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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7:32:50

최경식(1957)

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IMG_8881.jpg
이름 최경식
崔景植|Choi Kyung-shik
출생 1957년 2월 1일 ([age(1957-02-01)]세)
경상남도 부산시
(現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 78kg [1]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은퇴
축구 해설가
교수
칼럼니스트 은퇴
학력 숭실고등학교 (졸업 / 59회)
건국대학교 (체육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박사)
소속 선수 숭실고등학교 (1973~1976 / 유소년)[2]
건국대학교 축구부 (1976~1980)
대우 축구단/대우 로얄즈 (1979~1982)
유공 코끼리 (1982~1983)
국민은행 까치 (1983~1984)
포항제철 아톰즈 (1984~1985)
마쯔다 SC (1985~1987)
세인트 조지 (1987~1988)
감독 숭실고등학교 축구부 (1989~2000)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1996~1998)[3]
코치 대한민국 U-16 축구 국가대표팀 (1992~1996)[4]
행정 대한축구협회 (2001~2005 / 유소년분과위원)
대한축구협회 (2005~2008 / 기술위원)
대한축구협회 (2009~2016 / 상벌위원)
뇌성마비장애인축구연맹 (2004~ / 부회장, 홍보이사)
고양 해피니스 유소년 FC (2023 / 원장)
해설 KBS SKY SPORTS (1997~2007)
KBSN 해설 위원
제주MBC 해설 위원
티브로드 해설 위원
SPOTV 해설 위원
교수 성균관대학교 외래 교수
건국대학교 외래 교수
광운대학교 외래 교수
광운대학교 겸임 교수 (2015~2022)
국가대표 14경기 ( 대한민국 / 1978~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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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 시절3. 플레이 스타일4. 선수 경력5. 국가대표 경력
5.1. 1978년5.2. 1979년5.3. 1980년5.4. 1981년5.5. 1982년5.6. 국가대표 소속 득점 기록 (비공인)
6. 선수 은퇴 후7. 수상, 기록 및 출전 대회
7.1. 구단7.2. 국가대표팀7.3. 개인7.4. 지도자
8. 여담9. 둘러보기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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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인.

축구 선수, 코치, 감독, 해설 위원, 축구 행정가, 칼럼니스트 등 선수 은퇴 후에도 다방면으로 활동 중이다.

주로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후반까지 축구 선수로서 활약했고 당시 장신 수비수[5]에 해당했다.

숭실고등학교 축구부에서 처음 축구를 진지하게 시작하였고, 고교 상비군으로 발탁, 이에 건국대학교 체육학과 (76학번)로 입학. 건국대학교 축구부에서 중앙 수비수로 활약했다. 1980년도에 대학 졸업 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프로축구리그 [6] 축구 선수,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 했으며[7] 선수 시절을 마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2013년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국내 축구 팬이라면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의 을용타가 나왔던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제3경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VS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중계한 해설위원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을, 생중계로 하고 있는 와중에 을용타가 나오자 침착하게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우리나라 선수에 대해 공감을 해주면서도 “저런 행동은 잘못되었다.” 는 비판도 함께 했다.[8]또한 캐스터와 함께 찰떡 호흡으로 무슨 일 있었냐는 둥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해설은 정말 명품이였다.

2. 유년 시절

한국 전쟁이 휴전한 지 4년도 채 안 된 1957년에 태어난 최경식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아무리 차비를 아끼고 모아도 그 당시의 교육 제도는 지금과 같은 무상 교육 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면 수업료를 내지 못해 꾸중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최경식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취미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축구였다.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동네 축구를 주로 하다가 숭실고등학교에 축구부를 새로 창단하게 된다는 지인의 소식과 추천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축구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가 축구를 처음 시작 하기 시작했을 1973년 때는 차범근, 허정무와 같은[9] 인너[10]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 윙 포워드' 포지션이 유행이여서 최경식도 오른쪽 윙 포워드로 축구를 시작했으나, 그 포지션에는 본인보다 잘하는 경쟁자도 많고, 무엇보다 이 자리는 본인과 썩 맞지 않음을 느꼈다.

