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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2:43:57

프레디 융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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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융베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아스날 FC 로고.svg

27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올로프 멜베리
(2004~2006)
프레디 융베리
(2006~2008)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2008~2016)
}}} ||
프레디 융베리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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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파일:ESM.png
}}} ||
스웨덴의 축구감독
파일:Screenshot_20230408_112151_Facebook.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프레디 융베리
Freddie Ljungberg
본명 칼 프레드리크 융베리
Karl Fredrik Ljungberg[1]
출생 1977년 4월 16일 ([age(1977-04-16)]세) /
스웨덴 스코네 주 비트시외
국적
[[스웨덴|]][[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직업 축구선수 ( 윙어 / 은퇴)
축구코치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할름스타드 BK (1994~1998)
아스날 FC (1998~2007)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07~2008)
시애틀 사운더스 (2009~2010)
셀틱 FC (2011)
시미즈 S펄스 (2011~2012)
뭄바이 시티 FC (2014~2015)
지도자 아스날 FC U-15 (2016~2017 / 코치)
VfL 볼프스부르크 (2017 / 수석 코치)
아스날 FC U-23 (2018~2019)
아스날 FC (2019~2020 / 수석 코치)
아스날 FC (2019 / 감독대행)
국가대표 파일: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75경기 14골 ( 스웨덴 / 1998~2008)

1. 개요2. 선수 시절
2.1. 클럽
2.1.1. 아스날 이전2.1.2. 아스날 FC
2.1.2.1. 아스날과의 이별
2.1.3. 웨스트햄 유나이티드2.1.4. 저니맨 생활과 은퇴
3. 국가대표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
5.1. 아스날 FC (감독대행)
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
7. 여담

[clearfix]

1. 개요

그는 경기를 뛸 때 모든 것을 쏟아붓는 헌신적인 선수이죠.
아르센 벵거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승부욕도 강합니다.
라르스 라예르베크

스웨덴 출신의 前 축구선수.

헨릭 라르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빅토르 린델뢰프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스웨덴 축구 선수이며 "적토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아스날에서 나간 뒤에는 J리그나 인도 슈퍼 리그등을 전전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인 아스날에서 뛸 당시에는 괜찮은 외모와 패션 센스로 꽤 여성팬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광고도 여럿 찍었다. 후술할 팬티 광고는 매우 유명하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2.1.1. 아스날 이전

자신의 청소년 시기에 뛰었던 클럽이자 스웨덴 리그 알스벤스칸의 소속팀인 할름스타드에서 데뷔한 그는 어린나이에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팀에게 우승컵을 안겨주는 등 재능을 뽐냈다. 4시즌 간 79경기 10골로 윙어로는 꽤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1.2. 아스날 FC

아스날의 무패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클럽의 최전성기를 함께한 레전드 선수 중 한 명이다.

더 큰 무대로 나가기 위해 4시즌 간 뛰면서 정이 들었던 할름스타드를 뒤로 하고 아스날의 감독인 아르센 벵거의 눈에 띄어 300만 파운드에 아스날로 이적하였다.[2] 등번호는 8번.

그러나 스웨덴에서 넘어온 그를 현지 잉글랜드 언론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 하였고, 데뷔전 상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기에 융베리에 대한 아스날 팬들과 융베리 개인 팬들의 우려는 끊이지 않았었다.[3] 이러한 우려와 걱정속에 융베리는 데뷔전에서, 그것도 무려 교체 출전 한 지 4분 42초 만에 골을 기록하였고 아스날의 다른 팀원들과 함께 팀의 3:0 대승을 이끌며 축구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프리미어리그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진에 빠지기도 했는데[4] 감독인 아르센 벵거의 도움과 본인의 적극적인 노력과 열정 등으로 자신의 축구인생에 찾아온 첫번째 위기인 부진을 극복하였고 이후 그는 아스날 내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나 01/02 시즌에는 컵대회 포함한 모든 경기에서 17골을 넣는 대활약을 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을 통해 융베리는 01/02 시즌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고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된다.[5]

주로 우측 날개로 기용되어 우측 풀백이었던 로렌과 아스날의 무패 우승 시절 오른쪽을 담당했다.

