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즈레 시타델 (지즈레 칼레시) |
1. 개요
튀르키예어, 영어: Cizre쿠르드어: Cizîr
시리아어: ܓܙܪܬܐ ܕܒܪ ܥܘܡܪ (가자르타)
아랍어: جَزِيْرَة ٱبْن عُمَر
히브리어: גזירא (그지라)
튀르키예 동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 주도 쉬르나크에서 서남쪽으로 25km, 바트만에서 동남쪽으로 90km, 마르딘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티그리스 강 서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13만명이다. 성경과 쿠란의 대홍수 이후 노아 (누흐)가 처음으로 세운 도시라는 전승이 있을 만큼 오래된 도시로, 동쪽 15km 지점에는 아라라트 산과 함께 노아의 방주의 안착지로 전해지는 주디 산이 있다. 지명은 아랍어로 섬이란 뜻인 자지라의 튀르키예식 발음으로, 티그리스 강을 직선에 가깝게 이은 수로와 기존 강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지형에 도시가 자리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아나톨리아 고원이 끝나고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시작되는 입지 덕에 육로 / 수로 교통의 요지로써 중세 시기 번영하였다. 11세기 마르완 왕조와 12세기 장기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다.
14 ~ 19세기에는 쿠르드계 보흐탄 후국의 중심지였다. 자지라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써 지즈레에서는 천년 이상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는데,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함께 1915년 아르메니아인 / 아시리아인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과 개종이 이루어지고 1951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며 무슬림만 남게 되었다. 1984년 이후로는 튀르키예군의 PKK 진압 작전으로 많은 쿠르드 인들이 유입되었다. 이로써 지즈레는 쿠르드 민족주의의 거점 중 하나가 되었고, 2015-16년 인근 누사이빈과 함께 튀르키예군의 토벌 대상이 되어 시가지 일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시내에는 성채와 대사원, 붉은 마드라사, 아흐메드 지즈리 영묘, 누흐 영묘 등의 유적이 있다. 서북쪽 7km 지점에는 쉬르나크 셰라페틴 엘치 공항이 자리한다. 남쪽에는 시리아와의 국경이 있고, 동남쪽으로 계속 가면 역사적 친연성이 큰 이라크 및 남쿠르디스탄과의 국경이 나와 교류가 이루어진다.
2. 역사
로마 제국 시기 티그리스 강의 도하처인 아드 플루멘 티기림이었고, 니시비스로 향하는 로마 가도가 지났다. 일대는 자브디케네 주에 속했고, 서북쪽 10km 지점에 도시 베자브데가 있었다.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에 따르면 본격적인 도시는 압바스 왕조 시기인 9세기 중엽, 모술의 아미르 (총독) 알 하산 이븐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 잇 타글리비가 건설했다. 알 하산 이븐 우마르는 강이 굽어 흐르는 반도에 운하를 뚫어 섬으로 만들었고, 이로써 '이븐 우마르의 섬'이란 뜻인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굴곡진 기존의 강은 느린 유속 덕에 점차 퇴적되었고, 하도 (강의 진로)는 더 유속이 빠른 알 하산의 운하로 옮겨졌다. 따라서 본래 강 본류의 동안에 있던 시가지는 서안에 위치하게 되었다.아미드 (디야르바크르)와 니시비스 (누사이빈)를 잇는 무역 & 교통로 상에 위치한 덕에 도시는 경제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수심이 깊어 모술 등 하류 쪽 도시들로 물자를 실어나르는 하항의 기능을 했다. 이렇게 자비라트 이븐 우마르가 성장하자 기존의 도시인 베자브데의 주민들이 이주했고, 그 결과 후자는 10세기 전반 들어 버려졌다. 번영의 결과 알 하라위 등의 지리가는 누흐 ( 노아)가 대홍수 후 2번째로 세운 도시고, 인근 주디 산이 방주가 안착한 곳이라고 과장하기도 했다. 그 외에 와파야트 이븐 알 아얀과 이븐 칼리키칸 등은 사산 제국의 건국자 아르다시르 1세, 우마이야 왕조 시기의 유수프 이븐 우마르 앗 타카피 혹은 압둘 아지즈 이븐 우마르가 세운 도시라는 설도 제기했다.