최경식은 어린시절 빼빼 마른몸에 동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키가 굉장히 큰 편에 속했는데 이러한 본인의 장점 (큰 신장. 약 180cm)을 살려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아 공중볼을 장악하고, 또한 둔하지 않게 재빠른 움직임을 익히기 위해 갖가지 훈련을 했었고 특히 가장 많이 했던 연습은 패스였다고 한다. 그에 말에 따르면 결국에 축구는 '팀스포츠'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본인이 원하는 대로 킥,패스가 성공할 수 있도록 피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당시 숭실고등학교 감독이였던 대한민국 축구의 전설이자, 1956년 아시안컵 초대 대회 우승 멤버인 박경호의 눈에 띄어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주전 수비수로서 활약한다. 고교 상비군 명단에도 발탁되며 기량이 일취월장 하기 시작한다.

남들보다 훨씬 늦게 축구를 시작했으나[11] 대학교 축구부 입단, 선수 커리어 내내 프로 1부리그 선수로서의 커리어, 게다가 프로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가대표로서의 커리어까지 거친 것을 보면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대기만성형 선수라고 평가하는 쪽이 맞지 않을까.

3. 플레이 스타일

주 포지션은 센터백[12]이다.

최경식은 당연하게도 수비수로서의 수비 능력은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팀 상황에 따라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옮겨 전진성 있는 플레이를 하거나, 아예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 한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공격 상황시 과감하게 공격에 가담하여 중거리 슛, 로빙 패스, 스루 패스, 크로스 등 다양한 구질의 패스를 통한 빌드업 능력으로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수비수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때때로 라이트백도 소화했다고 한다.

1980년대 당시 큰 키와 민첩한 움직임, 빠른 판단력을 바탕으로 당시 대한민국의 여러 뛰어난 공격수들을[13]괴롭히던 자타공인 S급 수비수.

소속 팀과 국가대표팀 에서 페널티킥 전담 키커를 맡고 있을정도로 PK에 대한 수준급 능력이 있었으며, 때로는 프리킥도 처리한적이 있다.

최경식은 골 넣는 수비수로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중거리 슈팅, 패널티킥, 헤더, 등 득점을 직접 한다거나 이타적으로 동료 선수에게 연결해주는등 골에 관여한 적이 많았으나…

아쉽게 B대표팀시절 득점 이라던지, A대표팀소속의 득점이지만 상대팀이 클럽팀인[14]비공인 경기에서의 득점이여서 FIFA, KFA의 공식 득점 기록은 A대표팀 0골, 1985시즌 포항제철 아톰즈 시절 유공 코끼리 와의 K리그1 경기에서 득점한 1골이 전부이다.

펠레가 1200골 이상을 넣었다는것은 사실이며 기네스북에 오른 사실은 변치않지만 그 득점을 한 무대가 ‘브라질 주립 리그’ 라는 특수성 때문에 FIFA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것처럼, FIFA가 공인한 펠레의 득점기록은 700골대 인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같다.

4. 선수 경력

4.1. 숭실고등학교 축구부 (유소년)

1973년 당시에 후암동[15]에 위치한 숭실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축구부 창단 멤버로 축구부에 입단한다.

처음 축구 시작한 1973년에는 본인이 가진 빠른 속도와, 큰 키를 이용하여 윙 포워드를 맡으려 했지만 당시 지도자의 권유로 센터백으로 전향했다. 이 선택이 그의 인생에 긍정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후 뛰어난 활약으로 1976년 고교 상비군 명단에 발탁된다.

숭실고등학교 축구부 시절 지도자는 상술한대로 아시안컵 1회 대회[16] 우승 멤버인 박경호였는데 최경식이 국가대표 1982년 한일정기전을 치렀을때 그 경기를 중계한 해설위원이 박경호였다. 본인이 가르친 제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선수로서 임하는 경기를 중계한 것이다.

4.2. 건국대학교 ~ 대우 로얄즈

1977년 건국대학교 2학년 시절 같은 대학팀의 1년 후배 오석재와 함께 전국축구선수권대회[17]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건국대학교는 당시 결승전에 올랐고 결승 상대는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18]이 즐비한 포항 제철 축구단이였다.

그러나 공격에는 포항제철을 상대로 2골을 폭격한 오석재, 수비에는 단 하나의 실점을 내주지 않던 최경식이 버티며 끝내 건국대학교 축구부 창단 14년만의 우승을 달성 했고. 이 활약에 힘입어 1978년 오석재와 최경식은 국가대표 선수 명단에 발탁된다.

