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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직장 괴롭힘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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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형태3. 폭력에 대한 고찰4. 기타5. 관련 문서

1. 개요

/ Violence

폭력이란 대개 상해나 파괴를 초래하는 심하고 격렬한 힘, 권력의 행사로 좁게는 남을 거칠고 사납게 힘으로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ㆍ무기 따위의 수단을 말하는 단어다. 한 마디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괴롭히는 행위다. '폭력범죄'라는 용어는 살인이나 구타와 같이 신체적인 상해를 입히거나 위협을 주는 범죄와 관련이 있다. 철학, 정치학 등의 학문에서는 다른 사람 또는 국가나 세력을 강제로 제압하는 힘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공격성을 절제하지 못했을 때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공격성이 강한 사람은 운동 등으로 공격성을 안전하게 발산해야 한다.

2. 형태

폭력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첫째는 신체폭력( 강간, 강도, 할퀴기, 감금, 상해, 구타, 고문, 사냥, 살해, 살인, 손찌검, 체벌, 폭행, 학대 등), 둘째는 언어폭력( 갈굼, 공갈, 조롱, 명예훼손, 모욕, 사기, 사이버폭력, 욕설, 고인드립, 패드립, 인신공격, 폭언, 협박, 악성 댓글 등), 셋째는 성폭력( 불법촬영,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넷째는 국가 주도의 폭력( 독재, 악법, 전쟁, 전범, 학살, 인종청소, 수사기관의 고문, 과도교정, 시위 폭동 진압, 정치범수용소 등)이 있으며 범죄 조직들이 저지르는 폭력들과 똥군기, 강요, 갑질, 예절[1], 직장 내 괴롭힘, 집단괴롭힘, 차별, 태움, 텃세 등은 앞에서 말한 유형들이 섞여 있다.

폭력의 발현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폭력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 정치학, 철학 등이 공동으로 다양한 폭력 현상군을 인식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성에 있어서 폭력의 발생을 본능적, 생득적으로 보느냐, 환경적, 학습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격투기 등 경쟁형 스포츠도 폭력의 일부분이다.

3. 폭력에 대한 고찰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는 하지만 폭력은 인류의 가장 대표적인 필요악이며 폭력이 없으면 인류는 살 수가 없다. 인류가 음식을 얻으려면 동물을 사냥하거나 식물을 채집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식물이 사망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인류 역사상으로 폭력을 막을 방법은 폭력밖에 없었다.[2] 멀리 갈 것도 없이 국가 기관이 범죄자에게 행할 수 있는 체포, 감금, 태형 등 강제력도 국가가 행하는 폭력에 기인한다. 까놓고 말해서 법원에서 아무리 처벌을 내려봤자 잡아서 집행할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문젯거리가 생겼을 때 가장 간단하고 쉽게 떠오르는 해결방법은 대상에게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 잘못이 터지면 폭력적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크게 얻고, 그런 짓을 한 사람에게는 폭력을 저질러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당장 층간소음만 봐도 "윗집에서 소음을 일으키는 놈을 없애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겠구나"하는 심리에서 살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시민들은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상대를 압박하는 시위를 하며, 소동이 일어나면 각목 따위로 주변 상가나 경찰, 반대파 시위자들을 위협, 공격하는 것도 폭력이며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경들이 진압 방패, 진압봉 따위를 동반해 시위대를 폭행하거나 물대포를 사용하는 것도 옳고 그름을 떠나 모두 폭력이다.

수도 없이 일어난 수많은 국가 간의 전쟁도 역시 폭력에 기인함과 동시에 폭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상황이 많다. 그만큼 사소한 것부터 국가간의 분쟁까지 폭력은 어딜가나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폭력에 기인하여 일어나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이며 사회과학의 원리다.[3]

물론 폭력이 모든 것의 답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아동에게 폭력을 가하면 아동은 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 비행 청소년이나 소년범의 대다수는 아동 학대 경험이 있으며 아동 학대를 겪은 아주 많은 학생들은 이후에 심리적, 발달적인 어려움과 장애를 호소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폭력을 대물림을 행하거나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4]

