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8-09 15:15:23

중세/정치사/중기/서·중부 유럽 일대

1. 개요2. 프랑크→프랑스
2.1. 필리프 2세 이전2.2. 필리프 2세 치세2.3. 필리프 2세 이후
3. 독일(신성 로마 제국)
3.1. 11세기3.2. 12세기3.3. 13세기

1. 개요

중세 중기로 들어서면서 서·중부 유럽의 정세가 정반대로 흘려가기 시작했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여전히 약한 왕권을 강화하려는 가운데 1066년 휘하 제후였던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기윰이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해 잉글랜드 국왕을 자처한 가운데 그들의 후예들이 지속적으로 프랑스 내의 다른 제후들과 결혼 동맹을 맺어 자신들의 확대해 가는 반면 독일의 경우 부족 공국들이 해체되거나 약체화되어 갔다.

하지만 12세기 중·후반에서 13세기 초반부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2. 프랑크→프랑스[1]

2.1. 필리프 2세 이전

카페 왕조가 성립된 후 초반은 단순히 왕령지 내지는 왕국의 영토를 확대하거나 말 안듣는 영주들과 티겨태격하던 상황이었다. 한편 로베르 2세는 두번째 결혼이 근친혼이란 교황의 비판으로 인해 교황청과 갈등을 빗다가 결국 1001년 베르트와 이혼하고 1003년에 어떻게 해도 근친이 될 수 없는 아를 백작 기욤 1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했다.

세 번째 왕비인 콩스탕스는 1003년 결혼 당시 17세로 당대 기록에 의하면 “허영이 많고 탐욕스러우며 거만하고 앙심을 품는”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는 그녀가 북부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풍속을 지닌 프로방스 지역 출신이라는 편견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콩스탕스는 로베르 2세에게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선사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콩스탕스는 아들들을 내세우며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자 했고 이는 종종 궁정에서 수많은 충돌과 사건들을 일으키고는 했다.

이러한 왕실 내부와는 별개로 로베르 2세는 부왕처럼 지방의 제후 세력 특히 노르망디 공작을 제어하려 했다. 당시 경제 기반은 전적으로 농토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기반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장악력에 달려 있었다. 이에 따라 로베르 2세는 조금씩 왕령지를 늘려나가야만 했는데 그는 손강 서편에 위치한 부르고뉴 공국을 주목했다. 부르고뉴의 공위는 로베르 2세의 친족이었던 외드 앙리가 982년까지 통치를 하다가 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자리가 비어진 상태였다. 문제는 외드 앙리는 아들을 두지 못했지만 오토 빌헬름이란 인물을 양자로 두었기에 로베르 2세는 오토 빌헬름과 부르고뉴의 공위를 두고 분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로베르 2세였고,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령으로 흡수되는 형식으로 병합하는데 성공한다.

1025년에는 장남이었던 위그가 사망하였고 이에 왕세자로 차남인 앙리 1세가 지명되었다. 곧 1027년 왕비 콘스탕스의 주장에 따라 앙리 1세 또한 공동왕으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앙리 1세의 왕위계승이 확실해지자 콩스탕스는 아들들을 부추겨 로베르 2세에게 대항하는 봉기들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결국 1030년경 로베르 2세는 두 아들인 앙리 1세와 로베르, 외드의 저항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로베르 2세의 군대는 아들들과 콩스탕스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였고 1031년 로베르 2세가 사망하게 된다.

앙리 1세 또한 동일하게 집권기는 영토적 분쟁들을 겪었다. 초창기에, 그는 어머니의 지원과 함께 남동생인 로베르가 일으킨 아버지에 대한 반란에 동참하였다. 이후 아버지가 죽자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를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여 왕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왕의 후계자로 로베르를 지지하였고, 왕이 죽으면서 앙리는 반란을 일으킨 형제들을 상대해야만 했고, 이에 굴복해 왕령지를 나눠주는 선에서 달래줘야 했는데 동생 로베르에게 부르고뉴 공국을 왕자령으로 수여해야 했고, 다른 동생인 외드에게 오를레앙을 수여해야 했다.

1035년 그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 순례를 다녀오던 중 사망하고 말았고 그의 뒤를 이어 일곱 살밖에 안된 사생아로서 작위를 상속받았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생전 작성된 유언장에 따르 작위를 승계받았는데 이에 앙리 1세는 기욤 2세를 도와 다른 귀족들의 도발을 제압하였고 1047년에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기욤 2세의 권력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앙리 1세는 오히려 기욤 2세를 견제하려는 다른 노르망디 귀족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청년 공작이 된 기욤 2세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54년과 1057년 앙리 1세의 군대는 기욤 2세의 군대와 큰 전투를 두 차례 치렀으나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다른 한편 앙리 1세는 콘라드 2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른 하인리히 3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056년에 사소한 영토 문제를 두고 충돌하여 그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앙리 1세의 치세의 봉건제는 그 정점에 달한 상태로 주군과 종신 사이에 충성과 토지를 매개로 한 쌍무적 계약 관계라고 정의될 수 있는 봉건주의에서 권력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실질적인 장악력을 지닌 영주권들로 파편화되었고 수많은 권력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저해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앙리 1세는 계속된 전투 속에서 새로운 영지를 획득했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또 다른 영지들을 상실하기도 했다.

1059년 7세의 장남 필리프의 축성식을 거행하면서 그를 공동왕을 삼다가 1060년 앙리 1세가 죽자 필리프 1세가 프랑스의 단독왕이 되었지만 겨우 8살에 불과하여 모후 안과 고모부인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가 섭정을 실시했다.섭정 기간인 1060년 최초로 대무관장직(Grand Connétable de France)직을 만들어졌으며 그가 직접 통치를 시작한 것은 15세가 되던 1067년부터였다.
그동안 봉건 영주들에 비해 위축해가던 카페 왕조의 권력을 상승시키기 시작한 국왕으로 선대들과 똑같이 봉건주의적인 지방분권적 정치 질서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부왕과 달리 필리프 1세는 왕령지를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가는 데 있어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069년에서 1077년까지 파리 인근의 베르망두아 일부와 백생 지역을 차지했고 1101년에는 막대한 자금으로 부르주 자작령과 기타 여러 영지들을 사들였다. 확장된 왕령지에서 거두어들인 수입을 관리하기 위한 재정관을 고용하는가 하면 아직 세속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여러 교회의 재정에 개입하여 왕실 재정으로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후자와 관련해 필리프 1세는 이 당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던 교회 개혁 세력의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치세 동안 그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적수는 바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였다. 필리프 1세 섭정기인 1066년 노르망디 공작령의 내분을 모두 평정한 기욤 2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하면서 잉글랜드를 공격, 왕위에 올랐다. 잉글랜드에서 노르만 왕조 세워‘정복왕 윌리엄 1세’가 된 기욤 2세는 북부 프랑스 지역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에 필리프 1세는 앙주 백작 풀크 4세,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와 연대, 견제 세력을 형성했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는 필리프 1세와 고종사촌 간이었으며 필리프 1세는 이 로베르 1세의 의붓딸이자 프리슬란트 백작 플로렌스 1세의 딸 베르트와 결혼했다.

1076년 필리프 1세는 기욤 2세에게 브르타뉴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늘 서쪽을 위협하는 잉글랜드-노르망디 세력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욤 2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078년 기욤 2세의 아들 로베르 2세(1051년 ~ 1134년)가 기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1세는 그를 도와주었고 1087년 기욤 2세가 사망한 후에도 노르망디 공작령을 물려받은 로베르 2세에게 동생 윌리엄 2세에게 돌아간 잉글랜드 왕위를 빼앗을 것을 부추기기도 했다.

1092년 필리프 1세는 자신의 지지 세력인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부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베르트라드와 결혼하기 위해 필리프 1세는 왕비 베르트와 강제 이혼을 했고 베르트라드 또한 필리프 1세와 결혼하기 위해 풀크 4세 곁을 떠났다. 결국 같은 해 5월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는 재혼을 감행했다. 이에 1094년 오툉 공의회에 모인 32명의 주교들은 이들의 결혼이 부당함을 선언하고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하지만 주교들의 파문령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파문이라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견디면서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는 꿋꿋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회개혁 및 십자군 모집과 관련해 프랑스를 방문한 길에 필리프 1세에게 더욱 강력한 파문 선고를 내렸다. 결국 1096년 가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1차 십자군에 수많은 제후들이 참가했으나 파문을 선고받은 필리프 1세는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로 필리프 1세는 자신이 참전해야 할 전투에 전처였던 베르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루이 6세를 파견했고 1098년에는 루이 6세에게 축성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교황과의 관계가 개선된 것은 파스칼 2세가 신임 교황이 된 이후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권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104년 파스칼리스 2세는 필리프 1세의 파문을 철회했으며 1107년에는 프랑스를 방문, 필리프 1세 및 루이 6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13세기 내내 지속될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한 프랑스-교황권 사이의 동맹이 그 시작을 알리게 된 것이다. 이듬해인 1108년 7월 29일, 필리프 1세가 사망하고 루이 6세가 단독왕이 되었다.

전처였던 베르트의 소생이었던 루이 6세는 어릴때 생모와도 이별을 한데다가 새왕비와의 다툼을 우려한 아버지 필리프 1세로 인해 어린 시절을 왕실 수도원이었던 생드니 수도원에서 자랐다. 이때 그곳에서 수도사 쉬제를 만났고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이후 쉬제는 루이 6세가 즉위한 이후 그의 정치적·종교적 조언자로 활약을 했다.

이미 공동왕 시절부터 군공을 세운 루이 6세는 서둘러 장례식을 끝낸 후 오를레앙으로 가서 8월 3일 축성식을 거행했다. 축성식은 통상 랭스 대주교가 거행했으나 왕국 서부 지역인 믈룅에서 필리프 1세가 사망하자 루이 6세는 동쪽 끝에 위치한 랭스보다는 보다 가까이 남동쪽에 위치한 오를레앙으로 가서 축성식을 거행했다.

사실 루이 6세는 의붓어머니 베르트라드의 아들인 망트 백작 필리프가 랭스로 가는 길목을 막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때문에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최대한 신속히 축성식을 거행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바로 오를레앙에서 축성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물론 랭스 대주교 라울은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이미 루이 6세는 상스(Sens) 대주교 댕베르에 의해 오를레앙의 생트크루아 성당에서 축성을 받고난 이후였다. 하지만 다행히 다른 제후들이나 영주들이 그의 왕위계승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루이 6세는 이전의 카페 왕들과 달리 본격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는 전 왕국에 걸쳐 이른바 ‘통치’라는 것을 행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투와 무력 투쟁을 통해 봉건적인 제후와 귀족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왕국의 여러 인민들을 실질적인 국왕의 신민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통치’를 통해서 그는 봉건주의적 권력 파편화를 극복하고 왕국을 통합, 카페 왕권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 당시 활기차게 전개되던 각 도시의 코뮌 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이들의 자율권과 자치권을 보장하고 봉건 영주들이 도시들을 약탈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했다. 즉 도시의 왕권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왕권의 도시에 대한 자치권 부여가 이루어지면서 향후 프랑스 왕국에서 지속될 왕권과 도시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자율권과 자치권은 또한 여러 수도원과 종교 조직들에게도 부여되었으며 이를 통해 루이 6세는 종교적인 명분을 획득했다. 그리고 비적 집단으로 변해버린 몰락 귀족들의 약탈 행위들을 척결해 나가면서 왕국 내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렇게 해서 루이 6세는 카페 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국 전체에 걸쳐 왕의 권위를 확장해 나갔다. 그의 별칭인 ‘확장왕(le Gros)’은 바로 이러한 그의 왕권의 확장과 확립에서 유래한다.

물론 그의 정책이 순탄하게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권 강화 정책에 저항하는 수많은 봉건 귀족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인 ‘전투왕(le Batailleur)’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유래한다. 어쨌든 이러한 다양한 무력 충돌 상황과 전투에서 루이 6세는 많은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많은 패배를 겪기도 했다. 특히 잉글랜드 왕 헨리 1세는 그 자신이 프랑스 왕의 종신으로서 이러한 프랑스의 분열적 상황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다. 더군다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는 헨리 1세의 사위로서 그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고 1124년에는 랭스까지 쳐들어오기도 했다.

이같은 하인리히 5세의 공격은 프랑스에 대한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간주되었고 루이 6세를 중심으로 다수의 제후(베르망두아, 부르고뉴, 플랑드르, 아키텐, 앙주, 샹파뉴, 네베르 , 블루아 등이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대제후들은 프랑스 왕의 권력 강화도 원치 않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 확장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루이 6세는 이 당시 생드니에 보관된 ‘붉은 왕기(oriflamme)’를 내세우면서 이 연합군의 수장을 자처했다. 사분오열을 기대했던 하인리히 5세는 프랑스 제후들의 연합군을 보고 다시 동프랑키아로 후퇴했다. 어쨌든 이후로도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긴밀한 관계는 계속되었고 프랑스 왕은 이를 이용해 프랑스 제후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루이 6세는 또 1127년 플랑드르 백작 샤를 1세가 사망하고 여러 귀족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자 조정자 또는 중재자의 입장으로 플랑드르 백작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루이 6세의 권위는 점차 높아졌고 봉건제후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루이 6세는 사부아 백작 욍베르 2세의 딸 아델라이드와 1115년경 결혼하여 총 8명의 자식을 두었다. 이중 장남인 필리프는 13세가 되던 해인 1129년 공동왕으로 축성식을 받았다. 하지만 1131년 필리프는 갑작스럽게 요절했고 세자와 공동왕의 직위는 왕보다는 성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차남 루이에게 떨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루이는 형을 대신하여 1131년 공동왕으로 축성을 받았다. 1137년에는 갑자기 모든 일이 평화롭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왕 스티븐과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어 그의 아들인 외스타슈가 노르망디 공작령을 두고 루이 6세에게 봉건신서를 실시했다. 프랑스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던 남부 지방에서도 낭보가 찾아들었다.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가 사망하면서 공작령을 무남독녀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에게 상속하면서 주군인 루이 6세를 딸의 후견으로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루이 6세는 엘레오느르의 후견인이 된 점을 이용해 자신의 아들인 루이 7세와 약혼시켜 거대하면서도 풍요로운 아키텐 공작령이 추후 프랑스 왕실령에 귀속시키려고 했다.

같은 해 7월 25일 보르도에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사이 8월 1일 루이 6세는 갑자기 병이 들어 사망하였고 루이 7세가 17세의 나이에 누구의 이의제기도 없이 안정적으로 단독왕이 되었다. 8월 8일에는 엘레오노르의 남편으로서 아키텐 공작도 겸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이 7세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는 언제나 장남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직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정치·군사적 활동과 관련해서는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별명 ‘연소왕(le Jeune)’은 그가 미성년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의미도 있지만 ‘미성숙’ 또는 ‘미숙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왕의 절친이었던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가 여전히 루이 7세 곁에 충실한 조언자로 남아 있었지만 그는 당대인들의 눈에 정치적으로 많은 실책들을 저질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루이 6세 당시에 왕권의 기틀이 그나마 잡혔다고는 하나 여전히 프랑스 왕국은 봉건주의적인 지방분권화와 권력 파편화가 심한 곳이었다. 따라서 루이 7세는 쉬제의 조언을 받들며 부친의 정책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야 했다. 즉 그는 난폭한 기사 귀족들에 맞선 도시 부르주아들 및 성직자들의 자치권 확립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 외에도 농민들의 여건 개선과 농촌에서의 생산력 증대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개간 사업을 장려하고 농노들의 해방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어디까지나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었다. 1140년대 초 루이 7세는 왕권과 배치되는 경우에는 교황과의 분쟁도 서슴지 않았으며 파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4년 후 루이 7세는 교황과의 화해 무드를 위해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게 되었다.1146년 루이 7세는 왕비 엘레오노르와 함께 아직 십자군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봉건 제후들을 이끌고 육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도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십자군과 합류하였는데 루이 7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들과 잘 어울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서유럽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동로마 제국 황제와 그 측근들은 십자군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교황에게 군대를 요청한 이유는 자신들을 위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십자군은 아예 눌러 앉아 그 지역을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1148년 3월 루이 7세의 십자군은 엘레오노르의 숙부인 레몽 드 푸아티에가 통치하고 있는 안티오크 공국에 도착했다. 큰 위기에 처해 있던 레몽 드 푸아티에는 루이 7세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루이 7세는 오직 예루살렘을 향한 전진만을 고집했다. 남부 프랑스 출신의 레몽은 화려하고 언변 좋으며 과장이 심한 사람이어서 애초에 성직자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금욕적인 루이 7세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남부 프랑스 출신인 엘레오노르는 곧 숙부와 친근한 모습을 보이면서 루이 7세로 하여금 숙부를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다. 레몽과 알리에노르가 보여준 다소 자유분방한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태도는 곧 북부 프랑스의 경건하고 엄숙한 성직자들에게 양자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루이 7세에게는 안티오크 방어보다도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1148년 늦은 봄에 콘라드 3세와 루이 7세, 그리고 십자군이 전열을 정비했다. 하지만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점령한 에데사 수복보다도 이들은 1146년 죽은 장기의 새로운 후계자인 누르 앗 딘 마흐무드와의 전투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왕국과는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다마스쿠스가 곧 누르 앗딘에 의해 함락될 것이라 추측하고는 어처구니없게도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현지에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유혈낭자한 전투와 승리, 그리고 여기에서 얻어질 명예와 전리품, 무용담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머나먼 이국 땅에서 거대한 도시 하나를 점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결국 루이 7세와 콘라드 3세가 이끄는 십자군은 점령 실패와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본국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제2차 십자군은 루이 7세에게 커다란 재앙이었다. 원정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원정을 갔다는 그 자체가 루이 7세 통치에 치명타들을 가했다. 먼저 장기간의 원정으로 왕실 재정이 바닥이 났고 이는 루이 7세의 운신의 폭을 크게 제약하였다. 특히 봉건제후 및 귀족들에 대한 그의 장악력이 크게 손상되었는데 그는 이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재정을 당장 마련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원정으로 인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위에 상술한 숙부 레몽 드 푸아티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 동안 딸 둘만 낳으면서 남자 후계자가 절실했기에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와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 7세는 결국 1152년 엘레오노르와 이혼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이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여공작으로서 서남부 지역의 막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혼은 이 영토들이 다시 왕권의 범위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안 좋은 점은 이후 엘레오노르가 이 영토들을 가지고 프랑스 왕권의 가장 큰 경쟁자인 잉글랜드 국왕이자 프랑스 왕국에 속한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백작이었던 헨리 2세와 결혼한 것이었다. 이 둘의 결합은 루이 7세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이라는 프랑스 왕국의 대제후령 3개가 통합되어 잉글랜드 왕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루이 6세 때부터 부단히 확장해 왔다고는 하지만 카페 왕조의 왕령지는 왕국의 절반을 차지하는 잉글랜드 왕의 영지에 비하면 극히 보잘 것 없는 크기만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루이 7세는 거대한 헨리 2세에 직접 맞설 수 없었고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헨리 2세 가문의 분열 조장을 끊임없이 꾀했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헨리 2세는 1159년 툴루즈까지 장악하는 등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이에 대해 루이 7세는 무력하게 관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루이 7세는 1154년 카스티야 왕 알폰소 7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나 콩스탕스는 딸 둘만을 출산하고 1160년 고향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에서 돌아오던 중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루이 7세는 샹파뉴 백작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티보 4세의 딸 아델과 결혼했고 1165년 드디어 왕위를 이을 아들 필리프를 얻었다.

