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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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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권도의 기원
1.1. 5대 기간도장 (5대관)
1.1.1. 청도관1.1.2. 송무관1.1.3. 무덕관1.1.4. YMCA 권법부
1.1.4.1. 창무관1.1.4.2. 강덕원
1.1.5. 지도관(조선연무관 권법부)
1.2. 명칭의 유래
2. 대한태권도협회의 창립3. 태권도 세계화와 WT-ITF의 대립4. 가라테와 차별화5. 태권도계 내부의 태권도사 인식
5.1. ITF의 인식5.2. 국기원(세계태권도본부)의 입장
5.2.1. 택견이 태권도의 원류인지 여부5.2.2.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파생된 무술인지 여부
5.3. WT의 역사왜곡
5.3.1. 택견이 태권도의 원류가 아닌 이유5.3.2.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파생된 무술인 이유

1. 태권도의 기원

태권도는 한국의 전통무술이 아닌 현대무술로 기원은 후술하는 이른바 5대관이고, 이 와중에 한국군 토종 군용무술을 고심하던[1] 최홍희가 자신의 부대에 설립한 (주로 청도관 출신이 많던) 군대 도장 오도관에서도 ITF 태권도의 원형이 자리를 잡는다.[2]

1.1. 5대 기간도장 (5대관)

파일:5대관.jpg

해방 전후 국내에 무술들을 가르치는 도장들이 설립되었는데, 1944년 설립된 청도관을 필두로, 송무관, 무덕관, 조선연무관 권법부, YMCA 권법부 다섯 개의 도장이 그것들이다. 이들 5개의 도장들은 기간도장(基幹道場) 또는 5대관으로 불리며 현대 태권도의 근간이 되었다. 당시엔 공수도, 당수, 권법 모두 가라테를 지칭하는 단어였고 관장들 모두 가라테를 배워온 사람들이었다.

5대 기간도장 중에서도 영향력이 큰 도장은 청도관무덕관이었다. 청도관은 이중에서 거의 최초로 설립된 도장으로 이후 태권도계에서 비중있는 인물들도 많이 배출했고, 무덕관 역시 1960년대 태권도 수련생의 75%가 수련했다는 말도 있을만큼 큰 영향력을 끼쳤다.

6.25 이후 청도관에서 정도관, 오도관[3]이 분관되었고, 조선연무관은 지도관과 한무관으로, YMCA 권법부는 창무관과 강덕원으로 나뉘어 기간도장은 총 9개(9개관)가 되었다.

1950년대 이후 지속적인 통합 작업을 거쳐 1978년 9대관이 완전히 소멸되면서 각각의 개성은 거의 희석됐지만, 과거 해외로 나간 태권도 사범들의 경우 국내 태권도의 통합을 겪지 못했거나[4], 자신의 도장에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에 아직도 'XX관 태권도'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5]

1.1.1. 청도관

5대관 중 최초로 설립된 도장으로 알려진 곳이다.[6] 태권도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장이다.

이원국은 19세인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원국은 도쿄 중앙대학 법학과에 다니면서 1929년부터 10년간 일본 가라테의 본산 쇼토칸(松濤館, 송도관)에서 근대 공수도의 창시자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 1868~1957)에게 가라테를 배웠다.[7] 1936년에는 훗날 송무관 창설자인 노병직도 쇼토칸에 들어와 이원국과 함께 수련했다.[8]

1944년 9월 이원국(1907~2003)이 서대문 옥천동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개관했다. 개관 당시 이름은 '당수도 청도관(靑濤館)'이었다. '젊은 청년의 꿈과 기개가 파도처럼 퍼져나가라'라는 뜻에서 청도관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원국은 이후 자신의 명함한국태권도 창시주, 총재 이원국이라고 새기고 다니기도 했다. 이원국은 일단 개관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말기로 가면서 일본 제국 상황이 어려워지자 일단 문을 닫았다가 해방 후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예배당인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다시 재개관했다.[9] 이후 자신의 고향인 안국동으로 도장을 옮겼다.

이원국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갔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말이 나온다.[10] 하여튼 일본에 체류하면서도 손덕성, 엄운규 등 제자들과 교류하던 이원국은 제자들의 성화에 종종 방한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이후부턴 사실상 국내 태권도계와 연이 끊어지게 된다. 1960년대 후반 태권도교범(진수당)을 출간하기도 했다.

청도관은 9대관 중 무덕관에 이어 가장 많은 수련자를 배출했으며, 한국 태권도계 원로급들을 다수 배출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발차기 위주의 수련과 태권도란 명칭을 선제적으로 쓴 민간도장이기도 하다. 청도관에서 정도관(正道館), 오도관(吾道館) 그리고 국무관(國武館), 청룡관(靑龍館) 등이 분리되었다.

이원국의 유학 당시 쇼토칸 가라데는 다른 가라데 유파와는 달리 발차기 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였다고 한다.[11] 덕분에 카타상으로만 쓰이던 발기술들을 실전 도입하면서 하이킥 수련도 하였다고 한다. 관련 쇼토칸 기술들만 해도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뒤차기, 앞후리기(낚아차기), 날아차기, 두발당성, 아시바라이 등이 있으며 이 발차기들을 배워 한국으로 온 이원국이 청도관에서 발차기 위주의 수련을 하다 발차기 수련이 없던(시토류, 고주류, 슈도칸) 다른 유파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며 다른 유파들도 발차기 수련이 활성화 됐다는 말이 있다. 일례로 2세대 태권도인 이종우는 자신이 수련한 조선연무관은 초창기엔 아예 발차기 수련 자체가 없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여튼 청도관에서도 꾸준한 발차기 연구의 성과로 1963년 박종수 원로에 의해 뒤돌려차기라는 태권도의 상징적 기술이 탄생한다. 다만 동문인 엄운규는 본인이 뒤돌려차기를 개발했다 주장했다.

이원국은 어렸을 적에 택견을 배웠고 그것을 가라테에 접목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선 왈가왈부가 있는데, 일단 이원국이 실제 택견을 수련했는지 아닌지는 오늘날 와선 명확히 알 순 없으나[12] 이원국은 후술하는 황기와 같이 특별히 전통 무술의 복원을 추구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택견 수련 경험을 허위로 말하고 다닌다고 해서 딱히 실익이 있지도 않았다. 사실 진짜 문제는 "접목시켰다"는 말이 무색하게, 후술되어있듯 태권도엔 딱히 택견 기술이 유입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2. 송무관

노병직이 개성시 자남동 관덕정에서 개관했다. 개관 당시 이름은 '공수도 송무관(松武館)'이었다. 이후 명칭을 ‘당수도 송무관’으로 바꾸었다.

송무관은 처음 개성에서 개관했기 때문인지 5대관 중에서 세가 가장 약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개성이 북한에 편입되자 서울과 인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노병직은 1936년 3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쇼토칸에서 1929년부터 수련하던 이원국과 함께 근대 공수도의 창시자 후나코시 기친에게 가라테를 배웠다. 그러다 1944년 2월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온 노병직은 취미 삼아 가라테를 가르치다가 마침내 송무관을 열었다. 송무관이 열린 시기에 대해선 왈가왈부가 있는데, 현재 대한태권도협회 등에 따르면 송도관의 정식 개관은 1946년 5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노병직 본인은 이원국의 청도관보다 앞선 1944년 3월 11일 개관했으며 송도관이 국내 최초의 당수도 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병직에 따르면 관할청에 허가원을 제출하여 3월 20일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13] 정확하게는 1944년 3월에 창설했지만 전쟁통에 교습을 중단했다가[14] 1946년 5월에 재발족했다고 주장한다.[15]

그러나 <동아일보> 1948년 11월 9일자에는 창립 1주년 창립대회를 송도대강당에서 개최한다고 되어 있어 대외적인 송무관의 공식적인 개관은 1947년 11월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론 청도관의 도(濤) 자가 송도관의 도(濤) 자를 따온 것처럼, 송무관의 송(松) 자는 송도관(쇼토칸)의 송(松) 자를 따온 것인데, 노병직이 송 자를 먼저 선점했다는 점에서 청도관보다 먼저 개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애초에 이름 가지고 선후관계를 따지는 것부터가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물증이 없다보니 지금 와서는 구체적으로 검증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노병직은 5대관을 개관한 1세대 태권도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이후까지 활약했다. 1966년에는 1년여 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맡았고, 60년대 후반엔 ITF 부총재도 지냈다. 다만 해외 인사들을 상대하는데 자신이 없었는지 일종의 대인기피증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중반 미국 미네소타주로 이민을 간 노병직은 그곳에서 타계했다. 송무관 2대 관장인 그의 아들 노희상은 합기도와 북부 소림 무술도 배웠다고 한다. # #

1.1.3. 무덕관

파일:JoongAng_dojang.jpg

사실상 태권도의 전신에 가장 가까운 단체라고 볼 수도 있다. 태권도가 창시될 당시 참여한 사범들 중 과반수가 이 도장 출신이었고, 태권도 현용 도복의 원형이 이 도장의 도복이었으며, 청도관과 오도관이 밀던 '태권도'라는 무명이 현재까지 확정되는 데에 큰 공헌을 한 도장이기도 했다. 수련생들도 가장 많은 당시 최대의 도장이었는데, 1953년과 1970년 사이에 전체 태권도 수련자의 약 75%가 무덕관에서 배웠다는 주장도 있을만큼 큰 영향력을 끼쳤다.

