem und großen: ich will irgendwann einmal nur noch ein Jasagender sein! (『즐거운 학문』 4부 276절) [29] War das das Leben? Wohlan! Noch einmal! (Also sprach Zarathustra, Vom Gesicht und Rätsel) [30] die Frage bei allem und jedem: »willst du dies noch einmal und noch unzählige Male?« würde als das größte Schwergewicht auf deinem Handeln liegen! (Die fröhliche Wissenschaft, 341. Das größte Schwergewicht) [31] 원문: Jeder tiefe Denker fürchtet mehr das Verstandenwerden als das Mißverstanden-werden. Am letzteren leidet vielleicht seine Eitelkeit; am ersteren aber sein Herz, sein Mitgefühl, welches immer spricht: "ach, warum wollt ihr es auch so schwer haben wie ich?" [32] Allein gehe ich nun, meine Jünger! Auch ihr geht nun davon und allein! So will ich es. Wahrlich, ich rate euch: geht fort von mir und wehrt euch gegen Zarathustra! Und besser noch: schämt euch seiner! Vielleicht betrog er euch. (...) Man vergilt einem Lehrer schlecht, wenn man immer nur der Schüler bleibt. Und warum wollt ihr nicht an meinem Kranze rupfen? (...) Nun heiße ich euch, mich verlieren und euch finden; und erst, wenn ihr mich alle verleugnet habt, will ich euch wiederkehren. (Also sprach Zarathustra, Von der schenkenden Tugend) [33] "니체의 말"은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쓴 저서로, 니체의 여러 저서에서 명언 같은 말들을 문맥의 고려 없이 떼어 모아놓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만든 책이다. 한국에는 여기서 여러 말들이 니체의 명언인 양 퍼졌지만, 문맥을 고려하지 않거나 아예 오역으로 인한 잘못된 해석이 많으니 열람 시 주의해야 하며, 이 책의 글 그대로를 니체의 명언으로 인용하면 안 된다. [34] 1766 ~ 1817, 프랑스 혁명기의 낭만주의 작가. [35] 당시의 여성 해방 논조에 대해 한 말이다. [36] 묘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추종자들에게 한 말이다. [37]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의 첫 저술로서,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투쟁과 조화로 설명하고 있다. [38] 4년에 걸쳐 4편의 글을 모은 책이다. 1.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1873) 2.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1874) 3.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1874) 4.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1876) [39] 참고로, 이 책 제목의 영문 번역은 'The Gay Science'이다. 여기서 Gay는 '즐거운'이라는 의미지, '동성애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1950년대까지는 Gay가 '즐겁다'는 의미로 쓰였다. [40] 니체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책.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4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해설서. 차라투스트라는 꽤 난해하지만, 이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덜 난해하다. 이 책은 아홉 장으로 나뉘어 기술되었는데, 첫 장에서 실체론을 비판하며 시작된다. [42] 도덕적 개념의 형성사를 다룬 책. <선악의 저편>에서 말한 "귀족 도덕과 노예도덕"을, 좀 더 상세하게 논문형식으로 쓴 글이다. [43] 기존의 모든 가치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를 펼치는 책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모든 확신에 반박하는 자신을 두고 '망치를 든 철학자'로 표현하고 있다. 제목 '우상의 황혼'은 바그너의 악극인 니벨룽의 반지의 제3부 악장극 <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의 패러디이다. [44] <도덕의 계보>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 책으로, 그리스도교는 비판하지만 예수는 비교적 고평가하는 점이 이채롭다. [45] 1888년에 저술했으나, 1894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46] 아모르 파티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쓰기로 쓰여진 니체의 철학적 자서전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과도하게 칭찬하는데, 그 설명이 니체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기 때문에 니체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해설하는 부분도 있어서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준다. 책의 제목은 성경 구절의 패러디다.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옷을 입은 채로 나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다!' 하였다." < 요한복음> 19:5 [47] 쓰여진 연도는 1888년, 최초로 출판된 연도는 1908년이다. [48] 1888년 말에 쓴 마지막 저서이나 1889년 초에 출간되었다. [49]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유고를 편집하여 내놓은 책. 1960년도 이후부터 니체의 공식적인 저서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50] 서울대학교 박찬국 교수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부터 시작하면 절대로 안 돼요. 몇 쪽 안 읽고 좌절해요. 시적인 비유가 많아 니체 전공자에게도 어려운 책입니다. 니체가 난해한 사상가라는 인상은 이 책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해요. 니체를 이해하고 싶다면 『도덕의 계보학』, 『안티 크리스트』, 『비극의 탄생』 등 논문식으로 쓴 책부터 시작하세요. "라고 말했다. # [51] 4권의 책이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즐거운 학문〉, 〈우상의 황혼〉을 말한다. 니체의 핵심 주장을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52] 다만 《이 사람을 보라》는 입문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난해할 수 있다. 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이런 글을 썼는지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다. [53] 이밖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니체의 철학은 주로 쇼펜하우어에 대한 반응으로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으며, 쇼펜하우어를 논박하는 과정에서 니체의 철학도 뚜렷하게 정립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볼테르의 『캉디드』를 읽는 것도 니체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볼테르의 책을 만나고 나서부터이기 때문이다.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는 삶의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낙천적인 태도'를 '현실적인 태도'로 승화시키는데, 이 책을 통해 니체 철학에서의 '긍정'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볼테르가 『캉디드』를 지은 의도는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지만, 니체는 『캉디드』를 그런 식으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운명에 당당히 맞서는 주인공 캉디드는 이제 '미래'를 위한 낙천주의자가 아니라 '현재'를 위한 낙천주의자가 되었다는 소설로 보았던 것. [54] 다른 출판사에서는 '선악을 넘어서', '선악의 저편'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55] 1893~1974. 유태인이라고 하지만 본명도 알려지지 않았다. [56] 특히 니체는 아나키즘중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스트였던 막스 슈티르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유일자와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은 정말 많은 면에서 매치가 많이 된다. 물론 이에 대해서 막스 바진시키등의 아나코 코뮌니스트들은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와 막스 슈티르너가 말한 유일자는 그 개념부터가 다르다며 둘의 연관성을 부정한 적이 있다. [57] 니체의 사상 전반적인 색채를 잘 들여다보면 불교와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서양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실재와 이원론을 부정했고, 욕망과 고통을 극복한 자유로운 상태를 지향했다. [58] 독립 유공자 박달성과 동명이인이다. [59] Motette: 성서 구절을 다성적으로 다룬 무반주 악곡을 말한다. [60] 차라투스트라는 독일어 발음 음차이고 이 인물에 대한 제대로된 한국어 표기는 자라투스트라다. 여기에서는 니체의 책에 나오는 인물을 다루므로 독일어 발음 음차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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