1170년대에 이르러 헨리 2세의 궁정에서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 청년왕 헨리, 제프리, 리처드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졌다. 루이 7세는 이들을 지원함으로써 헨리 2세의 왕권 약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당장 효과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1179년 11월 1일 루이 7세는 장남 필리프 2세를 위해 축성식을 거행하고 이듬해인 1180년 9월 18일 사망했다. 이미 공동왕으로 필리프 2세가 왕권을 장악한 상태였던 만큼 그의 공식적인 왕위 즉위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2.2. 필리프 2세 치세

단독왕이 된 필리프 2세는 우선 지방분권적인 권력 파편화가 만연한 난관에 봉착한 프랑스에 다시 하나의 질서를 세워야 했다. 카페 왕실 직할지는 일드프랑스와 부르쥬에 그친 상황이었다.[2] 즉위 초기의 변덕스러운 정치 동맹, 반란과 배신, 변절로 얼룩진 소용돌이에서 필리프 2세는 동맹을 정비하고 번복했으며 교활한 실용주의적 노선을 일관하여 동맹을 맺고 끊었다.

불과 14세에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예법 교육을 담당한 플랑드르 및 베르망두아, 발루아 백작 필리프 1세를 외숙인 샹파뉴 가문의 견제책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필리프 1세는 질녀인 에노의 이사벨을 필리프 2세의 배필로 주선했는데 지참금은 플랑드르 백국의 주 수입원인 아르투아 백작령[3]으로 이사벨이 상속하기로 조인했다. 이후 필리프 1세와 클레르몽 백작 라울 1세는 성 하나를 두고 분쟁을 벌였고, 실상은 단독왕으로서 이미 친정을 하고 있었던 소년왕을 둘러싼 연장자로서의 영향력을 두고 필리프 1세가 라울 1세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필리프 2세는 필리프 1세의 단물을 다 빨아먹은 다음 이 분쟁에 개입하여 그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어 모든 방면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질투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 대한 흑색 선전을 확산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북프랑스 군벌들을 연합하여 일으킨 향후 7년간 지속된 대규모의 반란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필리프 1세는 적자가 없었고 이는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 영지 상속 문제에 관여할 빌미가 되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독실한 기독교 왕의 이미지로 왕권을 굳건하게 해 민심을 얻으려고 하나 그 방향성은 아버지와 달랐다. 유대인들을 보호한 것과 달리 필리프 2세는 유대인들을 재산을 몰수했는데 이는 앞으로 다가올 앙주 제국과의 분쟁에서 필요한 자금이 되었다. 그는 헨리 2세의 아들과도 교류하면서 그들이 아버지 헨리 2세와 싸우도록 내분을 조장했다. 젊은 왕 헨리는 반란을 도모하자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를 비롯한 수많은 동맹국의 유혹을 뿌리치며 3년 동안 마상창시합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다시 야욕의 불을 지핀 사람은 그보다 10세 아래인 15세의 필리프 2세였다.

1181년, 플랑드르와 썽쎄흐가 급습하여 파리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순간에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필리프 2세를 구출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헨리 2세가 나서서 필리프 2세의 편을 들었고 젊은 왕 헨리, 리처드, 제프리는 플랑드르 백작과 공모한 군벌들의 권역을 응징했다. 이듬해, 삼형제가 내전을 벌이자 필리프 2세는 젊은 왕 헨리와 제프리에게 뒤에서 은밀하게 용병을 지원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이 회고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전역을 놀라게 했던 젊은 왕의 진심어린 보호와 사랑'을 받던 필리프 2세는 이렇게 되갚았다.

1182년 4월 다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템즈네로 추방시켰고, 다시 7월에 다시 유대인에 대한 추방령을 선포했다. 가을, 젊은 헨리가 이름뿐인 잉글랜드 공동왕 자리를 놓고 부친에게 강하게 항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여 그 길로 당장 파리로 가 필리프 2세에게 조언을 구하고, 돌아간 즉시 이렇게 선언했다.
"부왕께서 명령하신 비굴한 위치에 있느니, 차라리 추방을 당하거나 십자군 원정을 가리다. 나의 요구 조건들이 무시된다면 이대로 자살을 하겠소!"

필리프 2세는 젊은 헨리가 제프리와 연합하여 리처드의 영지 아키텐을 침공하고,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또 뒤에서 헨리와 제프리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6월 11일, 젊은 헨리가 28세의 나이에 이질로 숨지자 반란이 중단되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제프리를 중점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수년간 지체되었던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했다. 헨리 2세는 이 문제를 질질 끌었으나 리처드는 1183년 가을에 아델과의 결혼을 선언하고, 교회의 지지를 얻어냈다. 또한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리처드와 제프리가 경쟁을 벌였고 리처드의 선언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1183년 12월 6일, 지조흐에서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만나 회담을 열었다. 청년왕 헨리의 미망인인 마르가리트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은 아델의 지참금으로 합의되었고, 헨리 2세는 아델이 리처드가 아니면 존과 결혼할 것이라고 알렸고, 필리프 2세에게 바다 건너 그의 모든 땅에 대해 전부터 결코 바라지 않았던 충성 서약을 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는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의 미망인인 마리와 재혼을 약속했으나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포르투갈 공주 테레사와 재혼했고, 테레사의 과부산에 질녀 이사벨의 지참금에 속한 영지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필리프 2세를 도발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제2대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사절단을 보내 프랑스뿐만 아니라 브르타뉴까지 침공할 것을 설득했다.

필리프 2세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지지를 일약에 확보하여 그의 계획을 가로막았고, 플랑드르와 에노를 이간질해 그들이 이전투구하도록 만들었다.

1185년 7월, 솜므에서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군대가 대치했다. 그러나 전투 직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회담을 제의했는데, 불과 19세의 필리프 2세는 그로부터 아미앵, 몽디디에흐, 후아, 슈아지 오 바끄, 뚜호뜨를 얻고, 베르망두아와 발루아를 상속분으로 차지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플랑드르 영지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185년 말,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가 반항적인 봉신들을 응징하는 도중 이로 인해 교구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부르고뉴 내전에 개입하여, 위그 3세의 반항적인 봉신들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12월, 썽쓰에서 필리프 2세가 위그 3세를 소환했으나 그가 이에 불복하자 이듬해 1월,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출군하여 부르고뉴를 기습, 위그 3세에게 벌금으로 30,000리브르를 요구했다.

1186년 초,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와 연합하여 부르고뉴를 침공해, 주요 도시까지 치고 들어가 샤띠용을 점거했다.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는 오흐비에또로 달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왕으로 막 즉위한 하인리히 6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프리드리히 1세가 아들의 개입을 금지했다. 4월, 프리드리히 1세의 중재하에 필리프 2세는 위그 3세와 화해하고, 그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고, 이제 필리프 2세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열로 눈을 돌렸다.

1186년 5월, 필리프 2세와 제프리는 헨리 2세와 리처드를 대적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8세기 역사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던 리처드의 노고를 완전히 망쳐놓고 부친 헨리 2세와의 반목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프리가 필리프 2세에게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재촉을 귀띔하고, 이 의도를 안 필리프 2세가 흔쾌히 받아들여 헨리 2세에게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제프리는 부친과 형에게 맞설 낭트 국경의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뉴버그의 윌리엄은 제프리가 앙주를 탐냈다고 기술했다.

에버라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기 리처드는 제프리와 필리프 2세의 농간에 발목이 잡힌 채, 모후 엘레오노르를 앞장세워 자신과 공동으로 아키텐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부친 헨리 2세를 묵인해야 했다.

그러나 1186년 8월 19일, 제프리는 파리에서 27세의 나이로 의문사했다.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자신이 상위 군주이므로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의 후견인임을 주장하여 양육권을 청구했고, 툴루즈에서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을 제압하는 리처드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후 그는 계획을 계속 진행하기 의해 헨리 2세의 삼남이엇던 리처드와 같은 해 겨울에 비밀 동맹을 맺었다.

한편 이시기에 파리의 인구 증가와 함께 악취가 심해지면서 포장되지 않는 길 때문이라 판단하고 도로 포장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는 우선 수도 도시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길부터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도로가 만인을 위한 공공 시설이라는 측면에서 더 이상 민간인에게 이를 위탁하지 않고 공공 사업으로 추진했으며, 공사는 전문가에게 맡겼다. 파리 시장(prévôt des marchands)이 공사의 총책임을 맡았고, 재정 문제는 왕실의 권위로 보증되었다. 출처

그 무렵, 유년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필리프 2세와 함께 자랐던 절친 르노 드 다마르탱이 필리프 2세에게 등을 돌리고 헨리 2세에게 붙었다. 1187년 3월 29일, 제프리 2세의 미망인이었던 브르타뉴 여백작 콩스탕스가 그의 아들 아르튀르(아서)를 낳았고, 4월,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아르튀르의 양육권도 청구했다. 누나 마르가리트를 헝가리 왕 벨라 3세와 결혼시키며, 헨리 2세에게 그녀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의 영유를 내놓고 누나 아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가 이 문제를 질질 끌고 양육권 청구를 거절하여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5월 말,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헨리 2세의 영토인 이쑤덩을 점거했다. 봉신 신분이기도 했던 헨리 2세와 리처드가 대군을 이끌고 샤토루에 당도, 필리프 2세에게 통첩했다.
'우리가 상속받은 이 땅을 떠나 그대의 왕국으로 철군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전쟁에서 우리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전투 혹은 철군뿐이다.'

중무장한 전군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대치하여 공격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하에, 리처드가 군사 경계선에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를 대면했다. 이때 필리프 2세의 통수에 당할대로 당해왔던 필리프 1세는 리처드에게 필리프 2세를 경계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후 전투는 리처드가 이끌던 군대 내부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무산되었다.

1187년 6월 13일, 샤토루에서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만나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 2세는 그로부터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이쑤덩과 프레티발을 차지했으며, 2년 간의 휴전으로 협정을 체결했다.회담이 끝나자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파리로 가서 함께 지냈다. 이기간 동안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부왕인 헨리 2세를 배신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헨리 2세가 리처드에게 노르망디로 소환하는 서신을 보냈을메도 응하지 않는 것으로 결실이 이루어졌다.

1187년 7월, 서유럽 전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소식이 전해졌다. 하틴 전투 패배로 인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1187년 9월 5일, 필리프 2세의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왕세자 루이를 낳았다. 가을이 되자 리처드는 헨리 1세에게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제프리 2세의 자식들에 대한 양육권 청구를 포기했다.

1187년 11월, 리처드는 보베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귀족들과 앞장서서 십자가를 짊어졌다. 아들의 결정을 전해들은 헨리 2세는 5일간 칩거하는 것으로 입장을 표시했다. 이를 알게 된 리처드는 십자군을 불참하는 대가로 부친에게 자신을 상속인으로 지명해 줄 것을 청했으나, 그는 답을 미루었다.

1187년 12월, 필리프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회담을 열었다. 둘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를 견제하는 데 대해 입장의 일치를 확인했고, 필리프 2세는 그에게서 플랜태저넷령을 침공할 시 군사적으로 협력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왕비 이사벨의 부친 에노 백작 보두앵과 교섭하여 동맹을 다졌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노르망디 국경 지대의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되었다고 증언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누나 마르가리트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를 내놓고, 리처드와 누나 아델의 결혼을 요구했다.

1188년 1월 21일,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티레 주교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고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맹세했다. 두 왕은 살라딘세를 걷기 시작했으나, 필리프 2세는 원성에 부딪히자 즉각 그만두었다.

1188년 봄, 리처드의 아키텐과 푸아티에의 봉신들이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는 그들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여 수많은 귀족들과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눈을 뽑고 가죽을 벗겼다. 그들의 친족들이 파리로 와서 필리프 2세에게 탄원하자, 그는 리처드에게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툴루즈 영지까지 밀고 들어와 께흐씨를 점유했고, 궁지에 몰린 툴루즈 백작 레몽 5세는 상위 군주인 필리프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리처드의 공격 중단을 명령할 것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나의 아들 리처드는 나의 바람과 충고로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오. 그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는 그러한 일을 한 것이오. 더블린 대주교가 이리 전하였소.'

필리프 2세는 서신을 읽고 격분하여 협정을 깨고 군사를 이끌어 샤토루를 급습했다. 그리고 헨리 2세의 영지인 베리를 점유했다.헨리 2세가 주교들을 사절단으로 보내어 필리프 2세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으나, 그는 분개하며 요지부동이었다. 필리프 2세가 뚜헨느 부근까지 침공하자, 7월 10일에 헨리 2세가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서 노르망디로 상륙했으며, 존이 합류했다. 상황을 알게 된 리처드가 필리프 2세와 싸우겠다며 당장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베리로 달려갔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병력을 남겨두고 이미 파리로 철수한 후였다.

이후 헨리 2세는 한 발 물러서서 먼저 전쟁이 아니라 외교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루앙 대주교 월터와 윌리엄 마셜을 사절단으로 보내 필리프 2세에게 베리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으나, 그는 베리를 차지하고 노르망 벡쌍 전역를 탈환하겠다고 선언했다. 블루아 백작 티보 5세,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합류했다.

1188년 8월 31일, 리처드가 부친에게 가세하기로 확약했다. 9월, 그들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10월 6일, 두 왕은 샤티용에서 회담을 열었으나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온갖 감언이설로 리처드를 구워삶아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리고 헨리 2세가 3남 리처드를 제치고 막내 존을 계승자로 지명할 것이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1188년 11월 18일, 봉물랭에서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대동하여 헨리 2세와 만나 회담을 열고,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및 리처드를 헨리 2세의 계승자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헨리 2세가 뜸을 들이자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무릎을 꿇고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하여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필리프 2세와 리처드에게 붙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대동하고 돌아다니며 둘의 동맹을 두려워하는 영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188년 12월, 두 왕은 다음해 4월 16일까지 휴전에 합의했다. 이 기간에 헨리 2세는 사절단을 보내서 리처드와의 화해를 계속해서 시도했고, 교황의 대사와 주교들이 온갖 외교 수단을 동원하여 부자간의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89년 6월,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전쟁을 일으켜, 르망에서 쉬농까지 헨리 2세를 몰아냈다. 7월 5일, 셋은 콜롱비에르에서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리처드와 아델이 결혼할 것과 그 외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헨리 2세에게 강요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앙주와 벡쌍의 일부를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헨리 2세의 요청으로 앙주 제국의 배반자 명단을 보냈다. 맨 위에는 헨리 2세가 가장 아끼는 아들 이 있었다.