난세인 10세기 들어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는 요새화되었다. 누사이빈 출신의 지리가 이븐 하우칼은 '수라트 알 아르드'에서 동로마 제국 및 아르메니아와 모술, 마야파리킨, 아르젠과의 교역장이라 묘사하였다. 977년, 일대를 지배하던 함단 왕조의 아미르 우다트 앗 다울라 아부 타글리브 파달라는 부와이 왕조의 군주 이즈 앗 다울라 바크티야르와 동맹했다. 하지만 이듬해 후자는 사마라에서 파르스의 사촌 아두드 앗 다울라에 패배했고, 자지라 지방은 부와이 령이 되었다. 다만 983년 아두드 앗 다울라의 사후 벌어진 내전을 틈타 마르완 왕조를 세우게 되는 쿠르드 왕공 바드 이븐 두스타크가 자지라를 침공하자 함단 왕조는 복원되었다. (989년)
복원된 함단 조의 군주 아부 타히르 이브라힘은 주요 지지 세력이던 베두인계 바누 우카일에게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와 누사이빈 등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바드에 패배한 이브라힘이 누사이빈으로 피신해오자 우카일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알 무사입이 그를 피살, 모술을 장악하며 우카일 왕조를 세웠다. 우카일 조는 바드를 전사시키고 부와이 조에 복속하여 자지라 지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996년부터는 부와이 군을 축출하며 사실상 독립했다. 반세기 간의 안정 후 1042년 여름부터 튀르크멘 유목민들이 일대를 습격했고, 그 무렵 일대는 디야르바크르 분지의 마르완 왕조령이 되었다. 1056년, 마르완 왕조는 셀주크 제국에 복속했다. 셀주크 재상 니잠 알 물크는 도시에 마드라사 (대학)를 세웠다.
2.1. 모술의 배후 도시
1085년, 마르완 조의 전 재상이 불러온 셀주크 군대가 디야르바크르를 정복했다. 이때 마지막 아미르 나시르 앗 다울라 만수르는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의 영주로 봉해졌으나, 그마저도 1096년 1월 나시르 앗 다울라가 사망하자 휘하의 맘루크인 지키르미쉬 (제케르미슈)가 찬탈하면서 마르완 왕조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해 말엽, 모술에서는 튀르크 용병대장 케르부가 (키토부카)가 우카일 왕조에 대해 정변을 일으켜 도시를 포위했다. 이에 우카일 군주 알리 이븐 샤라프 앗 다울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지키르미쉬는 출정했으나 케르부가의 동생 알툰타쉬에게 패배한 후 그에게 복속, 오히려 모술 포위를 도와 우카일 조의 멸망을 앞당겼다. 이러한 혼란기인 1097년 말엽, 1차 십자군이 당도했다. 안티오크 구원에 실패한 케르부가가 사망하자 지키르미쉬는 셀주크 술탄 바르키야루크로부터 모술 총독에 봉해졌다.이후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는 함단 시기처럼 일련의 모술 총독들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1106년 지키르미쉬의 사후 자왈리 사카와, 마우두드, 아크순쿠르 알 부르수키 (보르소키) 순으로 통치했다. 1126년, 알 부르수키가 암살된 후 아들 마수드가 계승했으나 이듬해 요절하고 어린 동생 알프 아르슬란이 맘루크 자왈리의 후견 하에 계승했다. 자왈리는 술탄 마흐무드 2세에게 책봉을 청했으나, 사절들이 재상 아누시르반 (아누슈르완)을 매수한 결과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아타베그 (섭정)로 봉해졌다. 이에 장기는 손쉽게 모술을 장악했으나, 알프 아르슬란에 충성하는 군대가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에서 항거했다. 따라서 장기는 친히 북상했고, 그의 숙련된 병사들은 전함 혹은 수영을 통해 도시에 접근해 항복을 얻어냈다. 1130년, 장기는 북방의 아르투크 왕조 연합군[1]을 패배시켰다. 하지만 그가 시리아 원정에 나선 틈에 하산케이프의 다우드가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 근교를 약탈했고, 이에 장기가 친정하자 산지로 철수했다.