미국과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중국, 북한처럼 범죄자에게 사형 내지는 인권 박탈에 가까운 처벌을 내려도 범죄는 근절되지 않는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채택하고 있는 영미법의 체계는 나라의 선진 수준에 비해서 후진국형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국은 범죄자들의 재범율이 33%, 캘리포니아의 경우 60%에 달하기까지 한다.[5] 이슬람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영미법보다 가장 극한의 형벌을 내리는 법 중 하나인 샤리아도 범죄를 완전히 근절하기는 커녕 범죄자들을 증식시키고 있다. 중국이나 북한처럼 독재 국가들이 내리는 강력한 처벌 속에서도 범죄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폭력은 폭력의 진행을 막을 방법은 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을 완전히 근절시킬 수는 없다. 폭력을 통해서 폭력이 계속되는 것을 정체시킬 수는 있겠지만 이를 넘어서서 폭력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정말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폭력이 정말로 변화시킨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갈등과 억압과 불안의 증가일 뿐이다.

아이를 두들겨 팼더니 말을 잘 듣게 된 케이스가 경우가 있다고 해 보자. 그러나 사실 아이는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 선생님께 버림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해할 순 없지만 일단은 억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불안과 억압의 증가와 더불어 신뢰의 저하가 계속 쌓이고 있다. 이것이 점점 심해져서 애정과 사랑이 사라져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싫어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고 따르고 싶지도 않다"는 심리에 따라 말을 안 듣게 된다.

불안이 심해지면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발병할 수 있으며 쌓인 억압에 폭발하면서 기성세대에 적대적으로 구는 반항아를 만들게 된다. 이렇게 쌓이던 불만이 폭발하는 시기가 청소년기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아동 학대나 어린 시절부터 폭력을 경험한 많은 청소년들은 비행 청소년과 소년범이 되고 있다. 인권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폭력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가 너무나도 쉽다. 기본적으로 폭력은 당하는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행위이다.

게다가 폭력은 광기를 불러오는 속성이 있다. 미친 사람이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쓰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된다. 아동학대를 저지르는 상당수의 부모들은 통제력을 잃어버려서 "훈육 목적으로 한두 번만 쳐야지"하다가 순식간에 수십번을 후려치곤 한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폭행을 시작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 모든 것은 폭력과 상관없는 개인의 기질이나 의지 문제가 아니라 폭력이 초래하는 광기적인 속성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손에 매를 드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많은 부모가 자신을 통제하는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를 너무 믿어버려요.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그러나 전 여기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을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건 마치 음주운전과도 같아요. "이 정도 마시면 충분히 운전할 수 있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취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자신을 믿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스스로를 믿는다면 그 믿음을 운전하는 데 쓰지 말고 운전을 안 하는 데 쓰시라는 거예요.
오은영
폭력이 초래하는 치명적인 부작용과 파멸적인 결과 때문에, 폭력은 정말 신중하게, 최소한, 수 없이 많은 안전장치가 있는 상태에서 사용되어야만 한다. 국가가 형벌을 집행하는 것에는 3심제도를 비롯해서 굉장히 많은 사법제도를 안전장치로 마련하고 있으며 격투기에서도 심판과 규칙, 의료킷과 다양한 TKO 기준을 통해 안전장치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다. 폭력이 허용될 때는 동시에 폭력을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안전장치가 철저하게 마련된다. 하지만 안전장치 하나 마련하지 않은 개인이 폭력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 미련한 생각이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이 현상을 말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이러한 반대가 가지는 몇 가지 함정은 폭력이 답이 아닌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일괄적으로 어떤 하나의 방법이 답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을 비판하는 여러 가지 이론과 근거 중 큰 부분들은 대체적으로 일리가 있고 사리에 맞지만, 다른 대안들도 막상 일괄적으로 현실에 대입하려고 한다면 다 문제가 있다. 폭력을 쓰는 것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지만, 사실 대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면 폭력은 잘 사용되지 않고 이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폭력이 사용된다.

이 문제의 현실적인 대안 중 비판을 받지 않거나 부작용이 없는 해결책 역시 없다. 폭력보다 더 효과적인 해결책이나 방안도 있겠지만 해당 문제에 대해 최소한 십 년 이상을 공부해서 학위를 딴 박사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문제를 연구하고 여러 가지 사례를 경험해 본 전문가들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그것을 알 수 없다. 즉 해당 사례가 어떻게 되어 나가는지 잘 보면서 그 때 그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잘 써야 하는데 일반인들은 이게 안 된다.