이것이 헨리 2세가 급사하는 원인이 되었고, 1189년 7월 6일, 그는 적자들을 저주하며 "패배한 왕, 수치, 수치로다"라는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헨리 2세의 사망으로 이제 리처드만이 남은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 원정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둘의 사이는 비교적 원만해보였는데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의 내전을 부추기면서 리처드의 무위를 옆에서 봐왔기에 리처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허나 3차 십자군 결성을 준비하면서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또한 1190년 언제인지 불명이나 필리프 2세는 프랑크라는 국호 대신 프랑스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쯤에 영주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 집단 및 직속 슈발리에들을 육성하였다. 이들 관료들은 자치 도시의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대관이라 불르는 바이이(Bailiff), 기사 계급으로 구성된 지사로 불리는 세네샬(Sénéchal)이라 하는데, 바이이는 프랑스 북부, 세네샬은 프랑스 남부의 카페 왕령지의 수입을 관할하였으며 그 밖에도 사법권을 행사해 지방 유력자들인 프레보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1190년 2월,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하면서 나바라 왕 산초 6세의 딸 베렝겔라와의 결혼을 준비했다. 지참금은 가스코뉴,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왕국과의 외교로 합의하고,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도록 산초 6세를 설득했다. 리처드 1세가 출정을 한 다음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나바라를 방문해 그가 있는 곳으로 베렝겔라를 데려 오기로 했고 이 모든 일은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190년 3월 15일, 필리프 2세의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쌍둥이를 출산했으나 20세의 나이에 난산으로 죽었다. 3월 16일, 리처드 1세가 노넝꾸흐에서 드회까지 8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여 필리프 2세를 만났다. 회담의 목적은 불명이나 두 왕에게 비보가 전해지자마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헤어져 파리로 달려갔으나, 이사벨의 장례식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파리 주교의 주재하에 이미 끝난 후였다. 필리프 2세는 이사벨과 조상들의 영혼을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에 성직자 두 명을 두었다. 쌍둥이 아들들인 호베흐와 필리프도 곧 죽자 필리프 2세는 그들을 제프리 2세 옆에 묻은 뒤 제프리 2세의 친우였던 샹파뉴의 트루베르에게 연금을 지불했다. 이때까지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달리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세금을 전혀 걷지 않았다.

필리프 2세는 파리 방어를 목적으로 한 대규모의 성벽 축조를 명령하고, 모후 아델 드 샹파뉴와 외숙부이자 오른팔인 랭스 대주교 기욤 드 샹파뉴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부재 중에 왕국을 다스릴 대법령을 공포하여 이것으로 섭정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감시단을 세웠으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법령에 추가했다. 법령의 각 행은 필리프가 먼 거리에서도 프랑스를 관리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6월 24일, 필리프 2세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성직자들의 축복을 받았다. 필리프 2세는 그들에게 2척의 비단과 순금 십자가로 장식된 커다란 깃발 2개를 선물했다.1190년 7월 2일, 두 왕은 베즐레에서 회동했다. 프랑스 깃발은 황금색 백합들이 흩뿌려진 파란색이었고, 잉글랜드 깃발은 두 마리 금색 사자가 마주보고 서 있는 붉은색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또한 프랑스 병력은 2,000명이었고, 잉글랜드 병력은 8,000명이었으나 십자군 원정으로 얻은 수익은 50대 50으로 나누기로 조약을 맺었다.

7월 4일, 두 왕이 출정했다. 두 왕은 육로 대신에 해로를 선택하여 필리프 2세는 제노바로 향하고, 리처드 1세는 마르세이유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리옹까지 동행했고, 갈라지기 직전 리처드 1세의 요구로, 50대 이상인 세탁부를 제외한 모든 여자의 3차 십자군 참여 금지를 약속했다. 1190년 8월 1일, 필리프 2세가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도착했다. 해군이 없어서 함대를 따로 구해야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수완을 발휘하여 함대와 식량을 확보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곧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8월 7일,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해군의 도착이 늦어지자 직접 함대와 식량을 확보하고 14일에 제노바에 도착하여 필리프 2세를 방문해 앓고 있던 그를 위로했다.

15일, 리처드 1세가 제노바로부터 30마일 떨어진 포르트피노로 가서 5일 동안 머물렀다. 이 동안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갤리선 5척을 요구했고, 리처드 1세가 3척을 제안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갑자기 화를 내며, 리처드 1세가 주겠다는 모든 것을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가 표면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8월 24일 필리프 2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메시나로 출항했다. 그러나 메시나 해협에서 폭풍우를 맞닥뜨려 포도주 부대를 바다에 버려야 했다. 1190년 9월 16일에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당도했는데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시칠리아의 왕위를 두고 새로운 왕 탕그레드와 루제루 2세의 딸 쿠스탄차 1세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두고 다투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시칠리아의 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조안이었고, 탕크레드는 조안을 유폐하며 상속분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9월 23일에 리처드의 함대가 메시나에 당도했고, 몇일 후 유폐에서 풀러난 누이 조안을 필리프 2세와 만났는데 이때 필리프의 측근들 사이에서 필리프가 조안과 재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리처드 1세는 10월 1일, 조안을 멀리 떨어진 라 바냐라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2주 넘게 십자군들이 메시나에 주둔하는 것에 대해 메시나 주민들이 불안감이 생길 쯤에 10월 2일, 리처드 1세는 메시나 교회의 수도사들을 쫓아내고 병사들을 주둔시켰으며, 탕크레드에게는 사절단을 보내 여동생 조안의 상속분과 지참금 반환을 요구했다.

또한 대규모의 외국 군대와 메시나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화되자 이 때문에 10월 4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탕크레드의 사절단, 그리고 메시나의 귀족들과 회담을 열었다. 그 때 메시나인들이 리처드 1세의 동료들의 거처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잉글랜드 군대만 리처드의 지휘 하에 메시나를 점령했다. 이때 필리프 2세는 메시나 성벽에 올려진 잉글랜드 깃발을 발견하자 그걸 빼고 프랑스 깃발로 바꾸라고 요구한 후 나중에 여러 갑질을 시전하면서 둘의 관계가 파탄이 나기 시작했고, 종국에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가 아끼는 그리스 출신의 기사를 억류해 그의 눈 하나를 적출하면서 결국 관계가 파탄이 나게 되었다.

이후 메시나 귀족들이 필리프 2세가 평화 협정의 당사자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1190년 10월 6일, 필리프 2세, 리처드 1세, 탕크레드가 평화 협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두 왕이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할 것, 제프리 2세의 아들 아르튀르(아서)를 리처드의 후계자로 정하고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시킬 것이었다. 탕크레드가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리처드 1세에게 조안의 상속분 금 20,000온스와 딸의 지참금 금 20,000온스를 지불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베즐레 서약을 근거로 탕크레드로부터 받은 돈의 반을 요구했다. 리처드 1세는 조안의 몫도 챙겨줘야 한다며 그에게 3분의 1을 주었다. 이후 두 번째 서약을 맺으면서 표면적으로 화의는 했다. 또한 두 왕은 식량, 도박, 군사적 행동에 대해 규칙을 수립했다. 메시나의 인구 밀집 때문에 식량값이 치솟자, 필리프 2세는 청년왕 헨리의 아내였던 누나 마르가리트의 두 번째 남편인 헝가리 왕 벨러 3세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허나 십자군은 악천후로 인해 크리스마스가 지날 때까지 메시나에 주둔해야 했다. 1191년 2월 2일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의 기사 중 한념이었던 기윰 드 바흐와 일대일로 결투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기윰을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하자 필리프 2세가 분노를 진정시켜서 기욤 드 바흐를 십자군에서는 내치는 일은 막았다.

한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베렝겔라가 필리프 2세가 통과했던 알프스를 거쳐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리처드 1세의 명령을 기다렸다. 리처드 1세는 함대를 보낼 테니 나폴리로 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 후 리처드 1세가 여태까지 숨겨온 결혼 문제를 말하면 아델과의 파혼을 통고했다. 이에 필리프 2세는 속으로 분노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2월 말 메시나 해안에 ,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호위를 받아 베렝겔라를 데려왔으나 필리프 2세는 탕크레드에게 엘레오노르와 베렝겔라를 결코 메시나에 들이지 말라 경고하고,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를 시켜서 그에게 서신 한 통을 전달했다. 탕크레드는 필리프 2세의 경고를 따라 그들에게 브린디시에 상륙하라고 했다.

이에 리처드는 아델이 자신의 부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며 결코 결혼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의 명예를 짓밟고 나아가 필리프 2세와 카페 왕가를 향한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귀족들이 두 왕을 중재한 결과,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원하는 여성과의 결혼을 허가하는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누가봐도 필리프 2세가 열세인 상황이었다.

아델의 지참금인 지조흐와 벡쌍은 리처드 1세가 베렝겔라로부터 남성 후계자를 얻으면 그 지역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얻지 못하면 필리프 2세가 돌려받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꺄오흐와 께흐씨에서 필리프 2세의 영지인 대수도원장 관할 두 구역을 제외한 영유권을 얻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로부터 이쑤덩, 그하쎄, 오베르뉴의 영유권 그리고 파혼 배상금 10,000마르크를 받아내기로 했다. 아델은 두 왕 모두가 귀국한 후 한 달 이내에 유폐에서 풀려나기로 했다.

리처드 1세는 지금 당장 베렝겔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시대 결혼은 가문 간의 동맹이자 평화 협정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나바라 왕국과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이후 3월이 되자 필리프 2세가 먼저 아크레로 출항해 4월 20일에 도착했다.이에 아크레에 있던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들은 환영 파티를 열어주려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지휘권을 이어받아 전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공성무기 조립에 몰두하며 아크레 성벽의 약한 틈을 찾기 위해 밤마다 직접 성벽 외곽을 정찰했다.

5월 12일 리처드와 베렝겔라가 키프로스에서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리처드 1세의 지연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고, 키프로스로 사절단을 보내 당장 아크레로 올 것을 통고했다. 허나 리처드는 키프로스의 동로마 제국군과 싸우는데 물두했다.

아크레의 십자군 진지에 지독한 전염병이 돌았고, 루이 7세의 시대를 풍미한 권력자들과 필리프 2세의 가신들이 줄초상을 치렀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병으로 쓰러져 6월 1일에 죽었다. 6월 6일, 리처드 1세의 함대가 티레에 도착했다.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도시 입성을 거부하여 리처드 1세는 티레의 성벽 밖에서 야영해야 했다.

6월 7일, 리처드 1세는 아크레 항해길에 올랐는데, 신원불명의 갤리선 2척을 마주쳤다. 그들은 프랑스 왕의 배라고 주장했으나 이를 의심한 리처드 1세가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갤리선 선원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격전 끝에 리처드 1세가 승리를 거두었다. 6월 8일, 리처드 1세가 함대를 이끌고 아크레에 당도해 그날 십자군은 리처드 1세를 위한 환영 파티를 밤새도록 열었다.

6월 9일, 필리프 2세는 공성전 무기를 전선에 투입했다.이 무렵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필리프 2세에게 보급품을 요청했는데, 필리프 2세는 그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리처드가 응해줬다.6월 11일,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에게 다시 협공을 제안했으나 리처드 1세는 아크레에 오자마자 병에 걸렸고 해전을 하기에 풍랑이 유리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을 거부했다. 필리프 2세는 더 이상의 공격 지연은 없어야 한다 판단하고, 리처드 1세의 조력없이 아크레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병사들에게 봉급으로 적정량인 금화 3개를 지급하는 걸 알고 당장 금화 4개로 봉급을 올렸다. 필리프 2세의 병사들이 봉급이 낮다며 항의하자, 리처드 1세가 그들을 가로채 고용하여 필리프 2세의 군세에 제동을 걸었다. 병사들이 리처드 1세를 '남자 중의 남자로다'라고 칭송하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불충을 저지르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 때문에 전선에 투입된 프랑스 공성전 무기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튀르크인은 '그리스의 불'로 공성전 무기를 불태웠다. 이를 본 필리프 2세는 대노하여 이전까지 하지 않았던 욕설을 퍼부었다.

그 직후 필리프 2세도 병으로 쓰러졌다.이즈음 살라흐 앗 딘이 두 왕과의 회담을 거절하자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탐색전을 펼쳤다. 그 기간이 늘어지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두 왕은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십자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필리프 2세는 투석기를 쏘고, 리처드 1세는 침대를 전선으로 옮겨서 누운 채 쇠뇌를 쏘았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보다 먼저 병에서 회복하여 공성전 무기를 재조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병으로 쓰러졌다. 이후 두 왕은 병에서 회복되었으나 결국 곪을대로 곪아질 갈등이 폭발해 내분이 벌어졌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면서 얻은 전리품의 반을 요구하였고, 리처드는 그 요구를 무시했고, 결국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다른 귀족들까지 나서서 두 왕을 중재하고, 십자군 원정으로 나누는 것은 성지의 영토로 한하기로 합의했다. 허나 7월 초 다시 내분이 발생하자 리처드 1세가 아크레 성벽에 먼저 꽂히는 깃발 주인이 모든 전리품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제안하자 필리프 2세와 지휘관들은 이에 응했다. 7월 3일, 필리프 2세가 마샬로 임명한 알베릭 드 클레몽이 성벽을 오르던 중에 전사했다.

1191년 7월 12일, 두 왕이 아크레를 함락했다. 성벽에는 잉글랜드 깃발이 먼저 꽂히고, 코라도가 간발의 차로 프랑스 깃발을 꽂았다.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전리품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7월 13일 아침,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만 아크레의 모든 전리품 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2년 가까이 아크레에서 참전했던 귀족들이 분노하여 이 같은 분배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두 왕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답변했으나 차일피일 미루었다. 7월 20일,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성지를 떠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21일, 리처드 1세는 왕비 베렝겔라와 조안, 그리고 '키프로스의 처녀'와 함께 아크레 도시로 입성했다. 필리프 2세는 성전 기사단 막사에서 지냈다. 22일, 그는 신하들을 리처드 1세에게 보내어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병이었다. 당연히 십자군 내에서 반발이 있었으나 필리프 2세는 십자군의 모든 비난과 설득을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귀환을 준비하면서 왕은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로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그들은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의 상속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또한 티레, 시돈, 베이루트 지역은 코라도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병을 이유로 리처드 1세에게 자신을 베즐레 서약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리처드 1세는 무슨 이유에선지 갤리선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두 척을 필리프 2세에게 주었다.

필리프 2세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에게 전리품 반절과 그의 군 지휘권을 넘기고, 코라도에게는 아크레 땅 반절과 모든 수비대 포로들을 양도했다.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의 아들 레몽에게는 기사 100명과 병력 500명을 넘겼다. 느베흐 백작 피에흐 드 꾸흑뜨네가 필리프 2세를 따라 귀로길에 올랐다.리처드 1세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평화로운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맹세를 요구했고, 필리프 2세는 이에 순순히 응했다.

1191년 7월 30일,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아크레를 떠났다. 코라도는 왕을 티레로 데려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8월 3일, 필리프 2세가 프랑스 귀환길에 올랐다.중간에 폭풍우를 만낫지만 12월 필리프 2세는 아크레 공성전 승리를 축하 받으며 프랑스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퐁텐블로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이전에도 그래왔듯이 다시 앙주 제국을 붕괴시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남긴 아르투아를 차지했다. 1192년 1월 20일, 필리프 2세는 1191년 3월 메시나에서의 협약서를, 잉글랜드 왕이 지조흐와 벡쌍을 프랑스 왕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으로 위조하여 노르망디로 가져갔다. 노르망디의 세네샬은 이를 의심하여 영유권을 넘기지 않았는데 이는 필리프 2세가 노린 바였고, 1192년 1월,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의 루앙에 유폐된 누나 아델을 풀어줄 것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에게 재차 요구했으나 아들 리처드 1세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즉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대항할 동맹자들을 모았다. 존, 첫 왕비 에노의 이사벨의 부친이자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 보두앵, 툴루즈 백작 레몽 5세, 앙굴렘 백작 임마흐,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 등이 가세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뒤흔들었다. 아키텐에서는 조프루아 드 랑송을 중심으로 공공연한 반역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스코뉴에서는 툴루즈의 지원으로 반란이 터졌으나, 이곳의 세네샬이 리처드 1세의 왕비 베렝겔라의 오빠이자 훗날의 나바라 왕 산초 7세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주둔시킨 프랑스군을 이용해 리처드 1세가 유럽으로 귀환하지 못하게끔 공작을 부렸는데 5월 30일 리처드 1세는 전갈로 필리프 2세와 존이 공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고 9월 2일,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라믈라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10월 9일, 아크레를 떠났다. 이후 폭풍우로 인해 소식이 끊기다가 12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필리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리처드가 신성 로마 제국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필리프 2세는하인리히 6세에게 리처드를 계속 구금해달라는 부탁을 한 후 계속 앙주 제국을 붕괴시킬 계획을 진행시켰다. 1193년 1월,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라고 충동질했다. 존이 아키텐의 영지 일부와 센 강 동쪽 부근의 땅 대부분, 지조흐와 벡쌍을 내놓고 아델과 결혼한다면 그 대가로 대륙의 플랜태저넷령 전체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존은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했다.

존은 잉글랜드로 건너와 형에 대한 온갖 험악한 소문을 사실처럼 떠들고,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으니 제프리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윌리엄 마셜과 필리프 2세의 궁정에 심어둔 첩자 덕에 리처드 1세의 소식을 알게 된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아들 존의 계획을 결사적으로 막았고, 런던의 섭정위원회는 존을 지지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위 찬탈이 실패했단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당장 출군하여 지조흐 요새를 첫 목표로 삼았다. 4월 12일, 성주는 순순히 성문을 열고 필리프 2세에게 투항했는데, 역사가들은 사전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 기세를 몰아 노르망디를 관통하여 순식간에 해안지대인 디에프와 르 뜨헤뽀흐에 다다랐다.