파일:Hwang_Kee.jpg
1945년 11월 19일, 무술인 '황기'가 서울 용산역 부근의 교통부 청사를 빌려 개관한 것이 시초다. 지금의 교통부인 운수부 부설 형식으로 설립되었으며, 설립 당시 명칭은 '운수부 당수도부'[16]였다. 무덕관은 용산 철도국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철도국 도장'이라고 칭했고 무덕관 하면 철도역을 연상했다고 한다. 황기는 1955년에 무덕관(武德館)이란 이름을 정하고 서울 중구 동자동에 독자적인 도장을 열었다.

황기는 무술 경력이 상당히 불분명한 사람인데, 본인 주장으로는 어린 시절엔 택견을, 커서는 (일제시대) 만주에서 철도 회사[17]를 다니면서 중국에서 태극권 우슈[18]를 배웠다고 하며 자신이 무덕관을 개관하고 가르쳤던 건 중국식 세법(勢法)과 보법(步法) 등 중국권법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권법을 가르치는 도장에서 굳이 당수도부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황기 본인이 이에 대해 해명하길, 당수도가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뻥카쳤단 소리? 그는 직접 가라테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서적 독학과 청도관 등 다른 도장들과 교류를 통해 가라테를 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57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권법을 참고해서[19] 전통무예인 수박에 영감을 얻어 수박도를 창시했다는 게 황기 본인의 주장이다.

하지만 노병직과 최홍희는 황기가 발행한 화수도교본, 당수도교본, 수박도대감 등의 책이 후나코시 기친이 저술한 책들을 표절 개조한 책일 뿐이라고 혹평했으며, 황기의 출신 도장과 스승, 즉 무술의 계보와 연혁이 불명확하고 그가 실질적으로 도장에서 지도한 것은 중국 십팔기가 아닌 일본 쇼토칸 가라테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 황기가 쇼토칸 가라테 서적 표절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는 주장도 있는데, 황기는 9대관 창립자 중에 유일하게 가라테 수련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지만[20] 본인 주장에 의하면 가라테를 배우지 못한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통해 오키나와 가라테를 접했다고 한다. 근데 책으로 무술을 배운다는 게 현실적으로 쉽게 가능한 것도 아니고,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쪽에 가까웠을 듯? 즉, 가라테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가라테 책을 쓰면 가라테 교본이 되지만 책 보며 흉내만 내던 사람이 가라테도 아니고 당수도니 수박도니 하는 제목 내걸고 책 쓰면 그게 표절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는 논리.

하지만 적어도 황기가 택견, 태극권, 우슈를 배웠다는 주장 역시 물증은 없더라도 심증상으론 신빙성이 꽤 있어보인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황기 본인이 가르치던 무술에 가장 가까운 단체인 수박도[21]의 경우 의외로 택견과 중국권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보이기 때문. 대표적으로 이 영상의 경우, 기본 스탠스는 태권도처럼 다리를 앞뒤로 벌리고 서긴 했지만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는 태권도 스텝과는 달리 수박도의 경우 제자리에서 뛰지 않고 양다리를 번갈아 굽혔다 펴며 상체를 앞뒤로 이동시키는 등 택견 품밟기의 굼실거림의 영향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손기술을 쓰기 전에 상체를 뒤로 크게 젖혔다가 허리를 퉁기며 체중을 실어서 치는데, 이는 의외로 송도수박의 특징이다.[22] 후술된 YMCA권법부가 택견 기술을 가라테식으로 재해석하려 한 단체라면, (황기 제명 이전의) 무덕관은 택견의 운동원리를 가라테 스탠스에 적용하려 한 단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태극권 특유의 상대를 밀어버리는 자세도 있으며 팔극권 특유의 러시안훅같은 자세도 있으며 무예도보통지의 권법 파트에 기록된 전소퇴, 후소퇴, 선풍각같은 기술 또한 존재한다. 설령 황기가 택견과 중국권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해도 저 무술들에 대한 이해도만큼은 상당하며 최소한 비슷하게나마 자신의 무술에 적용이라도 해보려 한 성의는 확실하다는 뜻이다.[23]

이러한 전체적인 정황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황기는 전통무술과 중국권법을 배웠던 사람이지만, 가라테를 비슷하게 흉내내서 전통무술, 중국권법과 섞은, 가라테도 전통무술도 중국무술도 아닌 괴상한 무근본 짬뽕무술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 태권도 수련생 중 75%를 점유했던 걸 보면 무술인으로서는 몰라도 도장 사업가로서의 수완은 확실했던 듯?

이후 황기는 자신의 수박도를 고집하며 태권도의 통합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가장 소극적으로 참여했고, 참여하더라도 가장 먼저 탈퇴하기를 반복했다. 황기 입장에선 당시 무덕관이 가장 수련생이 많은데 통합하면 협회에서 자기 입지만 좁아질테니 뭔가 손해보는 것 같기도 했을 것이다. 허나 이 과정에서 태권도 통합을 지지하던 제자들과 불화를 겪어 1965년 3월 황기는 자신이 설립한 무덕관에서 제명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만다. 태권도계의 스티브 잡스?

그래서 태권도계에서 이러한 황기에 대한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고[24], 사실 당시에 이미 맥이 끊긴 상태였던 수박을 끌어들인 것 등은 다소 황당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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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가 태권도에 남긴 확실한 유산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태권도 도복이 그것인데, 황기는 전통무예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전통문화 자체에 관심이 많았으며 일본의 가라테와 차별화된 한국 무술만의 고유한 도복을 개발하고 싶어했고 그 결과물이 위 사진에 나오는 특이하게 생긴 도복이다. 위 디자인은 무용총에 그려진 고구려의 복식에서 참고한 것이라고 하며 삼국시대 한복의 특징은 앞섶의 깃이 상체의 정중앙에서 떨어진다는 것인데[25] 황기가 고안한 무덕관의 도복도 앞섶 깃이 상체의 정중앙에서 떨어져서 띠의 매듭 라인에 맞춰진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무덕관 도복은 목파임이 띠까지 닿을 정도로 엄청 깊은 것에 반해 정작 고구려 복식은 (섶이 깊이 겹쳐지는) 가라테 도복처럼 목파임이 깊지 않은데, 사실 고구려 복식은 앞섶과 뒷섶이 비대칭이기 때문이다. 사실 뒷섶 깃은 오른쪽 옆구리까지 닿을 정도로 깊이 겹친다. 뒷섶 부분이 앞섶에 가려져서 섶이 겹치는 부분이 좁아 보이는 것이지 사실 고구려 복식도 가라테 도복처럼 섶이 깊이 겹치는 구조인 것이다.[26] 하지만 황기는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인지 뒷섶도 앞섶과 대칭으로 만들어 버렸고(...) 결과적으론 섶이 거의 겹치지 않는, 사실상 하오리 위에 띠 멘 수준인 상체의 중앙 부분이 시원하게 다 드러나는 이상한 도복이 되어버린 것. WT태권도 도복의 목파임이 가라테 도복에 비해 매우 깊은 것은 태권도 도복이 무덕관 도복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또한 황기는 고구려 복식을 참고하여 도복에 깃, 도련, 소매 부분에 검은 선을 넣었는데, 무덕관 도복의 이 검은 선 디자인은 이후 WT태권도, ITF태권도, 당수도, 합기도 같은 수많은 한국 무술 도복 디자인들의 원형이 된다. 사람마다 관점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태권도 도복은 디자인이 멋있다고 평가받으며,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태권도가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가 도복이 멋있어서인 것을 생각해 보면, 황기가 태권도에 남긴 업적은 결코 낮다고만 볼 순 없다.

아무튼 황기가 전통무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당시 태동기였던 태권도와 결합하려고 한 것 자체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시 태권도계는 그러한 시도를 철저하게 배척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오늘날 와선 이게 문제가 되니 전통무술과 태권도의 연결고리로써 황기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는 것.[27] 황기에 대한 이와 같은 태권도계의 이중적인 태도는 한국 태권도 단체의 역사왜곡 문제와 궤를 같이 한다.

그렇게 태권도계에서 아웃사이더로 전락한 후 황기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수박도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무술을 보급했고, 무덕관 내의 (황기를 쫓아낸 세력 중) 가라테의 전통을 고집한 또다른 세력은 당수도로 활동하고 있다. 의외로 미국 내에선 큰 인지도를 가진 무술들이며, 각각 일명 Soo Bahk Do, Tang Soo Do로 알려져 있다. 수박도의 경우 웨스트포인트에서 유도와 함께 단 둘뿐인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고, 당수도의 경우 최소한 2010년대 초반까진 미국에선 태권도 도장보다 당수도 도장이 훨씬 많았을 정도로 압도적인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다.[28]

수박도야 상술했듯 황기 개인의 독창적인 창작 무술에 가깝다 쳐도 당수도는 사실상 가라테 짝퉁(...)이나 다름없는데 태권도와는 달리 최소한의 차별화도 하지 않았으며 그냥 가라테에서 간판만 당수도로 바꿔달고 전통무술이라고 우기는 단체라서 말이 많다. 심지어 형(카타)까지 똑같다. 순서도 안 바꾸고 그대로.[29] Kumdo 간판 달고 역사왜곡한다고 욕쳐먹는 대한검도회도 최소한 지들만의 독창적인 형은 있다 게다가 무덕관 시절엔 황기가 상술한 한복에서 영감을 얻은 독창적인 도복을 개발했었는데 당수도는 가라테 도복에서 재질만 바꾸고 (무덕관 도복과 대충 비슷하게) 검은 선만 넣는 등 일본식 도복으로 다시 회귀한 바 있다. 사실상 한국 무술이 아니라 한국의 가라테 단체에 가까운 단체. 미국에선 대충 쇼토칸가라테에 태권도 발기술 추가한 실전무술 정도로 생각하는 듯?

