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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0:18:24

프라테르 죄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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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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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동헝가리 왕국 섭정
프라테르 죄르지
Fráter György
파일:프라테르 죄르지.jpg
본명 우체셰니치 유라이
Utješenić Juraj
출생 1482년 6월 18일
헝가리 왕국 크르카 강변 카미카츠 성
사망 1551년 12월 17일 (향년 69세)
동헝가리 왕국 알빈크
재위 동헝가리 왕국의 섭정
1540년 ~ 1551년
아버지 우체셰니치 게르게리
어머니 마르티누세비치 안나
형제 미클로시, 야카브, 마차시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프라테르 죄르지 암살 사건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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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오로 수도회 수도자, 에스테르곰 대주교, 헝가리 추기경, 동헝가리 왕국 재무대신이자 섭정.

2. 생애

1482년 6월 18일 헝가리 왕국 크르카 강변 카미카츠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계 헝가리 귀족인 우체셰니치 게르게리이고, 어머니는 헝가리의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인 마르티누세비치 안나였다. 그에게는 세 형제 미클로시, 야카브, 마차시가 있었다. 미클로시와 야카브는 헝가리군에 입대해 장교 직임을 역임했는데, 그중 야카브는 1521년 베오그라드 오스만 제국군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전사했다. 마차시는 정계에서 활동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동생도 있었는데, 헝가리 귀족 드라스코비치 베르탈란과 결혼해 세 자녀를 낳았다.

8살 때인 1490년 그의 가족 영지가 오스만 제국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그는 코르빈 야노시[1]의 휘하에 들어간 뒤 보이다후냐드 성에 들어갔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그 성에서 20세가 될 때까지 "매우 비참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502년에서 1504년 사이에 세페스바르로 가서 궁정백 서포여이 이슈트반의 미망인인 테센의 헤드비히의 궁정에 의탁했다. 헤드비히는 그를 환대했고, 그는 곧 궁전 경비대원이 되었다. 몇년 후 당시 예르데이 보이보드를 맡았으며, 서포여이 이슈트반과 헤드비이의 아들인 서포여이 야노시의 경비대원이 되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24살 때 경비대원 생활을 그만두고 부더에서 바오로 수도회에 합류했고, 사졸라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쳉스토호바의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근면함과 뛰어난 지도력, 조직력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며, 1520년대에 수도원장이 되었다. 1527년 말 사졸라드로 돌아와서 그 지역 바오로 수도회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임명은 1527년 서포여이 야노시가 어머니와 남동생 서포여이 죄르지가 수도원에 기부한 것을 확인하고 실뢰할 수 있는 추종자를 수도원장으로 앉히고 싶어했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526년 8월 29일,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격돌했다가 귀족 28명, 헝가리 추기경 및 주교 7명 등 고위급 인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그 후 서포여이 야노시가 헝가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헝가리 국왕에 취임했지만, 헝가리 국왕을 자처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와 대결해야 했다. 1527년 9월 27일 타르칼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합스부르크군에게 완패한 뒤, 서포여이 야노시는 적군의 추적을 피해 폴란드로 망명하면서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자기가 소유한 귀중품 일부를 넘겼다. 하지만 그는 곧 폴란드로 망명해 서포여이 야노시와 합류했다. 이후 그는 종종 헝가리에 들러서 아르탄디 팔, 바토리 이슈트반, 토르날라이 야카브, 치박 임레 등 서포여이 가문 지지자들과 협의해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항할 방안을 논의했다.