선수시절 융베리는 어디서든 팀의 공격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선수였다. 베르캄프, 앙리, 비에이라 등의 화려한 슈퍼스타들에 묻히는 경향이 있는게 사실이지만[6] 아스날이라는 클럽에서 그 둘과 함께 인기 선수로써 오랫동안 군림하였고 현재는 구너들에게 레전드 칭호를 받는 선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융베리는 아스날에서 9년간 선수 생활을 해왔던 선수이다.[7]

그렇게 아스날에서 뛰면서 FA컵과 커뮤니티 쉴드 등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에서 획득 할 수 있는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월드 클래스 윙어라는 명성과 함께 뱅거 체제 아스날의 최고 황금기를 만드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융베리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216경기 46골을 기록하며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선수로 아스날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외에도 융베리는 아스날에서 놀라운 활약을 선보이며 팀에게 영광스러운 2번의 리그 우승을 성사 시켰으며 당연히 그의 최고의 커리어는 두 말 할 필요없이 아스날 최고의 업적이자 뱅거 감독의 전성기인 PL 03/04 시즌의 무패 우승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서른 살을 넘어서고 라이언 긱스 안드레아 피를로등의 소수의 선수를 제외한 여타 선수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융베리 또한 기량 저하가 왔다. 융베리는 06/07 시즌에 유망주인 알렉산더 흘렙에게 밀리면서 말년에는 선발이 아닌 후보 선수로써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고 좀처럼 많은 기회가 오지 않았다.

뱅거 감독은 2007년 1월 겨울 이적시장 당시에 융베리의 이적 루머에 대해 입을 열었는데 " 물론 그에게 이적 제의가 온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그를 이적시장 목록에 올리지 않았다. 융베리의 경험과 태도로 봤을때 그는 아직도 아스날에게 있어 특별한 선수이며 나는 융베리를 아낀다"며 그를 두둔했지만...
2.1.2.1. 아스날과의 이별
결국 2007년 여름, 계약기간을 2년 남겨두고 아스날과 이별했다. 지난 7월 자신이 아스날에 올 때와 똑같은 금액인 300만 파운드의 이적료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 떠났다. 융베리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 2년 전 계약을 체결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새로운 경기장을 짓고, 세계적인 선수를 데려올 것이라고 말했다. "
"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스널이 많은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 (티에리)앙리가 떠났을 때 나도 이제 새로운 도전을 할 때라고 느꼈다. "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 만큼이나 프라이드가 강했던 그였기에 별로 그렇게까지 큰 미련은 없어 보였고, 이러한 점들이 자신이 선수로써 오랜 기간 동안 뛰었던 아스날을 미련없이 떠나기로 결심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떠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스날이라는 구단에 대한 자신의 섭섭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웨스트햄에 입단한 후 융베리가 아스날이 야망이 없다고 비판을 늘어놓자 당시 팀 동료였던 로빈 반 페르시는 "아스날에서 9년을 뛰었으면 좀 더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었다. 앙리의 이적을 자신의 변명으로 삼는 것은 좋지 못한 언사였다"고 반박하며 불만을 토로했다.[8]

뭐.. 그래도 선수 은퇴 이후엔 지속적으로 아스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뱅거 감독의 18년 감독 임기를 축하하기도 하고, 4위라는 성적에 만족하면 안된다고 지금의 성적보다 더 큰 목표를 가지라면서 여러가지 조언도 해주는 등 이적 당시에 있던 응어리는 지금와서는 다 풀린 모양이고[9] 2016년 아스날의 코칭 스태프로 복귀하면서 이제는 응어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제는 감독이 되었다

2.1.3.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융베리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뛰게 되었지만 이후의 행보가 아스날 시절처럼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2008년에는 " 웨스트햄이 두 번의 승리만 더 기록한다면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 할 수 있고 현재 부상 중이던 뛰어난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돌아오고 있다. " 며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결국 챔스 진출은 좌절 되었고 본인도 많은 출전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융베리는 웨스트햄에서 25경기를 뛰었고 2골을 넣는 등 준수한 활약을 하였다.