어쨌든 황기가 이끄는 수박도와 독자노선의 당수도를 제외한, 김영택과 홍종수가 주축이 된 (태권도) 통합파가 이끄는 무덕관은 태권도를 창시할 때 그 쪽수에 걸맞게 정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대표적인 게 태권도의 무명 문제였다. 최홍희 문서에도 나오지만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무명을 지었을 때 당시 9대관 관장들 중 다수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종우 등은 대신 권도와 당도를 합친 '태수도'라는 무명을 밀었지만 9대관 중 무덕관의 김영택이 태권도 명칭을 지지했던 탓에 무덕관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던 나머지 관장들도 어쩔 수 없이 최홍희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즉, 무덕관이 아니었으면 현재 태권도의 명칭은 당수도(...)였거나 태수도였을 거란 얘기. 태권도의 무명을 지은 최홍희 못지않게 태권도 명칭이 자리잡도록 알게 모르게 활약을 한 도장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무덕관은 무술계 내외의 여러 유명인사들을 배출해 낸 '명문도장'으로도 이름이 높은데, 인지도가 있는 사람만 해도 척 노리스[30], 멕시코 태권도[31]의 아버지 문대원 사범, 이란 태권도[32]의 아버지 강신철 사범[33], 프로레슬러 천규덕 등 태권도 내외에서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유명인들을 제법 배출한 바 있다. 규모적으로도 비단 태권도뿐만 아니라 가라테 계열 무술 도장들을 통틀어 봐도 비견될만한 단체는 송도관 극진회관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다.

1.1.4. YMCA 권법부

5대관 중 유일하게 중국권법, 택견과의 연관성을 확실히 입증할 수 있는 단체이다. 지도자 본인들은 배웠다고 말하지만 시대적 한계상 실제 중국권법이나 택견을 배웠다는 단증 비슷한거나 증언자 등 물리적 입증은 힘든 청도관, 무덕관과는 달리, YMCA 권법부는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중국권법, 택견을 배웠다는 계보가 입증이 가능하다. 물론 그만큼 주류 태권도와는 온도차가 있는 상당히 독특한 독자 노선을 취하고 있다.

파생관으로 창무관(彰武館)과 강덕원(講德院)이 있다.[34]

1946년 윤병인이 서울 종로 YMCA에서 권법부를 창설한 데서 시작한다.

기반이 되는 무술은 2가지로, 하나는 윤병인이 어린 시절 만주에서 배운 권법[35]과, 일본 유학 시절 배운 슈도칸(修道館) 가라테이다. 권법은 몽골계 사범한테서 배웠는데 본래 조선인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을 직접 사범의 집 마당을 쓸고 교습료를 남들의 2배(...)로 내는 등 정성을 보이며 배웠다고 한다. 그가 배운 형은 '단권', '장권', '토조산', '태조권', '태극권', '팔기권'과 '칠보대타', '일보대타' 등의 수련법이다. 이 중 대부분의 형들이 대타(對打)로, 2인의 약속 대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로부터 윤병인을 가르친 몽골계 사범이 청나라 팔기군의 무술 사범이고 권법이란 몽골 팔기에서 연마한 군용 무술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이 '팔기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논쟁거리다. 중국 쪽의 권법이었던 건 확실한데, 만주족의 무술이라거나 북파권법의 일종이라고 추정만 할 뿐이다. 실제로 강덕원의 박철희 사범과 지승원 교수가 중국에 가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팔기권의 마지막 형인 대팔극이 곽전곽 계통의 곽가 팔극권의 투로와 일치했다고 한다. 실제로 곽가팔극권은 만주 쪽에서 가장 세력이 큰 무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팔극을 제외한 나머지 형은 팔극권의 투로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정황증거를 종합해 볼 때 윤병인이 몽골계 사범에게 배웠다는 팔기권은 여러가지 중국권법이 합쳐진 청나라짬뽕 군용무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청나라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바로 우슈인데, 중국국민당이 황푸군관학교에서 태극권, 남권같은 여러 전통권 투로들을 섞어서 군용무술로 가르친 것을 우슈의 시초로 보기 때문. 중국 각지의 전통권들의 여러 투로들을 취사선택해서 군용무술로 만든다는 개념은 중국 역사에선 특이한 게 아니었단 얘기다. 청나라의 만주 팔기군이 배웠다는 군용무술도 우슈 표연종목처럼 여러 중국 전통권들의 투로가 하나씩 섞인 무술이 아니었을까 정도의 추론은 가능하단 얘기.

참고로 (강덕원의 직계후손뻘 도장인) 다물원의 대팔극 시연을 본 한국의 팔극권사들은 ' 진각을 포함한 전체적인 팔극권의 운동원리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낮아 보이며, 사실상 자세를 흉내내는 쪽에 가깝다'며 혹평하는데, 이것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YMCA권법부는 팔극권 도장이 아닌 가라테 도장이었고, 무술이라는 게 똑같이 전수되는 것도 아니고 한번 사사될 때마다 무술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스승을 둔 문파, 유파별로도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사실상 가라테 도장에 가까웠던 도장에서 가르치던 팔극권 투로의 진각 자세가 정확하지 않은 것 정도는 애교에 가깝다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YMCA권법부는 중국권법과 택견을 가라테식으로 해석하는 단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운동원리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다물원의 중국권법 형은 누가 '이건 중국권법 투로입니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냥 태권도 품새나 가라테 카타라 생각할 정도로 절도 있는 자세를 보인다. 즉 부드러운 자세의 (백학권을 포함한) 남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서 절도 있게 바뀌어서 가라테가 된 것처럼 팝핀같은 독특한 운동원리를 가진 (팔극권을 포함한) 북파권법이 절도 있게 바뀌어서 YMCA권법부식 태권도가 되었단 얘기.[36]

창립자인 윤병인은 일본 도쿄 니혼대학에 유학을 했는데,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가라테부 학생들을 권법으로 혼내준 것을 계기로, 대학에서 가라테를 가르치던 슈도칸 가라테 개조 토야마 칸켄과 교류를 하고[37] 토야마는 윤병인을 가라테 5단으로 인정한다. 토야마 칸켄은 일본 송도관 가라테의 개조 후나고시 기친과 사동류의 개조 마부니 겐와의 스승인 이토스 야스츠네의 제자이다. 요컨데 후나고시 기친, 마부니 겐와와 동렬의 제자인 셈.[38] 이 때는 가라테가 오키나와에서 건너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므로, 윤병인이 습득한 가라테는 실은 오키나와 테에 가깝다.

실제 YMCA 권법을 수련했던 사람들은 맨손 권법 이외에도 중국식으로 보이는 (찌르기를 주로 하는) 창술, 단검술[39], 오키나와 테식 봉술을 수련했다고 한다. 주로 수련하는 가라테 형은 (이후 한자 음독 기준) 평안1~5, 발색 대, 발색 소, 공상군, 명경, 반월, 노패, 진수, 기마(내보진, 철기) 1~3, 십수, 오십사보 대, 소 등이 있다. 봉형은 '윤선생(윤병인 선생)의 콘'이 있다. 현대화된 가라테와 달리, 오히려 1930년대 가라테가 일본에 전파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듯.

윤병인은 수련 당시 오른손에 흰 장갑을 끼고 수련을 했는데, 이는 어린 시절 사고로 오른쪽 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원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오른손으로 경례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현재 제자들은 윤병인을 존중하는 의미로 오른손에 흰 장갑을 끼고 수련한다.[40] 아직 관이 존재하던 시절엔, 타 관들과의 대련시 주로 기술에 강세를 보였다고 한다.

(황기를 제외한) 다른 5대관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가라테에 자부심을 느끼며 딱히 다른 무술을 접목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것에 반해, YMCA권법부의 사범들은 특이하게도 택견을 적극적으로 배워서 택견의 발기술을 자신들의 가라테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다. 박철희, 김병수 등 YMCA권법부의 여러 사범들은 택견 장인 송덕기의 제자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송덕기 또한 가라테 도복을 입은 YMCA권법부 출신 제자들을 아꼈다.

이렇게 '택견과 중국권법을 가라테식으로 재해석한다'는 YMCA권법부의 무술철학은 가라테만의 고유한 전통을 중시하던 다른 기간도장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그들만의 아이덴티티였다고 볼 수 있다. (황기 제명 이전의) 무덕관과는 비슷하면서도 정반대 느낌인데, 황기 사범이 가라테의 기술에 택견과 중국권법의 운동원리를 도입하려 했었다면, YMCA권법부는 택견과 중국권법의 기술에 가라테의 운동원리를 도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이러한 흐름은 당시 주류 태권도의 시각에서 벗어난[41] 튀는 성향이었던 탓에 YMCA권법부는 태권도가 창시될 당시 5대관 중 마이너 신세를 면치 못했고, 실질적으로 YMCA권법부가 현재의 주류 태권도에 기술적인 면에서 끼친 영향은 고려 품새[42], 한수 품새[43] 정도밖에 없다.[44]