또한 같은 해 1977년에 전국대학축구연맹전[19]에서도 우승했다. 건국대학교 축구부는 지금까지[20] U리그에서 두차례[21] 우승을 했는데, 그중 한번이 최경식과 오석재가 이끌던 1977년의 건국대학교 축구부 세대이다.

1979년 최경식은 1980년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포항 제철 축구단과 1979년 11월 재 창단 예정인[22] 새한 자동차 축구단의 영입 제안을 받게 되는데, 11월 새한 자동차 축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1979 ~ 1982 대우 축구단 소속 시절, 국가대표팀과 리그를 병행해가며 많이 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이 시절이 본인 커리어에서 가장 바쁘고 좋았던 시절이였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특히 1981년 전기,후기 리그로 나뉘어 치르던 전국실업축구연맹전[23]에서 전기리그를 우승하게 된다.

1981년 전기리그 우승, 리그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

그리고 1981 한.일 실업축구 연맹전에서 대한민국 측 대표 클럽팀 대우 축구단의 주장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 경기에서마저도... 최우수 선수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이 당시 일본 측 대표 클럽팀은 일본 축구 레전드이자 팀의 주장으로서 가마모토 쿠니시게 소속되어 있는 얀마 디젤 이였다.

또한 이원화 체제(대체로 36명)로 구성되던 국가대표팀 중 B팀(2진 충무팀)의 주전 수비수이자 주장을 맡고 있었는데 1981년 6월 김정남(축구인)감독으로부터A 대표팀(1진 화랑)의 첫 부름을 받게 된다.

4.3. 유공 코끼리

1983년 역사적인 K리그1. 대한민국 프로축구리그가 출범했다.

이에 맞춰 최경식은 1982년 12월. 대우 로얄즈 에서의 화려했던 시절을 마무리하고 프로 축구 선수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자신을 믿고 국가대표팀에 선발하여 주전 멤버로 기용해 주었던 김정남(축구인) 감독을 따라 유공 코끼리로 이적한다.

1983 시즌 시작 전, 팀 동계 훈련에서 같은팀 동료 김용세와 볼 경합 도중 최경식 커리어에 좀 큰 부상을 입게 된다.[24] 다행히 회복하여 1983 시즌 준비를 위해 운동을 했고 1983년 5월 8일에 열린 할렐루야 축구단과의 역사적인 프로축구리그 첫 경기를 포함하여 리그 5경기 출장을 한다. 하지만 동계 훈련에서 얻었던 부상 여파가 좀 컸는지, 리그 출장 수는 5경기에 그친다.

하지만 컵 대회격인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등 다수 국제 대회에는 항상 주전으로 출전을 했다.

4.4. 국민은행 까치

최경식은 지난시즌 유공 코끼리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K리그1에 참가하는 실업구단 국민은행 까치 로 이적하게된다. 작년의 아쉬움을 이겨내기 위해 몸관리를 철저히 했고 성인 축구 선수로서의 경력도 벌써 9년 차[25]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 시즌의 그는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팀의 성적은 최 하위로 아쉬운 성적을 거뒀지만 그럼에도 최경식은 빛났다. 1984년 K리그1 공식 기록 기준 26경기에 출장하며, 주장완장을 왼팔에 차고 팀을 이끌었다.

이에 다른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K리그 드래프트를 통해 다음 시즌인 K리그 1985 시즌 포항제철 아톰즈로 합류하게 되며, 다시 프로팀으로 복귀했다.

4.5. 포항 제철 아톰즈

K리그1의 드래프트를 통해 포항으로 이적했다. 물론 활동무대는 같지만[26] 실업팀에서 보여준 꾸준하고 좋은 활약으로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포항제철 아톰즈로 복귀했다.

배정받은 등번호는 화랑시절 달았던 3번.

1985 시즌 리그 12경기를 출전한 최경식은 5월 11일에 열린 전 소속팀 유공 코끼리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공식적인 K리그 처음이자 마지막 골을 넣으며 자신은 여전히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1985 시즌은 K리그1에서는 1패가 발목을 잡아 2위로 마무리했고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으나 2위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4.6. 마쯔다 SC

1993년. J리그가 출범하여 프로화가 된 J리그 1호로 데뷔한 대한민국 축구 선수는 노정윤 선수이고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 축구 리그의 프로화 이전 가장먼저 일본 축구 1부리그에 1호로 데뷔한 대한민국 축구 선수는 최경식이다.[27] 최경식은 1986년 당시 실업 리그로 운영되던 JSL에 데뷔 하며 일본 무대에 첫걸음을 딛게 된다.

