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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

擇里志
파일:택리지 표지.jpg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출처
1. 개요2. 내용3. 기타

1. 개요

영조 27년, 1751년[1]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인문 지리서.

원래 이름은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였으나 저자인 이중환이 직접 도서명을 택리지로 고쳤다.

원본과 함께 팔역지(八域誌),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승람(形家勝覽), 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 등의 조금씩 변형, 개보한 여러 필사본이 전하여 오고 있다.

대표적인 조선후기의 사찬지리지[2]이며 주제별로 서술되어있다. 작가가 직접 돌아다니며 본 것을 주관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전기에 만들어진 관찬 지리지에 비해서는 객관적이지 않다. 대표적인 예시로 복거총론의 '인심(人心)'이 있는데, 사람이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지역의 인심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전체적으로 이중환이 30여 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직접 현지 답사한 것을 기초로 하여 저술하였다.

경상도 신라( 진한, 변한)의 땅으로,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고조선 고구려의 땅으로, 전라도 충청도 마한, 백제의 땅으로, 강원도 예맥(濊貊)의 땅으로 비정했다. 단순 지리적 내용뿐만 아니라 고조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고려의 건국과 그 강역에 관해서도 논하였다.

산천을 따라 각 고을의 인심과 풍속, 역사와 문화, 물자 등을 기록했으며 전체적으로 우리 나라 지리와 인문에 대한 것들을 역사적, 문학적, 철학적으로 논했다. 18세기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산업, 교통, 국방, 풍수지리, 환경 등에 대한 다채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저자가 팔도를 직접 다니며 지역별 지형과 역사, 토산물 등을 기록했고, 지리적 환경에 맞는 생산 활동과 교역을 강조했다. 편찬 후 택리지는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내용은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3가지 총론으로 나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이나 한국어 위키 백과를 참조.

복거총론에서는 가거지의 조건 네가지를 제시하였다. 풍수지리적 명당인 배산임수에 위치한 '지리'와 생업에 유리한곳에 위치하는 '생리(生利)'[3], '인심(人心)' 그리고 '산수(山水)'이다.

다만 큰 고을들은 설명을 비교적 자세히 했으나 작은 고을에 대해서는 설명이 빈약하거나 여러 고을을 뭉뚱그려 설명하거나 아예 고을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점, 그리고 고을들을 깎아내리는 서술이 많다는 점이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라도 편에서는 남해안을 따라 해남 - 강진 - 장흥 - 보성 - 낙안 - 흥양 - 순천 - 광양까지 무려 여덟 고을을 한 문장으로 묶어서 설명해놨다. 이마저도 왜구가 잘 침입하고 전염병이 많다고 깠고, 다른 설명은 없었다. 다만 이 중에서 여러 고을을 한데 묶어 설명했다는 것은 지역을 생활권에 따라 인식하려는 시도라고 보기도 한다.

특이점은 관동팔경 낙산사 월송정을 빼고 청초호 시중대를 넣었다는 점이다. 삼황오제 7현인 등도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는 점에서 당대에 선정 기준도 왔다갔다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저자 그 자신이 정치권에서 소외된 남인 출신이었고, 저서 중에도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사색당파의 폐해를 논한 부분이 많음을 들어 '온 땅을 다 둘러봤지만 역시 우리나라는 당파 싸움 때문에 개판일 뿐'이란 것이 택리지의 진짜 주제의식이라는 견해도 있다. 종합 지리서를 표방하지만 본래의 주제는 따로 있다는 것. 정인보 역시 이 책을 이런 방향으로 읽었다.
白頭山在女眞朝之界, 爲一國華蓋。上有大澤, 周圍八十里。(중략) 西流爲鴨綠江, 東流爲豆滿江, 北流爲混同江, 豆滿鴨綠之內卽我國也。
백두산은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한 나라의 지붕이다. 위에 큰 못이 있으니 둘레가 팔십 리이다. (중략)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니 두만강과 압록강의 안이 바로 우리 나라이다.

-택리지 中 -

택리지에는 경상도 평안도를 빼고는 그다지 긍정적으로 인심을 기술하지 않았다.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며, 경상도는 풍속이 진실하고,[4] 함경도는 오랑캐 땅과 가까운 탓에 백성의 성질이 모두 거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사납고 모질며, 강원도는 많이 어리석고, 전라도는 오직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에 쉽게 움직이며, 경기도는 도성만 벗어나면 재물이 보잘 것 없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이재만 좇는다."[5]라고 했다. 게다가 평안도를 두고도 택리지 복거총론 인심조에서는 좋은 평가를 하는 듯하면서도, 택리지 팔도총론에서는 폄하한다.

택리지 저자와 택리지 발문에 참여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근기남인으로 남인 강경파 이중환, 이중환의 친척인 성호 이익, 이중환의 처가 식구들인 목성관, 목회경 등 전부 남인 일색이었다. 택리지 발문에 마지막으로 참여한 이 역시 남인 정약용으로 성호 이익을 사숙(私淑)하며 그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택리지가 정치색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볼 수 없고, 그래서인지 남인 지지기반인 영남에 대하여 호의적인 평을 했던 모양이다. 정작 자기 고향인 충청도는 서인의 지지기반이라 그런지 대차게 깠다. 이중환, 이익, 정약용의 글들에서 유사한 점이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중환이 직접 쓴 택리지 원본과 수정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관계로 필사할 때마다 본인 마음에 안 들면 글을 바꾸는 경우도 많아서 택리지 이본(異本)만 200여 종에 달하므로 그 정확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그래서 택리지에 관한 제대로 된 학술대회조차 열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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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2015년 11월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사상 두 번째로 택리지를 소재로 학술 발표회를 열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기사에서도 말하듯이 조선 후기 최대의 베스트셀러였고 교과서 등에서도 자주 나오는 중요한 지리서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진단학회에서 한번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지금까지 아무런 연구가 없었다.

이후 2018년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가 성균관대 대동문화원 연구원들 등 여러 연구원등과 함께 200개의 이본 중 23개의 판본을 추려 교감하고 번역해 정본 택리지를 번역하였다. 특이점은 기존의 번역본들이 채택한 사민총론-팔도총론-복거총론-총론-(저자 후발) 구성이 아닌 서론-팔도론-복거론-결론-저자 후발 구성으로 새로 번역했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인 황상(黃裳)이 주관에 따라 재편집하고 증보한 택리지 필사본이 발굴되었다. 이 필사본은 향촌 지식인이 전라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 대한 기존의 박한 평가를 뒤집고, 그 근거를 제시한 개정증보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에 따르면 1751년 4월 초순 이전에 원고의 초고를 완성하고, 이익을 비롯한 주변 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초고를 수정한 개정판을 1756년 사망 직전까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 이 시기에는 실학의 영향을 받아 국토를 객관적이고 실용적으로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지리지가 제작되었다. [3] 이는 택리지가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4] 참고로 평안도와 경상도를 묶어 인심은 평안도가 제일이고 다음이 경상도라고 말했다. [5] "대망(大望)을 항상 품고 살아온 사대부들은 좌절되면 재력을 얻는 방향을 택한다. 그래서 험담가들이 호서인을 음흉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