YMCA권법부에서 배출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정통 무술인이 아닌 오랜기간 태권도 행정가로 활약하며 올림픽 종목 채택에도 공을 세운 김운용이다. 물론 YMCA권법부가 김운용에게 직접적으로 끼친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일각에선 김운용이 세계태권도연맹 태동기에 태권도를 무술이 아닌 스포츠로 가닥을 잡았던 것도 송덕기와 연관이 깊었던 YMCA권법부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뇌피셜을 펴기도 한다. 송덕기는 택견을 무술이 아닌 민속놀이, 즉 스포츠로서 전승되길 원했고, 김운용은 이런 송덕기의 제자가 많았던 YMCA권법부의 전체적인 도장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던 거 아니냐는 주장. 물론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여담으로, 태권도랑 별개로 다른 동북아 무술사 측면에서 보아도 연구 가치가 높은 도장이다. 우선 윤병인 관장의 가라테는 오키나와 테가 일본식 가라테로 바뀌어가던 중간다리에 가까운 형태였고, 그가 배웠다는 팔기권이 진짜 청나라의 군용무술이 맞다면 중국 사학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윤병인 관장의 팔기권이 진짜 팔기군의 군용무술이 맞다면 만주족의 전통무술과 청나라 군대의 훈련에 대한 연구가 가능해지는 등 연구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45] 또한 윤병인 관장이 월북한 이후 북한 격술 창시에 영향을 줬다는 점이나 택견 장인 송덕기의 1대 제자가 박철희 사범인 점 등을 고려하면, 비록 규모는 작은 도장이지만 격동의 동북아 무술사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는 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수련했다는 파사류(破邪流)의 창시자인 이강희(Kang Rhee) 사범이 여기 출신이라고 한다. 윤병인 관장이 가르치던 중국권법에서 상당히 달라지긴 했지만, 의외로 YMCA권법부의 초창기 모습을 제법 잘 보존하고 있는 편이라는 평을 받는다.
1.1.4.1. 창무관
윤병인이 한국전쟁 여파로 월북하자 체신부 직원이었던 이남석은 1953년 10월 체신부 관계자의 도움으로 창무관을 개관하고 자신이 관장을 맡았다. 부관장은 김순배였다.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과 무도인의 '무'자를 합쳐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지만 박철희의 증언에 따르면 윤병인이 '빛날 창(彰)' 자에 '호반 무(武)' 자를 쓰는 창무관이 좋다고 했다고 하면서, 한국전쟁 이전에 창무관 명칭으로 단증을 발급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사학자 허인욱은 이남석이 YMCA 권법부에서 수련을 하면서 체신부에 별도로 권법부를 설립한 것으로 여겨진다며, 윤병인도 체신부권법부가 YMCA 권법부와는 별개의 도장이었으므로 이남석의 부탁에 따라 '창무관'으로 단증을 발급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46] 창무관은 국내에 700여 개의 지관을 설치하고 해외에 450여 개의 도장을 개관할 정도로 성장했다.

1986년 이남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김순배가 3대 관장으로 취임했다. 김병수 사범의 증언에 따르면, 1973년 당시 최홍희 ITF 총재가 브라질로 가는 도중에 휴스턴에 들러 이남석(당시 ITF 사무총장)과 함께 그의 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최홍희가 김병수 사범에게 "이남석 관장도 ITF로 왔으니 김병수 사범도 ITF로 와서 오른팔 역할을 해달라"고 제안했다고 한다.[47] 이를 토대로 김병수 사범의 평을 종합하면 홍정표 사범과 박철희 사범을 제외한 YMCA권법부 출신들은 당시 관통합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부와 명예를 쫓아 이합집산했으며, 이 과정에서 창무관의 수련 내용은 급속히 국기원의 그것으로 대체된다. 현재 김중영이 4대 관장으로서 세계태권도창무관총본관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명목상의 중앙본관일 뿐 실제 YMCA 권법부의 기법들을 전수하진 않는다.

현재 국내에서 창무관의 기법의 맥을 이어받은 도장은 이규현 사범이 설립한 태권도이규현사범아카데미와 이광희 사범과 서재영 사범이 1997년 설립한 연무재(硏武齋) 태권도가 있다. 이규현 사범은 품새 관련 자타가 공인하는 사범으로 1968년 청우태권도장 사범을 시작으로 국기원 교육분과 위원장, 대한태권도협회 품새 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 이규현 사범은 양평에 사범들을 위한 재교육의 장으로서 태권도이규현사범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고, 이규현 사범의 제자들이 모여 '청우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국내 곳곳에서 청우태권도장의 이름으로 창무관 기법을 잇고 있다.

연무재태권도의 이광희 사범은 창무관 8단으로 서울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던 1962년 서울시청 뒤에 위치했던 철도청 관사 옛 건물터에 있던 창무관 본관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태권도라 부르지 않고 '공수도창무관'이라고 칭했던 시절이다. 학계에서는 연무재가 창무관 기법을 변형하여 독자적으로 수련을 이어오고 있다고 평가한다.[48] 당연히 50년 전의 창무관 수련 기법을 그대로 이어오는 것은 아니고 그 이후 본인의 연구 성과를 합친 결과이다. 그러나 수련의 기저를 구성하는 가치관(무술로서의 태권도)과 손기술과 발기술의 조화를 꾀하는 것은 창무관의 기법과 상통한다. # 이광희 원장의 창무관 시절 및 팔극권에 대한 구술내용은 연무재태권도 항목 참고.
1.1.4.2. 강덕원
이남석과 김순배가 창무관을 개관하자 이에 반발한 홍정표는 1956년 6월 박철희와 함께 신설동에서 연세대 당수도 부원들을 중심으로 '무도원택견권법도장(줄여서 무도원)'을 개관했다. 무도원은 홍정표가 사범을 맡아[49] 3개월 내지 4개월 정도 운영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 두게 되었다. 그리고 홍정표의 부탁으로 박철희가 사범으로 취임했다.[50] 박철희는 이때부터 강덕원(講德院)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강덕원에서는 앞차기, 안다리걸어차기, 손기술 활용법을 연구해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타격 순간에 힘을 줄 것을 강조했으며,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팔을 뒤로 빼는 예비동작 없이 바로 뻗는 주먹 또는 수도와, 역시 예비동작이 생략된 빠른 앞차기가 이 강덕원에서 연구한 결과물이다.

티우 월남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장교 안낙순 씨가 강덕원 출신이다. 안낙순 씨가, 친분 있는 청도관 고위급 수련생과 함께, 강덕원 후배들을 찾아온 자리에서 두 사람의(안 VS 청) 친선 대련이 이뤄졌는데, 대련을 지켜본 중학생 수련생 말이, 두 사람 다 한 번에 빠르게 싸움을 끝내려고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호랑이 같았다고 한다. 예비동작없는 빠른 주먹을 수련한 분 중에는, 권투로 전향해 성과를 거두신 분도 나왔다는 후문.

강덕원은 '덕을 가르치는 집'을 뜻한다. 기존의 '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을 사용한 것은 박철희가 『파사권법』(1958)이라는 교본을 저술한 해인사 경학원의 '원'에서 차용한 것으로, 일본식 '관'이라는 명칭에서 탈피하고자한 의도에서 비롯됐다. 홍정표와 박철희는 강덕원이 창무관의 분관이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다. 특히 박철희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YMCA 권법부라는 줄기에서 창무관이 먼저 가지를 뻗고, 그 후 강덕원이 가지를 뻗은 것이기 때문에 강덕원이 창무관에서 분관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강덕원 출신으로는 이금홍·김용채·정화·김정후·이강희·한정일· 김병수·임복진 등으로, 박철희가 1971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이금홍이 강덕원무도회 회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서울대학교 직원이었던 홍정표는 1966년 서울대 법대에 흥무관(興武館)을 창설했다. 흥무관은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각 단과대학이 통합되면서 폐관한 것으로 본다. 지승원 사범(前 한동대 법학부 교수)은 1969년 교양학부를 마치고 법학부로 전공진입하면서 홍정표 사범을 만나 태권도를 배우게 된다. 이로써 본인을 YMCA 권법부 3세대로 여긴다.[51]

지금은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다물원이 강덕원의 맥을 잇고 있다.

강덕원 출신으로 김병수는 텍사스 휴스턴에서 Chayon-ryu (자연류)라는 이름으로, 이강희는 파사류란 이름으로 과거 YMCA 권법부의 형(공산군, 장권 등)을 수련하고 있으나 시간에 따라 개인의 해석이 가미되면서 독자적으로 변모했다.

특이하게도 토니 퍼거슨이 이쪽 출신 사범한테서 태권도를 배웠었다고 한다. #

1.1.5. 지도관(조선연무관 권법부)

1946년 3월 3일 전상섭이 열었으며, 최초 이름은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 권법부(공수도부)였다. 전상섭이 일본에서 어떤 유파 가라테를 배웠는지는 불명이다. 이종우 전직 국기원 부원장 전기에 따르면 전상섭이 시토류를 배웠는지 고주류를 배웠는지 쇼토칸을 배웠는지 불명이라고 한다, YMCA 권법부의 윤병인과 친하여 같이 중국 권법을 수련하러 만주에 가기도 하였다.그러던 중 6.25를 겪으며 전상섭이 행방불명되었다.