필리프 2세와 에노•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의 군세는 노르망디의 중심지, 즉 아델이 유폐된 루앙을 포위했다. 루앙의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이 도시 방어선을 공들여 구축해 공격이 순탄치 않자, 필리프 2세는 항복을 권유했다. 레지스터 백작은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고 혼자 성 안으로 들어오면 아델을 보내주겠다고 조롱했다.

이를 본 필리프 2세는 분을 이기지 못해 포도주 부대를 때려 부수고 강에 던지며, 자신의 공성전 무기를 불태우고는 "반드시 루앙을 정복하겠다."라고 외쳤다. 즉시 전략을 변경하여, 일거에 노르망디의 전략적 가치를 자랑하는 요새들을 점령해 루앙을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한편, 뚜헨느와 베리 사이의 영지를 차지했다.

1193년 7월 9일, 망트에서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사절단이 만나 회담을 열었다. 리처드 1세는 그들을 통해 노르망디 침공을 중단하면 지금까지 얻은 영지를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추가로 다른 영지도 넘길 수 있단 조건을 제시했다. 또한 리처드 1세가 이 영지를 되찾으려면 20,000마르크를 지불하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항이 더해졌고, 필리프 2세는 정복한 영지들을 잘 통합하여 그의 세력으로 흡수했다.

8월 15일, 필리프 2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의 딸 잉에보어와 결혼식을 올리고, 지참금으로 10,000마르크를 받았다. 하지만 어더한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결혼식 첫날밤을 치른 이튿날, 왕비 대관식에서 잉에보어에게 깊은 혐오감을 보이며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덴마크 사절단에게 잉에보어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잉에보어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잉에보어와 첫 왕비 에노의 이사벨의 가계도를 위조하고, 주교들을 설득해 근친혼을 주장하여 일방적으로 혼인을 무효화했다.

1194년 2월 4일 필리프 2세의 지속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치러드 1세가 풀려나자 필리프 2세는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서신을 받아본 존을 곧바로 파리로 도망쳤고, 필리프 2세는 존으로부터 노르망디와 뚜헨느의 영지 일부를 더 뜯어내고, 노르망디 공략에 박차를 가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뇌브흑, 에브회, 보드회이를 점령했다. 마침내 루앙에서 10마일 떨어진 뽕드라흑슈로에 이르렀고, 협력의 대가로 존에게 에브회를 주었다.

1194년 3월 13일,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4월 17일,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리처드 1세는 군자금을 모으며 프랑스 출정을 선포했다. 5월 12일, 리처드 1세가 300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훗날의 나바라 왕 안초 7세가 이끄는 석궁병 부대와 합세했다.

이에 존은 필리프 2세를 배신하고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중재하에 리처드에게 용서를 빌었다.리처드 1세로부터 용서를 받은 후 에브회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회를 형에게 바쳤다.

이에 필리프 2세가 격분하여 보복으로 에브회를 탈환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리처드 1세의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즉시, 필리프 2세는 병력을 차출해 남겨두고 루앙 남쪽 베흐뇌이로 진군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다음날, 병사들이 왕이 떠나자 철수했다고만 기술했다.

5월 28일, 베흐뇌이 공성전 승리를 코 앞에 두고 노르망디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 리처드 1세가 분견대를 차출하여 포위망을 기습하고, 본대를 이끌고 가 필리프 2세군의 보급로를 끊자 이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5월 30일, 리처드 1세가 에브회에 당도하자, 수비대가 투항했다. 6월 5일, 빠씨에서 필리프 2세는 자신을 조롱했던 루앙의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을 생포했다.

리처드 1세가 노르망디의 요새들을 하나씩 탈환하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키텐 봉신들을 선동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리처드 1세가 남프랑스로 진군하던 중인 6월 27일, 나바라 왕 산초 6세가 사망하여 그의 아들 산초가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리처드 1세가 푸아티에로 넘어가려면 필리프 2세가 점거한 로슈를 거쳐야 했기에, 리처드 1세는 공성전을 벌이고 로슈를 탈환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북프랑스 공략 대신 군세를 재정비하여 동맹군 지원으로 전략을 변경, 남프랑스로 진군했다. 리처드 1세는 정보를 입수하고 벙돔므 평야에 진을 쳤다. 필리프 2세는 프레티발 부근에 진을 치고 리처드에게 내일 공격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지만 리처드가 이에 기뻐하는 답신을 보내자 그날 밤 막사를 걷고 퇴각했고, 추격까지 받아야 했다.

1195년 3월,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필리프 2세와 덴마크의 잉에보어의 혼인 무효화를 다시 무효화했으나, 필리프 2세는 이 결정을 무시했다. 덴마크 사절단이 이 문제로 교황과 회신하느라 부르고뉴를 통과하자 필리프 2세는 즉시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에게 접근했다. 외드 3세는 사절단이 부르고뉴를 지날 때 그들을 감옥에 처넣고 서신을 압수했다.

같은 해 여름 리처드 1세와 하인리히 6 세간의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필리프 2세는
사절단이 프랑스 영토를 지날 때 필리프 2세가 그들을 억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리처드 1세가 띠예흐 협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며 노르망디를 기습했다. 필리프 2세가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보드회이를 침공, 공성전을 벌여 요새들을 파괴하자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했다.

1195년 7월, 리처드 1세가 회담을 위해 필리프 2세를 방문했다. 아크레에서 헤어진 후 4년만의 대면이었다. 당시 외교상으로 적이라도 이때는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당대 관례였으나 필리프 2세는 요새 벽 밑에 땅굴을 파게 했다 당연히 이사실을 안 리처드 1세는 분노하고 회당장을 벗어나 동시에 회담장에서 나와 군사들과 함께 탈출하려는 필리프 1세를 추격했지만 잡는데 실패한다.

1195년 8월, 두 왕이 회담을 열었다. 이때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누나인 프랑스의 아델을 돌려주었다.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와 필리프 2세의 왕세자 루이의 결혼 협상이 오갔는데, 리처드 1세는 질녀의 지참금으로 지조흐, 부드몽, 노르망 벡쌍, 베흐농, 이브히, 빠씨 등의 영지와 20,000마르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필리프 2세는 오말르, 오슈, 아흑슈와 노르망디 요새 몇 채를 반환하기로 했고, 최종 합의는 11월 1일에 의결하기로 미루어졌다.

8월 20일, 필리프 2세는 누나 아델를 뽕띠유 백작 기욤 3세와 결혼시키고, 지참금으로 아흑끄와 우를 주었다. 허나 전쟁의 승기는 점차 리처드 1세에게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다시 재혼 상대를 물색했는데 후보들 중 메라니 공작 베르톨트 4세의 딸 아녜스와 결혼하다. 하지만 선대 교황과 마찬가지로 새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또한 그가 덴마크의 잉에보어와 혼인 상태로 아녜스와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필리프 2세를 압박했다.

잉글랜드와의 전쟁 또한 후반으로 갈 수록 리처드 1세는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한 맞춤형 뇌물 공세를 펼쳐 북프랑스, 플랑드르, 신성 로마 제국, 남프랑스에 걸쳐 거대한 동맹 연합을 건설하고 필리프 2세가 빼앗은 영지 대부분을 수복하였으며 이 기세에 올라타 선조 바이킹 롤로가 그랬듯 필리프 2세의 본거지인 파리 외곽까지 위협하였다. 이당시 파리의 방어벽은 1190년부터 시작한 증축 공사가 한참이었기에 파리를 방어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궁지에 몰린 필리프 2세가 음모를 총동원해 리처드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기 시작했다.

결국 필리프 2세의 부추김을 받은 남프랑스의 봉신들이 리처드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리처드 1세는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남프랑스로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자작의 농성을 제압하던 중 석궁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자 존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이렇듯 플랜태저넷 왕가를 우환에 빠뜨려 약화시킨 필리프 2세는 형보다 덜 떨어진 존이 왕이 되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것에 대해 행운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존은 어리석게도 필리프 2세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일을 벌였다.

존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네째 형인 제프리 2세의 아들이자 브르타뉴 공작이던 아서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했지만, 존에게 거액의 뇌물과 벡쌍, 에브휴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후 존은 조카인 아서를 위험한 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추방시켰던 유대인들을 다시 불려들였다.

1200년 존은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13~15세의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한다.사실 배상만 잘 해줬다면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건만 존 왕은 배상조차 생각하지 않았고, 이에 뤼지냥 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였다. 존을 비롯한 앙주 가문과 그들의 모계였던 아키텐과 노르만 가문이 프랑스 왕실의 봉신이었기에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지만 존은 불응했다. 한편 이시기 세번째 왕비였던 아녜스가 포이시 성에서 세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었다. 또한 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1150년에 설립되었지만 정식 인가가 없던 파리 대학을 인정하는 특허장을 내린다.

1203년, 아서는 자신의 조모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아 자신의 숙부와 협상하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 왕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서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존 왕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지역의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다.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는데,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들었는데, 조카 아서의 경우 어디엔가 구금을 시켰는지 소재조차 밝히지 않았다.

이에 부르타뉴와 앙주의 귀족들은 존에게 등을 돌렸다. 이를 놓치지 않은 필리프 2세는 존이 자신의 봉신으로서 의무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 및 봉건법 위반에 따른 존의 대륙령의 몰수를 선언했으며 이에 노르망디로 상륙한 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앙주, 멘, 푸아투, 투렌 등 대부분의 노르망디 공국과 아키텐 공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카페 왕령지로 삼았다. 1208년 인노첸시오 3세가 툴루즈 백작령 안의 영지주의 이단인 카타리 파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십자군 원정을 할 것을 요구했고, 필리프 2세는 귀족들이 알비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알비 십자군은 현대에 많은 분쟁거리를 제공했지만 한편으로 필리프 2세에게 있어서 프랑스 남부의 대영주 중 하나였던 툴루즈 백작령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는 카타리 파와 툴루즈 백작이 밀월 관계인 것을 그도 알고 있엇기 때문이었 이후 1213년 마침내 잉에보어를 자신의 왕비로 인정하기로 했다.

1214년 복수의 칼을 갈던 존은 당시 필리프 2세의 계략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왕실 직할지로 빼앗기게 된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가 필리프 2세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것을 알고, 그와 연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까지 끌어들였으며, 이 외에도 판 플란데런 가, 레히나르 가 등의 여러 영주 세력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 약 30,000명에 달하는 전력으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연합군에 의해 담 해전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이후 상륙한 존 왕을 아들 루이 8세가 로슈 오무안 공방전에서 격파하면서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프랑스 남부 지방을 순회 중이어서 자신의 본거지이자 수도인 파리를 비우고 있었던 필리프 2세는 존이나 오토 4세의 예상과는 달리 재빠르게 남부 친국왕파 영주 세력들을 규합하여 15,0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구성하고 굉장한 속도로 북쪽으로 진격해, 파리 북부를 제압하고 발랑시엔 인근에나 와있던 오토 4세의 연합군을 부빈 평야에서 맞닥뜨림으로써 결전을 강제했다.

이 부빈 평야에서 필리프 2세의 총지휘하에 유드 드 부르고뉴, 로베르 드 드뢰 등의 영주들이 가세한 7,000여명의 프랑스군이 오토 4세의 총지휘하에 존의 대리로 잉글랜드군을 지휘하는 윌리엄 롱제스피,페르디낭 드 플랑드르, '용기공' 앙리 레히나르, 르노 드 다마르탱 등이 참전한 신성 로마, 잉글랜드, 플랑드르 연합군 9,000명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며, 연합군은 다마르탱이 인솔하던 장창병들이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용전을 선보인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완벽한 졸전을 선보이고, 프랑스군에게 압도당하며 대패했다.

그리고 이전투를 통해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내에서 앙주 가문의 세력을 아키텐 서남쪽에 위치한 가스코뉴까지 밀어버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종결되지 않았다. 1215년 존의 무능과 그에 따른 실정 및 폭정에 질려버린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서로 협력해 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귀족들은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출정, 여기에 런던시마저 가세해 무혈로 입성하게 된었고, 귀족들과 성직자, 도시민들까지 등을 돌린 것을 알게 된 존은 반란을 진압할 병력이 없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다가는 퇴위는 물론이고 처형될 위기라는 것을 깨달아 공포에 질렸다.

이때 봉기군 내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왕을 처형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제한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면서 마그나 카르타를 작성했고, 템즈 강변의 러니미드(Runnymede) 평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귀족들에게 존 왕이 방문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을 하였으나 나중에 인노첸시오 3세의 반발에 추인을 거부하면서 내전은 더 연장되었는데 이때 남작군의 우두머리인 로버트 피츠왈터는 스스로를 신성교회군 원수라 칭하고 프랑스의 루이에게 잉글랜드의 왕이 될 것을 요구한다. 루이는 이러한 남작들의 지원하에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인 런던에 입성했고, 남작군과 런던 시민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존 왕은 도주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까지 받은 루이는 길퍼드, 파넘, 윈체스터 등 주요 잉글랜드 도시를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존 왕을 추격했다.

이때 루이의 아버지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루이가 가장 먼저 점령했어야 할 도버 성을 간과한 것에 우려를 표했다. 켄트를 비롯한 잉글랜드의 1/3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존 왕을 따르는 휴버트 디 버그가 도버 성에서 루이의 배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는 뒤늦게 도버 성을 공격했으나 3개월 간의 포위 공격에도 도버 성은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캐싱엄의 윌리엄이 이끄는 장궁병 부대에게 켄트 일대가 습격을 받게 되자 결국 10월 14일에 휴전 조약을 맺은 루이의 프랑스군은 런던으로 회군했고, 또한 루이의 프랑스군이 런던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로체스터 성은 식량난으로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1216년 10월 18일, 존 왕은 이질에 걸려 급사한다. 존이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윌리엄 마셜이 섭정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작들은 윌리엄 마셜의 회유로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끌어들인 루이를 배신했고, 루이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 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윈 첼시로 철수하다가 이후 람베스에서 평화 조약을 채결한 후 프랑스로 귀국한다. 1223년 필리프 2세가 죽었고 그 뒤를 루이 8세가 잇게 되었다.

2.3. 필리프 2세 이후

1223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8세는 이전 카페 왕들과 달리 부왕 생존시 축성식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필리프 2세 이후로 후계자의 축성식을 안 해도 될 만큼 왕위계승에 대한 우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필리프 2세의 업적으로 카페 왕조는 이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정당성을 지녀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며 공동왕 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루이 8세는 부왕 때 부각되기 시작한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라는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고자 했다. 그는 11월 국가 재정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리지 말 것을 명령함으로써 국가의 정책을 교회의 교리에 부합하게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샹파뉴 정기시를 통해 샹파뉴를 새로운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고 있던 샹파뉴 백작 티보 4세(1201~53년)는 이러한 루이 8세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를 표하기도 하였다.

1225년 루이 8세는 필리프 2세 당시에 정복된 남부 랑그독 지역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다. 이미 시몽 드 몽포르 4세의 정복 직후부터 남부 랑그독 지역에서는 종교와 결합된 정치적 갈등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즉 카타르에 대한 십자군은 곧 북부 프랑스 침략군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는 여전히 알비 십자군의 빌미였던 카타르파를 비호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결국 1225년 부르주 공의회에서 레몽 7세를 파문에 처하고 다시 한 번 십자군 원정을 천명했다. 루이 8세는 기꺼이 이 결정을 받아들여 툴루즈로 공격에 나섰다. 3개월 동안의 원정으로 툴루즈 백작령 곳곳이 점령당했고 결국 레몽 7세는 포로가 되었다.

루이 8세는 툴루즈 백작령을 왕령지에 편입시키고자 했지만 루이 8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티보 4세는 이러한 루이 8세의 시도에 반대를 표했다. 봉신으로서의 원정 의무가 끝났다는 점을 내세우며 티보 4세는 샹파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루이 8세는 급작스럽게 이질에 걸려 1226년에 사망했고, 12세 밖에 안된 아들 루이 9세가 승계하게 되었다.

루이 9세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햇기에 모후 블랑슈가 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갑작스러운 왕의 서거와 어린 왕의 즉위로 인해 정국이 불안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축성식은 가능한 한 가장 빠른 날짜인 11월 29일에 거행되었다. 하지만 1227년에서 1228년까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왕과 외국인 왕비가 주도하는 왕정은 이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더군다나 이 반란에는 숙부인 필리프 위르펠은 물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까지 개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블랑슈의 선처로 감옥에서 풀려난 플랑드르 백작 페랑과 루이 8세 이후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샹파뉴 백작 티보 4세의 도움으로 루이 9세와 블랑슈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1230~31년 동안에는 역으로 루이 9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이 반란군들을 진압해 나갔다. 아직 17살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군대를 지휘하는 루이 9세의 모습과 모후 블랑슈의 정치력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던 많은 봉건 귀족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들은 점차 루이 9세와 블랑슈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1234년 20세가 된 루이 9세는 프로방스 백작 레몽-베랑제 4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로부터 루이 9세의 권위는 별 탈 없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인정받았고 더 이상 그에 대한 봉건 귀족들의 도전이 발생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1240년대에 들어와 또 다시 루이 9세는 전장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아키텐 지역 귀족들과 툴루즈 백작, 그리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필리프 2세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서로 동맹을 맺고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1242년 ~ 1243년 사이 벌어진 이 생통주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는 결국 루이 9세에게 돌아갔다. 툴루즈 백작은 루이 9세에게 무릎을 꿇었고 헨리 3세는 루이 9세에게 5년 동안의 휴전을 요구했다. 하지만 휴전이 지난 이후에 전쟁이 재개되지는 않았고 루이 9세는 관대하게도 헨리 3세가 이제는 프랑스 왕국에 속해 있는 퐁트브로 수도원에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퐁트브로 수도원은 바로 플랜태저닛 왕조의 기원인 앙주 지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바로 여기에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의 납골당이 있었다. 이후 1년 뒤 몽세귀르(Montségur)의 산성 요새를 근거지로 카타리 파들이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자 십자군은 바스크 산악지대 출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요새를 함락시켰고, 농성하던 카타리파 신도 2백 명 이상은 화형에 처해졌고, 베지에 함락과는 다르게 개종을 한 사람들은 무사히 성을 떠날 수 있게 해주면서 알비 십자군 원정은 일단은 마무리 되었지만 이후에도 이단심문관들이 툴루즈 일대에 활동을 하면서 숨어 있는 카타리 파들을 색출해 갔다.