결국 2008년 8월에 웨스트햄은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 구단과 프레드릭 융베리가 잔여 계약기간을 즉각 파기하는 형식의 합의에 도달했다 " 고 전하며 "이번 결정은 선수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이뤄진 것이다 " 라는 스콧 덕스버리 단장의 인터뷰도 함께 실었다.

이에 대해 융베리는 "웨스트햄에 모든 것을 바쳤으며 진정으로 그곳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양측 모두에게 최선의 결정이다."라며 " 시간을 갖고 내 축구인생을 되짚어 볼 것이다 " 라고 덧붙여 자신의 축구선수로서 은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2.1.4. 저니맨 생활과 은퇴

융베리는 그 후 미국 리그에 입단해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하였으며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리그의 셀틱 FC로 이적하였다. 기성용, 차두리등의 코리안 리거와 같이 뛰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리그에서의 첫 경기에서 64분을 뛴 융베리는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는데, 당시 셀틱의 감독이었던 닐 레논은 " 프레드리크 융베리가 이번 경기에서 곧바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굉장히 혼잡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 고 그를 두둔했다.

그러다 1년도 못뛰고 J리그의 중하위권 팀인 시미즈 에스펄스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J리그에서도 6개월 밖에 뛰지 않았다. 그가 노년에 리그를 가리지 않고 여러 팀을 전전하는 모습은 흡사 브라질의 축구선수인 히바우두를 보는 듯 하다.

시미즈 펄스와의 계약을 해지한 융베리는 "서로의 비전이 달랐다"며 실망감을 나타냈고, 시미즈의 한 관계자는 "융베리가 지난해 시미즈를 우승으로 이끌어 올해 AFC 챔피언스리그에 뛴다는 단기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팀은 젊은 선수들을 중점으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융베리가 올해 AFC 챔피언스리그에 뛸 기회를 잃은 게 이번 결정을 내린 주요 이유"라고 설명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2008년 아스날에서 웨스트햄으로 이적 할 때와 비슷한 양상이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길었던 선수 생활을 은퇴하나 싶었는데 2년뒤 다시 복귀하여 인도 슈퍼 리그로 떠나 많은 축구팬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었다. 결국 인도 리그에서 1년을 더 뛰고 2015년 경에 드디어 은퇴를 했다.

3. 국가대표

1996년 스웨덴 U-21에 데뷔하였다.[10][11][12]오랜 세월 스웨덴의 키 플레이어였는데. 스웨덴에서는 전성기에 헨릭 라르손의 다음가는 네임드를 가진 선수였고,[13] 또 그만큼 실력이 뒷받침 되는 선수였기 때문에 스웨덴 리그에 있었을 때에도 기대를 받았고, 아스날에 입단해 좋은 활약을 펼치며 사람들의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14][15] 유로 2004에서는 불가리아를 5:0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이겼음과 동시에 자신도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밀어내고 8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났지만 라르손과 본인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불운으로 결국 본 경기의 승부차기에서 패하게 된다.

2005년 11월 서울에서의 친선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당시 스웨덴이 주전 선수들을 빼고 젊고 유망한 선수들을 기용했기에 융베리는 나오지 못하였다. 결과는 2:2 무승부였다.

당시 스웨덴의 주장이었던 수비수 올로프 멜베리가 시즌 직전 감독이 바뀐 소속팀 아스톤 빌라에 매진하고 싶다며 주장 완장을 내려놓은지 하루만에 융베리가 스웨덴 대표팀의 주장으로 선임됐다. SFA의 대변인 요나스 니스테트는 "융베리는 팀원들 대다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며 대단한 경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 선임 배경을 밝혔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본 경기에 들어가기 앞서 연습경기에 융베리를 제외시켰다. 아스날에서 오른쪽 발목이 부상당했기 때문인데 고통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융베리는 벤치에 앉아 칠레와의 친선경기와 핀란드와의 경기를 관람했다. 여러모로 의지가 참 대단하다. 이런 악재에도 융베리는 스웨덴 대표팀의 패스를 책임졌다.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조별 예선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막판에[16] 헤딩골을 넣으면서 승패를 갈랐다. 이 골은 이번 대회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골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1승 1무의 성적을 가지고 잉글랜드와의 경기를 치렀다.

당시에도 지금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바이킹 군단에게 공한증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 많은 호사가들에게 잉글랜드에게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결국 무승부로 두 팀다 16강에 진출했다.