등번호 4번을 배정받아 팀내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으나.. 팀의 재정적 상황과, 공격진의 부진이 심하여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JSL은 외국인 쿼터제가 있었기에 3명까지 1군 합류가 가능한데, 최경식의 영입은 팀 내에서 꽤 중요하게 여기며 영입했던 것으로 보인다.[28] 최경식의 말에 따르면 1군 스쿼드 에서 최경식을 제외하고 유럽선수 둘이 더 있었다고 한다.

마쯔다 SC 소속 당시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가기도 하고 유럽 클럽팀과의 친선 경기 등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4.7. 세인트 조지 (St George)

최경식이 두번째로 해외에서 보내는 시즌이자, 그의 현역 선수 시절 마지막 소속팀이다. 이 시절에 에이전트는 정말 극소수의 선수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고, 이적과정을 선수 본인이 직접 타 팀과 연락하여 입단 테스트를 보는 식으로 했어야 했다. 당연히 최경식도 본인이 직접 본인의 경기영상을 호주 팀에 보내서 입단 테스트를 보았고, 김정남 이후로 2번째, 1부리그로는 첫번째[29]선수로 입단했다.

일본에서의 좋은 경험을 마무리하고 호주로 향했다. 팀은 ‘St George’ 헝가리쪽 사람들이 호주로 이민와서 설립한 구단인데, 헝가리 리그팀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23년 현재는 호주 4부리그에서 활약중인팀.

하지만 최경식이 세인트 조지 팀에 가기 전시즌만해도 1987시즌 NSL(National Soccer League)[30] 우승팀이였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총 11경기에 출장했고 7선발 4 교체.

호주에서의 선수생활 경기중 가끔은 관중들이 “치노! 치노!”[31] 라고 하는 야유를 듣기도, 혹은 반대로호주에 살고있는 한국 교민들이 경기를 보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이렇게 최경식의 현역 축구 선수 생활은 1988시즌을 끝으로 완전히 마무리 짓게되었고, 그의 축구인 인생 챕터 2가 시작되었다

5. 국가대표 경력

(1978~1982)A매치 통산 14경기 0골

국가대표 경력에 대해 알아보기 전, 먼저 이 시대에 대표팀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상황을 알아야한다.

1970년대 중반~90년대 후반까지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운영 방식 [32]

그렇기에, (공식적으로 A매치 14경기 0골인 것)이고, 실제로 KFA 의 A대표팀 1981년~1982년의 경기 기록들의 출장기록을 세어보면 그가 A대표팀 소속으로 출장한 경기와 득점 수는 대략(비공식 28경기 3골) 정도로 추정된다.[33]

5.1. 1978년

1976~1980 건국대학교 재학 시절, 수비 시 뛰어난 위치선정과 큰 신장을 이용한 수비 실력은 훌륭했다. 1977년 대학교 2학년 신분으로 수비에는 최경식 공격에는 오석재가 있었기에 건국대학교는 승승장구하듯 전국대학축구연맹전[34] 우승과 1977전국축구선수권대회[35] 결승에서 포항 제철 축구단을 꺾고 우승을 했다.

이때의 활약을 기반으로 그는 1978년 생애 첫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상비군 명단에 오르고 곧바로 데뷔한 그는 자카르타시 창립 기념 축구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해낸다.

5.2. 1979년

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던 1979 멕시코시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유니버시아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구성되어 출전했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1승1무인 상태에서 모로코와 격돌 했는데, 이 경기에서 최경식은 중거리 슛으로 득점을 뽑아내서 총 3:0의 스코어로 8강에 진출 했다. 또한 4강진출에는 실패했지만 5,6위 결정전의 상대로 알제리를 만났는데 이경기에서는 PK를 성공시켰다. 결과는 4:2 승리. 대회 성적은 5위로 마감했다.

1979년 제7회 한일정기전에 대학선발팀으로 소집, 출전했고 도쿄 원정 경기를 치렀는데 1:0으로 끌려가던 대한민국 대학선발팀이였으나, 일본 대학선발팀이 패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파울을 범하였고, PK전담 키커였던 최경식이 침착하게 득점을 성공시키며 1골 만회해 무승부를 거둔다.

1979년 1979 킹스컵 충무팀 으로 소집되어 당연하게도 주전 수비수로 활약한다.