1258년 결국 헨리 3세는 루이 9세에게 과거 조상들의 영토들(노르망디, 앙주, 투렌, 멘, 푸아투 등)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루이 9세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1259년에 헨리 3세는 일부 남아 있는 아키텐 영지 및 가스코뉴의 영지를 두고 루이 9세에게 봉건신서를 행했다. 사실 이 당시 헨리 3세는 거듭되는 실정으로 시몽 드 몽포르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저항에 직면해 있던 상황이었고 마치 부친 존 1세가 <대헌장>을 제시 받았던 것처럼 그 또한 비슷한 내용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내용의 <옥스포드 조항(Provisions of Oxford)>을 제시 받았다. 프랑스에서 루이 9세의 왕권이 점점 확고해져 가고 있는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헨리 3세는 결정적으로 의회에 의해 왕권이 제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1258년에 루이 9세는 아라곤 왕국과의 협상을 통해 남부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이기간 동안의 루이 9세는 내치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선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기독교 군주로서의 이미지로 민심을 얻으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멱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당시 루이 9세는 당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독교적 감수성을 전파한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 사상에 깊이 감화되었다. 그는 옷과 식사에 있어서 왕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검소함과 금욕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몸소 사회적 약자들을 돌봐주는 모습을 보였다.

나병 환자와 맹인들을 왕실에서 세운 구호소에서 직접 돌봐주고 빈민들에게 세족식을 실시하는 등 루이 9세는 동시대인들에게 성 프란체스코의 태도들을 실천하는 이상적인 군주로 비춰졌다. 다만 하지만 이러한 신실한 태도는 역으로 이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랑그독 지역의 카타리 파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적 이상에 충실한 루이 9세의 행적들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뤘다.

또한 세속 군주로서의 치적 또한 상당 부분 남겼는데 주로 사법권의 개혁에 집중되었는데 루이 9세는 스스로가 제 2의 솔로몬과 같은 정의로운 재판관임을 내세웠고, 또 지방 행정관들의 문제들을 정화하는 개혁을 실시하고자 했다. 전자와 관련하여 루이 9세는 헨리 3세와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 옥스포드 조항을 둘러싼 분쟁을 중재하기도 했고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발생한 작위계승을 둘러싼 무력 분쟁을 조정하기도 했다.

이 때 분쟁 당사자들 사이의 요구들은 객관적인 제3자인 프랑스 왕의 기준에 따라 중재되고 조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분쟁들을 통해 루이 9세의 정치적 위상은 점점 높아져 갔다. 다른 한편으로 루이 9세는 필리프 2세 당시에 세워진 지방 행정관들(세네샬, 바이이)에 대한 실사를 통해 이들의 직권남용과 부정부패의 시정에 나섰다.

아울러 17명의 남작과 7명의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고등법원을 설립했는데 민사 및 형사 항소 법원으로 기능했지만 특정 사건, 특히 귀족에 관한 1심 법원으로도 기능했으며 이를 통해 귀족 세력들을 제어하려 했다. 또한 전혀 기독교적이지도 않으면서도 거의 결투자들의 실력에 의해 좌우되는 결투 재판에 대해서도 정당한 판결이 나오지 않기에 폐지하려는 노력을 했다. 동시에 무죄 추정의 원칙을 도입하는 등 성공을 거둔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받았다.

다만 알비 십자군 원정이 종결됨과 동시에 그는 또다른 십자군 원정에 직접 참전해야 했다. 루이 9세가 프랑스를 다스리던 때에 신성 로마 제국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중세 서유럽에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권과 정면으로 충돌한 때이기도 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로서 분열된 모습을 보인 독일 지역보다 단일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서유럽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일인지배체제(monarchia)를 구축했고 이는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교황과의 격렬한 충돌을 초래했다. 루이 9세는 최대한 이 둘 사이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교황들, 그 중에서도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대립에서 늘 수세에 처해 루이 9세에게 수많은 도움을 청했지만 루이 9세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신중하게 처신했다.

기어이 1243년 인노켄티우스 4세는 로마의 상황이 불안하다며 프랑스 왕국 내 리옹시로 거처를 옮기고 공의회를 소집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리옹시로 진격하려 했으나 루이 9세의 개입으로 단념하고 말았다. 이렇게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루이 9세의 모습은 그가 더 이상 조부 필리프 2세처럼 일방적으로 교황의 권위에 매달리는 세속 군주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루이 9세가 교황을 지원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로는 그가 이 당시 헨리 3세와 생통주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생통주 전쟁이 끝나고 루이 9세는 1244년 겨울부터 이질로 의심되는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몇 주 후 루이 9세는 기적같이 완쾌되었고 자신의 쾌유를 신에게 돌리면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물론 모후 블랑슈는 물론이거니와 측근들 모두 그의 결정에 반대했다. 이유는 그의 건강이 원정을 떠날 만큼 강건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군대와 재정을 장기간 준비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은 훨씬 후인 1248년에 6월에 실행되었다. 그는 모후를 섭정으로 임명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의 공격을 피해 리옹에 머물고 있던 인노켄티우스 4세를 만나 잉글랜드의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총 2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한 루이 9세는 1250년 이집트의 만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많은 봉신들이 이구동성으로 귀국하기를 권했으나 루이 9세는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루이 9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4년 가까이 예루살렘 방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본국에서 모후 블랑슈가 사망했으며 막냇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이 섭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루이 9세는 귀국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원정은 랑스 왕국에 실질적인 이득을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했고 막대한 재정만을 소비했지만 6년 간의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프랑스는 비교적 평화로웠고 루이 9세는 그 누구보다 십자군과 성지 회복에 가장 적합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전 유럽에 심어 주었다. 물론 그것은 그 개인의 자질로 끝날 것이 아니라 향후 즉위하는 모든 프랑스 왕들의 이상적 과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7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루이 9세는 지중해 세계 저 멀리에 펼쳐진 원나라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이슬람 협공에 대해 제안하는 서한들과 함께 기욤 드 뤼브룩과 같은 수많은 선교사들을 원나라 조정으로 보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이후 1264년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교황 우르바누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만프레디를 제압하기 위해 루이 9세의 막냇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을 끌어들였다. 결국 1266년 샤를은 만프레디를 죽이고 시칠리아 왕위에 올라 카를루 1세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동부 지중해에서 십자군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어 가고 있었고 이에 대한 소식을 들은 루이 9세는 다시 한 번 십자군 원정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1267년 루이 9세는 신하들 앞에서 십자군 원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과거의 전우들까지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찬성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루이 9세의 형제들, 즉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와 시칠리아 왕이 된 앙주 백작 샤를, 그리고 1259년 파리조약 이후 루이 9세와 화해를 한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 의사를 밝혔고 이에 따라 교황의 후원 아래 또 한 번의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이 십자군의 행선지는 이집트도 예루살렘도 아닌 보다 서쪽에 있는, 시칠리아의 아래에 위치한 북아프리카 도시 튀니스였다. 아마도 시칠리아 왕국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샤를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1270년 7월 제8차 십자군이 조직되어 튀니지로 향했다. 그러나 보다 잘 준비되었던 이 원정은 더 어이없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도착한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많은 기사들이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 아래 풍토병으로 쓰러져 갔다. 후계자 필리프가 심하기 앓기 시작했고 그의 동생 네베르 백작 장 트리스탕은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8월 25일 루이 9세마저도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뒤늦게 도착한 시칠리아 왕 샤를은 후계자인 필리프를 대신해 이집트 술탄 무하마드와 협상을 진행했다. 대체로 그 결과는 샤를에게만 유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다만 덕분에 십자군들은 무사히 철군할 수 있게 되었다.

국 도중 필리프 3세는 매형인 나바라왕 티발트 2세의 사망 소식과 부인 이자벨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1271년 5월 21일 파리로 돌아온 필리프 3세는 바로 다음 날 루이 9세의 장례를 치루고 8월 15일에 축성식을 거행했다.

필리프 3세가 즉위할 당시 유럽은 조용한 변화를 준비 중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1272년 시몽 드 몽포르 5세 일파를 축출하고 에드워드 1세가 새롭게 왕위에 올랐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오랜 기간의 대공위 기간이 끝나고 신흥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제위에 올랐다. 이제 각 왕국들 및 도시국가들, 제후령들 간의 뚜렷한 경계들이 형성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서유럽 정치 체제들이 발전해 가면서 십자군과 관련한 이상과 현실의 격차는 더욱 커져만 갔다. 특히 프랑스 왕들에게 루이 9세로 대표되는 십자군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시켜주는 강력한 상징 권력으로 인식되었는데, 문제는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복잡다단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필리프 3세는 당장의 내치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즉위 후 필리프 3세는 물려받은 왕령지를 더욱 더 확장해 나갔다. 전쟁은 왕국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상속자가 없는 영지를 다시 왕령지에 통합하거나 국고로 매입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대신 자신에 대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령지의 일부나 다양한 권리들을 양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르마냑 및 푸아 귀족들에게는 무력을 통한 정복을 행하기도 했다.

아울러 다양한 결혼 정책들을 통해 주요한 지지 세력들을 확보했다. 1274년에는 필리프 3세 스스로가 브라반트 공작의 딸 마리와 재혼했고 사촌동생인 아르투아 여백작 마틸드를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부르고뉴 백작과 약혼시켰다. 또한 자신의 아들 필리프는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 약혼시켰다. 특히 이 당시 나바라 왕가는 샹파뉴 백작 가문으로서 아들 필리프와 잔의 결혼으로 필리프 3세는 나바라와 샹파뉴에 이중의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1282년에는 시칠리아에서 앙주 백작 샤를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발생해 프랑스 귀족들이 모두 축출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른바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사실 새로운 지중해 지역의 패권자로 급부상하고 있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의 사주로 이루어진 대학살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는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의 딸 콘스탄차와 결혼한 후 스스로를 만프레디의 후계자로 내세우며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에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에 처했으며 1285년 샤를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3세는 아라곤 십자군을 내세우며 피레네 산맥을 지나 아라곤의 동부지역인 카탈루냐의 지로나(Girona)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역시 무더운 지중해 지역의 풍토병이 프랑스군을 엄습했고 결국 필리프 3세는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10월 5일 사망하고 말았다.

필리프 3세는 루이 9세와 마찬가지로 십자군 원정 도중 타향에서 사망하고 후계자인 필리프 4세가 뒤를 이었다. 필리프 4세가 즉위할 당시 카페 왕조는 방계 왕족이 타국의 왕이 되거나 유럽의 왕실 및 유력 귀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은 상태로 그의 친동생 중에는 발루아 백작이 되는 샤를이 있었고 이복형제로는 에브뢰 백작이 되는 루이, 에드워드 1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는 마르그리트, 합스부르크 루돌프 3세의 부인이 되는 블랑슈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필리프 4세 치세 이후 서유럽 세계 정치를 뒤흔드는 강력한 가문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위 초 먼저 한 일은 선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왕령지 확대로 이미 나바라 여왕기도 한 아내 호아나 1세가 샹파뉴의 여백작이었기에 샹파뉴 지역 또한 장악하던 상태였고, 이후 1284년 샤르트르 백작령을 매입하였다.

또한 필리프 3세는 선조 필리프 2세처럼 부르주아들을 중용한 왕으로 이들의 조력으로 보다 더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추구했으며 법학자인 기윰 드 노가레를 중용해 왕국 전역에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했으며, 행정조직조차 정비해 대회의(Grand Conseil), 고등법원(Parlement)과 재무원(Chambre des comptes)과 같은 행정기관들을 파리로 이전하면서 관료제를 확립시켰다.

다만 그의 통치 기간은 프랑스 내부의 봉신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우선 처음 격돌한 것은 아키텐 공작령으로 필리프 2세때 앙주 제국이 붕괴되었다지만 아킨텐 일부 지역은 가스코뉴와 함께 여전히 잉글랜드 국왕의 왕령지로 남은 상태였고, 잉글랜드 국왕들은 여전히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 남아 있었으며 동시에 툴루즈 백작의 주군이기도 했다.

문제는 필리프 4세는 툴루즈 백작의 후계자 부재로 툴루즈를 왕실 영역에 복속시키면서 벌어진다. 혈기왕성한 26세의 필리프 4세는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아키텐 공작이자 영국왕인 에드워드 1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정복에 혈안이 되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꺼리고 있었다. 1293년 필리프 4세는 아키텐 공작의 종주 자격으로 에드워드를 소집하고, 에드워드는 동생 에드먼드를 대리 파견한다. 필리프는 에드먼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써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아키텐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한다. 1294년에 필리프는 군대로 아키텐을 점령한 이후 전쟁을 선포하고, 로베르 2세 아르투아 백작에게 군권을 준다. 1297년에 아키텐 점령전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다.

아키텐 전쟁은 프랑스에게 높은 재정 부담을 안겨주었다. 프랑스는 전국의 쌍껑티엠 (성직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부과되는 2%의 세금), 그리고 가장 부유한 지방인 플랑드르에 의존한다. 당시 플랑드르는 기 드 당피에르 백작의 치하에 있었는데, 기 드 당피에르는 인근 에노 백국의 도시들에서 일어난 폭동을 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압했다는 것 때문에 파리에서 왕의 재판을 받아 벌금을 내고, 플랑드르 도시들에 대한 권한을 잃는다. 모욕당한 기 드 당피에르는 1297년에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3. 독일(신성 로마 제국)

3.1. 11세기

밀레니엄이 될때까지 오토 3세는 로마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헝가리 대공국의 대공 이슈트반이 로마 교회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찬성하여 헝가리하고도 우호관계를 맺는 등 다양한 활동에 매진했으나 1001년 로마 인근의 경쟁 도시 티볼리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오토 3세가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평화협상이 시도되긴 했지만 오토는 로마 바깥으로 피신해야 했고, 북쪽의 도시 치비타 카스텔라나에 머물면서 섭정으로 독일에 남겨둔 육촌 형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1002년 1월 24일 갑작스런 고열에 시달리다 서거했다.

한편 오토 3세가 죽었다는 소식에 이브레아 백작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외손이며 베렝가리오 2세의 조카 손자인 아르두이노 디브레아가 2월 15일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했다. 나중에는 밀라노 주교 아르눌프는 그를 황제라 선언하였고 롬바르디아의 귀족들 또한 그를 카이사르로 불렸다.

그의 뒤는 독일에 남아 섭정으로 독일 지역을 통치하던 육촌 형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가 오토 가문의 종주가 되었다. 오토 3세의 운구 행렬이 알프스를 넘어 바이에른에 도착했을 때 하인리히 3세는 독일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선 제국회의에서 귀족들의 표를 얻고, 또한 권위를 증명하는 보물이 필요했다. 하인리히 3세는 행렬에 속한 쾰른 대주교 헤리베르트에게 오토 3세의 보물 중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알려진 성창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귀족들에게 자신을 선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

방법을 바꾼 하인리히 2세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를 회유해 독일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왕가의 보물인 성창과 다른 징표들도 손에 넣었다. 이어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에게 통치권 보장을 약속하고 지지를 얻어냈다. 빌리기스 대주교에게 자신의 부인 쿠니군데를 독일 왕비로 인정하는 대관식을 치러달라고 부탁해 성사시켰다.

이런 식으로 독일 전역을 다니며 귀족들을 포섭한 하인리히 2세는 오토 대제의 손녀와 결혼해 적통임을 주장하는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나머지 경쟁자들도 물리쳐 마침내 독일 국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인리히 2세는 육촌 동생인 오토 3세와 달리 로마 제국 복구보다는 프랑크 왕국 복구가 현실적이라고 여겼고, 이를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했으며 선교사들이 동유럽의 슬라브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했다.

또한 귀족 세력을 억눌렸는데, 그의 전임자 오토 2세와 오토 3세 때처럼, 제국의 다양한 독일 공작들은 하인리히 2세로부터 점점 더 독립적이 되면서.지역별로 독자적인 정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했다.알프스 산맥 남쪽 이탈리아에서도 다양한 지역 영주들이 독립했다. 점점 제국의 영지들은 제국의 일부분이 아닌 각각의 공작 가문의 개인 소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후들에 대한 하인리히 2세의 정책은 황실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작들 내의 이러한 가족 구조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하인리히 2세는 다른 전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공작들에 대한 그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와의 연계에 의존했다. 하지만, 오토 1세와 오토 2세 치하와는 달리, 다양한 독일 공작들은 더 이상 하인리히 2세와 긴밀한 혈연 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프랑켄 공국과 작센 공국이 제국의 핵심 지지층을 형성한 반면, 슈바벤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은 점점 더 반항적이 되었다.