비록 팀은 16강에서 지고 말았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었기에 그럴만 했다는 평가도 종종 나온다. 아쉽게도 2:0으로 졌으나 본 대회에서 융베리는 꽤 이름 값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무래도 파라과이 전에서의 좋은 헤딩골이 있었으니 그런 듯 하다.

월드컵 다음으로 큰 대회 취급을 받는 유럽 국제 대회인 유로 2008에서는 본인이 스웨덴의 주장 완장을 차고 뛰었으나 이번 대회에서 스웨덴은 아쉽게도 1승 2패라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는 성적을 거두며 조별예선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도 리그와 대표팀을 번갈아 뛰는 것에 한계를 느꼈는지 유로 2008이 끝난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하다보니 리그 쪽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인듯 하나 애석하게도 이때부터 리그에서도 융베리의 기량이 많이 하락했다(...) 뭐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말이다. 또 융베리는 "국가대표로 뛰었던 모든 경기가 내게는 한없이 소중했다. 팬들의 지지가 대표생활의 가장 큰 힘이었다."고 대표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국가대표를 떠났다.

4. 플레이 스타일

2000년대 초반 아스날 전성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선수.

다재다능한 클래식 윙어로, 좌우측면 모두를 커버할 수 있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아스날식 4-4-2에서 우측 윙어로 자주 출전했지만, 4-5-1 형태에서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자주 출전했고 데니스 베르캄프 부재시 그자리에서 대신 세컨드 스트라이커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박투박 미드필더와 비교될 정도로 엄청난 활동량과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연계 능력과 득점력까지 갖춘[17]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넘치는 투지와 끈기, 체력을 바탕으로 공수 양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하드워커였다. 그러면서도 중앙 침투로 인한 득점능력도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18] 바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뮐러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준다. 실제로, 피레스 & 앙리, 베르캄프가 만들어 준 공간을 통해서 득점을 자주 한 선수가 바로 융베리. 애초에 아르센 벵거가 1998년 스웨덴과 잉글랜드와의 A매치[19]에서 영국인 수비수들 상대로도 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영입했기 때문에 피지컬도 굉장히 좋았고, 이는 그 활동량과 투지와 맞물려 큰 시너지를 냈고, 남들보다 한발 더 뛰는 식으로 무패우승 당시 동료들에게 크게 공헌했다.

스피드와 테크닉도 최고 수준이었고 가속력과 돌파력, 드리블 실력이 좋았다. 아스날의 키플레이어로 절대적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며, 골 결정력도 윙어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MLS에서는, 중앙에서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다만 동료 옌스 레만처럼 은근히 기행 기질을 보인 선수였다. 성격적으로 이웃팀의 데이비드 베컴과 흡사하게 셀럽에 어울리는 성격을 보유해서 얼굴은 그에 못 미쳤지만 오늘날까지 플레이 외적으로도 회자되는 일이 잦다. 유명 스포츠선수는 스타급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당시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분위기는 순수 '축구하는 선수' 그자체여서 오늘날처럼 문신을 한다던가, 컬러풀한 축구화를 신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자기주장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융베리는 후술되었듯이 요즘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핑크빛 닭벼슬 머리를 시도하고, 베컴 정도나 했던 남성속옷 모델을 하기도 했다.

다만 부상을 많이 당하는 선수였고, 특히 아스날 생활 중반부부터 고질적인 등과 정강이 부상이 계속 도져 훗날 아스날 퇴단의 직간접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편두통환자로서 잦은 편두통 발생, 문신 시술 부작용으로 혈액 감염 등 일반적이지 않은 부상 사유도 많았다.

오늘날 아스날 FC 공식 베스트 11의 오른쪽 윙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5. 지도자 경력

2016년 7월 아스날 유스 아카데미(U-15) 코치로 부임했다.

2017년 2월 VfL 볼프스부르크 감독으로 선임된 안드리스 욘커로부터 부름을 받고 1군 수석 코치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2017년 9월 욘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자 같이 사임하였다.