1529년 9월, 서포여이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 국왕으로 복위했다. 프라테르 죄르지 역시 그와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상에서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서포여이 야노시를 위해 다양한 직무를 수행했거나 사졸라드 수도원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1532년 부더 총독 로도비코 그라티로부터 부더 성의 궁정 판사로 선임되면서 첫번째 공직을 맡았다. 1534년 로도비코 그라티가 살해된 뒤 공석이 된 재무장관에 선임되었으며, 그 해에 왕실 참의원 칭호를 받았고, 바러드 주교이자 비하르의 세습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또한 부더의 궁정 판사로서의 지위를 유지했고, 부더 성주의 칭호도 수여받았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재무관으로서 세금을 무자비하게 징수해, 서포여이 야노시의 정책과 전쟁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보장했다. 그는 예르데이 지방들을 자기의 통제하에 두고자 추종자들을 주요 직위에 앉혔다. 페르디난트 1세의 지지자였던 나다스드와 포가라스폴드의 백작 나다스디 타마시에게 예르데이 소금 광산의 관리를 맡기는 대가로 서포여이 야노시 편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그는 세금 수입 외에도 가죽, 양모, 포도주, 곡물을 거래해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1536년 서포여이 야노시의 사절단 대표를 맡아 페르디난트 1세 측 사절단과 협상했고, 협상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자 나폴리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페르디난트 1세의 형인 카를 5세를 만나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서포여이 야노시는 페르디난트 1세를 상속자로 삼을 용의가 있지만, 그 대가로 생애 동안 국왕 칭호를 사용할 수 있으며, 옛 재산을 되돌려받아야 했다. 카를 5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1537년에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페르디난트 1세 측 사절단 대표인 룬트의 요한 폰 베제 대주교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야노시의 나라에서는 백인 수도사(프라테르 죄르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고, 원하는 사람을 약탈하고, 자신과 영주를 위해 보물을 축적합니다."

또한 그는 항상 새로운 제안을 내세워 협상을 방해하는 죄르지를 예측할 수 없고 신뢰하기 어려운 인간으로 여겼다. 실제로 죄르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고단해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더 나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다고 여기고, 협상을 최대한 지연했다.

그러던 1538년 2월 24일, 바러드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헝가리 왕국의 2/3에 달하는 동쪽 부분은 서포여이 야노시의 통치를 받기로 했고,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서쪽 부분은 페르디난트 1세의 지배를 받기로 했다. 또한 당시 아들이 없었던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하면, 그에게 속했던 영토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서포여이 야노시가 차후에 적법한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헝가리 왕관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그 대신 금전적 보상, 왕자의 칭호 및 스피슈(Spiš)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기로 했다. 이 협약은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기에, 양자는 비밀을 엄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포여이 야노시는 후계자를 낳아서 서포여이 왕조를 이룩하기로 마음먹고, 폴란드 왕국과 협상해 이자벨라 야기엘론카를 왕비로 맞이했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결혼을 주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1542년 폴란드 왕비이자 이자벨라의 어머니인 보나 스포르차가 그에게 "이자벨라를 잘 부탁한다"라고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1539년 말에서 1540년 초, 예르데이의 두 총독 발라사 임레와 마즐라트 이슈트반은 반(反) 서포여이 음모를 조직했다. 그들의 정확한 목표는 알려지지 않았다. 예르데이를 페르디난트 1세에 돌려주려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의 예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받는 예르데이 공국을 조직하려 했을 수도 있다. 1540년 3월, 마로스바사헤이에서 두 사람이 주관한 비밀 회의가 열렸다. 예르데이 영주들이 그들이 원하는 만큼 지지해주지 않았지만,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사절단을 보내 프라테르 죄르지가 잔인하고 자의적으로 자기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며, 성을 마구잡이로 건설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투르다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귀족들 앞에서 프라테르 죄르지를 변호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으려면 공물을 정확하게 지불해야 하며, 그러려면 세금을 어떻게든 받아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나중에 미즐라트 이슈트반이 음모를 꾸몄다는 게 밝혀지자, 서포여이 야노시는 그를 체포한 뒤 포가라스 성에 가두었다.

1540년 7월 7일, 왕비 이자벨라 야기엘론카가 외아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낳았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축하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그러나 열흘 후인 7월 17일에 심장마비에 걸려 급사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바러드 조약을 따르지 말고 아들을 헝가리 왕위에 세운 뒤 섭정을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한 직후 부더로 서둘러 가서 정국을 장악했다. 이후 1540년 9월 13일 의회를 소집한 뒤 서포여이 야노시의 유언장을 낭독했고, 헝가리 의회는 유언에 따라 갓난아기였던 서포여이 야노시 자그몬드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다. 또한 의회는 어머니 이자벨라, 프라테르 죄르지, 그리고 2명의 헝가리 대귀족 페트로비치 페테르, 퇴레 발린트를 유아 군주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는 갓난아기 외손자를 왕으로 받들면서 국가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고, 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과 합의해 왕위를 그들에게 넘겨주고 보상을 받아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는 서포여이 야노시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자벨라가 성급한 퇴위를 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사실상 가택 연금했다.