얼마 후에는 현지 도즈다르 (성채 사령관) 티키트 앗 딘 하산이 휘하 군인들이 원정에 차출된 틈에 그 부인들을 범하자, 장기는 자신의 하집 (비서실장) 알 야그시야니를 보내 처리하게 했다. 알 야그시야니는 반란을 피하기 위해 하산에게 그가 알레포의 도즈다르로 승진했다는 거짓말로 꾀어낸 후, 성채를 나오자마자 체포해 궁형과 십자가형을 차례로 집행했다. 1142년에는 유대인 학자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가 도시를 방문해 그 번영상을 기록했다. 당시 시내에는 4개의 샤피이파 마드라사[2]가 있었고, 성밖에는 2개의 수피 사원 (칸카)가 있었다. 1146년 장기가 사망한 후 모술을 계승한 장남 사이프 앗 딘 가지 1세는 이즈 앗 딘 아부바크르 앗 두바이시를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의 총독에 봉했다. 다만 1149년에 등극한 쿠트브 앗 딘 마우두드는 도시를 직할령으로 두었고, 1155년에 현존하는 대사원을 세웠다.
2.2. 장기 왕조의 마지막 갈래[3]
1170년 그의 사후에는 아들 사이프 앗 딘 가지 2세가 계승했다. 한편 시리아인 미카일에 의하면 1173년, 현지 시리아 정교회 수도원이 몰수되고 주교 바실로오스가 감금되는 등 기독교 박해가 있었다. 1180년 사이프 앗 딘 가지 2세의 사후, 그의 아들들은 어렸기에 동생 이즈 앗 딘 마수두가 모술의 아미르가 되었다. 대신 가지 2세의 아들들 중 장남인 무이즈 앗 딘 산자르 샤는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가 주어졌다. 1183년, 산자르 샤는 당시 시리아 ~ 이집트를 지배하던 살라흐 앗 딘 유수프에 복속하여 사실상 자립하였다. 살라딘 사후에는 아예 자신의 명의로 청동 디르함 등 동전을 발행하던 그는 1208년, 아들 가지에게 암살되었다.이후 다른 아들 무이즈 앗 딘 마흐무드가 가지를 죽여 시신을 들개들에게 던져준 후 집권했다. 그는 1234년 모술의 장기 왕조를 찬탈한 바드르 앗 딘 룰루의 딸과 자신의 아들 알 말리크 알 마수드 샤한샤를 결혼시킴으로써 인척을 맺어 지배권을 확보했다. 마흐무드는 또한 대사원을 보수하며 현재에도 이스탄불 이슬람 예술 박물관에 남아있는 이중문을 더했다. 비록 잔인했지만 내치와 외교에 능했던 그는 무려 42년간 안정적으로 도시를 통치했다.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당시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의 성채와 마드라사를, 이븐 칼리칸은 그 대사원을 묘사했다.
장기 왕조 시기 도시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12세기에 비마리스탄 (병원) 1개, 하맘 (목욕탕) 14개, 모스크 19개, 사빌 (음수대) 30개가 있던 인프라는 13세기 이븐 샷다드에 의하면 비마리스탄 2개, 대사원 2개, 하맘 14개, 모스크 80개로 늘어났다. 그러던 1251년, 몽골 제국이 10만 디나르의 연공을 요구한 직후 마흐무드는 사망했다. 뒤이어 아들 마수드 샤한샤가 계승했으나, 그는 장인 룰루에게 감금되어 모술로 압송되던 중 배가 침몰해 사망했다. 이로써 장기 왕조는 115년만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2.3. 중세 후기
룰루는 1252년 몽골에 복속허여 뭉케 칸에 이에 훌라구 칸의 명의로 동전을 발행했고,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에 모스크를 세웠다. 1259년 여름, 룰루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이 각각 영지를 받으면서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는 알 말리크 알 무자히드 사이프 앗 딘 이샤크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인잘루트 전투 후 1260년 여름, 이샤크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4]은 맘루크 왕조령 이집트로 망명했다. 이샤크는 도시를 떠나며 현지 기독교도들로부터 700 디나르를 수탈했고, 그가 몽골의 침공 앞에서 무책임하게 도망간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이샤크가 떠난 후 일대는 아마디 (아미디야)의 아미르 이즈 앗 딘 아이바그 (아이바크)가 장악했고, 마야파리킨의 아미르 압둘라가 뒤늦게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한편 바이바르스에게서 원군을 얻지 못한 이샤크는 1261년 알 무스탄시르 2세의 바그다드 수봇 원정에 동참했다가 그가 전사하자 이집트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듬해 여름, 긴 포위 끝에 모술을 함락한 훌라구 칸은 부관 삼다구를 보내어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를 포위했다. (1263년 여름) 다만 아시리아 정교회 주교 헤난이 금을 만드는 연금술을 갖고 귀순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포위는 풀렸교, 자말 앗 딘 굴바그가 총독으로 봉해졌다가 이전 군주 이샤크와의 내통 혐의로 처형된 후 헤난으로 대체되었다. 다만 헤난 역시 1268년에 부도덕을 이유로 처형되었고, 그후 일대는 일 칸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13세기 후반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에서는 금화와 은화 동전이 주조되었고, 그 생산량은 가잔 칸의 개혁 후 늘어났다. 1300년경, 집사의 저자이기도 한 재상 라시드 앗 딘 함다니는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의 티그리스 강에서부터 운하를 파려 하기도 했다.