2018년 6월 아스날로 돌아와 U23 감독 직책을 맡게 되었다. 리스 넬슨을 지도했고, 부카요 사카 등을 키워냈다. 융베리가 키워 낸 일부 선수들은 1군에서 뛰기도 했다.

2019년 6월 17일, 아스날 1군 수석코치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1군 수석코치였던 스티브 볼드가 융베리의 원래 직책인 U-23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일부 팬과 언론들은 에메리 이후 유력한 감독 후보로도 보고 있다.

우나이 에메리의 삽질로 U-23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융베리를 새 아스날 감독으로 원한다는 아스날 팬들이 생겨나고 있다.

5.1. 아스날 FC (감독대행)

매우 좋아요, 엄청난 영광입니다. 저는 이 환상적인 클럽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고, 그것이 제가 오늘 느끼는 바입니다.
- 융베리의 취임 인터뷰 중
2019년 11월 29일(한국시간) 우나이 에메리는 경질되었고, 그에 따라 수석 코치인 융베리가 아스날의 감독 대행이 되었다. 여담으로 아스날에선 1996년 팻 라이스 이후 23년만에 처음으로 임시감독을 선임하게 되었다.

일단 임기는 새 감독을 찾기 전까지이며, 아스날이 새 감독을 찾지 못하거나 융베리가 일정한 성적을 낼 경우, 시즌 끝까지는 융베리 체제로 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스탭과 코치진 역시 본인이 구성할 수 있다고 한다.[20] 언론에서는 구단이 융베리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다고 한다.

취임 후 첫 경기였던 노리치 시티 FC 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졸전 끝에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의 두 골로 겨우 2-2로 비기면서 체면을 구겼다. 융베리 본인은 만족감을 표현했지만 # 팀으로서는 8경기 연속 무승의 부진을 이어나갔다. 설상가상으로 두번째 경기였던 브라이튼과의 경기에서는 라카제트의 동점골에도 아예 1-2로 패했다. ## 데뷔 2경기에서 1무 1패를 기록하면서 아스널 운영진이 맨유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전례를 답습하려다 준비가 안된 융베리에게 성급하게 감독 대행을 맡기게 된게 아닌지 우려스러운 상황.

그래도 웨스트햄과의 원정 경기에서 3-1 역전승을 거두며 팀의 10경기 무승을 기록을 힘겹게 마감했다. 베예린 ㅡ 티어니의 부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도 승리하긴 했으나 후방 빌드업은 소크라티스 - 자카라는 암울한 조합과 더불어 시원찮았으며 경기력은 그저 그랬다. 다음 경기 맨시티전이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맨시티전에서 0-3 참패를 당했다. 이에 여러 매체에서 새로운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다. 짧고 험난했던 아스날 생활의 끝이 보이는 중이다.

이후 미켈 아르테타의 선임 소식이 나왔지만 융베리는 계속 팀에 코치로 남아 헌신한다고 밝혔다. 아르테타가 27일부터 본격적으로 경기를 지휘할 예정이기 때문에 20일 있었던 에버튼 FC와의 리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지휘하게 됐다.

결국 짧은 감독 대행 임기 동안 1승 2무 2패라는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다만 부진했던 성적을 마냥 융베리 탓으로만 몰고 갈수는 없는데 팀의 지도력이 붕괴한 상황에서 충분히 지휘 경험을 쌓지 못한 상태에서 감독 대행 지휘봉을 맡은데다가. 에메리 사단이 나간 상황에서 코치진을 새로 꾸리지 못하고 팀에 자신의 색깔을 입혀볼 기회도 얻지 못했기 때문. #

아르테타 체제에서도 신임 코치들인 라운드, 스투이벤베르그와 함께 수석 코치를 맡을 예정이다.

