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고바르드 국왕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알보인 | 클레프 | 아우타리 | 아길루프 | 아달랄트 |
아리알트 | 로타리 | 로달트 | 아리페르트 1세 |
페르타리트 고데페르트 |
|
그리말트 | 가리발트 | 페르타리트 | 알라히스 | 쿠닝페르트 | |
리우페르트 | 라긴페르트 | 아리페르트 2세 | 안스프란트 | 리우프란트 | |
힐데프란트 | 라치스 | 아이스툴프 | 데시데리우스 | }}}}}}}}}}}} |
랑고바르드 15대 국왕 Cunincpert | 쿠닝페르트 |
||
제호 | 한국어 | 쿠닝페르트 |
라틴어 | Cunincpert | |
생몰 년도 | 미상 ~ 700년 | |
재위 기간 | 689년 ~ 700년 |
[clearfix]
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15대 국왕.2. 행적
랑고바르드 왕국 10, 13대 국왕 페르타리트의 아들로, 678년 아버지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68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르는 듯했으나, 트렌토 공작 알라히스가 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코모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섬에 세워진 성에 유폐되었다. 그러다가 알라히스가 폭압적인 정치를 펼쳐서 민심을 잃은 사이 코모 호수에서 빠져나와 피에몽트에서 병력을 모았다. 이 소식을 접한 알라히스는 베네치아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출진했다. 양측은 로디 마을 인근의 코르나 테 다다에서 맞붙었다. 오랫동안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격전이 이어지다가 그가 마침내 승기를 잡았고, 알라히스는 전사했다. 이후 수도 파비아에 입성한 그는 알라히스의 추종자들을 처벌한 뒤 왕위에 올랐다.688~689년 사이에 로마로 순례를 가는 중인 웨식스 왕 캐드왈라가 방문하기도 했다. 다만 그는 이미 왕위를 후임자 이네에게 넘겨준 뒤였기 때문에, 방문 당시에는 왕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랑고바르드 왕이 된 그는 알라히스를 무찌른 전장에 성 게오르기우스 수도원을 세웠고, 전쟁 중 파괴된 도시인 모데나를 재건했다. 하지만 전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90년, 레우니아의 안스프리트가 프리울리 공국을 침공해 그 땅을 차지한 뒤 왕을 자처한 것이다. 하지만 안스프리트는 파비아로 진군하던 중 베로나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사로잡힌 뒤 왕 앞으로 끌려갔다. 쿠닝페르트는 안스프린트를 실명형에 처한 뒤 추방했고, 프리울리 공국을 왕실 소유지로 삼고 아도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 후 랑고바르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공작들을 설득하여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했고, 교회와 수도원을 잇따라 설립해 민중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했다. 또한 698년 오랫동안 이탈리아 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던 단성론 논쟁을 끝내고자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정통 가톨릭과 단성론 추종자들의 화합을 도모했다.
700년에 사망했고, 아들 리우페르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세습에 반발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은 수년 간 내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