준결승전인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 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을 0:1로 뒤진채 마무리 했고, 후반 시작 2분 최경식은 공격에 가담하여 왼발 슈팅으로 골을 성공시켜 승부의 균형추를 다시 맞췄다.
이에 그치지 않고 후반 36분, 최경식이 올린 크로스를 이태호가 결승골로 성공시키며 2:1 역전극에 성공. 이 경기에서 그는 1골 1도움을 기록하게된다.

1979 킹스컵 결승전 상대는 홈팀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 0:1 스코어로 경기가 끝나며 준우승을 한채 귀국 했다.

5.3. 1980년

1980년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 에서도 충무팀 으로 출전하여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5.4. 1981년

1981년에는 상술했듯이, 소속팀에서의 빼어난 활약[36]으로 A팀의 부름을 받아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에 참가하는 대표팀 명단에 포함될 예정이였으나, 소속팀의 중요한 경기(한.일 실업 축구 연맹전)를 치르고 차출해주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그의 A팀 (비공식) 데뷔 경기는 공교롭게도 그가 처음 국가대표로 데뷔했던 국제 대회 자카르타시 창립 기념 축구대회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명단 포함은 되었지만, 교체명단으로 이름을 올렸다. 불가리아 선발팀 과의 결승전에서 비공식으로 A대표팀 데뷔를 연장전반에 교체 출전으로 데뷔를 했는데 1:1의 상황에서 경기의 마지막 of 마지막인 연장 후반 17분, 득점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 대표팀이 2:1로 경기를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최경식은 '중앙 수비수' 이다...이렇게 2:1로 대한민국이 승리하는줄 알았으나 아쉽게도 경기종료 30초를 남기고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게 되어 2:2로 경기가 종료되었고 양팀의 주장[37]은 승부차기를 가서 승부를 내기보다 공동우승을 하기로 하였고 [38]

최경식은 자신의 (비공식) A대표팀 데뷔전에서 연장 후반 마지막에 역전골을 넣은것으로도 모자라 우승을 했다.

이 대회 후, 1981년 말에 열렸던 메르데카컵 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백은 박성화와 최경식이 맡게 되었다.

5.5. 1982년

1982년 인도에서 열린 네루컵 국제 축구대회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역사상 처음으로 남미 강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했다. 결과는 2:2 무승부였고,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1982년 3월 21일 서울 동대문운동장[39] 에서 열린 제 10회 한일정기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출전.

이 경기에서의 중요한 포인트는 최경식이 가진 장점들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1. 전반 2분, 일본 패널티 에어리어 부근으로 침투하는 이태호[40]를 향해 정확한 로빙 패스를 배달, # 06초에서 볼을 받아 09초에 로빙 패스를 하는 선수가 최경식 이다 이태호[41]가 때린 슈팅이 키퍼 정면으로 향하여 튕겨 나왔지만 세컨드볼을 놓치지않은 강신우가 첫 골을 성공시켰다.
최경식이 어린시절 스스로 되새기던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패스,킥 연습이 이렇게 빛을 발한것.

2. 일본의 오자키 선수가 동료에게 패스를 하고 일본 선수가 슈팅 자세를 취하자 최경식은 한발 앞서 뛰어나와 자세를 낮추고, 끝까지 상대의 슈팅시 발의 동작과, 공을 끝까지 보며 버질 판데이크 선수의 수비 방식을 연상시키는. 수비수가 오히려 속임 동작을 취한뒤[42] 수비하는 형식으로 예측 수비에 성공. # 07:04 ~ 07:06 최경식의 슈팅 블로킹 장면 슈팅을 블로킹 하고 흐른 세컨드 볼을, 당시 함께 대표팀 센터백으로 호흡을 맞추던 박성화가 스루 패스를 넣어 곧바로 1:1 강신우 일본수비수의 1:1 상황이 전개되었다.

