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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4:14:44

프레드(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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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네르바흐체 SK 소속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프레드(199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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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플루미넨시 FC
Fluminense FC
파일:external/s2.glbimg.com/30530383922_37ef521561_o_xFXiBVD.jpg
<colbgcolor=#8c2a3c><colcolor=#ffffff> 이름 프레드
Fred
본명 프레데리쿠 샤베스 게지스
Frederico Chaves Guedes
출생 1983년 10월 3일 ([age(1983-10-03)]세)
브라질 테오필루오토니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신체 186cm / 체중 78kg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8c2a3c><colcolor=#ffffff> 선수 아메리카 FC (2003~2004)
크루제이루 EC (2004~2005)
올랭피크 리옹 (2005~2009)
플루미넨시 FC (2009~2016)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6~2017)
크루제이루 EC (2018~2020)
플루미넨시 FC (2020~2022)
행정 플루미넨시 FC (2022~ / 스포츠 기획이사)
국가대표 39경기 18골 ( 브라질 / 2005~2014)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선수. 현재 플루미넨시 FC 스포츠 기획이사를 맡고 있다. 브라질 전국 리그 역대 최다 득점 2위이자 브라질 전국 리그 득점왕상 역대 최다 수상자이다. 하지만 2014 월드컵 참사의 원흉이 된 공격수이기도 하다.

2. 클럽 경력

2.1. 데뷔 초

2001년 고향 구단인 아메리카-MG에서 축구를 시작하였고, 2003년 1군팀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프로 데뷔 즉시 브라질 리그 역대 최단 시간 득점을 기록했다. 당시 프레드가 세운 기록은 3.17초다.

이후 2004년에는 크루제이루 EC로 이적하였다. 이때 프레드는 브라질 전국컵 득점왕에 등극, 역대 브라질 전국컵 단일 시즌 최다인 14골[1]을 넣었다. 여기에 모든 대회 총합 43경기 41골을 넣는 대활약을 보이며 유럽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2.2. 올랭피크 리옹

2005년 이적료 1500만 유로를 낸 리그앙 올랭피크 리옹으로 이적하였다.

이적 후 첫 시즌에는 14골을 넣으며 프랑스 리그 득점왕 2위에 올라 우승멤버가 되어서 얼핏 보면 리옹의 기대치를 충족한 거 같지만 이 시즌 득점 1위는 그 다음 시즌에도 득점왕을 차지한 파울레타였는데 이 시즌에는 21골이나 넣어 무려 7골 차이나 난 걸 보면 프레드가 그렇게 잘 했다고 보기에도 어렵다. 게다가 단독 2위도 아니고 피터 오뎀윙기와 같은 공동 2위인데 심지어 프레드는 31경기에 나왔고 오뎀윙기는 26경기에 나왔으니 경기수 대비 득점 비율은 프레드가 오뎀윙기에게 밀린다.

두 번째 시즌 역시 부상이 있는데도 2자리 수 득점을 기록해서 공동 6위를 기록했다고는 하나 전 시즌보다 줄어든 11골에 그쳤고, 11골을 넣은 선수가 프레드를 포함해서 무려 6명이나 되었다.[2]

세 번째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브라질 대표팀에 소집되어 부상을 당하고 와서 이에 리옹은 대체자로 유럽선수권 대회 득점왕 출신 밀란 바로시를 영입했는데, 바로시는 부진하며 프레드의 자리를 직접 위협한 건 아니었고, 대신 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던 유망주인 카림 벤제마가 바로 이때부터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했고[3] 결국 프레드는 주전 경쟁에서 밀린 채 2009년 2월 26일 브라질의 플루미넨시로 이적하였다.[4]