얼마 후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사절이 부더에 도착한 뒤 바러드 조약에 따라 서포여이 야노시의 영토를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이자벨라의 어린 자식에게는 신성 로마 제국 영방군주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프라테르 죄르지와 이자벨라 등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상 헝가리에서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하는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페레니 페테르와 컬로처 대주교인 프라뇨 프랑코판은 곧바로 페르디난트 1세에게 귀순했고, 에르데이 보이보드 마즐라트 이슈트반 역시 페르디난트 1세 지지를 천명하면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지지자들을 대거 축출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1세의 또다른 사절인 히에로니무스 라스키는 코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바라드 조약 내용을 알리면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전역을 차지하는 걸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라스키를 체포했다.

1540년 10월,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제국군 비셰그라드, 바츠, 페슈트, 터터,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공략했지만 부더를 공략하지는 못했다. 1541년 5월 4일,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가 이끄는 제국군 사령관이 다시 부더를 포위했다. 이에 프라테르 죄르지와 이자벨라 왕비는 쉴레이만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그해 6월 곤경에 처한 봉신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군을 일으켜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해 7월 말,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가 쉴레이만 1세의 지시에 따라 퍼거라슈에서 마즐라트 이슈트반을 체포해 코스탄티니예로 압송했다. 이후 에르데이 의회는 오스만 제국군의 압력에 굴복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무렵, 프라테르 죄르지는 부더에서 제국군을 상대로 수비대를 몸소 이끌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검을 몸소 뽑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 여럿을 처단했다고 한다. 1541년 6월 13일, 성내 내통자들이 제국군을 성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다. 그러나 로겐도르프는 합의한 대로 헝가리인을 보내지 않고 독일 용병들을 열린 문으로 보냈고, 그들은 경비병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이 다가오자, 로겐도르프는 8월 20일에 마지막 공격을 감행한 뒤 실패로 돌아가자 철수했다.

8월 26일, 쉴레이만 1세는 부더 인근에 숙영지를 설치한 뒤, 이자벨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및 영주들을 초대했다. 이자벨라는 "여자가 남자의 천막으로 가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며 거절했지만, 프라테르 죄르지, 퇴레 발린트를 포함한 헝가리 대귀족 6명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함께 파디샤의 진영으로 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곧 구금되었고, 예니체리가 부더에 입성했다. 이후 쉴레이만 1세는 어린 아이를 헝가리 왕위에 앉힌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헝가리를 잃겠다고 판단하고,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티서강 동쪽의 영토만 매년 10,000 플로린의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훗날 프라테르 죄르지가 사망한 후에 열린 재판에서, 많은 영주, 성직자, 시민들은 그가 부더를 오스만 제국군에 넘긴 원흉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그가 제때에 부더를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겼다면, 오스만 제국군이 부더에 입성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1541년 9월 5일,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는 어린 왕과 함께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 중심지인 리퍼(현 루마니아 리포바)로 이동했다. 그해 10월 18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추종자들은 쉴레이만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고 서약했다. 하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는 오스만 제국이 이러다가 헝가리를 통째로 집어삼킬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페르디난트 1세와 손잡기로 마음먹었다. 1541년 12월 29일,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현 루마니아 길라우)에서 페르디난트 1세의 사절인 카스파르 세레디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페르디난트 1세가 부더를 탈환할 경우 헝가리의 주권이 페르디난트 1세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았다. 이후 프라테르 죄르지는 동헝가리 왕국에 속한 귀족들에게 페르디난트 1세와 협력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에르데이 의회는 1542년 12월 20일 줄러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 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1543년 2월, 에르데이 의회는 이자벨라가 프라테르 죄르지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후에도 국가 행정과 재정을 통제하면서, 이자벨라 왕비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외교 문제를 자신의 손에 맡기는 데 민감했으며, 영주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교 관계를 맺는 걸 엄금했다. 또한 그는 1544년부터 재무관, 대판사, 1551년부터 트란실바니아 총독, 바라드 주교와 크사나드 주교의 직무를 맡았다. 그는 재무부와 두 감독단의 수입을 모두 받았으며, 이전에도 수익성이 좋았던 상업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이를 통해 자금을 확보한 뒤 군대와 국가 기관에 예산을 지급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그는 에산을 어떻게 썼는지를 밝히길 거부했고, 이자벨라가 기대하는 수준으로 궁정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돈을 제공하길 거부해, 이자벨라의 반감을 섰다.