1982년 3월말~ 4월초 에 총 세차례 있었던 당시 서독의 프로 축구 클럽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와 의 친선경기 세차례 모두 출전 하였고, 특히 마지막 3차전에서는 이태호가 페널티 에어리어 에서 상대 수비 안스네로와의 경합 도중 얻어낸 PK를 최경식이 처리하여 선제골을 성공시켰고 그 후에 조광래의 중거리 슛팅으로 또 골에 성공하여2:1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1982년 세계 축구사를 논할때 빼놓을 수 없는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소속되어 있는 북중미 클럽팀 뉴욕 코스모스와의 친선경기 2연전에 1차전에는 후반 80분경 교체 출전, 2차전에서는 선발 출장하였다. 여담으로 최경식이 김정남감독에게 지시받은 마크맨은 1974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전 멤버 요한 네스켄스 였다. 그가 네스켄스를 상대할때 느낀점이 있다면. 확실히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선수는, 경기 운영능력과 기술에서의 차이가 컸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축구[43] 종목에 출전하는 18명의 대표 선수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고, 본선 16강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출전하였다.

첫경기 남예멘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3:0 승리

두번째 경기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0:1 패배

세번째 경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1:2로 패배하게 되었고.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A대표팀 메이저 대회 출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 대회를 치르는 도중에도 그간의 리그,국가대표 경기를 병행하며 갈리며..[44] 생긴 부상 여파가 있었어서 100퍼센트의 폼을 끌어올리진 못했고, 본인 스스로도 너무 아쉬운 대회라고 말한다. 그는 이 대회를 끝으로 그는 국가대표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소속팀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했다.

78년 충무팀부터 82년 아시안게임 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선수와 함께 중앙 수비로 호흡을 맞춰왔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박성화 선수와 함께 경기에 출전할때 굳이 말을 안해도 호흡이 척척 맞았었다고 회상했다.

5.6. 국가대표 소속 득점 기록 (비공인)

국가대표팀 소속 비공식 골,어시스트 기록[45]

대한민국 유니버시아드 축구 국가대표팀: 2골[46]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충무: 2골 1도움[4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화랑: 3골[48]

6. 선수 은퇴 후

6.1. 지도자 경력

6.1.1. 숭실고등학교 축구부 코치, 감독

자신이 처음 축구를 시작하게 해준 모교 숭실고등학교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으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지휘봉을 잡은 첫 해인 1989년
서울시교육감배고교 축구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이듬 해인 1990년
KBS배 추계 전국 고교 축구 대회 우승을 했다.

6.1.2.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숭실고등학교를 지도하던 도중, 대한축구협회에서 유소년 분과위원직을 제의 받아 여러가지 기술고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또한 1992년에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새로운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몰색하던중 최경식에게 제의를 했고, 자신이 지도하던 숭실고등학교와 일정을 잘 조율해가며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직도 겸하게 된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직을 맡은 1996~1998 때는 국제대회에 나가 우승도 두차례나 했을만큼 감독으로서의 지도자 능력도 있는 유능한 축구인이다.

6.2. 교수

자신의 모교인 건국대학교를 더불어 성균관대학교, 광운대학교 에서 체육학을 전공하는 본과 학생들을 지도했고[49] 2015년 ~ 2022년 광운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했었다.정년이 됨으로써 자연스레 은퇴하게 되었다.

6.3. 축구 해설위원

1997년 KBS에 입사하여 2007년까지 재직했었고, 이 시기에 라리가, 프리미어리그 와 같은 해외축구리그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활성화 되던 시기에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잊을 수 없는 2002 한일 월드컵기간, KBS측 중계진으로 합류하여 좋은 해설을 들려주었다.
이후 제주MBC, 티브로드, SPOTV 등 다양한 곳에서 프리랜서 해설위원으로서 혹은 이적하여 해설위원으로 2023년인 아직까지 활동중일 정도로 꾸준한 해설을 들려주고 있다.

해설 스타일은
당연히 프로 축구 선수 출신 답게 차범근과 같이 경기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며, 축구 경기중 어떠한 상황이 지나간 후 느린 화면이 나올때 시청자들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축구 경기의 룰을 언급하며 어떠한 상황이였는지에 대한 설명을 알기 쉽게 풀어 해설한다.

‘선수 출신 해설위원의 교과서’ 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다.

특히 국가대표의 경기를 중계할 경우, 우리나라 선수가 파울을 당하면 억지로 우리나라 선수의 편을 들지 않고 파울을 당한 상황에 대하여 빠른 판단을 한 후, 최대한 중립적으로 해설을 한다.[50][51] 최경식이 해설을 할때는 선수의 입장에서 경기를 풀어주되, 억지로 어느 한쪽을 쉴드 치는 행위는 하지않는 좋은 해설을 들려준다.