리옹에서 첫 시즌과 두번째 시즌에는 그럭저럭 활약을 보인 것은 맞지만, 어차피 리옹은 이 당시 리그를 지배하던 전성기 때라 프레드의 역할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고, 리그에서의 모습도 리옹에서 기대한만큼은 아니었으며, 리옹이 리그보다 더욱 갈망하던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는 4시즌 동안 21경기에서 단 6골을 넣는 부족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1500만 유로를 투자한 리옹의 기대치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성적을 보자면 첫 시즌에는 조별리그 통과가 확정된 상황에서 로젠보리와의 홈경기에서 인저리 타임 결승골, 16강 PSV와의 홈경기에서 3-0으로 이기는 상황에서 90분에 골을 넣었고, 두번째 시즌에는 첫번째와 두번째 경기인 레알 마드리드[5]와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선취 결승골을 넣으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후 무득점에 그쳤으며, 세번째 시즌에는 그 전 시즌 AS 로마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인 크리스티안 키부를 팔꿈치로 가격한 것에 의한 3경기 출장정지 징계 탓이 있긴 하지만 아예 무득점, 네번째 시즌에는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의 원정 경기에서 두 골을 넣은 것 외에는 득점을 하지 못했다. 특히 첫시즌 PSV와의 16강 홈경기에서의 골 이후로는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 모조리 무득점을 하며 첫 시즌 이후 리옹이 16강에 그치는데 일조한 것도 문제였다. 특히나 2006-2007 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AS 로마를 상대할 때는 리옹에게 승산이 있다고 예측 되는 의견도 있었고 원정에서 0-0 무승부로 그런 예측이 현실화 되는 듯 했으나 홈에서도 무득점을 하며 0-2으로 지며 탈락한 것도 당시 주전이었던 프레드의 책임이 상당하다.
그리고 리옹 시절에 구단과도 상당히 불화를 일으켰다. # #

종합해보면 리옹의 첫 번째 시즌과 두번째 시즌은 그럭저럭 잘 했다고 볼 수는 있으나, 이후에는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6]

2.3. 플루미넨시 FC

프레드는 리옹에서 실패에 가까운 모습으로 브라질 리그에 복귀 했지만, 브라질 리그에 복귀하자마자 바로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2012시즌에는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 + MVP + 득점왕을 모두 석권했다. 또한 2014시즌에도 득점왕에 올라 현재 플루미넨세 역대 최고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중이다[7].

프레드가 플루미넨세에서 세운 업적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2016시즌 여름이적시장을 통해 오랜 플루미넨세맨 생활을 종료하고, 남미 정상 등극을 노리는 아틀레티쿠-MG로 이적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플루미넨세 팬들이 아쉬워한 일이지만, 최근 그가 이적을 하게 된 이유는 구단 수뇌부 때문이었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들은 팀 재정 상황 악화로 프레드에게 더 이상 많은 연봉을 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는데, 선수를 내보내는 과정이 너무 추한 게 문제였다.

구단 운영진들은 프레드의 연봉과 나이 문제로 팀에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겼고, 운영진들이 감독에게 프레드의 뒷담화를 하면서 감독과 선수의 불화를 조장했다. 또한 프레드 연봉 정보 역시 외부에 노출했다. 당시 프레드는 2014 월드컵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대신 팀을 위해 무리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나한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아틀레티쿠-MG가 프레드의 영입 제안을 했고, 플루미넨세 운영진이 이적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미 의욕을 잃은 프레드는 이적협상 때 플루미넨세 운영진의 권유와 아틀레티쿠-MG측 제안에 전부 알겠다고 대답했고, 결국 사인을 하면서 아틀레티쿠-MG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프레드의 이적 후 플루미넨세 운영진은 '프레드는 플루미넨세 역대 최고 레전드'라고 발표하고 프레드는 이에 더 어이없어한다.