한편, 그는 종교 개혁이 예르데이에 퍼지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애썼다. 1543년 6월, 루터교회를 받아들인 크론슈타트의 작센인 성직자들이 줄러페헤르바르로 찾아와 가톨릭 사제들과 토론을 벌였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해 종교재판에 세우고 싶어했지만, 이자벨라 왕비와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1544년 4월, 투르다 의회는 여행자들이 방문한 정착지의 종교 관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545년 데브레첸 의회를 주재해 누구도 자신의 소유지에 루터교인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도록 했고, 같은 해 투르다 의회를 재소집해 "아무도 어떤 종교적 혁신도 도입해서는 안 되며, 사제와 수도자의 직업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하게 했다. 헝가리 종교개혁가 헬터이 가슈파르가 성경 헝가리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하자, 프라테르 죄르지는 성경은 오직 라틴어만 쓰여야 한다고 못박고 그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교황청은 그런 그의 노고를 인정해 1551년 10월 12일 그를 헝가리 추기경으로 승격했고, 동시에 에스테르곰 대주교로 선임했다.

1547년 합스부르크 가문과 쉴레이만 1세가 5년간의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쉴레이만 1세는 1548년 사파비 제국에 대항한 원정을 단행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오스만 제국이 동방 원정을 떠난 걸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페르디난트 1세 카를 5세에게 헝가리를 통합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라고 촉구했다. 두 사람이 평화 협약을 막 맺은 터라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자, 프라테르 죄르지는 방침을 바꿔 1541년 12월 29일에 체결되었던 줄러 협약대로 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의 끝에, 1549년 9월 8일 니르바토르에서 새로운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보헤미아 왕관령 슬레스코 오펠리와 라티보르시(현 폴란드 라치부시) 공국을 받고 10만 플로린을 별도로 받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아들의 퇴위를 거부하고 줄러페헤르바르에 남았다. 그녀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자신과 아들의 지위를 지키기로 하고,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지배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라테르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1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550년 9월, 이자벨라와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이자벨라를 포위한 뒤 강한 압력을 가한 끝에 1550년 10월 13일에 항복하고 평화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뒤이어 1550년 12월 몰다비아 공국과 튀르크 분견대의 헝가리 침공을 격파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페르디난트 1세와 협상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자마자 서둘러 의회를 소집한 뒤, 프라테르 죄르지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아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군대를 소집한 뒤 돌아왔다. 의회는 곧 해산되었고, 이자벨라는 강한 압력에 시달렸다.

1551년 5월, 이자벨라는 추종자인 파토치 페렌츠 등에게 군대를 일으켜서 자신을 구출하게 했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를 추종하는 군대가 이들을 물리쳤다. 1551년 7월 19일, 이자벨라는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헝가리 대관식 휘장을 넘겨야 했다. 그 대신, 오폴리와 라티보르시 공국 및 140,000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이틀 후, 이자벨라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페르디난트 1세가 선임한 헝가리 총독인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에게 넘겼다. 에르데이 의회는 7월 26일 그들의 퇴위를 인정하고 페르디난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51년 8월 6일,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는 에르데이를 떠났고, 페르디난트 1세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가 에르데이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통치권을 맡기기로 했다.