그의 전임자들과 달리, 하인리히 2세는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든 공작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것은 세속적인 귀족들과의 급격한 갈등을 야기했고, 이것은 하인리히 2세가 제국의 통치에서 성직자들이 누렸던 지위를 강화하도록 강요했다. 하인리히 2세가 통치 첫 10년 동안 그의 통치에 반기를 든 수많은 귀족 반란에서 살아남은 것은 성직자들의 지지를 통해서였다. 심지어 그의 처남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5세와 모젤 백작 프리드리히와 같은 그의 친척들도 반란을 일으켰다.그 결과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과 슈바벤 공작의 내부 권력 구조를 체계적으로 축소했다.

한편 독일왕으로 선출된 직후 그는 보헤미아의 자칭타칭 공작이었던 블라디보이에게 정식으로 작위를 내리게 되었고, 이로써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 공작이 다스리는 정식 공국으로서 제국에 편입되었는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블라디보이는 프르셰미슬 가문 소속이 아니라 계승 분쟁 중에 폴란드 왕국의 지원을 받아 보헤미아의 지배자가 된 피아스트 왕조 소속으로 추정되는 폴란드 계통의 인물로 추후 폴란드 영지와의 분쟁에서 아군으로 포섭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다.

이후 선거 당시 자신의 정적을 지원한 폴란드 영지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아르두이노의 반대 세력의 요청을 받았지만 이때까지 폴란드 영지를 통치하던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의 산발적 분쟁에 집중해야 했기에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쓰지 못했다. 1003년 볼레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 모라바, 슬로바키아를 복속시키면서 하인리히 2세는 동쪽의 일에 더 집중해야 했다. 그는 당시 현재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남동쪽과 오늘날의 브란덴부르크 북쪽에 거주했던 슬라브계 루티젠족과 군사동맹을 맺어 볼레스와프 1세와 전쟁을 이어나갔고, 이후 볼레스와프 1세를 패배시키자 곧 이탈리아에 간섭,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침공하였다.

아르두이노는 하인리히 2세가 보낸 독일 군대를 패퇴시켰고, 하인리히 2세의 명을 받고 온 케른텐의 오토 1세는 소극적으로 전투를 지휘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직접 출병했고, 아르두이노는 아디제 계곡에서 하인리히의 군사를 가로막았지만 하인리히는 바르수가나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하인리히 2세의 출현에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고, 아르두이노는 이브레아로 퇴각해야 했다.

1004년 초, 독일 왕 하인리히 2세는 아르두이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자신이 정당한 이탈리아의 왕이라 주장했다. 1004년 3월 하인리히 2세는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 북부로 와 트렌토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과 그 후계자인 독일 왕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귀족들의 반발과 불만은 심했고, 하인리히 2세는 아르두이노를 굴복시키기 위해 이탈리아의 귀족들을 체포, 처단하였다. 그러나 아르두이노는 이탈리아의 지형을 이용해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계속 전쟁을 벌였다.

치열한 싸움으로 독일의 군대는 이탈리아를 황폐화 시키고 베로나를 점령, 하인리히 2세는 일단 1004년 5월 15일 파비아에서 밀라노 대주교 아르눌프 2세에게 이탈리아의 왕관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교황 요한 18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인정받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독일 왕국의 통치를 거부한 파비아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하인리히 2세에게 즉시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1004년 9월 아르두이노는 하인리히 2세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가 계속 저항하자 하인리히는 결국 아르두이노를 물리치르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폴란드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로 돌아온 이후 볼레스와프 1세의 플란드 영지의 이탈을 막기 위해 분주했으며 1005년까지 이어졌고, 하인리히 2세의 군대가 포츠난까지 진입하면서 결국 하인리히 2세에게 굴복하고 다시는 독일 왕국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포츠난 조약을 채결했다.

하지만 1007년 블레스와프는 다시 조약을 철회하고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블레스와프의 폴란드 군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후령까지 진군했으며 바우첸까지 손에 넣었다.1010년이 돼서야 하인리히 2세는 반격을 시작했으나 1012년 새로이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8세가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로 인한 위기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탈리아로 떠나야 계획이 생겼고, 볼레스와프 또한 키예프 루스와의 분쟁이 생기면서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면서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하인리히 2세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할 때 북이탈리아 일대는 여전히 아르두이노가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에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내 아르두이노파 제후국들을 토벌, 복종 서약을 받아내고 독일로 되돌아갔다. 그해 말 그는 군사 충돌을 피하고 하인리히 2세에게 조건부 항복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 하인리히 2세는 1014년 2월 알프스를 넘어 2월 14일 로마 가서 대관식을 치뤗는데 이에 대해 동로마 제국 바실리우스 2세의.반발을 불려왔다. 그러나 2월 21일과 22일 로마에서는 아르두이노 지지 귀족 및 반 독일 세력이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고, 하인리히는 그해 4월부터 5월 한달 간 로마에 체류하였다.

1015년 아르두이노가 프루투아리아의 수도원에서 사망하면서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내에서 온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가 다시 평화조약을 깨면서 하인리히 2세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아들인 미에슈코와 함께 독일 동부를 유린했지만 보헤미아 공작령을 이끌던 올드르지흐의 분투 등으로 인해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결국 폴란드가 우세한 상태에서 바우첸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이 한참일 때 하인리히 2세는 서쪽의 부르군트 왕국으로 눈을 돌렸다. 하인리히 2세의 모친 지젤은 부르군트 왕 루돌프 3세의 동생이엇는데 그에게 딸 세 명이 있었고, 전부 결혼은 해 자식을 남겼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테였기에 하인리히 2세는 외숙에게 자신의 계승권을 인정해달라는 주장했다.

이미 부르군트 왕국의 국력으로 독일 왕국을 이기기 힘든 상태였기에 루돌프 3세는 조카의 계승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사루 조카 하인리히 2세, 혹은 그의 후계자에게 부르군트의 왕위를 넘기겠다는 조약을 채결하고 우선적으로 바젤을 양도했다.

1020년 동로마 제국과도 전쟁을 벌였는데 상술한 하인리히 2세의 황제 즉위에 바실리우스 2세가 반발한 것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바리의 롬바르디아계 귀족인 멜루스가 노르만 용병들을 고용해 동로마 제국에게 반란을 일으키다가 반란이 진압당하자 교황령으로 망명했는데 이후 하인리히 2세로부터 아폴리아 공작을 받지만 몇일만에 죽었고, 이에 하인리히 2세는 마인츠와 뷔르츠부르크의 주교들과 회의 끝에 이탈리아 내륙으로 다시 확장하는 동로마 제국을 저지하기로 했다.

1022년 하인리히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부 이탈리아로 향했다.그는 카푸아 공국을 정복할 목적으로 쾰른 대주교 필그림에게 티레니아 해를 따라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전진시킬 것을 명했다. 이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포포의 지휘 아래 더 작은 세 번째 군대는 아펜니노 산맥을 통과하여 하인리히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트로이아 요새를 포위했다. 필그림 총대주교는 카푸아의 판둘프 4세를 생포하고 카푸아와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냈지만, 하인리히 2세의 세 군대는 트로이아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동로마 제국군은 장기전을 강용햇고, 하인리히 2세는 역병으로 인해 군대에 큰 손실을 입은 채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하인리히 2세는 카푸아 공작을 처형할 뻔했지만 필그림의 간청으로 살려두는 대신에 하인리히 2세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서 독일로 보내고 판둘프 5세를 카푸아의 공작로 임명했다.이 원정은 결국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24년 부활절 기간에 로마에 있었던 하인리히 2세는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밤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몸져누웠다.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북쪽의 괴팅엔에 마련된 왕궁에서후사도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에 오토 왕가가 단정되자 독일 내의 제후들을 다시 독일 왕을 선출해야 했다.

오토 가문의 여계쪽 친척들이 있긴 했지만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는 귀족회의에 어느 누구도 후보로 나서지 않았다. 오토 왕조와 대립 노선을 걷던 콘라트 2세가 귀족 세력을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경쟁자는 오히려 같은 살리 가문에서 나왔다. 이름 또한 동일한 사촌 동생 콘라트였다.

그러나 어린 콘라트는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국왕으로 선출된다 하더라도 후사가 없으면 다시 한 번 권력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에 의장을 맡은 마인츠 대주교 아리보를 비롯해 대부분의 귀족은 이미 아들을 두었으며 성숙한 인품을 지닌 콘라트 2세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결국 서른넷의 젊은 국왕이 선출되었다.

국왕이 되긴 했지만 선거에서 패배한 사촌 동생뿐만 아니라 오토 왕조의 종말을 안타까워하는 각지 귀족들의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지어 1025년 의붓아들인 슈바벤 공작인 에른스트 2세가 반기를 들었고, 폴란드에서 볼레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뤘다.

콘라트 2세는 정치계와 종교계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이때 볼레스와프 1세가 죽고 미에슈코 2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추방시키자 둘 중 한 명이었던 오토의 독일 망명을 받아들였다. 1025년 6월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가 하인리히 2세 죽음 후 북이탈리아 귀족들 사이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정치적 혼란이 생기자 이를 종식시키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콘라트 2세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1026년 2월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인 부르노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마인츠 대주교 아라보와 쾰른 대주교 필그림과 함께 군대를 몰고 간 콘라트 2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의붓아들을 굴복시킨 후 강제로 원정에 참여시켰고, 계속 이탈리아로 진군해 3월에 밀라노에 들어온 후 이탈리아 국왕 선출 회의에서도 아리보 대주교를 의장으로 앉혔고 계획대로 왕관을 얻어냈다. 또한 1028년에는 장남 하인리히 3세를 독일의 공동국왕으로 앉혀서 계승 체계를 확고히 했다.

두 번의 국왕 선출로 빚을 진 콘라트 2세는 아리보 대주교에게 보답 차원에서 마인츠 인근의 슈파이어에 당시로서는 유럽 최대 수준의 대성당 건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리보 대주교가 국왕 부부의 결혼이 가문 계승법에 위반된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부인 기젤라는 왕비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콘라트 2세는 아리보 대신에 쾰른 대주교 필그림을 왕실의 종교 수장으로 내세웠고, 가문 계승법을 인정받아 왕비 즉위식도 순조롭게 치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오토 왕조에 이어 살리 왕조 때도 종교계 인물들이 교황의 지시보다는 국왕의 경제적 지원에 허리를 굽혔다. 이로써 훗날 ‘카노사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정치와 종교 간 서임권 투쟁의 불씨가 커졌다.

한편 슈바벤 공작령 내의 반란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카린시아 공작 콘라트와 알트도프 백작 벨프 2세가 슈바벤 지역의 반란을 주도했다. 섭정으로 임명한 부르노마저 반란군에게 패배하자 1026년 9월, 콘라트는 에른스트를 독일로 돌려보내 반란을 종식시키려했으나 에른스트는 다시 반란군에 가담했다. 반란군들은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독일 국왕 겸 이탈리아 국왕에 오른 콘라트 2세는 1027년 3월 26일 교황 요한 19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대관식은 7일 동안 계속되었고, 주변국의 군주들 직접 참여하거나 사절을 보냄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관할하에 놓인 지역은 더욱 늘어났다. 대관식을 마친 콘라트는 서둘러 슈바벤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법정을 열고 반란군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에른스트는 신하들의 수와 충절을 믿고 평화 제의를 거절하고 슈바벤의 백작들에게 반란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백작들은 어니스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황제에게 반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했고, 백작들의 지원을 받게 될 수 없자 1027년 9월 9일 반란의 수괴들이 콘래트에게 항복하여 반란을 종식시켰다. 콘래트는 에른스트의 공작위를 박탈 작센의 기비첸슈타인 성에 감금했다. 했지만 이후 황후 기셀라의 탄원에 그를 풀어주었지만 이름뿐인 공작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하인리히 2세가 먼저 죽자 부르고뉴 국왕 루돌프 3세는 자신의 왕국이 독일 왕국에 병합되는 사태를 피한 것에 대해 안도하게 되었고, 자신의 외손자들 중 한명을 후계자로 내정하려 했다. 하지만 콘라트 2세는 자신이 모계쪽으로 하인리히 2세의 인척이기에 부르고뉴에 대한 계승권 또한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돌프는 이를 반박한데다가 루돌프와 가족관계가 두터웠던 블루아 백작 오도 2세도 승계를 주장했다. 콘라트 2세는 1027년 8월 바젤 근처에서 하인리히 2세의 황후인 룩셈부르크의 쿠니군드의 중재하에.루돌프 3세를 만나 분쟁을 해결했다. 콘라드 2세가 헨리 2세와 같은 조건으로 루돌프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대가로 루돌프는 그의 왕국에 대한 독립된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28년 보헤미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폴란드에 상실한 올디치는 상실된 영토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콘라트 2세 또한 폴란드를 다시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있길 원한데다가 슈바벤 반란에 개입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기에 이를 좌시할 수 없었기에 동방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1027년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국왕인 크누트에게 슐레스비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하는 등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했기에 콘라드 2세는 보헤미아 공국을 지원하면서 폴란드를 공격했다.

1029년 보헤미아 공국이 폴란드군을 동부 땅에서 몰아냈던 것에 비해 독일군은 바우첸을 공격했으나 루티치 부족의 약속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원정은 실패했고,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헝가리의 위협을 받고 콘라트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에슈코 2세는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다시 한번 작센을 침공했다.그러는 동안, 그의 남쪽 동맹은 바이에른을 공격했고 일시적으로 비엔나를 점령했다.

이에 콘라트 2세는 미에슈코 2세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조직하여 폴란드 왕에 대항하는 또 다른 원정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1031년 보헤미아 공국이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이스트반 1세와 합의를 이룬 콘라트 2세의 계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이에 올디치는 더 이상 콘라트 2세의 동방 원정에 협력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헝가리와의 동맹은 폴란드에게 압박이 되었고, 무엇보다 각각 키예프 루스에 망명 중이었던 이복동생 베즈프림이 폴란드오 돌아와 추종자들을 규합해 반란까지 일으키자 미에슈코 2세는 동생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하다가 거부당하자 보헤미아에 명명을 요청하다가 그에게 앙금이 있던 오디치 공작에게 투옥되었다. 1032년 베즈프림이 추종자들에게 살해되면서 폴란드의 왕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갔으며 그 결과 폴란드는 공국으로 격하되었고, 영토 또한 분할되면서 다시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한편 9월에 루돌프 3세가 죽으면서 바젤에서의 조약대로 부르고뉴 왕국을 이어받은 아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해 오늘날의 스위스 서부와 프랑스 동남부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그는 오토 대제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획득했다. 부르고뉴는 완전한 제국 통치하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많은 자치권을 허용받았다. 콘라트는 즉위식 이후 아를 왕국의 내정에 않았지만 황제의 영향력과 존엄성을 제국의 이익으로 증대시켰다. 부르고뉴가 확보되면서 콘라드는 서부 알프스의 이탈리아 진출입로를 통제했고 외세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콘라트 2세는 원칙에 의거한 통치 체계를 구축했다. 독일 중부의 작센 지역에서 관습법을 성문화시켜 분란을 없앤 것과 더불어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에 위치한 자치도시들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1036년 즈음,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는 지역 귀족들과 연합해 자치도시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분명한 원칙을 고수했던 콘라트 2세는 자치도시의 시민과 하급 기사들로 이루어진 발바소레 계층의 권리를 옹호했다. 하급 기사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의 내란 진압과 동유럽 원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리베르토와 귀족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까지 내려가 아리베르토를 체포한 후 ‘하급 기사들도 영지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의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확보했다.

1038년에야 돌아와 아들 헨리를 아를 왕국의 미래 통치자로 공표했으며 이후 살레르노의 가이마르 4세가 1024년 감옥에서 석방한 카푸아 공작 판돌로 4세와 카푸아에 대한 분쟁에서 콘라드에게 재판할 것을 요청하자 콘라트 2세는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미하일 4세 역시 같은 요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콘라드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와 아베사 지방으로 갔다. 그는 독일 출신의 리차르를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했고, 판두프에게 몬테 카시노에서 훔친 수도원 재산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돌프는 아내와 아들을 보내 평화를 요청하면서 금 300파운드(140㎏)와 자녀 2명을 인질로 내세웠다. 콘라트는 판두프의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판두프가 자신의 외딴 성인 산타가타 데 고티에 숨고 인질들 또한 탈출했다. 콘라드는 카푸아를 포위하고 정복하여 가이마르에게 카푸아 공작위를 수여하였다. 그는 또한 아베사를 노르만 모험가 레이놀프 드렝고트 휘하의 살레르노 군으로 인정했다.

1038년 독일로 되돌아오는 중 전염병을 만나 많은 병사가 죽는 중에도 콘라트 2세는 무사했지만 이듬해 병을 얻어 오늘날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지역에서 서거했다. 유해는 아직 건설 중이던 독일 슈파이어 대성당으로 이관되었다. 왕위는 아들 하인리히 3세가 이어받았다.