2.4.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많은 진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드의 활약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이적 후 첫 경기에서, 더비전인 크루제이루와의 대결에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프레드가 오기 전까지 아틀레티쿠-MG는 하락세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의 합류 이후 성적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비뉴와 훌륭한 콤비를 이루면서 득점왕 레이스에서도 1위를 달렸고, 끝내 디에구 소우자, 윌리암 등과 함께 공동득점왕(14골)으로 등극했다. 참고로 이는 커리어 3번째 브라질 전국 리그 득점왕상 수상이며, 전국 리그 득점왕상 역대 최다 수상 부분 공동 1위에 해당하는 업적이다.

2.5. 크루제이루 EC

2018 시즌에는 크루제이루로 복귀했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들어서 전성기가 끝났는지 전국 리그에서는 1자릿수의 골만 기록했다. 대신 2019 주리그에서는 12골로 경기 당 1골의 득점력을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2.6. 플루미넨시 FC

2020 시즌에 플루미넨시로 복귀했고 2021 시즌 주 리그에서 7경기 6골의 활약을 보인 것 외에는 리그에서 한자릿수의 골을 기록하며 은퇴를 준비했으며 현지 시각 2022년 7월 9일, 세아라 SC전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프레드는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통산 158골로 역대 최다 득점 2위를 기록 했다.

3. 국가대표 경력

2005년 4월 27일 과테말라와의 친선경기에서 교체선수로 A매치에 데뷔하였다. 2005년 11월 12일 아랍에미리트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2007 코파 아메리카 등에 출전하였다. 리옹에서 부상 등의 이유로 부진하고 이후 브라질 리그로 복귀한 사이 둥가 감독은 프레드를 외면하고 루이스 파비아누를 국가대표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 파비아누는 골을 쓸어담았고, 그렇게 프레드는 대표팀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둥가호의 실패 이후 마침 브라질 리그에서 프레드는 부활하기 시작했고, 2011년 대표팀에 복귀, 2012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득점한 이후 2013년에는 잉글랜드와의 두 번의 평가전에서 모두 골을 넣고 이탈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도 골을 넣는 등, 평가전에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했다. 특히 그의 대표팀 경력의 화룡점정은 2013 컨페더레이션스컵이었는데, 이탈리아를 상대로 두 번 골을 넣어 조 1위로 조별리그 통과에 기여했다. 이어 4강전인 우루과이전에서도 골을 넣어 결승으로 견인시켰고,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2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우승에 기여하였고, 실버슈와 대회 베스트 11상을 수상하였다[9].

3.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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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선 예상대로 주전 선발 스트라이커로 브라질 팬들의 기대를 받고 출전했으나, 카메룬 전에서 1골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브라질 주전 공격수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 역대 브라질의 월드컵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 중 이렇게 득점력과 경기력이 빈약한 선수는 없었고, 결국 독일과의 4강전에서 이 문제가 제대로 폭발했다. 전반전 내내 제대로 된 슛도 못 날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후반전에는 헐리우드 액션으로 페널티킥을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교체[10]당하면서 미네이랑의 비극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성난 브라질 관중들은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가장 무능한 스트라이커라며 야유를 보냈고[11], 한국에서는 프동국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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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의 부진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부상 탓이었다. 월드컵 전 많은 경기에서 득점행진을 달리며 브라질 주전 공격수다운 모습을 보여 프레드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왔으나, 하필 월드컵 직전 부상을 당해 본래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뛰었기 때문이다. 프레드 역시 이에 대해 "나도 안다. 내가 욕먹을만 하다는 것. 하지만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팀에도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내 피지컬 관리자는 쉬라고 했는데, 팀을 위해서는 계속 뛸 수밖에 없었다. 이게 부상을 촉진시킨 거다."라고 발언했다. 월드컵 시작 전부터 언론들은 그의 부상이 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월드컵이란 큰 대회를 앞둔 상황에서 자기 몸상태를 뒤로 하고 무리하게 소속팀 경기에 충실하다가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에서도 큰 부진을 보였다.