앞선 비판에서도 폭력은 답이 되지 않고 범죄나 폭력을 근절시키지 않는다고 하지만 막상 사랑과 풍족함이 가득해도 무언가가 잘 돌아가지 않고 범죄나 폭력이 발생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회다.[6] 사람의 성장을 봐도 잘 자란 사람들도 부모나 교사로부터 체벌의 경험이 있는가 하면 폭력이나 체벌이 없었는데 막돼먹은 사람으로 자라는 경우도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현대는 과학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과학사회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적인 그 무언가가 과학적으로 거의 해명되지 않은 현재의 과학 수준에서는 폭력옹호자건 반대자건 간에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이 훗날의 인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잘라서 말할 수 없다.[7] 만약 딱 잘라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자료를 적당히 조사한 다음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재벌 집안에서 잘 자란 후계자들이 있는가 하면 망나니들이 있는 것도 목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은 아이에게 의문과 상처와 반항심을 남겨서 삐뚤어진 반항소년으로 자라게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지, 있다면 그 관계성은 어느 정도인지 의문스러운 부분은 분명 있다. 폭력뿐만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거의 모든 행위는 절제가 필요하다. 중용을 잃어버리면 대체적으로 그 어떤 행위건 좋지 않으며 그런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가장 자연스럽고 매일 이뤄지는 먹는 행위조차도 많이 먹어서 비만이 되고 건강을 잃고 성인병을 얻는 사람들이 많다. 먹는 것에도 광기가 있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며 광기의 폭식증에 빠질 수 있으니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물론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폭력은 인간 개인의 삶에 필연적이지 않으니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사라져야 하는 행위일 수도 있겠지만 그 근거로 사용자가 절제심을 잃어버리고 광기에 빠진다는 얘기는 먹는 것 뿐만이 아니라 중용과 절제라는 상황이 적용 될 수 있는 여러가지로 봤을 때 좀 그렇다는 것이다. 즉 폭력과 그 악영향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폭력은 중용과 절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만약 중용과 절제라는 큰 범주에 대해 고찰하는 철학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거의 모든 것에 중용과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딱히 폭력이 특별히 문제라서 그럴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용과 절제를 잃어버려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이나 식생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처지를 모르고 차에 지나치게 빠지면 카푸어가 될 수 있으며 이것도 따져 보면 일종의 광기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서 카푸어 때문에 넉넉하지 않으면 차를 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없고, 자기 처지에 맞게 차를 사야 한다고 말한다. 중용과 절제는 대체적으로 다 필요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폭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폭력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존재하는 게 현실이기에 현재로는 폭력과 인간사회는 불가분의 관계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상술된 윗집의 소음공해 문제도 내가 경제적으로 집을 옮길 수 없으며 상대방과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결국 인내와 폭력 두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는다. 사적인 폭력이냐, 공적으로 잘 은폐된 폭력이냐 두 가지뿐인 것이다. 현대사회의 모든 갈등, 그리고 수많은 대화나 협상의 배후에는 강제적인 폭력이 그 종국에 도사리고 있다. 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최후에는 법과 공권력의 강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며, 개의치 않아 하며 멋대로 까불다가는 마치 정상수 테이저건에 맞고 옥살이를 했듯이 공권력에 의해서 강제적인 폭력을 당하게 된다.

폭력 없이 사회가 성립될 수 있는가?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조금만 간단하게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폭력을 배제시키는 문학이 인류를 구원한다고 하자. 그러면 슬프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나서 실컷 울고 개운해진 마음으로 열심히 사기를 치는 사기꾼들이 이 사회에 얼마나 있을까? 분명 적지 않은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과 사회를 아름답고 선량하게 만드는 예술작품이 가지는 역할과 가치는 무시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법망이 조금이라도 미비하면 그 틈새를 비집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건 말건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널렸으며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이득을 당연히 추구하는 것이라며 타인이나 사회에 부당한 피해를 끼쳐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제재할 것인가? 강제적으로 불이익을 가하는 폭력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으며 역사적으로도 봐도 그 외에는 도리가 없으며 공자 플라톤이라는 동서의 가장 오래된 정치철학자들도 한 쪽으로는 교화나 이성 등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꺼림칙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럽게 폭력과 처벌을 긍정한다.

이렇듯 조그만 사회가 생기면 반드시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은 항상 제재와 폭력을 함축하고 있다. 단지 사회가 커지고 고도화될수록 그 폭력행위 역시 고도화되고,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적 절차와 법에 의해 폭력이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는 범위와 그렇지 않은 범위를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규모가 국가 비슷한 정도가 되면서 행정적인 감시나 규제가 어느 정도 미치는 사회라면 인간 사회는 항상 그러했다. 이 사회에 폭력이 없다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폭력은 아주 잘 은폐됐을 뿐이다.