2.4. 보흐탄 후국
1327년, 도시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대사원과 바자르 및 3개의 성문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 무렵 일대는 한 튀르크멘 부족장에게 영지로 주어졌는데, 1335년 일 칸국이 붕괴한 후 쿠르드계 보흐탄 후국이 하산케이프의 아이유브 왕공 알 아슈라프의 도움으로 점령했다. (1337년) 그 무렵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의 연 수입은 17만 2백 디나르 정도였다. 한편 하산케이프의 알 아슈라프는 딸을 보흐탄 아미르 이즈 앗 딘과 결혼시켜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후자가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며 지배력을 강화하자 1384년경 무력 점령을 시도하나 격퇴되었다. 1400년경, 보흐탄 아미르가 티무르 제국의 보급대를 약탈하자 분노한 티무르는 보복으로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를 습격했다. 놀란 보흐탄 후국은 그에게 복속했으나, 얼마 후 티무르의 이라크 원정 동참을 거부했다가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가 재차 도시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452년, 형에 대한 정변으로 백양 왕조의 군주가 된 우준 하산은 1456년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를 점령하며 영토 확장에 나섰다.15세기 들어 도시에는 누흐 (노아) 영묘로 여겨지는 곳이 성지화되어 순례객들을 모았고, 그 중에는 오스만 술탄 메흐메드 2세도 있었다. 한편 우준 하산이 만든 제국은 1478년 그의 사후 반란이 연달아 터지며 붕괴했고, 산지로 물러났던 보흐탄 후국이 1495년경 도시를 수복했다. 그무렵 사망한 쿠르드 시인 알리 하리리의 영묘 역시 신성시되었다. 16세기 들어 사파비 왕조에 복속했던 보흐탄 후국은 1514년, 찰디란 전투에서 승리한 셀림 1세가 이드리스 비틀리시를 보내자 오스만 제국에 복속했다. 일대는 자치령인 휘쿠메트가 되었고, 1515년에 편성된 디야르베키르 에얄레트에 소속되었다. 1535년에 집권한 아미르 사이드 아흐마드의 치세에 보흐탄 후국은 전성기를 맞았고, 1566년에는 아르빌 출신의 기독교도들이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에 정착했다. 17세기 중엽, 모술에서 하산케이프로 향하며 도시를 지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4명의 무프티와 나킵 알 아슈라프[5]가 있고 카디 (법관)는 3백 악체의 일봉을 받는다고 기록했다.[6]
2.5. 근대: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화
시간이 지나며 지명은 '자지라'의 튀르크어 발음인 제지레 혹은 지즈레로 굳어졌다. 5세기간 이어지던 보흐탄 후국의 지즈레 지배는 메흐메드 알리의 아나톨리아 진격 후의 권력 공백기를 틈타 쿠르디스탄 일대를 석권하던 소란 후국의 모하메드 파샤 미르 코르가 1833년에 정복하며 종식되었다. 1836년, 반격에 나선 오스만 제국은 레쉬드 메흐메드 파샤를 보내 지즈레를 수복했다. 레쉬다 메흐메드 파샤는 소란 후국에 복속했던 보흐탄 아미르이자 뮈테셀림 (징세관) 사이프 앗 딘 쉬르를 폐위하고, 친척인 베디르 칸 베그를 옹립했다. 1838년에도 오스만 군대가 압둘 아가외 칸 마흐무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즈레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후일 독일군 총사령관에 오르는 헬무트 폰 몰트케가 참모로 동행해 기록을 남겼다. 