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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02:18:50

리우프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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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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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20대 국왕
Liutprand | 리우프란트
파일:리우프란트.jpg
제호 한국어 리우프란트
라틴어 Liutprand
생몰 년도 미상 ~ 744년 1월
재위 기간 712년 ~ 744년 1월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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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uit vir multae sapientiae, consilio sagax, pius admodum et pacis amator, belli praepotens, delinquentibus clemens, castus, pudicus, orator pervigil, elemosinis largus, litterarum quidem ignarus, sed philosophis aequandus, nutritor gentis, legum augmentator
그는 지혜가 많고 모략에 밝았으며, 경건하고 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전장에서 용맹했으며, 죄인에게 긍휼을 베풀고 순결하며 유덕했으며 지칠 줄 모르고 기도하고 구제에 관대했다. 문학에 무지했지만 철학자와 동등했으며, 백성의 아버지이자 법률의 제정자였다.
파울 부제

랑고바르드 왕국 20대 국왕. 32년간 집권하면서 내란으로 혼란스럽던 왕국의 질서를 재정립하고 최전성기를 이룩한 명군이다.

2. 행적

아스티 공작 안스프란트의 막내아들이다. 702년 아버지가 리우페르트 왕을 위해 싸우다가 아리페르트 2세에게 패배하고 바이에른으로 도피했을 때,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모조리 체포되어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아버지가 있는 바이에른으로 도피했다. 그 후 그곳에서 10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712년 초에 아버지가 바이에른 용병대를 고용하여 왕국으로 돌아온 뒤 아리페르트 2세를 무찌르고 왕위에 오르면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712년, 3개월간 재위하던 안스프란트는 중병에 걸렸다. 그는 임종 전에 모든 공작을 불러모아 아들을 왕으로 받들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뒤 눈을 감았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그는 잦은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왕국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총리에게 왕국의 운영 전반을 맡을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 문서 관리관, 왕실 종자, 재무관 및 행정을 맡은 궁전 집사를 신설하거나 개편하여 궁전의 기능을 강화했다.

그는 오직 수도 파비아에서만 궁정 예법에 기반한 행사와 연례 국민 회의를 개최하게 하면서 이에 적합한 건물들을 잇따라 세웠다. 여기에 보다 공평한 사법 행정 및 완전한 병역 부과, 안정적인 내부 보안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 관리기구를 재구성하고 위계와 기능을 정했다. 스쿨다키오(sculdascio)는 마을에서 판결과 집행을 담당했으며, 살리타리(saltarii)는 농촌 지역의 행정을 담당했으며, 프살테리(psalteries)는 도시를 다스렸다. 이들은 주교가 거주하는 도시 및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주교와 공작의 통제를 받았고, 공작과 주교들은 왕에게 연례 보고를 올리고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는 왕실과 국가 행정에서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국고를 충당하고자 이 공물 확보에 열을 올렸다.

한편, 그는 로타리 왕이 반포했던 랑고바르드 법률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편하고 새로운 법률을 추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즉위 첫 해에 로타리 법령에 6가지 법률을 추가로 반포했으며, 713년부터 735년까지 로마법에 기반한 153개의 법률을 반포했다. 그는 법령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나님을 받드는 군주가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지혜로 제정하고 반포하기로 한 법은 하나님의 의지와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새 법률의 초안을 작성하고 공포하는 활동은 매년 3월 1일에 파비아에서 열리는 연례 국민 회의에서 시행되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구성원들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협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결속력을 강화했다. 그는 특히 가정법, 토지 및 주택 매매, 계약서의 유효성 등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신속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판사의 순행을 장려했고, 자유인을 이탈리아 외부에서 노예로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하층 계급간의 결혼을 보호하는 등 약자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한 가톨릭 국교로 확정하고 수녀들을 보호했으며, 이교식 관습을 금지하고 교회법에 따른 결혼법을 도입했다. 그 외에도 강도나 살인에 대한 보상으로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돈을 늘리고 이를 마련하기 위해 가해자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는 등 여러 조치를 내렸다.

