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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26 16:44:48

로타리(랑고바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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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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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7대 국왕
Rothari | 로타리
파일:로타리(랑고바르드).jpg
제호 한국어 로타리
라틴어 Rothari
생몰 년도 미상 ~ 652년
재위 기간 636년 ~ 652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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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7대 국왕.

2. 행적

브레시아 공작 난닝의 아들로, 636년 랑고바르드 6대 국왕 아리알트가 사망한 뒤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모여서 논의한 끝에 왕으로 추대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길루프의 딸이자 아리알트의 아내인 군데베르가는 그에게 왕이 되고 싶으면 먼저 자신과 결혼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아내와 이혼한 뒤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파도바 궁정에서 토리노로 보내 수녀처럼 살게 하고 자신은 수많은 정부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동로마 제국과 평화롭게 지내는 걸 추구했던 전 왕들과는 달리 그들을 몰아내고 북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하기로 했다. 사실 시운이 받쳐줬는데, 동로마는 페르시아, 연이어 이슬람이라는 동방세력과 거의 쉬지 않고 30년 이상 싸워왔기 때문에 서방영토는 제대로 신경쓰기는커녕 오히려 서방영토의 병력까지 동부전선으로 차출했어서 마음 먹으면 일종의 빈집털이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리하여 군사 활동을 개시한 그는 639년 오데르초와 알티노 시를 공격해 격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베네치아 석초로 도주했다.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는 토르첼로의 산타 마리아 마드레 디 디오 성당을 새로 세우고 로타리 왕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알티노 주교를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642년, 로타리는 수도 제노바와 루니 시를 포함한 리구리아를 정복했다.

643년, 로마 공국의 공작을 맡던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로마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로마 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성 마리아 아드 프라세페 성당에 숨었지만, 곧 끌려나와 사슬에 묶인 채 라벤나로 보내져 참수당했다. 로타리는 동로마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틈을 타 라벤나로 진격했고, 643년 스쿨테나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군 8천 명이 전사했다고 하며, 이사키오스는 이때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타리는 여세를 몰아 라벤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본국에 돌아갔다.

643년 11월 22일, 로타리는 사적 복수를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하고 사형 집행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 일련의 법령을 반포했다. 또한 자신에게 거역한 공작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어느 공작도 왕의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풀리아와 살레르노 시를 정복하면서 영토를 크게 늘린 베네벤토 공국조차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작 아레치스 1세는 아들 아이울프 1세를 파도바 궁정에 인질로 보냈다.

로타리는 652년에 사망했고 아들 로달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