6.4. 축구 행정가

7. 수상, 기록 및 출전 대회

7.1. 구단


공식 득점
K리그1 포항제철 아톰즈 vs 유공 코끼리 1985년 9월 11일 리그 경기에서 1골

7.2. 국가대표팀

7.3. 개인

7.4. 지도자

8. 여담

9. 둘러보기

9.1.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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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등번호 한글 이름 영문 이름 생년월일 A매치 출장 / 득점 소속팀
GK 1 박영수 Park Young-soo 1959.01.1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해군 축구단
21 정성교 Chung Sung-kyo 1960.05.3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연세대학교
DF 2 안병대 An Byung-dae 1959.02.2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포항제철 축구단
3 최경식 Choi Kyung-shik 1957.02.0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우 축구단
4 조광래 Cho Kwang-rae 1954.03.1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우 축구단
5 최기봉 Choi Ki-bong 1958.11.1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해군 축구단
6 박성화 Park Sung-hwa 1955.05.0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할렐루야 축구단
8 박경훈 Park Kyung-hoon 1961.01.1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포항제철 축구단
13 장외룡 Chang Woe-ryong 1959.04.05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우 축구단
MF 7 정종수 Chung Jong-soo 1961.03.2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고려대학교
10 이흥실 Lee Heung-sil 1961.07.1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한양대학교
15 이강조 Lee Kang-jo 1954.10.2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고려대학교
FW 9 최순호 Choi Soon-ho 1962.01.1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포항제철 축구단
11 변병주 Byun Byung-joo 1961.04.26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우 로얄즈
14 강신우 Kang Shin-woo 1959.03.1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우 축구단
16 정해원 Chung Hae-won 1959.07.0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연세대학교
17 김석원 Kim Seok-won 1960.11.0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고려대학교
20 이태호 Lee Tae-ho 1961.01.2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고려대학교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은택 (Choi Eun-taek)