전상섭의 뒤를 이어 윤쾌병이 조선연무관 관장이 되었다. 윤쾌병은 일본 니혼대학에서 병리학을 전공했으며, 일본에서 도야마 간켄(遠山寬賢)의 슈토칸(修道館)에서 가라테를 배웠다. 1945년에는 일본 도쿄에 한무관(韓武館)을 세워 관장으로 활동하다 귀국 후, 전상섭의 영입으로 조선연무관 권법부에 부임했다. 참고로 한무관은 현재 사단법인 전일본공수도연맹 렌부카이[鍊武會]로 이어지고 있다. 윤쾌병이 귀국했던 1949년 말 당시 그는 가라테 7단이었다고 한다. 지도관의 전신 '조선연무관 권법부'. 윤쾌병은 6.25 당시 부산에 피난해 있던 이종우와 의기투합하여 단체명을 지도관(智道館)으로 개명했다. 지도관연맹 역사. 서울로 돌아오자 1954년 이종우를 지도사범으로 영입했고, 지도관은 이 둘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여담으로 윤쾌병은 1949년부터 서울대 수의과 교수를 역임했고 이어 건국대 축산대 교수로 부임하여 건국대 축산연구소장 및 축산대학장을 역임했다. 인터넷에서 윤쾌병을 검색하면 주로 한국야쿠르트 명예회장이 검색되는데, 동일인물이다. 윤쾌병은 1969년 한국야쿠르트사를 창업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종우는 5대관장 이후 등장한 2세대 태권도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그는 1946년 3월 23일 조선연무관 공수도부(권법부)에 입관해 가라테를 접한 이후 대한공수도연맹을 결성해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대 초 슨도메 방식을 채택하고 있던 전통가라테와 다른 겨루기 도입을 이끌기도 했다.[52] 1960년대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태권도계가 통합을 이루고[53] 체계화할 때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협회장 직책은 선배들이나 정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기술위원장 등에 재직하며 실질적인 부분을 많이 맡았는데, 이 기간 동안 태권도의 품새를 제정하고[54] 국기원 등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시대 흐름에 따른 관의 통합, 전자호구 도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2. 명칭의 유래

1950년대 국내 무술-무도계에는 당수도·공수도·권법·화수도[55]·수박도·태권도라는 명칭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당시 가라테라는 명칭은 일본색이 강해 거부감을 주었기 때문에 가라테를 음독한 당수도, 공수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거나 권법이라고 애둘러 표현했다. 그밖에 황기는 전통무예인 수박에서 영감을 얻어 수박도라 불렀고, 최홍희는 1954년 무렵 전후해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 내어 불렀다.[56]

1950년대 후반 무도인들은 발전을 위해 통합체의 설립 필요성에 공감을 했으나, 통합체 설립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명칭의 통일이었다. 어떤 명칭으로 통합되느냐 하는 문제는 각 관의 위신과 나아가 밥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이므로 쉽게 결론나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명칭 문제 등으로 통합단체 설립이 지지부진하던 상황 속에서 1959년 오도관 초대관장 최홍희가 군 장성이란 입지와 오도관, 청도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 태권도라는 명칭을 밀어붙이며[57]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1961년에는 대한태수도협회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지만[58] 1965년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되었다. 이때 이종우 등 기존 세력들은 태수도('태'권도+당'수'도)협회의 명칭을 고집했으나, 당시 5대관에서 영향력이 강하던 무덕관의 대변인 김영택이 수박도회와 태수도협회가 통합하는 거니 양쪽 명칭보단 태권도로 명칭을 개정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최홍희를 도와준다.[59]

사족으로, 최홍희는 태권도의 '태'자는 발을 의미하며 태껸과 연관짓기 위해 찾은 "밟을 태(跆)"를 붙였다고 하는데, 정작 태권도에는 발로 밟는 기술은 없다.[60](...) 발차기를 한다는 의미라면 "다리 각脚"을 썼어야 올바른 한자 조합이 된다. 각권도 이에 대한 유력한 가설로, 중국권법에 관한 고사성어 중 북파권법은 발차기가, 남권은 주먹이 뛰어나다는 뜻의 '남권북퇴(南拳北腿)'가 와전된 '남권북태(南拳北跆)'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이 남권북태는 아직도 종종 쓰이는 와전 표현이다. 참고로 남권과 북태의 순서를 바꾸면 '태권'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또한 태권도의 모체가 된 5대관 중 YMCA권법부에선 특이하게 진각을 가르쳤는데, 이 무술이 무엇이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61] 이 진각은 바닥을 '밟는' 자세이고, 최홍희가 거기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감이 없잖아 있다. 그리고 태권도는 높이 도약하는 자세가 많은데 도약을 하려면 바닥을 강하고 빠르게 밟아야(?) 하고, 그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을까 추정할 뿐이다. 참고로 최홍희가 '밟을 태(跆)' 자를 썼을 땐 차는 동작뿐만 아니라 뛰어오르는 동작도 의미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두번째 글자는 가라테를 음독한 공수도 또는 당수도에서 사용되는 손 '수(手)'자를 고려했다가 그와 비슷한 의미인 주먹 '권(拳)'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초기 태권도의 5대관에서 사용한 세 가지 명칭이 '공수도', '당수도' 그리고 '권법'이었다. 또 당시 쿵푸를 비롯한 많은 중국 무술들이 '권법'이라 불렸다.

세번째 글자인 도(道)는 태권도가 일본 무술 작명의 영향을 받은 현대 창작 무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무예에 도(道)를 붙이는 건 유도처럼 일본식 조어로 전통적인 한국식 명명법은 아니다. 다만 유도부터가 유술의 무술적 개념을 넘어 철학, 정신적 수양까지 연마하라는 의미에서 도를 붙인거라 태권도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2. 대한태권도협회의 창립

1959년,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명칭을 밀어붙이며 대한태권도협회가 창립되었다. 6개관이 여기에 참여했는데[62], 사실 이때도 내부에선 최홍희의 행보에 거부감을 느낀 무도인들이 꽤 있었다. 자기들 무술에 자부심이 있던 상당수 민간 도장들은 왜 군 인사 최홍희가 민간단체인 자기들 무술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지 모르겠다, 최홍희가 이론적 식견은 몰라도 실제 무술 실력이 높은 인사인지는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명칭에 있어서도 계속 이견들이 오갔다.

그러던 중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박정희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최홍희는 군에서 예편당하고 말레이시아 대사로 밀려나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 그렇게 최홍희가 쫒겨나면서 최홍희의 대한태권도협회는 와해되었고, 1961년 9월 무술인들은 새로 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를 만들었다. 태수도는 태권도와 공수도·당수도를 절충하여 새로 만든 명칭이었다. 그리고 대한태수도협회가 만들어진 후 황기, 윤쾌병 등 많은 1세대 태권도인들은 60년대를 거치며 서서히 태권도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태권도계는 주로 2세대인 이종우와 엄운규 등이 주도해나간다.

1964년 10월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온 최홍희는 1965년 1월 기어코 다시 회장직에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1965년 3월에는 황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덕관 인사들과 연합하여[63] 대한수박도회와 통합한다. 사실상 대한태수도협회가 대한수박도회를 흡수하는 것이었지만 표면적으론 두 단체가 동등하게 통합하는 모양새를 갖췄는데, 최홍희는 이를 명분으로 태수도나 수박도가 아닌 제3의 새로운 명칭을 사용해야할 것을 주장하며 1965년 8월 협회의 이름을 기승전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었다. 그러나 회장직에 복귀한지 1년만인 1966년 1월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 임원들의 불신임을 받아 불명예 퇴진을 당하고 만다.

1966년 3월 국제태권도연맹( ITF)이 창립되어 최홍희가 총재가 되었고, 부총재는 노병직, 사무총장은 엄운규[64], 기술위원장은 이종우가 맡았다. 이종우와 엄운규에 따르면 최홍희를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물러나게 하는 대신 그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일종의 명예직인 ITF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우는 곧 최홍희와의 의견 차이로[65] 기술위원장을 사퇴했다. 당시 태권도는 국내에서도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라 ITF는 창립 당시에는 9개국밖에 안될 정도로 말 그대로 속빈 강정인 조직이었다. 다만 1여년만에 40개국으로 늘어나는 등 수완을 발휘하긴 한다.

1960년대 후반 대한태권도협회는 무술로서 태권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독창적인(?) 품새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품새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팔괘품새와 유단자품새 17개를 만들었다. 1971년에는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종우의 주도로 "태권도교본(품새편)"이 발간되었다.[66] 1971년 1월에는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YMCA권법부 출신 행정인사 김운용을 태권도계로 끌여들여 그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운용은 국제감각과 본인의 외교력을 발휘해 태권도를 성장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다.

한편, 대태협 품새에 대해서도 본인만의 무술철학이 있던 최홍희는 가라테 냄새가 짙다느니 촌스럽다느니 비판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이에 뿔난 대태협 측이 최홍희가 발간한 태권도 서적에 대해서도 가라테 서적을 표절했다고 비판하는 등 충돌이 이어졌다. 그러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1968년 4월 대한태권도협회는 최홍희의 국제태권도연맹(ITF)를 탈퇴하고 만다. 이에 최홍희는 1968년 7월에 태권도진흥회를 결성하여 대한태권도협회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협회를 만들려고 했으나 문교부에서 중복단체 설립을 불허했기 때문에 좌절되었다. 최홍희나 ITF 쪽에서는 문교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정권의 정치적 탄압이라 주장하지만[67], 파벌 싸움 등을 우려해 만들어진 중복단체 설립 불허 방침은 최홍희가 태권도진흥회를 결성하기 이전부터 시행해오던 정부시책이긴 했다. 다만 최홍희가 박정희 정권이랑 사이가 좋지 않다보니 이런 식의 주장도 생긴 것으로 보인다.

1972년, 최홍희는 자신이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며 망명 신청을 허가받은 캐나다로 망명을 간다. 국제태권도연맹(ITF)의 거점도 캐나다 토론토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최홍희의 ITF는 북미에서 인기를 끌다, 1980년대 들어 북한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이후엔 북한을 비롯한 중국, 소련, 동유럽 등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중점적으로 보급하였다. 스위스도 90년대까진 ITF가 주류였다는 거 보면 서유럽에도 보급한 모양. 그러나 이런 북한과의 교류는 30년 동안 그의 최측근으로 지내왔던 남태희를 비롯한 상당수 사범들이 그를 떠나는 ITF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68] 최홍희는 망명 후에도 사인웨이브처럼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으로 태권도를 개량시켜 자신의 아호(雅號)인 창헌을 따서 '창헌류'라고 부르기도 했다.