또한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프레드의 역할이 참으로 애매했다. 컨페드컵 브라질호에서 프레드는 주 스코어러였고 네이마르는 플레이메이커 역할로 그를 뒷받침해주며 경기를 폭넓게 조율하고 골까지 노리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1년 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주 스코어러는 네이마르가 되어버렸고 프레드는 앞 선에서 수비수들의 관심을 끌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프레드는 압박을 잘 거는 유형이 아닌 침투와 뛰어난 위치선정으로 골을 노리는 유형의 공격수였다. 그러나 네이마르가 부상으로 빠져서 왼쪽 윙어 자리가 비었고, 대체로 들어간 베르나르드는 결코 네이마르의 빈자리를 채울 수가 없었고, 중앙에서 볼을 운반해야되는 미드필더들은 죄다 투박한 타입인데다 독일의 미드필더진에 대항하기만도 벅차고, 거기에다 주 득점원이 되어주어야할 2선은 네이마르가 빠짐으로 인해 완전히 무게감이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프레드는 자신이 주 득점원인지, 아님 2선을 지원해줘야하는지 완벽하게 역할을 정하지 못했고, 스콜라리 감독도 아무런 방지책 없이 프레드 원톱, 2선 3명, 3선 2명, 포백으로 전술을 짰고 결국 독일전에서 참사가 일어났다.[12] 게다가 프레드가 월드컵 직전까지 활약을 하다 보니 상대팀들도 브라질의 전체적인 전술은 물론이고 프레드에 대해 분석을 하고 막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자 프레드도 힘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브라질 리그의 득점왕이라고 해도 자국에서 열리는 국제 무대에서라도 절대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는 사례가 되었다.[13]

선수 자체 능력은 호나우두 시절로 돌아가도 대표팀 내 공격진 옵션은 될 정도다. 실제로 프레드는 2006 월드컵 때도 대표팀 선수로 대회에 참가했다.[14] 그리고 호주전에서는 아드리아누가 이미 골을 넣어 리드를 잡은 상황에 교체로 들어가 막판에 골대를 맞고 흘러나온 공을 위치선정을 잘 해서 빈 골대에 밀어넣어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득점도 기록했다.

- 스콜라리 1기(2001.06~2002.06)
호나우두: 9골
히바우두: 8골

- 스콜라리 2기(2012.12~2013.08 기준)
프레드: 9골
네이마르: 7골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같이 보기