하인리히 3세는 즉위 첫해에 전국을 순방하며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반대파를 설득했다. 서부의 고지 로트링엔과 그 위의 저지 로트링엔을 순방한 후 작센과 튀링엔을 거쳐 남부의 바이에른과 슈바벤을 지나 독일 땅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경로를 완주했다.

이듬해, 그는 제국의 위협이 되는 해외 세력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 우선 동쪽의 보헤미아를 공격했지만 매복에 당하는 바람에 승리를 놓쳤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 군대를 재정비해 더 동쪽의 헝가리로 원정을 떠났고 이번에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후 이어진 몇 년간의 전투에서 그는 연달아 이겼다. 이로써 그는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를 복속시키고 독일의 경계선을 다뉴브강 너머로까지 확장시켰다. 이 경계선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될 때까지 1천 년간 유지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전쟁으로 포획한 수많은 포로에게 가혹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의 뜻에 따라 평화와 휴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을 전국으로 하달해 포로들을 대가 없이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1043년 10월에 시행된 이 조치를 기려서 ‘대사면의 날’이라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경건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같은 해 11월, 하인리히 3세는 아키텐 공작 기욤 5세의 딸 아녜스를 만나 혼인했다. 이 결혼 덕분에 그는 프랑스 동부 아를 왕국과 프랑스 서부 아키텐 공작령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아들 하인리히 4세도 얻었다. 이후 그는 동부의 헝가리, 서부의 로트링엔, 남부의 이탈리아 등 각 변경지를 다니며 내란을 진압했다.

1046년, 하인리히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를 위해 로마로 향했다. 당시 로마에는 세 명의 교황이 있었다. 원래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9세는 성직자를 그만둘 계획이어서 교황직을 그레고리오 3세에게 넘겼고, 이에 반대한 실베스테르 3세가 진정한 교황을 자처했다. 교황청의 분열을 목격한 그는 로마 출신이 아닌 사람을 추대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민중에게 인기를 얻고 있던 밤베르크 주교 주이트거를 교황으로 지명해 클레멘스 2세로 탈바꿈시켰다. 클레멘스 2세는 즉위 다음 날인 1046년 성탄설에 하인리히 3세를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로마의 문제는 해결된 듯했으나 이듬해 10월 클레멘스 2세가 서거하는 바람에 새로운 교황이 필요했다. 하인리히 3세는 알자스 주교 브룬을 교황 레오 9세로 지목했으나, 그는 교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황제가 임명한 각 지역의 대주교보다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해서 전쟁을 벌이다 포로로 잡혔는데, 그는 풀려난 이듬해에 병을 얻어 서거했다.

이후 선출된 빅토리우스 9세는 하인리히 3세를 보필하며 안정된 노선을 걸었다. 그 덕분에 독일 각지와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황제의 편을 들어 교권을 안정시키고 귀족들의 참여를 독려해주었다.

하인리히 3세는 국내 각지와 변경지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집권 내내 기나긴 여행을 반복해야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독일 중부의 고슬라에 왕궁을 지었으나 항상 머문 것은 아니었다. 1056년에도 그는 동북쪽의 슬라브족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병을 얻어 10월 5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을 하인리히 4세가 여섯 살 남짓에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하인리히 4세는 어머니 아녜스 황후가 섭정을 맡았다. 어린 시절에 그는 쾰른 대주교 안노 2세에게 교육을 받았다.

하인리히 4세의 인생은 각지의 반란과 종교계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주된 원인은 어머니의 판단력 부족에서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바이에른, 슈바벤, 케른텐 등 왕권 기반을 이루던 지역의 권력을 귀족들에게 나누어준 것이 화근이었다. 자치권을 얻은 귀족들은 어린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종교적으로는 아버지 때부터 조언자 역할을 해온 교황 빅토르 2세가 1057년 선종한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실수가 계속되었다. 로마 교황령측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제하고 선출 절차를 개정했다. 아녜스 황후는 뒤늦게 개입을 시작했지만 기존 황제들이 지원해온 개혁파가 아닌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개혁파들이 선출한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아닌, 반대편의 대립교황 호노리우스 2세를 지지한 것이다. 이마저도 적극적이지 않아 개혁파 교황의 우세가 계속되었다.

우왕좌왕하던 황후의 행보는 마침내 반란을 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062년 쾰른 대주교 안노 2세가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하고 황후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아녜스 황후는 섭정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권력을 차지한 안노 2세는 개혁파 교황을 옹호했다. 이로써 로마와 독일 간의 알력이 해소된 듯했으나, 뒤이어 섭정을 시작한 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사제와 주교 임명 과정에서 부패를 저지르자 다시금 종교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1065년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혼란스러운 권력 쟁탈전에 휘둘리느라 그는 지식과 성품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즉흥적으로 내렸다가 갑자기 번복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1069년에는 베르타 왕비와 이혼을 발표했다가 귀족과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다시 취소하기도 했다. 귀족들에게 나누어준 영지에 왕궁을 짓고 그 소유권을 관리들에게 넘겼다가 소요가 발생하는 바람에 다시 철회하는 등 내분을 자초했다.

1073년 밀라노 대주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알력은 계속되었다. 성직자들의 부패에 반대하는 개혁파 주교들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허락을 받아 대주교를 새로 옹립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기를 들어 다른 대주교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시기 라인 강 일대에 코뮌 운동이 시작되었다.

1075년 교황은 “왕이라 해도 평신도에 불과하므로 대주교와 수도원장 등 로마 가톨릭의 주요 직책을 직접 임명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라며 ‘서임권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 순순히 처분을 받아들였던 하인리히 4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밀라노 대주교 임명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가 점잖게 경고하자 1076년 1월 1일 교황을 폐위시키기에 이르렀다.

화가 난 그레고리우스는 오히려 하인리히의 편에 선 주교들을 파문했고, 국왕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 서약까지 무효화했다. 주종관계에서 자유로워진 지역 귀족들은 새로운 국왕 선출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인리히 4세는 이듬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논쟁을 결론 내기로 합의해놓고 곧바로 이탈리아로 비밀 원정을 떠났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 등극을 지원했던 투스카니 여후작 마틸데는 전쟁이 닥칠 것이라 생각하고 교황을 카노사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오히려 사죄를 청했다. 그는 추운 겨울날 성문 앞에서 맨발로 3일을 기다린 끝에 허락을 받아 교황을 만났고, 땅바닥에 엎드려 십자가 자세를 취했다. 이것이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시간을 끈 것은 고압적인 태도로 괴롭히기 위해서였다기보다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는 것과 결별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이득을 가져다줄지 판단이 늦었던 이유로 보인다. 이때부터 주교와 수도원장 서임권은 국왕에게서 교황으로 옮겨졌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관계로 굳어졌다.

그 덕분에 하인리히 4세를 따르던 주교들에 대한 파문 조치는 철회되었지만, 귀족들은 약속을 깨고 몰래 교황과 접촉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 결국 슈바벤 공작 루돌프가 1077년 대립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3년 동안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는 독일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계속했다. 1080년 그레고리우스는 루돌프의 손을 들어주고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권의 강화를 우려한 귀족들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하고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돌프가 사망하자, 기세가 높아진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직접 쳐들어갔다. 1084년까지 버티던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도피했고, 클레멘스가 단독 교황이 되었다. 그 덕분에 하인리히 4세는 3월 31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1087년 부인 베르타 황후가 서거하자, 그는 1089년 키에프 공국의 공주 유프락시아와 재혼했다. 유프락시아는 프락세디스 또는 아델하이트로도 불린다.

한편으로 정신을 바로 잡았는지 반란으로 황폐화된 제국을 재건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여 하급 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카노사 성의 주인 마틸데 여후작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1089년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 2세를 통해 바이에른 공작 벨프 5세와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중에는 1087년 독일 공동 국왕으로 인정받은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 2세도 있었다.

콘라트 2세는 1093년 이탈리아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기반으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인리히 4세는 수세에 몰렸지만 벨프 5세가 마틸데와 결별하고 자신을 찾아온 덕분에 1097년 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듬해, 콘라트 2세를 대신해 동생 하인리히가 독일 공동 국왕으로 새로이 선출되었다. 1099년 우르바노 2세가 선종하고 새로 파스칼 2세가 선출되었는데, 그 역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으로 다투기 시작했다.

3.2. 12세기

이러한 다툼이 일년 넘게 진행되자 1102년 파스칼 2세 또한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선고한다. 1104년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의 퇴위를 요구하며 귀족들과 연합해 반기를 든 것이다. 체포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1105년의 마지막 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독일 국왕, 이탈리아 국왕, 아를 국왕 등 네 개의 직위를 모두 아들에게 넘겼다. 물론 변덕 많은 인물이 이대로 물러설 리 없었다. 이듬해 3월, 로트링겐 귀족들을 포섭해 군사를 일으킨 하인리히 4세는 전투를 계속하며 승기를 잡았다.

게다가 민중은 배신한 두 아들보다는 왕권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하는 하인리히 4세에게 감정적 지지를 보냈다. 여기에 하인리히 4세는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또한 양심에 따라 개종이 가능하다고 선포함으로써 각 지역이 독자적 문화를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런 만큼 하인리히 4세의 인기는 높아졌다. 하지만 그는 7월 말 갑작스레 질병을 얻었다. 오늘날 벨기에 리에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9일 동안 병상에 누웠다가 그는 결국 1106년 8월 7일 쉰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자신의 변덕과 상황의 격변에 시달렸던 하인리히 4세는 죽음 후에도 온전히 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리에주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나 후일 슈파이어로 유해가 옮겨졌다.[4] 뒤를 이어 하인리히 5세가 즉위했다.

독일의 단독왕으로 즉위한 이후 하인리히 5세는 동쪽으로 원정을 떠나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데 노력했다. 1107년과 1108년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어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의 즉위를 도왔지만 폴란드 국왕 볼라스와프 3세의 침략으로 인해 동유럽에서 철수해야 했다. 1110년 다시 보헤미아에 개입해 블라디슬라우스 1세의 집권을 이뤄냈다.

로마 가톨릭과의 서임권 논쟁도 계속되었다.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성직자 임명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오히려 교황은 “서임권을 포기한다면 독일 내 주교들에게 왕에게 받은 토지와 재산을 돌려주도록 명령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하인리히 5세는 협상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전부 빼앗기게 생긴 독일 성직자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하는 수 없이 이탈리아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교황과 16명의 추기경을 전원 체포했다. 그는 생포한 교황을 데리고 독일로 돌아왔고, 결국 교황은 서임권을 넘겨준 뒤 1111년 4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도 거행해주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그 다음 해에 독일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작센 공작 로타르 3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원인은 미니스테리알렌 계층에 대해 호의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살리 왕조 최초의 국왕 콘라트 2세 때부터 각지의 능력자들을 선출해 국왕의 가신으로 임용시켜 관료와 기사 역할을 맡겼는데, 이들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귀족들의 불만이 높아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진압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에 가담하는 귀족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113년의 바른슈타트 전투에서도 하인리히 5세는 승리했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반란을 도모했다.

1114년 하인리히 5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제국의 통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쾰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5세는 라인 강변에 진지를 구축해 쾰른으로 유입되는 물자의 이동을 막았다. 그러나 저항은 강렬했고 무더위가 계속되면서 병력 손실이 늘어났다. 이에 일단 후퇴했다가 다시 공격을 감행하는 등 공방전이 이어졌고, 1115년 로타르 3세까지 끼어든 벨페스홀츠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그는 결국 쾰른을 포기해야 했다.

같은 해 로마 공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하인리히 5세의 파문을 결정했다. 독일 내에서도 대다수 주교가 교황의 결정을 옹호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강행했고, 2년에 걸친 전투로도 성공적인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1118년 새 교황 젤라시오 2세가 선출되자, 하인리히 5세는 그레고리우스 8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원래 그레고리우스는 전 교황 파스칼 2세를 대신해 협상 사절로 나섰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에게 포섭되었고 결국 파문당했다. 갈 곳을 잃은 그레고리우스는 대립교황 역할을 수락했으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싸우는 도중 독일로부터 급한 전갈을 받았다. 귀족들이 자신을 폐위하려고 회의를 소집했다는 내용이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하인리히 5세는 양쪽의 요구에 치여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결국 그는 1122년 9월 보름스 협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황제, 귀족들이 모두 참여한 보름스 협약은 서임권 논쟁을 명확하게 종식시키는 내용을 담았다. 주교, 대주교, 수도원장 등 성직자는 종교적으로 평신도인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 직접 임명한다. 다만, 후보가 여럿으로 갈리면 황제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임명된 성직자는 황제에게도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으로서 영지와 권력을 부여받지만 동시에 교황과 대주교로부터 종교적 권능과 교구를 인정받는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황제의 권한이 축소되는 셈이었다.

보름스 협약 이후에도 로타르 3세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하인리히 5세의 거듭된 패배로 국내 정치는 혼란에 빠졌다. 때마침 하인리히 5세의 처남이자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윌리엄이 이북형제들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도중 배가 나파당해 익사하면서 부인 마틸다가 상속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에서 밀리는 바람에 1124년 프랑스의 루이 6세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했다.

육체적인 피로와 심리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하인리히 5세는 1126년 5월 23일 위트레흐트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비어버린 옥좌는 하인리히 5세의 외조카들인 호엔슈타우펜의 슈바벤공 프리드리히와 그 동생 콘라트, 주플린부르크의 로타르 3세가 치열하게 경합을 한 후에 1127년 로타르 3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의 콘라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뉘른베르크에서 추종자들에게 대립왕으로 즉위해 프랑켄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1128년 6월 몬차에서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1130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투스 2세등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어 대립하였을 때 로타르는 인노첸시오의 편을 들어주었고 1132년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아나클레투스와 그의 동맹인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싸웠다. 로타르는 이듬해 6월 인노첸시오로부터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받았다.

그러나 콘라트가 독일로 돌아와 형 프리드리히와 함깨 로타르 3세에게 계속 반기를 부추기자 독일로 돌아온 로타르는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와 콘라트 형제와 다시 다툼을 벌였는데 곧 진압하고 1135년 두 형제와 모두 협정을 맺었고 제위를 안정시켰다. 이듬해에는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1137년까지 로타르의 독일군대는 루지에로의 시칠리아군을 대부분의 남부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협정을 맺었다.

로타르는 그해 겨울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알프스산맥을 넘다가 죽었다.이후 1138년 3월 7일 콘라트는 로타르의 후계자로 선출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들어섰다. 주로 남부 독일의 제후들은 그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로타르 3세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오만공은 바이에른과 작센에서 콘라트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약 5년간의 내전을 치르고 1142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벨프가문과 화해했다.

1142년 콘라트는 보헤미아 원정을 성공시키고 매부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의 군주에 임명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이 콘라트의 유일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146년 콘라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제2차 십자군 제창에 호응하여 십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 하인리히 베렝가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확실하게 한 뒤 팔레스타인으로 출발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7세보다 먼저 11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 소아시아에 도착했지만 그의 독일 군대는 셀주크 제국의 군대를 만나 패배하고 나중에 프랑스 군대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콘라트는 곧 병이 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간호를 받았다. 그는 성지에서 몇 차례 성과 없는 원정을 했고 마누엘 1세와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를 공격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루지에로가 프랑스의 루이 7세 및 바이에른의 벨프 가문와 연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콘라트는 서둘러 독일로 돌아갔다.

1150년 아들 하인리히가 죽고 벨프가문과 전투 중에 죽었고 1152년 벨프 가문과 휴전을 맺었다. 콘라트는 로마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황제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식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되지 못하고 로마왕의 칭호만 받았다. 1152년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조카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지명하고 죽었고, 프리드리히 3세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로 독일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목표는 먼 조상인 샤를마뉴, 즉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와 오토 왕조의 오토 대제를 본받아 호엔슈타우펜 왕가 중심의 대제국을 건설하고, 교황권을 자신의 발아래 두는 일이었다. 그 출발점은 당시 수 백 여개에 달하는 독일 내 소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호엔슈타우펜과 벨프라는 가장 강력한 두 가문의 피를 이어받기도 했지만, 스스로 카리스마를 갖춘 덕에 지역 귀족들을 충성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대외적으로 이탈리아에 가장 많은 정성을 들였다. 이탈리아 북부는 경제적 지원을 얻어낼 수 있는 곳이고, 이탈리아 중부는 교황이 거주하는 로마가 위치해 있으며, 이탈리아 남부는 동로마제국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즉위 2년 후 1154년에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당시 이탈리아 곳곳은 북유럽에서 내려온 노르만족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연이어 승리를 쟁취해 1155년에는 이탈리아 국왕의 왕관을 받았고, 로마까지 진격해서 교황 하드리아노 4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대관식이 거행되자마자 로마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의 군대는 1천 명 이상을 사살함으로써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1156년 부르고뉴 백작 르노 3세의 외동딸 베아트리스와 재혼했다. 베아트리스는 첫째 부인 아델라와 달리 12명의 아이를 낳았다.