3. 태권도 세계화와 WT-ITF의 대립

캐나다로 망명한 이후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이끌던 최홍희는 이후 북미 마샬 아츠붐을 이용해 엄청난 조직 성장을 이뤄 태권도라는 이름이 북미권 국가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69] 이를 바탕으로 서방권 국가들에도 태권도를 보급하여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한편, 최홍희와 ITF가 캐나다로 떠나자 국내 태권도계에서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훗날 WT)을 출범시키고 김운용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이어지던 관들 통합 노력의 결실로 1978년 최종적으로 개별 관들이 폐지가 되고 승단 심사, 단증 발급 등의 주요 업무를 중앙 도장인 국기원이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까진 ITF나 사범 개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태권도의 해외 진출에 국기원도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WT는 태권도의 스포츠화에 앞장섰으며 GAISF(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에서 스포츠로 정식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최홍희가 자신의 태권도가 진짜이고 WT 태권도는 가짜이며 가라테의 아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WT는 1975년 10월 GAISF에 가입하는 데 성공하여 태권도 스포츠의 길을 열었고, 이어 1980년 8월 WT의 태권도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선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다. 1994년 9월엔 WT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다.

한편, 최홍희는 70년대 후반부터 북한과 접촉하여 북한의 지원하에 공산권 국가들에게 자신의 태권도인 '창헌류'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북한에 처음 태권도가 보급된 것은 최홍희가 방북하여 태권도를 지도한 1980~1981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둘의 관계도 은근한 대립은 있었는데, 북한은 최홍희의 ITF를 지원해주면서 ITF를 북한으로 흡수하려 했고, 최홍희는 북한의 지원에 힘입어 ITF를 공산권에 보급할 수 있었지만, 결코 ITF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김일성이 북한내 ITF 태권도 보급에 열성적인건 맞았기에 태권도는 북한에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다. 1986년에는 중국에도 처음 방문해 태권도 보급을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 최홍희는 자신의 아들 최중화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최중화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부자간 ITF 태권도에 대한 철학 차이 등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자, 2001년 최홍희는 자신의 아들을 ITF에서 제명시키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자 최중화는 반기를 들었고, ITF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격렬한 내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홍희는 위암으로 서서히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고, 최중화도 최홍희가 사망하기 한달 전인 2002년 5월 캐나다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며 부자 사이는 극적으로 화해하지만, 공적인 문제는 여전히 따로 놀게 된다. 결국 2002년 6월 최홍희는 평양에서 위암 치료를 받다 사망하고[70], 장웅이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이후 ITF는 크게 보면 북한계/비북한계로 나뉘어 지금까지도 내부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알고 보면 국내에도 최홍희의 ITF 계열 태권도 도장이 의외로 제법 있다. 최홍희가 1972년 캐나다로 망명 가면서 북미 지역에서 자신의 '창헌류'를 전파했고, 그 결과 재미 교포들이 운영하는 태권도장의 상당수가 최홍희의 ITF 계열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태권도장의 활성화 및 조기 영어 교육붐을 타고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으로 들어와 자신들의 태권도장을 열었다.

4. 가라테와 차별화

1950년대부터 태권도는 족기(발차기 기술)에 혁신적인 변화를 꾀했다. 특히 발차기 수련에 집중했던 곳은 청도관으로 초기 태권도의 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50년대에는 풀컨택트 방식의 겨루기(대련)가 태권도에 도입되었다. 겨루기의 도입은 태권도가 개인 수련 중심이였던 가라테와 구분되는 개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71] 그래서 비슷한 길을 가고 있던 극진공수도와 통합설이 한동안 일각에서 진지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혹자는 태권도의 이러한 대련, 시합 지향을 투로 같은 것이 없이 오로지 겨루기가 처음과 끝이었던 택견의 영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에는 태권도만의 독자적인 기술 중 하나인 뒤돌려차기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발차기 기술은 발전, 정교화되었으며 이는 80년대 나래차기, 턴차기 개발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덕분에 발차기 부분에선 태권도가 오히려 현재의 가라테 절권도[72], 쿵푸 등의 중국 무술에 영향을 끼친 점도 있다.

5. 태권도계 내부의 태권도사 인식

5.1. ITF의 인식

ITF는 WT와는 달리 태권도가 ITF 창립자인 최홍희가 창시한 현대 무술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도 기술된 바 있다.

ITF측 설명에 의하면, 오도관 초대 관장을 지낸 최홍희가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의 창립과 함께 태권도 기술을 체계화하면서 현대 태권도가 탄생하였다. ITF 측에서 내세우는 최홍희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한국의 역사를 담은 천지, 단군, 도산 등 24가지의 (품새)을 개발하여 가라테와는 다른 새로운 수련체계를 확립했다는 것, 둘째는 ITF 태권도는 모든 기술에 적용하는 사인웨이브 이론을 정립하여 독특한 무도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본 항목을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최홍희가 태권도 창시에 큰 역할을 한 주요 멤버 중 한명은 맞으나 청도관, 무덕관 등 5대관의 존재를 감안하면 혼자서만 태권도를 만든건 아니다. 그래도 ITF 태권도로 한정해서 보자면 틀이나 이론 부분이 최홍희의 영향력이 많이 들어간건 사실이다. 태권도계 전체로 봐도 기틀 확립, 전파, 통합 노력에 공이 있고 태권도라는 명칭도 창안했다.

그래서인지 WT에서는 최홍희가 초창기 태권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점은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태권도의 창시자임은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태권도 교범들은 대부분 WT 쪽에서 쓴 것이지만, 최홍희를 굳이 언급하지 않거나 덜 부각시키는건 있어도 딱히 부정적으로 다루진 않으며, 다만 최홍희 망명 이후 태권도도 발전해 왔다는 걸 부각하는 편이다.

5.2. 국기원(세계태권도본부)의 입장

이 부분에 대해 WT가 역사왜곡을 하는 것이다 아니다 말이 나오고 본 문서에서도 반달 논쟁이 있는지라 일단 두 의견 모두 서술해둔다.

우선 국기원은 태권도를 "한국무예문화의 풍토나 배경에서 외래무예를 수용하여 토착화된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73] 국기원은 태권도가 한국의 맨손무예사의 전통을 잇는 맥락 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실질적인 태권도의 역사를 해방 후인 1946년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명시한다.[74] 광복 직후 한국인에 의해 만주권법과 가라테 등의 외래무술이 도입되어 5대관이 태동하고 이후, 택견에서 착안된 차기 위주의 신기술이 개발되어 한국적 특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5.2.1. 택견이 태권도의 원류인지 여부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택견과 태권도의 관련성 항목을 참고할 것.

5.2.2.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파생된 무술인지 여부

태권도와 가라테 간의 연관성과 그 영향력의 정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는 바, 이에 대해선 가라테와 태권도의 관련성 항목을 참고할 것.

참고로 태권도의 모체가 된 기간도장 관장들은 다양한 무술을 연마했다. 무도관의 황기는 중국 권법을, 조선 연무관의 전상섭은 고주류(剛柔流) 공수도를, YMCA 권법부의 윤병인과 윤쾌병(윤희병)은 슈도칸(修道館) 공수도와 만주 권법을 배웠다. 이에 따라 태권도에는 중국 무술의 특징도 남아 있다. 중국 권법의 투로를 계승한 품새나, 중국 권법의 기본 자세들을 계승한 주춤서기, 앞굽이, 학다리 서기 등이 그것이다.

5.3. WT의 역사왜곡

현재 WT 계열 단체들은 태권도의 기원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태권도는 단군 이래 우리 민족과 오랜 역사를 같이 해 온 한국 전통 무예이다. 한국 무예의 발달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건국되면서 본격화되었다.[75]
일제의 한민족 탄압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항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백성들의 무예수련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심신 훈련방법으로써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욕에 따라 태권도(택견)의 명맥은 미미하지만 민족의 숨결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8.15 해방 후 잊혀진 우리의 태권도를 되찾자는 뜻 있는 이들이 모여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게 되어 드디어 1961년 9월 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2월 23일 대한 체육회에 27번째 가맹단체로 가입되어 1963년 10월 9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 44회 전국체전에 태권도가 공식 경기로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76]

즉, 태권도의 기원이 고대부터 계승된 수박 등의 한반도 고유 무술이며, 현대 태권도는 이를 되살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태권도는 상기했듯 1944년 이후 한국에서 가라테와 일부 중국 무술을 수련한 원로들이 상호 교류하며 여러 무술 요소들이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현대 한국 무술이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무술이 아니다. 수박은 태권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애초에 수박은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 많이 발달했으나 조선 시대 들어 점차 인기가 사그라들어 현대에는 그 형태가 전승되지 않고 있다.[77]

5.3.1. 택견이 태권도의 원류가 아닌 이유

택견 역시 직접적으로 태권도로 이어지는 무술은 아니다. 당시 태권도 원로들도 택견의 존재를 알고 몇몇은 가라테나 기타 자신들의 무술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인 기술의 유입은 거의 없었다. 택견은 발차기 외에도 장법이나 주먹 등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기법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발을 걸거나 다리를 붙잡아 사람을 넘기는 기법을 다채롭게 보유한 무술이었다. 입식타격기에 특화된 무술이 아닌 입식타격기+유술이 혼합된 무술이었던 것.