그는 처음에 동로마 제국 교황과 평화롭게 지내려 했다. 스폴레토 공작 파로알트 2세에게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세를 라벤나 총독부에 돌려주도록 명령했다. 여기에 새 교황 그레고리오 2세에 대한 우정의 표시로 아리페르트 2세가 돌려줬다가 나중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도로 빼앗아갔던 코티엔느 산맥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귀족 내부에서 영지를 확장하고 싶어하는 기류가 갈수록 거세지자, 그는 마음을 바꿔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717년, 리우프란트는 일전에 라벤나에 돌려줬던 클라세 항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와 동시에, 스폴레토 공작은 나르니를 점령했고 베네벤토 공작 로무알트 2세는 쿠마에를 점령했다. 리우프란트는 곧 북쪽으로 철수했고,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장군이 쿠마에를 재탈환했다.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 성상 파괴 정책으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성상 파괴를 밀어붙이는 동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잡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기로 했다. 레온 3세는 이를 저지하고자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에게 그레고리오 2세를 죽이거나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라벤나 주둔 동로마군은 로마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민병대에게 패퇴했다. 그 후 727년 라벤나에서 폭동이 일어나 파울로스가 살해당하면서, 라벤나 총독부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그는 이때를 틈타 공세를 개시해 포 강을 건너 볼로냐를 점령하고 727년에서 728년 사이에 프리가노, 몬테베글리오, 부세토, 산 조반니, 오시모, 그리고 펜타폴리스를 잇따라 공략하며 라벤나 총독부를 압박했다. 레온 3세는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해 라벤나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에우티키오스는 나폴리로 상륙한 뒤 일부 관리들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29년, 에우티키오스는 리우프란트에게 뇌물을 줘서 그레고리오 2세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무효로 하도록 유도했다. 이에 리우프란트는 최근에 교황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자신의 통제로부터 독립하려 하는 스폴레토, 베네벤토 공국을 응징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라벤나 총독부와 손을 잡겠다고 밝혔고, 에우티키오스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한 뒤, 그는 로마로 진군하여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인근에 진영을 세웠다. 그레고리오 2세가 교회 재산을 바치며 협상을 청하자, 그는 자신이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교황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힌 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베드로 대성당에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이후 교황과 라벤나 총독간의 화해를 중재하면서, 랑고바르드 왕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권위가 높은 군주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732년, 리우프란트는 통제에 따르지 않은 베네벤토 공국을 응징하고자 베네벤토로 쳐들어갔다. 그 사이, 리우프란트의 조카 힐데프란트가 라벤나를 급습했고, 라벤나는 얼마 안가 함락되었다. 라벤나 총독 에우티키오스는 베네치아 석호로 피신한 뒤 당시 총독의 암살로 혼란에 빠져 있던 베네치아를 수습하고 도제를 선출할 수 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5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리우프란트에 대항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을 지원해 두 공작이 힘을 합쳐 리우프란트와 맞서게 했다. 이리하여 리우프란트가 베네벤토에서 발목이 묶인 사이, 발칸 반도에서 파견된 동로마 함대가 베네치아 함대와 손을 잡고 739년 라벤나로 진격해 힐데프란트를 생포하고 라벤나를 탈환했다. 동로마 제국을 따르는 페루자 공작 아가토네는 여세를 몰아 볼로냐를 탈환하려 했으나 랑고바르드군에게 대패했다.

한편, 리우프란트는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연합군을 격파했다. 스폴레토 공작 트라사문트 2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적대적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3세에게 귀순했다. 리우프란트는 로마를 포위하고 시골 지역을 약탈하고 로마 귀족들을 랑고바르드 관습에 따라 면도하고 랑고바르드 옷을 입히면서 트라사문트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이 끝까지 응하지 않자, 움브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약탈을 자행한 뒤 파비아로 돌아갔다. 리우프란트가 떠나자, 트라사문트는 교황의 지원에 힘입어 739년 12월 스폴레토를 되찾았다.

741년, 리우프란트는 재차 남하하여 로마 공국과 라벤나 총독부에 타격을 입히고 로마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그레고리오 3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에 즉위한 자카리아가 협상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743년 테르니에서 만났다. 그는 움브리아 도시들을 교황청에 돌려주는 대신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는 것을 용인받았다. 그렇게 교황과 합의한 뒤 남쪽으로 진군해 동로마-스폴레토 연합군과 맞붙어 완승을 거두고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트라사문트를 수도원에 가두었다. 이후 라벤나로 진격하여 공성전을 벌이자, 에우티키오스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라벤나 대주교 요한 5세와 시민 대표들을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리우프란트는 교황의 설득에 넘어가 라벤나를 정복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이렇듯 내치와 외정 모두 성공을 거뒀으나, 여러 공작은 절대 왕권을 휘두르는 그에게 반감을 품고 반란을 도모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친척인 로타리의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모면했으며, 베네벤토와 스폴레토 공국의 잦은 반항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프리올리 공작 페모가 왕의 통제에 불응하다가 해임되고 그의 조카인 라치스가 그 자리를 꿰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저항을 분쇄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탈리아의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교회의 협조를 받아내려 했다. 이를 위해 시에나와 아르조, 루카와 투스카니 시 주교들간의 갈등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았으며, 왕국 전역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여기에 로마 공국의 북부에 있는 수트라 요새를 점령한 뒤 그곳을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기증하겠다며 로마 교황의 영지로 삼게 했다.

한편, 그는 대외 외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717년 바이에른에서의 내부 분쟁에 개입하여 아내 군트루드의 형제인 우베르토를 지원했으며, 아디게 강에 있는 바이에른의 여러 성들을 공략했다. 또한 명목상으로는 메로빙거 왕조가 다스리지만 실제로는 카롤링거 궁재들이 통치하는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잘 지내려 노력했다. 725년 카롤루스 마르텔이 군트루드의 조카와 결혼한 뒤 양자간의 서신 교류가 이어졌고, 730년경 양국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737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아들 피핀을 파비아로 보내 리우프란트가 양자로 삼게 했다. 리우프란트는 피핀을 정성껏 대접하며 랑고바르드족의 관습에 따라 면도하게 한 뒤 풍성한 선물과 함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돌려보냈다. 738년, 리우프란트는 작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원군을 보내 카롤루스의 승리에 일조했다. 739년 리우프란트가 로마 공국을 약탈하고 로마 시를 압박해오자,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프랑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전에 리우프란트에게 도움을 받은 바 있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탈리아 전역을 프랑크 왕국이 가지게 해줄 테니 도와달라는 교황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744년 1월, 랑고바르드 왕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군림하며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파비아의 성 아드리아노 교회에 안장되었다. 사후 조카 힐데프란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