10. 관련 문서

* 해외파/축구 선수/시즌별 정리/1980년대


[1] 자기 관리가 철저하여 2023년 기준 아직도 이 신장과 체중을 유지 중이다. [2] 숭실고등학교 축구부 창단 멤버 중 한 명이다. [3] 겸직으로 추정 [4] 겸직으로 추정 [5] 2023년 기준 일반인 기준 신장 180cm면 아직까지도 장신으로 꼽히는데 40년 전 180cm면…. 충격과 공포 [6] 대한민국에는 1983년 K리그1 출범 전까지 대한민국 최상위 축구 리그역할을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이 해왔었다. [7] 참고로 최경식은 축구 선수 시절 내내 1부 리그 팀에서만 활약했다. 그의 꾸준함과 클래스를 보여주는 기록. [8] 프로 스포츠를 중계하는 선수 출신 해설 위원이기에 ‘선수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저 행위는 스포츠에 있어서 엄연히 해서는 안 되었을 비신사적인 행위이며 이러한 행동은 옳지 않다’는 뉘앙스로 진행을 했다. [9] 허정무는 선수 초창기 시절 포워드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였다 [10] 지금은 사라진 축구용어 조광래를 지칭하는 링커와는 다른 개념이며, 인너는 좀더 공격적인 역할이다. [11] 상술했듯이 그가 축구를 진지하게 임하게 된 시기가 고등학교1학년 때이다. 이로 인해 그는 연령별 대표팀에 뽑혀본적도 없다. 그나마 고교 상비군 명단에 발탁된것이 유일한 유소년 시절의 경력 [12] 스위퍼 [13] 정해원, 최순호, 김용세 [14] 이렇게 되면 양 국가간의 최상위 대표팀 경기 A매치가 아니기 때문에 비공인 경기로 처리되며, 경기를 뛰었음에도 경기수에 집계되지 않는다. [15] 지금은 은평구 신사동에 위치해있다. [16] 1956년 대회 [17] FA컵의 전신 [18] 조병득, 홍성호, 조광래, 이영무, 박창선 [19] U리그의 전신 [20] 2023년 기준 [21] 1977년,1981년 [22] 실업팀 산업은행 선수들을 주축으로 재창단 [23] 프로축구리그인 K리그 출범이전의 국내 최상위 축구 리그 [24] 잠깐 기절할 정도로 큰 충돌이였다고 한다. [25] 대학시절 포함 [26] 1983년 K리그1가 출범할때 프로팀만 있지않았다. [27] 최경식 전에 1985시즌 김창호라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출신 포워드가 있었지만, 그당시에는 마쯔다 SC 가 2부 리그 소속이었고 부상으로 인하여 많은 경기를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28] 더군다나 최경식은 중앙 수비수다. [29] 김정남이 선수시절 호주 세미프로리그 였던 써더랜드 라는 팀이였다. [30] 호주A리그 출범전 최상위 리그 [31] 80~90년대 시절 아시안들을 전부 중국인이라고 해버리는식의 ‘엄연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 [32]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후반 까지,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선수를 약 36명을 뽑아 ‘축구 상비군’이라는 명목하에 A팀이 1진 별칭은 화랑(동음이의어), B팀이 2진 별칭은 충무 인 형식으로 A팀,B팀 으로 나눠 평가전을 가졌고 그경기를 통하여 부상 혹은 기량이 저하된 선수는 충무팀으로, 반대로 기량이 오르며 꾸준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는 1진 화랑(동음이의어)팀 으로 로테이션을 돌리는 형식으로 대표팀을 운영해왔다. [33] 신문선과 같이 B대표팀(충무팀) 에서만 활약을 했다고 해서, 그의 축구 선수 커리어 중 국가대표 선수가 아니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34] U리그의 전신 [35] FA컵의 전신 [36] 1981 전국실업축구연맹전(K리그 출범이전 최상위 축구 리그) 전기 리그 우승 및 최우수 선수상 수상 [37]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장은 다들 익히 알만한 조광래 였다. [38] 이 당시에는 두팀 간의 협의를 통한 공동 우승이 자주 있었다. [39] 현재는 DDP가 있는 그 위치이다. [40] 등번호 20번 [41] 등번호 20번 [42] 느린 화면으로 자세히 보면 최경식이 먼저 오른발로 스텝을 밟은 뒤, 몸을 날린다. [43] 23세 이하 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게 된 시기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부터다. 1998 대회까지는 엄연히 최정예 A대표팀 선수들이 출전했었다. 그렇기에 1998년대회 까지만 해도 A매치 기록에 포함되었다. [44] 특히 이시기에는 프로리그가 생기기 전인 시기였기에 관심도는 국가대표팀에 더 쏠렸다. 같은 국적의 국가대표팀 간의 비공인 친선전. 예를들면 A대표팀vsB대표팀 평가전 등 정말 많았고, 애초에 국가대표 명단에 한번이라도 들었으면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많은 경기를 치르며 혹사를 당했던 시기이다. [45] 뉴스 기사, 대회 기사, 대한축구협회 기록지를 참고한 비공식 기록 [46] vs모로코전 1골, vs알제리 5, 6위 결정전: PK 1골 [47] 제7회 한일정기전 대학선발팀: PK 1골, 79킹스컵: vs 싱가포르 준결승전 1골 1도움 [48] 자카르타시 독립 기념대회 결승전 1골, vs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친선 3차전 PK1골, vs 에스포르테[59]친선전 PK1골 [49] 프로 축구 선수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아니다. 체육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지도한것이다. [50] 대표적인 예가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제 3경기. 이 경기는 대한민국vs 중국 경기로, 전설의 을용타가 나온 그 경기다. [51] 해설위원은 엄연히 제 3자이기 때문에 중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신임 해설위원들이 많이 하는 실수가 지나친 대한민국 선수들 편들기라고 볼 수 있는데, 해설위원은 축구 경기를 말로서 경기에서 일어나는 상황,흐름을 들려주는 직업이다. 중립적인 성향을 지키며 “~~상황이다.” 라며 단정 짓는것은 좋지 않을 때가 많다. [52] U리그의 전신 [53] FA컵의 전신 [54] 유니버시아드 대회 대한민국 대표팀 첫 파견 [55]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선수 약 36명을 뽑아 ‘축구 상비군’이라는 명목하에 A팀이 1진 별칭은 화랑, B팀이 2진 별칭은 충무인 형식으로 A, B팀 선수 중 부상 혹은 기량 저하, 반대로 기량이 오르면 로테이션을 돌리는 형식으로 대표팀을 운영해 왔다. [56] 불가리아 선발팀과 공동 우승 [57] 브라질 클럽팀 오페라리우과 공동 우승 [58] 상대팀 중에는 유벤투스 유스팀과 산투스 FC 유스팀이 있었다고 한다. 모두 꺾고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