1 지다 · 2 카푸 · 3 루시우 · 4 주앙 · 5 에메르송 · 6 R. 카를루스 · 7 아드리아누 · 8 카카 · 9 호나우두
10 호나우지뉴 · 11 제. 호베르투 · 12 R. 세니 · 13 시시뉴 · 14 루이장 · 15 크리스 · 16 지우베르투 · 17 G. 시우바
18 미네이루 · 19 주니뉴 · 20 히카르지뉴 · 21 프레드 · 22 줄리우 세자르 · 23 호비뉴
파일:브라질 국기.svg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1 제페르송 · 2 다니 알베스 · 3 T. 실바 · 4 다비드 루이스 · 5 페르난지뉴 · 6 마르셀루 · 7 헐크 · 8 파울리뉴 · 9 프레드
10 네이마르 JR · 11 오스카 · 12 줄리우 세자르 · 13 단테 · 14 막스웨우 · 15 엔히키 · 16 하미레스 · 17 루이스 구스타부
18 에르나네스 · 19 윌리안 · 20 베르나르드 · 21 · 22 빅토르 · 23 마이콘
파일:브라질 국기.svg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1] 1위 2005시즌 프레드(14골), 2위 2002시즌 데이비드(13골), 3위 2010시즌 네이마르(11골) [2] 당시 리그 득점 1위 파울레타 15골, 2위 스티브 사비당 13골, 공동 3위 이스마엘 방구라, 마마두 니앙, 그라피테 12골, 공동 6위 프레드, 존 우타카, 아뤼나 댕단, 세이두 케이타, 프레데릭 피퀴온, 요한 엘만데르 11골 [3] 당시 벤제마는 리그 득점왕+MVP에 등극 [4] 토트넘 홋스퍼 SSC 나폴리와도 이적설이 있긴 했으나 무산 되었는데 당시의 두 구단은 리옹과 달리 챔피언스리그에 자주 나가던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당시의 프레드가 리옹보다 더 높은 위상의 유럽 빅클럽에서 적극적으로 영입할 수준은 아니었다는 뜻. [5] 이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지네딘 지단의 은퇴를 비롯해서 기존 스타 플레이어들이 노쇠하여 갈락티코가 해체 되어가는 과도기였으며, 이에 따라 챔피언스리그에서 부진하며 번번히 16강에서 바로 탈락하는 16강 마드리드로 조롱 받던 시기였다. 리옹이 그 전이나 이후 뉴갈락티코 첫번째 시즌까지는 레알 마드리드에 강했던 걸 생각하면 프레드가 특별히 하드캐리 해서 이긴 것도 아니다. [6] 종목은 다르지만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거금을 주고 영입한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첫번째와 두번째 시즌에 에이스에 가까운 좋은 모습을 보이고 월드시리즈 우승에까지 일조했으나 이후에는 부상 등으로 인해 부진 했는데, 보스턴 팬들과 세간에서 마쓰자카를 먹튀 취급 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7] 한 때 언론이 프레드 이후의 플루미넨세 에이스인 스카르파에 대해 '넥스트 프레드 시대의 얼굴'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8] 비공식 경기를 포함할 경우에는 3위, 비공식 경기 포함 역대 최다 득점자는 1950년대 레전드 와우두 마차두 [9] 득점 수는 골든슈 수상자인 토레스와 같은 5골 [10] 개막전 크로아티아전에서는 이를 통해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네이마르가 이를 성공시키며 결승골이 되었다. [11] 지금은 이 정도까지 비난 받지는 않는다. 참고로 브라질은 심할 경우 두 경기만 부진해도 감독이 경질될 정도로 사람들 성격이 급한 곳이다. 실제로 평균 감독 재직 기간이 고작 5개월이다. [12] 사실 결과적으로 우승을 하긴 했지만 2002 월드컵 때 스콜라리 감독은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와 너무나도 클래스가 차이가 나는 선수들인 루이장과 에디우손이라는 선수들을 뽑았다. 물론 지오반니 에우베르와 아모로수가 남미 지역예선에서 기회를 줘도 부진했고 루이장과 에디우손은 기회를 줬을 때 알짜배기 활약을 했었다. [13] 실제로 21세기 이후 브라질 리그 득점왕을 보면 브라질 리그 득점왕 등극을 한 이후에 유럽 빅리그에서 의미 있는 활약을 보낸 선수들이 거의 없고, 유럽에서 복귀한 노장들이나 아직 유럽 진출을 하지 않은 선수들, 유럽에서 실패하고 복귀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브라질 리그 득점왕을 해도 유럽 빅리그로 이적하지 못하고 중소 규모 리그나 아시아 리그로 진출하기도 한다. 2021 시즌만 해도 포르투갈, 러시아와 중국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빅리그에서 활약한 적이 없는 헐크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득점왕을 할 정도. 2002 시즌 브라질 리그 득점왕으로 세비야에서 맹활약 한 루이스 파비아누가 예외적이고, 2010 시즌 브라질 리그 득점왕 등극 이후 발렌시아에 진출해서 그럭저럭 활약하고 벤피카에서 맹활약 한 조나스의 경우에는 국대에서의 활약은 별로였다. [14] 다만 2006년 월드컵 때의 브라질 선수단이 결과적으로는 이름값은 높았을 뿐 속은 빈 강정이었다. 전술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호나우두는 점점 하락세를 타던 때였고 프레드보다 겨우 한두살 많은 아드리아누도 이미 이 시점에서 자만해지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슬슬 내려앉는 시점이었다. 그 결과가 지단 VS 브라질로 요약되는 8강 프랑스전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