한편 베디르 칸은 지즈레에 군수 창고 및 무기 공장을 설립하는 등 자체적인 근대화에 나섰다.1842년, 탄지마트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지즈레는 카자 (읍)가 되어 모술 에얄레트에 소속되었다. 다만 지즈레를 제외한 나머지 보흐탄 후국 영토는 디야르바크르 에얄레트에 남았기에 후국은 두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더욱 약해졌다. 한편 불만이 많던 베디르 칸은 1843-46년에 걸쳐 인근 쿠르드 왕공들과 함께 하카리 산지의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을 학살했다. 이는 현지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국제 사회에 알려졌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압박 하에 오스만 조정은 베디르 칸을 수도로 소환했다. 그가 거부하자 토벌군이 파견되었으나, 베디르 칸은 이를 격퇴한 후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오스만 파샤 등이 이끄는 대군이 파견되어 지즈레를 점령했다. (1846년 6월) 디야르바크르 총독은 또한 지즈레의 낙쉬반디 수피 종단의 셰이크들[7]에게 서신을 보내 중재를 청했다. 이듬달에 지즈레를 수복한 베디르 칸은 결국 철수, 항복하여 유배되었다. 이로써 보흐탄 후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예즈단셰르가 그저 뮈테셀림으로만 봉해졌다.
1847년 12월, 오스만 조정은 쿠르드 인들의 분규를 잠재우기 위해 지즈레와 보흐탄 카자 등을 포함한 쿠르디스탄 에얄레트를 신설했다. 1849년, 예즈단셰르는 오스만-카자르 국경 확정에 있어 영국인 장교 펜윅 윌리엄과 교섭했다. 같은해 예즈단셰르는 카이마캄 (행정관) 무스타파 파샤로 대체되어 수도로 압송되었고, 지즈레 귀환이 금지되었다. 1852년 이만-에-우무니예 (임시 세금)의 도입과 함께 지즈레에는 2만 3천 쿠루쉬 (피아스터)가 할당되었다. 1854년에는 크림전쟁의 본격화와 함께 예즈단셰르가 지즈레와 보흐탄의 징병을 맡아 9백의 쿠르드 인을 전선으로 보냈다. 그해 11월, 예즈단셰르는 현지 관리들의 박대를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지즈레를 장악했다. 이듬해 1월, 그는 지즈레와 보흐탄 지배권을 대가로 항복을 제안했으나 거절되었다. 결국 3월에 6문의 대포를 지닌 오스만 군대가 진군하자, 예즈단셰르는 크림 전선에 있던 펜윅 윌리엄스의 제안에 따라 항복했다.
1867년, 쿠르디스탄 에얄레트가 해체되면서 지즈레 카자는 디야르베키르 빌라예트 산하 마르딘 산작에 편성되었다. 당시 지즈레 카자에는 9개의 나히야 (면)와 210개의 마을이 있었다. 1878년, 베디르 칸의 아들 오스만이 수도에서 도주해 와서 1877-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쿠르드 패잔병들을 모아 봉기하고 아미르를 칭했다. 반군은 지즈레까지 점령했으나 8개월 후 셰브케트 베이의 오스만 군에게 진압되었다. 1880년, 독일 학자 에두아르드 사차우가 지즈레를 방문했다. 이후 프랑스 지리가 비탈 퀴넷은 도에 카라반사라이 5개, 가게 106개, 카페 6개, 실내 바자르가 있다고 기록했다. 1891년 압뒬하미트 2세의 하미디예 기병대 창설 시에 현지 미란 가문의 무스타파 아가는 입대하여 파샤 계급을 받아 무스타파 파샤가 되었고, 그 지위를 이용해 상인들의 물품을 수탈하거나 기독교 마을들을 약탈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 1892년, 무스타파 파샤는 지즈레의 모스크를 휘하 병력을 위한 병영으로 개조하는 무슬림이 하기 힘든 불경을 저질렀다.
