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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7:43:55

주니뉴 페르남부카누

주니뉴 페르남부카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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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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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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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 ·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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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축구인
파일:주니뉴_페르남부카누_2020.jpg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이름 주니뉴 페르남부카누
Juninho[1] Pernambucano
본명 안토니우 아우구스투 히베이루 헤이스 주니오르
Antônio Augusto Ribeiro Reis Júnior
출생 1975년 1월 30일 ([age(1975-01-30)]세)
브라질 페르남부쿠주 헤시피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2] / 은퇴)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선수 스포르트 헤시피 (1993~1994)
CR 바스쿠 다 가마 (1995~2001)
올랭피크 리옹 (2001~2009)
알 가라파 SC (2009~2011)
CR 바스쿠 다 가마 (2011~2012)
뉴욕 레드불스 (2013)
CR 바스쿠 다 가마 (2013)
경영 올랭피크 리옹 (2017~2019 / 기술 이사)
올랭피크 리옹 (2019~2021 / 단장)
국가대표 40경기 6골 ( 브라질 / 1999~2006)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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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현역 시절 올랭피크 리옹 리그 1 7연패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며, 바스쿠 다 가마에서도 세리 A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등 각종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프리키커로서도 큰 명성을 떨쳤는데, 무려 77골로 역대 최다 공식경기 프리킥골 기록을 보유한 데드볼 스페셜리스트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스포르트 헤시피 유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CR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했다. 점차 출장 횟수를 늘려가며 준주전급 위치로 도약한 뒤, 96~00년도까지 6시즌 동안 바스쿠에서 활약했다. 이 후 2001-02 시즌에 신흥 강호로써 당시 대대적인 스쿼드 강화를 하던 올랭피크 리옹[3]으로 이적. 오자마자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리옹의 주전 자리를 꿰어찼고 이후 통산 8시즌, 2008-09 시즌까지 리옹의 핵심적인 에이스이자 주장으로서 리옹의 리그 1 7연패라는 업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리옹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PL이나 세리에 A같은 빅리그 클럽들에서 관심을 가졌으나 주니뉴는 "유럽 커리어는 리옹에서 끝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러브콜을 거절했다. 이후 정말로 본인의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리옹을 제외한 다른 유럽 구단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2008-09 시즌이 끝나고 노쇠화로 인한 기량 저하가 눈에 띄기도 했고 일반적으로 노쇠화한 스타 플레이어들이 으레 그렇듯이 말년에 거액의 수입+주전 보장을 위하여 카타르 스타스 리그의 알 가라파로 이적하였다. 카타르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2시즌 동안 카타르 리그에서 뛴 뒤, 자신의 실질적인 커리어 시작지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 리그의 바스쿠로 이적하였다. 바스쿠에서 거의 주급을 무료 봉사에 가까운 수준으로 적게 받았는데 본인이 일부러 그렇게 요구했다고 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꽃피울 수 있게 해준 바스쿠라는 구단에 대한 의리성 차원에서 한 일이라고 한다. 바스쿠에서도 2시즌 간 주전으로 뛰며 신체 능력은 저하했으나 죽지 않은 킥력과 킥 정확성을 바탕으로 여전한 활약을 뽐내다가 2012년 12월, 미국 MLS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하였다. 2013 시즌의 MLS에서도 38세의 나이로 현역으로 활약하다가 2014년 1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99년 3월,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뛰었는데, 당시 김도훈의 결승골로 대한민국이 브라질에 1-0으로 승리했다. 참고로 이 경기는 아시아 소속 국가대표팀이 브라질에 거둔 유일한 승리이다.

그러나 대표팀과는 거리가 멀어서[4][5][6] 메이저 대회에는 단골로 출전하지는 못했고, 2001년 소속팀의 부진 이후로 덩달아 평가가 낮아지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동명의 파울리스타에게 밀려 탈락하였다. 그 후 리옹에서의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주자 다시 대표팀에 콜업되기 시작했고, 서브 멤버였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에는 출전할 수 있었다. 당대 화려한 네임밸류의 선수들에게 밀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3차전인 일본전과 8강 프랑스전에 각각 출전하였다. 일본전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무회전 중거리슛으로 일본을 무너뜨리는 역전골을 득점하였다.[7] 대회 이후 주니뉴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국가대표와 인연이 없는 선수로 보이지만, 사실 세계 대회인 월드컵과 프리월드컵 격인 컨페더레이션스컵, 그리고 남미대륙 대회인 코파 아메리카까지 모두 출전해봤다.

3. 플레이 스타일


수비력이 준수하고 활동량이 뛰어난 올라운드 유형의 중앙 미드필더이다. 전형적인 브라질 선수 특유의 리듬으로 화려한 기술을 갖추면서 개인 능력을 보여주는 유형은 아니었고 박스 투 박스처럼 움직이면서 침투하거나 전반적인 플레이메이킹으로 중원을 조율하는 선수였다. 거기에 사기적인 킥력과 축구민족 브라질리언다운 테크닉도 갖춘 미드필더였고 킥력을 이용한 전방위적인 공격 지휘를 잘했다.