예컨대 경찰과 같은 치안인력이 가지는 제한적인 폭력 사용에 대한 권리 같은 게 그런 것인데[8] 이들은 치안을 지킨다는 목적이 공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민주적 절차와 법에 의해 제한적 범위 안에서는 폭력을 동반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위임받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공익에 부합하지 않거나 공익을 명분 삼아 더 큰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9]에는 그만큼 더 큰 책임을 지게 된다.

폭력의 범위는 딱 정해진 것도 아니며 항상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을 통해서 범죄와 억압이 만들어지고 정치적 명분도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서 애완동물을 때리는 것은 예전에는 폭력이나 범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대부분 부당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을 교사가 때리는 것이나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것, 선배가 후배를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언어폭력이라는 말도 예전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일부의 사람들이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 역시 폭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통해서 그런 행위들이 폭력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예전과는 다르게 다른 전통적인 폭력과 마치 동일한 위계에 있는 잘못을 저지르는 듯한 심리적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폭력은 법률 및 제재와 민감하게 닿아있는 만큼 이렇게 묘한 사회적 효과가 발생하며 지금도 정치적 활동을 하는 운동가들 중 일부가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창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0년대 이후로 가장 뜨거운 주제라면 예컨대 당신이 남자라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위계에 의한 폭력이 발생한다는 따위의 주장이 있다. 위계 폭력과 성별 폭력이라는 기존에 없던 두 가지 개념이 혼합된 아주 새로운 형태의 폭력발명인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개념 발명으로 사회적인 영향력과 도덕적인 명분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다. 반면 반대하는 자들은 전통, 여론, 상식 등의 명분을 들어서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인 가치를 조명한다.

예를 들자면 # '한국남자'가 알아야 할 반성폭력 가이드라인과 같은 잡지 기사를 보면 노동 및 진보 단체들의 내규와 여성 단체들의 연구 자료 등을 바탕으로, 내가 왜 폭력범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새롭게 정의한 폭력의 정의는 이러하다"며 일방적인 폭력 선언을 하며 내면화를 시키려 하고 있다. 기사를 보면 위계폭력, 시선폭력, 2차 가해, 성 역할에 기반한 성폭력, 이미지 착취, 데이트폭력, 감정폭력 등 수많은 용어와 개념 그리고 그에 속하는 구체적인 하위 행동 사례 등을 마음대로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발명하며 사회적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에 있어서 폭력이란 것은 사회적, 정치적, 이념적 등등에 있어서 여러모로 참 민감한 사안이 되고 있으며 실제 현실에서도 새로운 폭력 발명을 통해서 현실적 힘을 발휘하는 민감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철학자 가야노 도시히토는 자신의 저서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지만>에서 이러한 폭력의 속성에 대해 폭력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사유를 멈추는 것보다는 폭력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서 폭력이 어떠한 경우에 긍정될 수 있고 또 부정될 수 있는지 사유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류는 언어가 발달하면서 상대적으로 약한 인간들의 연합이 용이해지자 폭력적인 인간을 꾸준히 죽여나갔다.[10] 이걸 자기가축화라고 부른다. 개코원숭이 늑대처럼 무리생활을 하는 다른 동물들도 지나치게 폭력적인 개체는 배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이라고 다를 것 없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폭력성은 환경에도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무리 폭력적인 개체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선술했다시피 어쩔 수 없다.

4. 기타

대중매체에서는 과 함께 규제대상 1순위로 꼽힌다. 다만 국가에 따라 규제 수위는 다른데 미국의 심의는 폭력에 관대한 반면 상대적으로 성적 묘사엔 대단히 예민하며 일본과 유럽은 반대로 성적인 묘사엔 놀랄 만큼 관대한 대신 폭력 묘사에는 대단히 엄격한 편이다. 일단 소년만화 등에서는 폭력을 통해 정의를 수호하고 악을 쓰러뜨리는 전개가 많이 나오지만 대체로 초인적인 묘사에 치중한 경우가 많으며 '현실에 등장할 법한' 폭력묘사는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현실적인 폭력은 멋있기는 커녕 잔인하기만 할 뿐이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폭력에 대한 규제는 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반면 독일에서는 한국에서 음란물죄를 처벌하듯 폭력물죄[11]가 따로 있을 정도다.