2020년 8월 22일, 아스날의 수석 코치직을 내려놓고 감독직 도전을 위해 아스날을 떠난다고 밝혔다. 이후 FC 도쿄의 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여담


* 축구선수가 아님에도 한국에서 키 175cm면 애매하다는 소리를 듣는데 장신으로 유명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선수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단신. 그래서 177cm로 비슷한 키인 헨리크 라르손과 단신 라인이었다. 스웨덴 국가를 부를 때 둘을 기점으로 카메라가 쑤욱하고 내려갈 정도로 장신이 즐비했던 그 시절 스웨덴 국대에서 작은 키로 눈에 띄었다. 키가 176cm인 아스날 후배 외데고르와는 단신의 북유럽 커넥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예전 젊었던 당시에는 머리를 이렇게 빨갛게 염색하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 머리는 융베리의 상징이 그리고 탈모의 원인이 되었으며, 아직도 아스날 팬들은 이 머리로 융베리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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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ˈfreːdrɪk ˈjɵŋ.ˈbærj/ 스웨덴어에서 어두의 lj는 "이"로 쓰고 뒤에 오는 모음과 합쳐 적는다. [2] 여담으로 뒤에서도 언급되겠지만 융베리가 아스날을 떠날 때도 300만 파운드 이적료로 웨스트햄으로 이적했다. [3] 대표팀으로 치자면 데뷔전이 한일전 인 셈이다. [4] 이는 프리미어리그가 스웨덴 리그보다 일정이 지나치게 빡빡하기 때문이었다. [5] 그러나 다음 시즌인 02/03 시즌에는 부상때문에 01/02 시즌의 좋은 성적을 이어가지 못했다. [6] 융베리 문서는 2015년 8월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다. [7] 이는 융베리가 뱅거 감독 최고의 영입 BEST 10 같은 순위를 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8] 허나 이 녀석은 그래 놓고 우승경쟁 팀에 이적했다. 내 안의 작은 아이 [9] 이적 당시인 2008년에도 아스날 관련 사이트인 '거너스'에서 아스날의 위대한 50인의 플레이어 안에 들기도 하는 위용을 선보였다. [10] 본 대회에서 스코틀랜드에게 2골을 넣었다. 당시 융베리는 타 멤버들 보다 키도 작고 국제대회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였기에 대회에서 쓰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덴마크 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것을 보고 Lasse Lagerbäck 코치는 그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바꿔 빠르고 좋은 선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1] 시니어 데뷔는 1998년 1월 24일. [12] 융베리의 첫번째 국가대표 골이 나온건 덴마크 전이었다. 팀은 3:0으로 승리했다 [13] 물론 당시에도 즐라탄이 있었지만 그때는 아직 좀 어렸다. [14] 2002 한일 월드컵 을 대비하기 위해 대표팀에서 훈련을 하는 도중 같은 팀동료인 올로프 멜베리와의 싸움이 화제가 되었다. 멜베리가 융베리에게 거친 태클을 하자 화가 난 융베리가 그를 밀쳤고, 멜베리도 덩달아 화가나 융베리의 멱살을 잡았는데 그게 또 기자의 사진에 찍혔다. 이래저래 멜베리와 융베리 측의 흑역사인 사건이다.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축구판에서 훈련 중에 선수들 간 일시적 감정 충돌은 꽤 흔한 편이다. [15] 참고로 한일 월드컵 당시 스웨덴의 조는 죽음의 조였다.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나이지리아가 포진해 있었으니...히익 융베리는 엉덩이 부상 때문에 대부분의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16] 44분에 넣은 라스트 미닛 골이었다. [17] 평균 4경기 1골 정도로 요즘 기준으로도 정통 윙어로서는 굉장히 준수한 득점력을 갖고있었다. [18] 한국에서는 융베리를 "영점 잡힌 박지성"으로 부르기도 했다. [19] 스웨덴 2-1 승 [20] 이로 인해 팀 동료였던 질베르투 실바가 아스날에 코치로 복귀할 가능성도 언론에서 점쳐지고 있다. [21] 한 축구팬이 "융베리 순대? 얘가 한국에 왔었던가?" 했는데 밑에 "융베리 그것" 이라는 연관 검색어를 보고 본능적으로 이해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22] 놀랍게도 정작 즐라탄과 멜베리는 서로 친한 친구 사이이다. [23] 출처는 https://m.sport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343&aid=0000013438&redirect=true 여기다. 뭐 사실 즐라탄에게 까인 인물이 한 두명이 아닌지라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기사에 메시와 사비등의 선수들이 즐라탄에게 실망했다고 말했다는 등 사실과는 다른 말들이 많기에 걸러 읽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24] 섹스 피스톨즈 의 보컬 쟈니 로튼이 아스날의 팬 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