1895년 10월, 메흐메드 에니스 파샤의 디야르바크르 부임 후 일대에서는 기독교도 학살이 만연해졌다. 그해 11월, 지즈레의 오스만 수비대는 학살과 약탈을 위해 당도한 무스타파 파샤의 입성 시도를 격퇴했다. 이를 무스타파 파샤가 고발하자, 메흐메드 에니스 파샤는 지즈레의 지휘관을 소환했다. 또한 그 무렵 지즈레는 여러 알바니아 인들이 거주하는 등 일종의 유배지로 활용되었는데, 태수 파리스 역시 조정에서 좌천된 인사였다. 한편 무스타파 아가는 무함마드 아가예 소르와 다투었는데, 1900년 지즈레 태수는 전자와 타얀 부족 측에 가담했다. 몇달 후, 무스타파 파샤가 상대편 마을 20여 곳을 파괴하자 아가예 소르는 장군 바하에틴 파샤에게 보호를 청했다. 이에 바하에틴 파샤가 조사차 지즈레에 당도하자 무스타파 파샤에 의해 5일간 감금되었고, 양측은 계속 싸우다가 1902년 아가예 소르가 무스타파 파샤를 암살하며 종식되었다. 이후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2.6. 근현대: 기독교도 학살
1909년 기준 지즈레에는 1천 5백 가구가 살았고, 그중 1천 가구는 50 두만 이상의 토지를 소유했다. 1910년까지 미란 가문은 모술 북쪽의 월동지에서 봄마다 지즈레로 와서 무역에 나서고 세금을 낸 후, 티그리스 강을 건너 보탄 강 발원지 일대의 하계 목초지로 이동했다. 아르메니아-아시리아인 학살이 한창이던 1915년, 메흐메드 레시드 파샤의 지시에 따라 아지즈 페이지와 쥘퓌 베이는 일대의 기독교도 주민들에 대한 인종 청소를 준비했다. 그들은 쿠르드 인들을 선동했고, 학살 가담을 거부한 할릴 사미를 해임한 후 카말 베이로 대체했다. 곧 지즈레에는 2개의 레디프 (예비) 부대가 배치되었고, 7-8월에 걸쳐 20여개의 야곱파-칼데아 교파 마을들이 파괴되었다. 이미 아자크로 피신한 시리아 정교회 주교 율리우스 베흐남 등을 제외한 다수가 학살되었고, 미처 피하지 못한 두 주교도 살해되었다.지즈레 내에서도 무프티 아흐마드 힐미 등의 주도로 아르메니아인 및 아시리아인 남성 전원에 대한 체포, 고문, 처형이 이루어진 후 시신은 티그리스 강에 던져졌다. 2일 후에는 아이들이 무슬림 가정에 강제 입양되었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강간 후 살해되어 역시 강물에 던져지며 인종 말살이 이루어졌다. 9월 들어 모술의 독일 영사 발터 홀슈타인은 4천 7백여 아르메니아인[8], 350여 아시리아인[9] 등이 지즈레 일대에서 학살되었고 교회 11곳 및 예배당 3곳이 몰수되었다고 보고했다.[( 지즈레 카자 전체로는 7천 5백여 피살됨] 9월에는 에르주룸 출신 아르메니아인 2백명이 자즈레 근처에서 처형되었고, 학살을 주도한 케말 베이는 11월에야 해임되었다. 1차 대전 패전 후, 제6군 사령관 알리 이흐산 사비스는 영국군의 점령을 방지하기 위해 지즈레의 쿠르드 인들을 무장시켰다. (1919년 2월)
쿠르드 인들의 습격이 지속되자 영국군은 지즈레 점령을 고려했으나 결국 철회했다. 또한 학살범 아흐마드 힐미에 대한 체포 영장 역시 쿠르드 부족들의 비호로 무력화되었다. 한편 쿠르드 인들이 독립 국가를 요구하자 튀르크계 대국민의회의 무스타파 케말은 1920년 6월, 니하트 아늘므쉬를 지즈레 지휘관으로 보내어 쿠르드 주민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격려하고 시정부를 설립하게 했다. 다만 니하트 아늘므쉬는 현지인들의 불만을 사 1922년 9월에 해임되었다. 한편 세브르 조약 당시 지즈레 일대는 프랑스령으로 규정되었지만, 1923년에 이르면 이미 튀르키예 군대가 다수 배치되었기에 로잔 회담에서 튀르키예 령으로 남게 되었다. 1920년대 들어 무스타파 케말은 쿠르드 반란들을 꺾으며 일대에 대한 '튀르크화'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1926년 아자크에 남아있던 257명의 시리아 정교도가 체포되어 구타당한 후 지즈레에 감금당해 음식 배급이 없는 등 절멸되었다.