한편으로 인터넷에서 "폭력적이다"라는 표현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는데 뭔가 강렬하고 강압적인 장면이 나온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로 패션 등 비주얼적인 요소를 대상으로 많이 사용된다.

5. 관련 문서


[1] 이것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폭력의 형태로 사용할 수 있다. [2]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폭력을 막을 다른 수단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정교화되는 폭력에 대한 은폐에 불과하다. 심지어 평화적 해결 방법인 협상조차 결국 힘, 즉 폭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돈과 계약, 법도 따지고 보면 그것을 정당한 돈과 계약, 법으로 인정하는 폭력에 연원을 둔 통제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폭력을 막을 것은 폭력밖에 없으며 그 폭력의 가장 최종적인 형태가 결국 전쟁이라는 가장 거대한 폭력이다. 개인과 개인, 집단와 집단의 범위를 넘어서 국가끼리의 충돌이 잘 조정되지 않으면 결국 최종형태는 폭력이 된다. 이런 무차별적인 피해를 주는 전쟁의 참상을 생각하면 딱히 악한 사람만 골라내어 정교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닌 듯 하다. [3] 문학에서는 분명 평화가 제일이고 사랑이 가득해야 한다는 반전주의가 당연하지만 반대로 사회과학에서는 폭력을 저질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모순적인 원리 때문에 한 일본의 작가는 "사회과학의 원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오로지 문학의 원리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4] 그런데 대한민국은 2010년까지는 아동을 상대로 폭력적인 교육이 당연했던 시대였다. 특히 오장풍 교사 사건의 피해자가 1998년생이기도 하며 1998년생까지는 그런 아동 학대 체벌 당연하고 무조건 겪어왔기에 체벌의 ㅊ자만 들어도 치를 떨거나 보상 심리를 지금도 호소할 정도다. [5] 영미법으로 범죄를 그나마 제대로 근절하고 있는 곳은 세계 최상위 수준의 치안을 자랑하는 싱가포르, 중국의 홍콩 정도 밖에 없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극한 형벌 때문에 자국민들이 주변국이나 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6] 부부관계에서 한 쪽이 끊임없이 잘해 주고 사랑을 줘도 그것 때문에 다른 한 쪽이 바람을 피웠다는 얼토당토 않아 보이는 사례가 의외로 꽤나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물질을 주면 사랑을 안 줬다고 바람 피우고, 사랑을 주면 물질을 안 줬다고 바람 피우고, 둘 다 주면 너무 잘해줘서 바람 피웠다는 인간들의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7] 예를 들어 현대의 호사가들은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으로 뇌 형태를 타고나고 어쩌고 하는 얘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러면서 또 동시에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이나 성적 억압에 관해서 얘기하기도 좋아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호사가들이 태반인데 까고 말해서 그냥 뒤숭숭하고 괴이한 것에 관해서 떠들고 싶어하는 것이지, 뭔가 이치에 닿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8] 공권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에 의해 제한적이고 합법적인 범위에서 폭력의 사용을 허가받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왕정국가에서는 왕이 이들에게 폭력의 권한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이러한 권력을 위임하는데 이에 따른 차이도 폭력의 정당한 사용범위를 논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9] 대표적으로 단순 절도범을 향해 도둑질을 막는다고 총을 쏘는 경우와 5.18 민주화 운동처럼 치안 회복을 명분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있다. [10]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살인이라는 폭력이 발생한다. [11] 독일 형법 제131조【폭력물 반포 등】① 인간 또는 인간과 닮은 존재에 대하여 잔인하거나 기타 비인간적인 폭력행위를 그러한 폭력행위에 대한 찬양 또는 고무를 기술하거나 인간존엄을 해치는 방법으로 사건의 잔혹성 또는 비인간성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문서(제11조 제3항)에 대하여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자유형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1. 반포행위
2. 공연히 전시, 게시, 상영하거나 기타 그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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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제1항에 규정된 내용의 표현물을 방송, 미디어 또는 전신을 통하여 반포한 자도 전항과 동일하게 처벌한다.
③ 제1항 및 제2항은 그 행위가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 관한 보도를 위한 경우에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④ 제1항 제3호는 18세 미만자에 대하여 보호권한을 가진 자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보호권자가 훈육의무를 제공, 양여, 방기를 통하여 현저하게 위반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