하지만 WT 태권도는 전형적인 입식타격기로서 마치 극진공수도처럼 그래플링 기법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태권도가 정말로 타격기와 유술기가 반반인 택견을 계승한 무술이라면, 발차기가 극도로 발달한 무술이니만큼 그에 상응해서 자연스럽게 방어를 위해 상대의 차는 발을 붙잡는 킥캐치 기법이 발달했을 것이다. 실제로 택견에는 칼잽이, 외발쌍걸이 등의 상대가 발을 들었을 때 그 발을 붙잡고 상대를 넘기는 기법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기술들은 태권도에 전혀 유입되지 않았다.

태권도 경기에서는 높은 발차기를 시도하다 제풀에 넘어지는 광경을 매우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닥에 넘어지면 지는 경기였던[78] 택견의 계승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또한 WT 태권도에서 손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기법은 가라테에서 온 정권 지르기 정도에 그친다. ITF의 펀치 기법은 복싱에서 차용한 것이다.

당시 상당수 태권도 원로들은 택견의 무술적 가치를 절하하여 택견의 기법을 진지하게 배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가라테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탈색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택견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가장 기본적인 태권도 발차기인 앞차기(まえけり), 옆차기(よこげり)는 가라테 발차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의외로 두발당성 날아차기도 가라테에 원래 존재하던 기술이다.

태권도의 특징적인 발차기로 잘 알려진 돌려차기는 回し蹴り를 변형시키 만든 응용기술이며 뒤차기의 경우 가라테의 後ろ蹴り를 독창적으로 변형시켜 만든 응용기술이다. 뒤차기 문서 참고. 돌개차기는 논란이 있지만 후술할 뒤돌려차기의 응용기술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택견의 발기술의 영향을 받았다 할 기술은 맴돌아차기를 응용한 뒤돌려차기와 발따귀를 응용한 내려차기 정도밖에 없는데, 일반적으로 기술 몇 개 영향 준 것 갖고 원류라고 하진 않는다.

반면에 택견에서 발차기 못지 않게 중요한 기술체계인 잡고 넘기는 등의 유술적인 요소는 태권도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79] 이 외 택견과 태권도의 차이와 관련성에 대해서는 택견과 태권도의 관련성 항목도 참고할 것.

5.3.2.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파생된 무술인 이유

전반적으로 태권도 동작의 기본 원리, 특히나 WT 계열의 태권도의 빠르고 직선적인 움직임은 가라테와 굉장히 흡사하다. 도복도 가라테 방식을 약간 변형한 것이고, 정권지르기나 얼굴, 몸통, 아래막기와 같은 기본 막기들도 전부 가라테에서 건너온 것이다. 또한 품새는 일본 쇼토칸 가라테의 가타(形)를 재조립한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태극 품새 같은 경우 일본 본토에 가라테를 보급하며 쇼토칸(송도관)을 창시한 후나코시 기친이 저연령층을 위해 만든 태극 카타와 이름조차 똑같다.

이에 대해서 초창기 태권도인들인 노병직, 최홍희, 이종우 등은 가라테가 태권도에 미친 영향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타 가라테가 태권도에 영향을 준 바에 대해서는 가라테와 태권도의 관련성 항목도 참고할 것.

사실 태권도의 모체가 된 기간도장 관장들은 다양한 무술을 연마했다. 무도관의 황기는 중국 권법을, 조선 연무관의 전상섭은 고주류(剛柔流) 공수도를, YMCA 권법부의 윤병인과 윤쾌병(윤희병)은 슈도칸 공수도와 만주 권법을 배웠다. 하지만 5대 관이 서로 교류하면서 이들의 무술은 크게는 한 가지 스타일로 수렴해 갔는데, 그 스타일이란 바로 쇼토칸 가라테였다. 쇼토칸은 당시 일본 본토에서 가장 세력이 큰 가라테 유파였기 때문에 당시 무도가들에게는 그들의 시스템이 선진적인 것으로 보였을 법도 하다.

물론 태권도에는 중국 무술의 특징도 남아 있다. 중국 권법의 투로를 계승한 품새나, 중국 권법의 기본 자세들을 계승한 주춤서기, 앞굽이, 학다리 서기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는 태권도가 '중국 무술을 계승한 가라테를 계승한 무술'이라 그런 점도 있다. 중국 무술이 곧바로 태권도에 유입되었다기보단, 태권도의 기원을 역추적하다 보면 가라테→오키나와 테→중국 남권에 닿게 된다는 것. 다만 상기되어있듯 1세대 황기나 윤병인 등은 중국 북권 계열을 직접 배워 가르친 사실도 있기 때문에, 직간접적인 부분이 얼마만큼 될런지는 또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