쉴레이만 1세는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가 에르데이에서 축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에르데이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노했다. 그는 루멜리아의 베글러 베그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군대를 소집해 페르디난트 1세를 에르데이에서 축출하라고 명령했다. 소콜루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크림 칸국, 비딘과 니코폴리스 방면 오스만군을 규합해 50,000 가량의 군대를 일으켰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 연간 공물을 오스만 제국에 보냈고, 여러 편지를 보내 예르데이는 여전히 쉴레이만 1세를 주권자로 받들 것이며, 독일군은 반란을 일으킨 페트로비치 페테르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소콜루는 일단 쉴레이만 1세를 만족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국경지대의 몇 개 성채를 공략한 뒤 후방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리파는 별도로 움직이던 오스만 분견대에게 손쉽게 항복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난 후, 카스텔도는 황제군 및 예르데이군과 함께 오스만 분견대 수천 명이 지키고 있던 리파를 포위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러다가 오스만 분견대가 몰살당하면 쉴레이만 1세의 분노를 사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오스만 분견대에게 항복하는 대가로 신변의 자유를 보장한 채 오스만 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스텔도는 페르디난트 1세의 명령에 따라 리파를 무력으로 공략하고 오스만군을 학살하고 싶었지만, 다수의 인사들이 죄르지의 주장을 찬성했기에 결국 그의 뜻대로 이뤄졌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여기에 더해 물러나는 오스만군에게 음식과 말을 공급했다.

이에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이 예르데이를 온전히 점령하도록 한 뒤 자기가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예르데이를 통치하려는 야심을 품은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이 의심은 프라테르 죄르지가 그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하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의 지역이 아닌 티살툴 마을에서 겨울을 보내라고 권고했을 때 더욱 강해졌다. 그는 죄르지가 티살툴 마을에 머무는 자신과 황제군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겼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정기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관해 보고했지만, 평소처럼 자긴의 계획과 행동을 카스텔도에게 전혀 밝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카스텔도가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는 걸 막지 못했다.

1551년 12월 16일, 카스텔도는 알빈크 성에 있던 프라테르 죄르지와 대면했다. 그는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오스만 분견대에게 음식과 말을 공급한 연유를 캐물었지만, 죄르지는 이번에도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두 사람은 이로 인해 심한 말다툼을 벌였고,카스텔도는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자리를 박차고 떠난 뒤, 카스텔도는 무장병들을 성으로 인도했다. 12월 17일 새벽 1시 또는 2시경, 카스텔도의 비서인 마르칸토니오 페라리, 스포르자 팔라비치니 대위, 그리고 몇몇 무장병들이 프라테르 죄르지의 방에 들이닥쳐서 그를 칼로 찌르고 소총으로 쏴 죽였다. 그의 귀 한쪽은 스페인 용병 한 명에게 잘려진 뒤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내졌다. 그의 유해는 70일 동안 방치되었다가, 1552년 2월이 되어서야 줄러페헤르바르 성직자들에게 수습된 뒤 2월 25일 성 미카엘 대성당 지하실에 안장되었다.

3. 프라테르 죄르지 암살 사건의 여파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를 처단한 뒤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고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카스텔도를 옹호하고 프라테르 죄르지의 배신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 율리오 3세에게 87개 항목으로 구성된 프라테르 죄르지 기소장을 발송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생전에 추기경을 맡았기 때문에, 교황청은 격분했다. 율리오 3세는 페르디난트 1세가 보낸 기소장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고, 카스텔도와 페르디난트 1세가 에르데이를 손아귀에 쥐기 위해 추기경을 살해했다고 여겼다. 이후 추기경 4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553년 3월부터 1554년 3월까지 조사하면서 총 139명의 증인을 심문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그들에게 강한 압력을 가했고, 조사위원회는 결국 1555년 2월 14일에 600페이지에 달하는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과 내통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며 살인에 연루된 자들과 공범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 암살 사건에 반발한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대거 귀순했고, 오스만 제국은 1552년 여름 바나트 저지대를 점령했다. 카스텔도는 에르데이 총독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려 했지만,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거의 받지 못했고, 병사들의 급료를 마련하지도 못했으며, 헝가리 귀족들의 전쟁 참여 거부에 직면했다. 결국 티미쇼아라, 세게드, 에게르 등 여러 요충지를 무기력하게 상실한 그는 에 "상황을 타개할 방도는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보고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1553년 봄 그를 에르데이에서 소환했다. 그 후 에르데이 의회는 자기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페르디난트 1세를 더 이상 따를 이유가 없다고 보고, 1556년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각각 헝가리 왕비와 헝가리 국왕으로 복위했다.
[1]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 사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