2.7. 현대
1913년 무렵, 지즈레의 1만 인구 중에는 3천 5백여 기독교도와 250여 유대교도가 거주했다. 하지만 대학살 후 1918년에 기독교도의 수는 1천 전후로 줄었고 1950-51년에는 유대교도 주민들이 이스라엘로 떠났다. 쿠르드 위주의 도시로 남은 지즈레는 1950년대 중반에 전기와 수도가 놓였고, 새 다리와 행정 기관 및 극장이 세워졌다. 시내 길은 확장되었고, 외부와의 신작로가 놓였으며 아타튀르크 공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1989년 2명의 경찰관이 피살된 후 60여명이 체포, 구금되어 20여일간 고문을 당하는 등 긴장감이 높아졌다. 또한 기존에 이라크와의 교류가 활발하던 도시는 뒤이은 걸프전으로 국경이 닫히자 90%의 상점이 폐업하는 등 경제적으로 지대한 타격을 입었다.경제 불안 속에서 1991년 6월, 쿠르드 민병대가 정부군을 공격해 5명을 전사시켰고 이듬해 3월의 (금지된) 노루즈 행사에서는 친 PKK 집회가 열려 벌어진 충돌에서 30여명이 사망했다. 1993년에도 양측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3명의 민병대 전사자 및 민간 재산에 피해가 있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2014년 시리아 내전 들어 쿠르드 인들은 국경 너머의 동족들 ( 로자바)을 도와 참전했고, 지즈레 출신 17인이 코바니 전투 당시 전사했다. 하지만 10월에 튀르키예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주민들이 봉기해 바리케이드, 해자, 검문소 등을 설치하고 경찰들의 이동을 막았다.
이에 2015년 9월, 정부군이 통금과 함께 공세를 가하여 민병대 30여 및 민간인 20여명이 사망한 후 통제권을 회복했다. 이후로도 군사 작전이 이어져 2016년 6월까지 7백에 달하는 민병대와 24명의 군경이 전사했고, 그동안 1천 2백채의 주택과 4개 구역이 파괴되었다. 일대의 난민 수는 11만에 이른다. 그후 튀르키예 정부는 40억 리라를 들여 2천 7백채의 주택 재건에 나섰고, 2016년 봄에 통금이 풀렸다. 하지만 8월에 검문소에 대한 차량 폭탄 테러로 11명의 군경이 사망하고 78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직후 튀르키예 정부는 기자들 및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3. 갤러리
[1]
하산케이프의 다우드, 마르딘의 티무르타쉬, 아미드의 일랄디
[2]
이븐 알 바즈리, 자히룻딘 카이마즈 알 아타베기, 라다위야, 카디 자말룻딘 압둘라흐만 마드라사
[3]
그외에 아이유브 왕조와 아르투크 왕조 역시 일부 방계 세력이 북쪽에 잔존했다
[4]
모술의 앗 살리흐 루큰 앗 딘 이스마일, 신자르의 알 무자파르 알라 앗 딘 알리
[5]
무함마드 후손인 하심 가문의 대표
[6]
17세기 말에는
타브리즈로 향하던 프랑스인 여행가가 기록을 남겼다.
[7]
이브라힘, 살리흐, 아르자일
[8]
2천 5백의 사도교회, 1천 2백의 가톨릭, 1천의 개신교
[9]
250의 칼데아 가톨릭, 1백의 시리아 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