[1] 저서에 의하면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1946년부터 고심하기 시작한 모양. [2] 1950년대 군생활했던 군번들이 회상하는, 군대에서 천지형, 원효형 품새하던 시절이 이때이다. 천지형, 원효형은 지금 ITF의 천지틀, 원효틀이 된다. [3] 오도관은 민간의 청도관과는 관계없는 당시 군 장성 최홍희가 군대내 세운 도장이지만, 남태희를 비롯한 청도관 출신 부하들이 많아 청도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후 최홍희는 청도관 2대 관장 손덕성 명의로 명예 4단증도 받는다. [4] 당장 미국 태권도의 개척자 이준구만 해도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쭉 활동했다. [5] 대표적으로 타이거 JK 무한도전에서 자신의 태권도를 '지도관(智導館) 태권도'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멕시코에 진출한 문대원 관장은 '무덕관 태권도'라는 이름을 고수하여, 멕시코 내에선 무덕관의 지명이 상당한 편. [6] 노병직은 자신이 이원국에 앞서 1944년 3월 개성에서 송무관을 개관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동아일보 기사 등에 따르면 1946~7년에 정식으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 일이고 기록이 미비하여 현재 사실 관계를 명확히 확인하기엔 한계가 있다. 1944년에 수련한 양반 없는가 [7] 청도관의 물결 도(濤) 자도 송도관의 도 자에서 따왔다. [8] 다만 노병직은 이원국이 자기보다 나이는 많지만 송도관에 늦게 입관했다며 후배라고 주장했다. 보면 둘은 애증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9] 일반적으로 이원국의 청도관을 최초의 도장으로 보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황기의 무덕관을 최초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원국이 이렇듯 잠시 폐관했다 해방 후 다시 재개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0] 이원국 본인은 당시 5천여명에 달하는 청도관 제자들을 자유당에 입당시키라는 이승만 지시를 거절해 대통령 암살미수 혐의를 받고 고문을 당하다 지인이던 육군 중장이 보증서를 내 겨우 풀려나 이후 피난민 틈에 끼어 부산에 가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주장했고, 노병직은 이원국이 서울이 점령당했던 당시 인민군에 붙잡혀 청도관원들과 한동안 부역한 사실이 서울 재점령 후 들통이 나 고된 문초를 받던 중 당시 이기권 선생의 도움으로 1.4 후퇴 직전에 간신히 풀려나 일본으로 도피했다고 주장했다. 둘 다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큰 맥락은 한국전쟁 당시 이원국을 비롯한 청도관원들이 남북 양쪽에서 고초를 겪다 지인의 도움으로 해외로 도피한 셈이 된다. [11] 이는 후나고시 기친의 아들 후나고시 기고가 주도했다고 한다. 한편, 후나고시 기친의 제자로 알려진 이원국이 후나고시 기고의 직계 제자였다는 말도 있는데 출처가 필요한 부분. 참고로 후나고시 기고는 1906년생으로 이원국과 1살 차이인데다 1945년 39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2] 택견이 지금처럼 무슨 가르치는 학원 같은 게 있어 등록하고 다니다가 나중에 명부를 살펴보면 수강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라,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예컨대 옛날 사람들이 어렸을 적 씨름 배웠다고 무슨 증명서같은걸 받는 시절도 아니었다. [13]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치열해짐에 따라 일제의 법은 한국인 5인 이상이 집합을 하게 되면 반드시 경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되는 삼엄한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 가라테를 가르치겠다고 하자 관할 경찰 당국은 반색하며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14]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교습 시간은 매일 아침 6시부터 2시간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식 도장이라고 보긴 좀 애매하긴 하다. [15] 이원국은 이때 개관 축하차 개성에 찾아왔고 축하 의미로 송무관이란 이름도 자신이 지어줬다고 주장했으나, 노병직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반대로 자신이 한국전쟁 이후 청도관 재건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는데, 청도관 3대 관장을 지낸 엄운규는 사실과 다르다며 노병직의 주장을 일축했다. [16] 화수도부라고도 했다. [17] 정황상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보인다. [18] 이 당시의 우슈는 산타가 없었고 (산타는 태권도보다 20년 정도 늦게 만들어졌다.) 당시엔 표연밖에 없었으며 명칭도 십팔기( 모 무예도보통지 복원단체랑 이름만 같은 다른 무술이다.)인 등 지금과는 꽤 다른 형태의 무술이었다. [19]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권법은 "중국 송태조 32세 장권"의 1개 투로(품새)이다. 맨손무술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체계나 수련법이 나와 있지 않다. 애초에 무예도보통지는 권법을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인용하여 무기술을 익히기 전 몸풀기와 힘쓰기를 익히는 정도의 용도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이 권법을 익혀서 맨손으로 적을 때려 잡는 용도가 아니라 냉병기술을 익히기 전 워밍업 정도로 익혔다는 이야기. [20] 본인 주장이 아니고 실제로 현재까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황기는 가라테를 배운 적이 없으며 그의 행적상 배울 여건도 없었다. [21] 한국 전통무술인 수박과는 완전히 별개의 무술이다. [22] 물론 황기와 송도수박의 접점은 전혀 없겠지만 황기 본인이 수박을 계승했다 주장하는 게 마냥 뻥카만은 아니란 얘기. [23] 택견의 계승을 주장하는 대다수의 태권도 사범들은 이런 최소한의 성의조차 없었단 걸 생각하자. [24] 일례로 YMCA권법부의 후신 강덕원의 홍정표는 황기와 최홍희의 창헌류에 대해 평이 박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술의 오의는 직접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전승 관계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출처: [원로들의 이야기] 故 홍정표 원로의 태권도와 무도 - 하편. [25] 사실 이건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전통이기도 하다. 당장 민복 저고리만 봐도 앞섶 깃이 중앙에서 떨어지는 형태이다. [26] 사실 이건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한복에서 내려오는 전통이다. 지금도 민복 저고리를 보면 앞섶 깃은 중앙에서 떨어지지만 뒷섶 깃은 왼쪽 옆구리(고구려 복식에서 좌우만 바뀜.)까지 닿을 정도로 섶이 깊이 겹치는 구조이다. [27] 물론 초창기 태권도 역사에서 황기를 언급하지 않고 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당시 무덕관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떻게 보면 황기는 최홍희와 함께 격동의 태권도 역사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아픈 손가락인 셈. [28] 참고로 미국 내에서 태권도가 당수도를 추월한 지금도 태권도 도장들은 McDojo로 대표되는 키즈부가 절대다수이지만 당수도 도장들은 가라테 전통유파들처럼 성인들이 수련하는 경우가 많다. [29] 물론 태권도가 창시된 이후 떨어져 나온 단체라서 내려차기, 뒤돌려차기 같은 태권도 고유의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라테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30] 세계 가라테 미들급 챔피언. [31] 멕시코 태권도 인프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수련생만 300만명에 달하며 UFC에서 활약하는 태권도 베이스 파이터들의 상당수가 멕시코계일 정도이다. [32] 이란은 태권도 강국이다. 심지어 2011년 경주 세계 태권도선수권 대회 땐 한국을 제치고 종합우승까지 거머쥔 적도 있을 정도다. [33] 세계적으로도 꽤 높은 인지도를 가진 태권도 강사로, 인간 병기 태권도편에선 내려차기를 가르치는 역할로 나오기도 했다. 나이 들어선 산신령처럼 백발에 수염 기르고 도포 입고 다닌다. [34] 후술된 창무관과 강덕원의 역사는 서성원의 『태권도뎐』(애니빅, 2014)과 박철희 사범의 구술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35] 본인은 '주안파'라고 칭했는데, 이는 권법의 중국 발음인 취안파(quánfǎ)를 말하는 것이다. [36] 재미있게도 남권과 가라테는 손기술 위주이고, 북파권법과 태권도는 발기술 위주라는 공통점이 있다. [37] 둘을 사제 관계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윤병인은 토야마에게 중국권법을 가르쳐주고 토야마는 윤병인에게 가라테를 가르쳐주는 교류 관계였다는 시각도 있다. [38] 사실 토야마는 개인적으로 후나고시 기친을 이토스의 정통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39]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6.25 전날 보인 시범의 기법들만이 면면히 전해질 뿐이다. [40] 다만 한국전쟁 도중 윤병인이 월북했기에, 이후 박철희 사범처럼 이런 특이한 모습을 보인 제자들이 스승과 암호로 연락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 정보부의 감시를 받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북에서 윤병인이 가르친 격술사범들은 이후 1980년대 북에 보급된 ITF 태권도에 편입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41] 다시 말하지만 다수의 기간도장 사범들은 당시 자신들이 배운 가라테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42] WT의 품새를 창시한 이종우가 고려 품새를 만들 때 택견 기술인 칼재비를 차용했다고 한다. # 이종우는 지도관 출신이지만 5대관 중 송덕기와 연줄이 있던 건 YMCA권법부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려에 칼재비가 존재하는 건 YMCA권법부의 영향력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 [43] 준비 자세가 팔극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44] 뒤돌려차기도 거론되지만 상기된 청도관 개발설도 있는 등 갑론을박이 있다. [45] 여러 중국무술이 실전된 이유를 기승전문화대혁명 탓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흔한데, 사실 문화대혁명은 10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무술이 실전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태권도처럼 여러 계파의 중국무술이 표준화되면서 우슈로 정립, 통합되었다고 보는 게 더 맞다는 의견도 있다. [46] 허인욱(2008), 『(관(館)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형성사』, 한국학술정보, 99쪽. [47] 서성원, 김병수 원로가 故최홍희 총재 묘 앞에 양주 놓고 절한 까닭은?, 태권박스미디어 2022. 2. 1.자 # [48] 허인욱(2008), 『(관(館)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형성사』, 한국학술정보, 101쪽. [49] 당시 관장이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50] 박철희는 창무관 인사들과 이후에도 꾸준히 교류하며 지낸다. [51] 한동IN 뉴스레터 지승원 교수편. # [52] 이건 스포츠 문화가 있던 택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다른 무술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만. [53] 다만 이종우는 이때 대한태수도협회를 고집해서 최홍희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실제 이종우는 본인이 배운 가라테에 대한 자부심이 있던 인물이었고, 훗날 태권도가 가라테가 기반이 된 무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54] 다만 안티들에겐 품새가 가라테 가타 그대로 베겨쓴 수준이라고 욕도 먹는다.(...) [55] 무덕관 황기 관장이 당수도에서 개칭한 첫 무술명으로 화랑의 화를 따와서 화수도. 참고로 태권도 관련 최초의 서적인 '화수도교본'(조선문화교육출판사)이 1950년 나왔다. [56] 최홍희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본인이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라 주장했지만, 오늘날엔 최홍희와 그의 부관 남태희가 함께 옥편 뒤지다 태껸과 비슷한 태권을 조합해 태권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태껸은 1954년 최홍희의 부대를 시찰한 이승만이 변형 가라테 시범을 보고 태껸(택껸)으로 착각해 언급한 것이 영감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1953년 제29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이미 태권도부대를 창설하고 경례구호도 태권으로 했다는 말도 있어서 전후관계가 미묘하다. [57] 사실 밀어붙였다기도 뭐한게, 최홍희는 태권도란 명칭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군 내부 반대파와 당수도와 공수도, 권법을 사용하고 있는 노병직, 윤쾌병, 이남석 등 민간도장 관장들의 반발로 무산될까 평소에도 걱정했다고 한다. 민족주의자였던 최홍희는 가라테 냄새가 나는 공수도 비슷한 류의 단어를 내켜하지 않았고, 반대로 자기들 무술에 자부심이 있던 상당수 민간 도장들은 기본이 가라테인데 이름만 태권으로 바꾸는 게 도리어 꼼수다, 오/청도관이 쓰는 태권도 쓰기 싫다, 군 인사 최홍희가 왜 민간단체인 자기들 무술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발하는 편이었다. [58] WT는 이곳을 대한태권도협회의 시초로 본다. [59] 60년대 중반에 나온 국내 중견 출판사의 생활대백과사전에는 태권도가 아닌 수박도로 나오고 있다. 물론 그 전반적 내용은 당시 국내 책들이 거의 그랬듯 일본 서적의 중역판이고 가라테 항목 대신에 넣은 것이었지만 그 때까지도 태권도 명칭이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60] 참고로 택견엔 있다. [61] 팔극권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62] 여담으로 역사에 If란 없다지만 만약 이때 관들이 각자 따로 가서 본인들의 독창적인 무술로 진화했다면, 태권도의 전체적인 파이는 줄었을지 몰라도 다른 근대무술들처럼 신종한국무술 도장들이 지금쯤 국내에 제법 있었을지도 모른다. [63] 이후 황기는 제자들에 의해 자기가 세운 무덕관에서 제명당한다.(...) [64] 다만 훗날 엄운규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ITF의 사무총장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65] 의견 차이를 넘어 이미 감정적으로도 상당히 멀어진 상태였다. [66] 품새로는 아마 최초. 이전에도 태권도교본은 있었다. [67] 해방 후 좌익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박정희는 군사재판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당시 군 재판관이 최홍희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악연이라 할 수 있다. [68] 다만 반론측에선 최홍희가 북한과 일본에 태권도를 보급한 것으로 인해 사범들이 돌아섰다는 것은 왜곡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몇몇의 한국인 사범들은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한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난 것이지 그의 태권도 보급 활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 [69] 이전에는 코리안 가라테로 간판 걸고 도장을 운영하는 사범들도 많았다. [70] 사실 최홍희는 김대중 정부 기간 고국에 묻히고 싶다며 남한 귀국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으나, 끝내 성사되진 못했다. [71] 다만 전통 가라테에도 슨도메 방식의 겨루기가 있긴 하다. [72] 창시자 이소룡이 당시 교류하던 이준구 사범한테 태권도 발차기를 몇개 배워간 적이 있다. [73] 기존 문서에서 'WT 계열 단체'라고 명명하여 국기원을 세계태권도연맹(WT)계열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내 태권도 4단체(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태권도진흥재단)의 역할과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WT는 경기단체로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종목단체일 뿐, 국내 태권도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곳이 아니다. 국기원이 과거 태권도 9개관의 통합도장이자 산하에 태권도연구소를 두고 관련 학술지인 국기원태권도를 편찬하는 만큼 국기원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이 타당하다. [74] 출처 - 국기원 '태권도 역사' 페이지. [75] 출처 - 국기원 '태권도 역사' 페이지. [76] 출처 -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역사' 페이지. [77] 다만 택견은 자기들이 수박을 이어받았다는 입장이다. 재물보 항목 참조. [78] 정확하겐 2가지 방식이 있었다. 이런 넘어지거나 손이 땅에 닿으면 지는 식의 시합식 (서기) 택견과 격투식 (결련) 택견. [79] 사실 사문화된 교본에는 존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계 유술에서 유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