주니뉴의 최대 장점은 단연 프리킥. 축구 역사상 최고의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를 뽑으라면 웬만하면 탑 5 안에는 무조건 들어갈 정도다. 그의 데드볼을 처리하는 능력은 역대 최고 수준인데, 주니뉴 하면 역시나 상식을 벗어나는 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무회전 킥이 유명하지만 사실 무회전, 감아차기를 비롯한 축구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킥[8]을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구사한다. 보통의 선수들은 킥을 처리하는 방식이 대부분 정해져 있으나[9] 주니뉴는 데드볼을 처리하는게 프리스타일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프리킥 한정으로는 사기 캐릭터 그 자체였다.

이런 주니뉴의 프리킥 능력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바로 득점 기록인데, 현역 시절 프리킥으로만 무려 77골을 기록했다.[10] 프랭크 램파드가 아닌 이상 평범한 중앙 미드필더들이 선수 생활을 다 통틀어도 프리킥은 커녕 온갖 골을 다 합쳐봤자 어지간해서 70골 넘기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주니뉴의 가공할 킥력과 그 정확성을 엿볼 수 있다.

현대 축구에서 각광받는 전형적인 3선 플레이메이커 유형인데[11], 주니뉴의 주 활동시기에는 이러한 유형의 플레이메이커가 대세가 되기 전이라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선수라는 올드 축구팬들의 의견도 종종 보이곤 한다.[12]

4. 은퇴 이후

은퇴 후 3년 뒤인 2017년, 기술 이사로 8년만에 리옹에 다시 돌아왔다. 프리킥 쪽에서는 현역 시절 역대 최고로 인정받은 만큼 몇몇 축구팬들은 해당 분야에서 기여를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리옹의 차기 지도자로 유력시되고 있다.

프리킥 말고도 중앙 미드필더로써 경기 운영 능력 역시 탁월했던지라, 장래 지도자가 된다면 리옹의 중원에서 뛰고 있는 어린 선수들에게 큰 도움을 줄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2년 뒤인 2019년부터는 리옹의 단장직을 맡게 되면서 지도자가 아닌 축구 경영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1] 포르투갈어로 'little Júnior'라는 뜻으로, 보통 Júnior가 이름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많이 붙는 애칭이라고 한다. [2]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3] 많은 사람들이 리그 1에 대해서 잘 모르는지라 모나코나 리옹 등을 전통 강호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으나 리옹과 모나코 모두 당시는 신흥 강호들이었다. 특히나 리옹의 경우에는 2000년도 접어들어서 장 미셸 율라 구단주의 대대적 투자가 있기 전까지는 그저 2부 리그와 1부 하위권을 오가는 약체 팀이었다. 프랑스에서 전통 명문 구단이라 할만한 클럽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AS 생테티엔 정도. [4] 당시 브라질의 공격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등이 하나같이 전성기였을 무렵이라서 주니뉴는 발을 얹기 힘들었다. 플레이 스타일도 화려한 기술이나 스피드 같은 신체 능력이 아닌 키핑과 킥이 주 무기였는데, 호나우지뉴나 호나우두 등도 킥이 사기였다. 2012년까지의 프리킥 골들이다. [5] 특히 호나우지뉴는 커리어 통산 프리킥으로만 65골을 기록한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다. 물론 주니뉴의 골 수가 더 많지만 킥 하나만 보고 국대에 선발하기는 애매함이 있었다 [6] 설령, 중미로 출장을 한다고 해도 수비력에 있어서 에메르송 & 제 호베르투, 질베르투 실바 등을 넘어서기는 불가능하였다. 기본적으로, 4R을 뒷받침해야 하는데 공수면에서 주니뉴가 저들보다 좋다고 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7] 이 날 수없는 선방쇼를 벌였던 가와구치 요시카쓰 조차도 감탄했을 정도의 엄청난 위력이었다. [8] 장지현 해설에 의하면 킥의 구종만 7~8가지가 된다고 한다. [9] 호날두의 무회전, 베컴의 감아차기 등이 있다. [10] 이는 2023년 현재까지 깨지지않는 최다 프리킥 골 기록이다. [11] 수비력과 피지컬은 어딘가 아쉽고 스피드나 드리블 능력도 뛰어나지 않지만 엄청난 활동량과 유럽 최상위급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가진 주니뉴의 플레이스타일은 수비적인 부담을 덜 가져가면서 경기장 하프스페이스에서 활약하는 현대 축구의 메짤라 혹은 하프윙 역할에 정말 완벽히 최적화 되어있다. 당시에는 중거리슛 능력이나 프리킥만 무기로 하는 작은 육각형 미드필더라는 인식이 강했고 에메르손, 질베르투 실바, 카카, 호나우지뉴 어느 자리에서도 그가 마땅히 활약할 포지션이 없었다. [12] 정확히는 그 이후 3선 플레이메이커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피를로가 그보다 약간 뒷 세대의 선수다. 주니뉴가 커리어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갈 때 피를로는 전성기였고 3선 플레이메이커가 대세가 된 시점에서 그는 변방으로 가서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불태울 시점이었으니 묘하게 안 맞은 셈이다. [13] Juninho를 Jun In Ho로 띄어 읽으면 전인호로 읽히는 드립. 한때는 인터넷 상에서 비운의 한국계 선수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었다. [14] 2000년과 2001년 두 해 동안 바스쿠 다 가마에서 같이 뛴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