1157년 교황 하드리아누스가 서신을 보내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황제 직위가 교황의 선물인 것처럼 말하며 일종의 신하 취급을 했다. 그는 이를 문제 삼으며 시칠리아를 정복한 노르만족을 몰아내겠다는 계획까지 덧붙여서 1158년 이탈리아 지배권을 주장하는 론칼리아법령을 발표, 이탈리아 도시들의 포데스타 행정관들을 자신이 파견한 관리들로 대체하기 시작하자, 이에 해당 도시들이 반발하자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을 실행했다. 밀라노를 점령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1159년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대립교황 빅토리우스 4세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한발 물러나 사태를 지켜보았다. 이에 실망한 알렉산데르는 다른 나라에 서신을 보내 그와 협약을 맺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프리드리히 1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163년 제3차 이탈리아 원정 때 밀라노를 공격해 동방박사 3인의 유물을 획득해 쾰른으로 가져옴으로써 종교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 유물들은 지금도 쾰른 대성당이 보유하고 있다. 1165년에는 빅토리오에 이어 대립교황에 오른 파스칼 3세를 아헨으로 데려와 자신이 존경하는 카롤루스 대제를 성인으로 시복하게 했다.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을 남기거나 발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성인이 되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66년 제4차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고, 이듬해 로마 공격 때 알렉산데르가 탈출하자 파스칼리스를 정식 교황으로 세웠다.

독일로 돌아가려던 프리드리히 1세의 앞을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동맹이 가로막았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충성과 용맹을 겸비한 부하들 덕분이었다. 실제로 1174년 프리드리히 1세는 전열을 가다듬어 제5차 이탈리아 원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밀라노 근처 레냐노에서 패배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바르바로사의 무용담이 생겨났다. 예수가 열두 사도를 거느렸듯이 바르바로사가 열두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속에 잠들어 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 내려와 구원할 거라는 믿음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프리드리히 1세가 몇 번이고 다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로마에 대한 지배권도 포기하고 1177년 베니스 협정을 통해 알렉산데르 3세의 복귀를 지지했으며 이때 교황령 또한 이탈리아 왕국으로 부터 독립했다. 물론 1178년 6월에는 부르고뉴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등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이탈리아에서 연패한 것은 국제적 망신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제4차와 제5차 이탈리아 원정 때 참여하지 않은 벨프 가문의 사촌동생 사자공 하인리히를 희생양으로 여겼다.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번번이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기에 불충을 문제 삼을 만했다. 1181년 귀족회의에서 유배가 결정되면서 사자공 하인리히는 장인이자 영국 국왕인 헨리 2세의 궁성이 있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유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장남 프리드리히 5세가 1170년 요절한 이후 무사히 성장한 두 아들 하인리히 6세와 프리드리히 6세가 1184년 기사 작위를 받게 되자, 전국의 기사 수천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1186년에는 하인리히 6세를 시칠리아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 디 시칠리아와 혼인시켜서 평화를 유지했다.

1189년, 성지 탈환을 주장하는 신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에 박자를 맞추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영국 국왕인 리처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도 함께했다. 2만 명의 기사와 8만 명의 병사가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인원은 이보다 몇 배나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 헝가리 국왕 벨러 3세도 군대를 보탠 덕분에 지금의 터키 땅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는 공동왕이었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맡았다. 프리드리히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지역 귀족들의 동요가 불거졌다. 하인리히 6세는 타협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하나씩 해결했다. 1181년 영국으로 유배됐다 돌아온 벨프 가문의 친척 사자공 하인리히에게는 옛 영지인 작센 지역 남은 영지인 브라운슈바이크를 돌려주어 화해를 이끌어냈다. 또한 독일 북서쪽에 거주하던 브라반트 공작 헨드릭 1세와 에노 백작 바우드베인 5세에게도 영토와 작위를 주어 같은 편으로 포섭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터키의 살레프강을 건너던 도중 프리드리히 1세가 익사를 하고만다. 당시의 경위에 대해 말이 많지만 어째든 그의 익사로 육로로 행군하던 신성 로마 제국군은 그대로 본군으로 회군해야 했다. 당시 독일의 공동왕이었던 하인리히 6세는 단독왕이 되자 당황하지 않고 후속 조치를 시행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각 지역 가문을 위로하고 이탈리아에서의 주도권 유지를 위해 군사를 준비했다. 이듬해 1191년 마침내 이탈리아로 진군한 그는 협상 능력을 발휘해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을 막아냈고, 4월 15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아내 콘스탄차의 고향인 시칠리아 왕국이 문제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의 조카손녀 베아트리스로서 국왕 루제로 2세의 셋째 부인이었다. 앞선 결혼에서 얻은 8명의 이복 남매들이 모두 요절함에 따라 하인리히 6세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귀족들은 노르만족 출신의 레체 백작 탕크레드를 왕으로 옹립했다. 공격을 준비하는 중에 비보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군대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독일의 귀족들도 국왕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인리히 6세는 어쩔 수 없이 독일로 복귀했다.

그러나 우연찮게 행운이 찾아왔다. 영국 국왕으로 십자군 원정을 벌이던 사자심 왕 리처드가 예루살렘에서 살라흐 앗 딘과 휴전을 한 후 영국으로 돌아오다 배가 아퀼레이아 부근에서 배가 난파하여 매형인 하인리히 사자공의 원조를 받기 위해 극소수의 부하들만 이끌고 비밀리에 유럽 대륙을 횡단하다가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크레에서 모욕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 의해 정체가 발각되어 포획한 후 빔에서 뒤른슈타인 성, 트리펠스 성을 걸쳐 1193년 3월 23일 슈파이어로 압송되어 신성 로마 제국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다. 플랜태저넷 가문의 앙주 제국을 붕괴시키려한 필리프 2세는 하인리히 6세에게 가능하면 리처드를 석방시키지 말 것을 서한으로 요청한 것도 있었다.

법정에 선 리처드는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켰고 결투 재판을 제의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렸다. 또한 법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는 여론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유도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리처드의 보석금으로 십 오만 마르크를 선고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다만 잉글랜드의 종속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리처드 1세가 슈파이어로 이송되는 동안 영국에서 태후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에게도 이사실이 보고되어 하인리히 6세가 제시한 보석금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면서 존과 잉글랜드의 토착 세력에게 밀려 프랑스로 망명한 처지였던 전 잉글랜드 대법관 기윰 드 롱샴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려가 하인리히 6세와의 협정을 도왔던 덕에 리처드는 독방 감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트리펠스 성에서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귀빈에 가까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동안 리처드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수뇌부와 친분을 쌓으며 동맹을 다졌고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이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회담은 겨울까지 진행되었고, 이후 엘레오노르가 직접 신성 로마 제국으로 와서 아들의 몸값을 후하게 지불했다. 또한 리처드 또한 하인리히 6세의 봉신이 될 것도 약속했다.

돈과 군사를 모두 손에 쥔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월에 북부 이탈리아인들과 협정을 맺어 황제군의 북부 이탈리아 안전 통과를 확보했고, 4월에는 사자공과 협상을 타결해 지긋지긋한 사자공과의 항쟁을 종결했다. 그리고 7월에 시칠리아 공격을 시작했고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1194년 11월 실리아의 수도 팔레르모에 무혈 입성해 항복 조건애 따라 굴리엘모 3세가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레체 백작령을 줄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냉철한 인물로 굴리엘모 3세를 비롯한 잠재적 반란 세력을 남겨두려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12월 25일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후 수백명의 시칠리아 귀족들을 처형했고, 굴리엘모 3세는 거세하고 맹인으로 만들어버린 후 유폐시켰으며, 탕크레드는 부관참시되었다. 즉위식 다음 날에는 외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태어났다.

독일과 네덜란드 내 가문 영토, 새로이 확보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전역,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 일부 영토까지 소유하게 된 하인리히 6세는 이 시점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가문의 직영지로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호엔슈타우펜 왕조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하인리히 6세의 다음 과제는 갓 태어난 아들 프리드리히의 차기 제위 계승권 확립이였다, 지금의 기세를 틈타 황제 자리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세습 지위로 확립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은 영원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작업으로 1115년 마틸데의 사망 이후 오랫 동안 제대로 된 주인이 없던 토스카나 후작 자리에 1195년 동생 필리프를 맞힌다.

하인리히 6세는 1196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전에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 국왕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반대를 표명하고 나섰다. 하인리히 6세는 교회 소유의 영지에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196년 봄에 뷔르츠부르크에서 열린 귀족회의에 아돌프 대주교 일파가 불참하면서 귀족들도 이탈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불리해졌고, 6개월 후 에르푸르트에서 재차 열린 귀족회의에서도 반대 의견이 이어졌다. 하인리히 6세는 설득을 계속했다. 그해 말, 마침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귀족회의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공동국왕으로 인정받았다.

자신감을 되찾은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로 가는 도중 그동안 자신에게 반대해온 지역 귀족들을 처형했다. 1197년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했지만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강행했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9월 28일 메시나에서. 급성 말라리아에 걸려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야 할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고작해여 세살이었기에 숙부인 필리프가 1198년 뮐하우젠 귀족회의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벨프 가문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봉지중 하나였던 토스카나 후작령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로 마음먹은 피렌체, 아레초, 루카, 피사, 피스토이아, 포지본시, 프라토, 시에나, 볼테라 등 유력 도시들이 토스카나 연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토스카나 일대는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토스카나 후작령은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교황은 로마 내 교황령과 시칠리아 왕국의 양도를 요구하며 결정을 미뤘다. 결국 독일 남서부 슈바벤을 기반으로 한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독일 중부 작센을 중심지로 삼은 벨프 가문은 기나긴 전쟁에 뛰어들었다.

외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점잖아 많은 이의 호감을 샀던 필립 폰 슈바벤은 독일 내 귀족과 성직자들을 규합하고 교황을 설득하는 한편 서쪽의 프랑스, 동쪽의 보헤미아, 남동쪽의 동로마 제국 등 주변국과 동맹을 강화해 세력을 넓혀갔다.

3.3. 13세기

1205년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필리프의 편에 서게 되었고, 다시 한 번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왕위를 굳혔다.그러나 1208년 6월 21일 부르고뉴 백작을 지내던 형 오토 1세의 딸 베아트리스 2세가 밤베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필립 폰 슈바벤은 벨프 가문과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결혼식 후 방에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때 비텔스바흐 백작 오토 8세가 칼을 들고 들어와 그를 난자해 살해했다. 임신 중이던 이레네 왕비는 무사히 도망쳤지만 충격과 후유증으로 인해 두 달 후 8월 27일 결국 사망했다.

이후 11월에 제후들은 사자공 하인리히의 아들인 오토를 독일왕으로 선출했으며 필리프의 어린 딸 베아트릭스과 약혼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하지만 1209년 9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을 받아 이탈리아의 비테르보로 교황청이 이전에 제국으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았던 토지들을 교회에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지만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의 영토인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동의한 후 10월 4일, 로마에서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한다.

하지만 얼마 안가 오토 4세는 약속을 어기고, 1210년 토스카나 지방을 점령한 후 호엔슈타우펜의 소유였던 이탈리아 남부로 원정을 개시하면서 교황과 제후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내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 4세에게 파문을 선언, 제후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대립왕으로 선출하자 1212년 서둘러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지만 얼마안가 베아트릭스가 사망하면서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이후 9월이 되어 독일에 온 프리드리히 2세는 남부의 여러 공작령의 지를 받고 오토 4세와 그의 추종 세력들을 라인 강 하류 지방과 북동부로 몰아냈으며 이후 1214년 부빈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패배한 하자 오토 4세는 부르고뉴 왕위만 보전한 채로 1215년에 퇴위한다.

7월 25일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 왕으로의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와 함께 십자군 종군을 서약하였다. 1217년 5차 십자군이 출정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1세를 포함한 귀족들을 파견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1220년 프리드리히 2세는 보름스 화약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로마로 와 11월 22일에 교황 호노리오 3세와의 협상을 통해 다음해에 십자군 원정에 직접 참전할 것을 요구받고 대관식을 받고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칙령으로 '이단을 처벌해서 화형을 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후 자신은 시칠리아에 머물고 장남인 하인리히를 독일왕으로 공인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성속 영주들에게 특권인 관세 징집권과 화폐 주조권, 축성권 및 영내 재판권 등을 부여하여 영방국가 체제 발전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약속된 1221년이 된 후에도 프리드리히 2세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지 않았다.

1222년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했으며 이후 5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되었고, 1223년 3월, 페렌티노에서 프리드리히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과 교황을 만나 1225년 6월 24일을 출정일로 확정하였다. 하지만 1225년 여름이 되어서도 프리드리히 2세는 출정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에 호노리오 3세가 분노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는 2년의 시간을 더 주면 1천의 기사를 더 모집하겠다고 교황을 설득하였다. 1225년 7월 20일, 몬테카시노에서 산 제르마노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리드리히는 1227년 에도 출정하지 않는다면 10만닢의 금화를 벌금으로 내거나 파문을 당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이로써 교황령 일부를 장악하던 독일군이 철수하였고 시칠리아 왕국 내 교황 재산도 환수되었다. 호노리오 3세는 프리드리히의 십자군 종군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와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과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둘은 1225년 11월 9일 브린디시 성당에서 결혼하였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동시에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다.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법에 의한 절대정치를 시행했다. 그는 콘실리어리 (조언자)인 피에르 드 비녜 (생몰 1190 ~ 1249년)의 도움으로 나폴리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1231년에 멜피 헌법을 제정하는 등 시칠리아 왕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편지를 주고 받았고, 알 카밀에게 천체 관측기를 선물로 받을 만큼 이슬람 세계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 특히 이슬람과의 교류는 새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레고리오 9세는 이전의 십자군 전쟁이 잇달아 실패하자 교황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다시 대규모 십자군 원정을 기획하고 이번에는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황제가 직접 출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비종교적인 성향인데다가 이슬람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출병하게 되면 그 틈을 타 교황이 독일에서 세력을 넓힐 것이 뻔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출병을 미루고 있었다. 물불 안가리는 성격의 교황은 출병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마지못해 원정길에 나섰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채 떠나기도 전에 병사들 사이에 장티푸스가 퍼졌고 황제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파문을 선언해버렸다. 이 당시에 2번 연속 이중으로 파문당했다.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한동안 느긋하게 시칠리아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파문 철회를 받기 위해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은 없었고 외교를 통해 원만히 예루살렘을 확보하려 했다. 마침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한 끝에 성전산에 대한 이슬람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데 성공하여 1228년,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 받아 예루살렘 왕에 등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지만 권위 없는 왕이었다.

황제는 성지 탈환에 성공하여 의기양양하게 귀국했으나, 교황은 이슬람과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격렬히 분노했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었기에 교황은 여론에 떠밀려 1230년에 아나니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만나 파문을 철회했다.

그러나 파문의 여파는 적지 않았는데, 그의 반대 세력들이 파문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도전해왔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장남 하인리히 7세와 사이가 벌어져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장남 하인리히 7세는 시칠리아에 사는 아버지와 떨어져 독일에서 양육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가 9살 때 독일왕위에 앉힘으로서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때 프리드리히는 교황과 사이가 틀어진 상태였기에 아들을 공동왕으로 승인받기 위해 성직 제후들을 위한 법령인 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를 1220년에 표고해 성직 제후들이 독일 지역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통행료를 부과하고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영주에서 법정을 열고 그곳에서 내려진 형을 집행하는 데 왕이나 황제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얻었습니다. 왕이나 황제에 의한 선고의 수락은 보장되었다: 교회 법정에 의한 유죄 판결은 자동적으로 왕실 또는 제국 법원에 의한 정죄와 처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교회 법정에 의한 파문 선고에 뒤이어 왕이나 황제로부터 불법 선고가 내려졌다. 하인리히 7세는 장성하면서 이탈리아에 머무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독일 내정을 담당했다. 하인리히 7세는 독일에서 마녀사냥을 하며 전횡을 일삼던 마인츠 주교를 견제하며 그와 충돌했으나, 이것이 파문을 철회받기 위해 노력하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고 말았다.

부자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고 결국 1234년에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켜 도전해왔다. 이때 프리드리히는 반란 진압을 위해 'Statutum in favorem principum'이라 불린 법령을 발표해야 했는데, 이법령은 독일 내의 세속 영주들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왕실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독일 지역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통행료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받기로 되어 있으며, 최종적으로 1232년 5월에 승인이 되어 있다. 이후 1235년까지 이어진 부자간의 내전 끝에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인리히 7세를 독일왕에서 폐위하고 두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차남 콘라트 4세를 독일왕에 앉혔고, 하인리히 7세는 어느 시점에서 나병에 걸렸기에 이탈리아 어딘가에 죽을 때까지 유폐시켰다.

한편 교황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1235년에는 마인츠에서 치안 법령 (평화 헌법)을 공포했고 롬바르디아 동맹을 쳐부술 결의를 하였다. 1237년에 크레모나 군과 함께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밀라노 군을 격파한 프리드리히는 코뮌의 상징인 카로치오를 파괴하였다. 1240년 아들인 콘라트 4세가 독일왕국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2세 본인은 이탈리아쪽만 전념하기로 했다. 1241년 8월에 그레고리오 9세가 선종하자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 2명을 포로로 잡아 새 교황을 뽑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1241년 몽골군이 동유럽을 휩쓸고 헝가리까지 쳐들어오자 급히 기독교 제후들 및 사이가 좋지 않던 교회와 협력하여 십자군을 편성해 막을 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1242년 오고타이의 죽음을 안 몽골군이 회군했기 때문에 한숨을 돌렸다.

1243년 2년간의 공백 끝에 새로 뽑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다시 황제와 항쟁을 할 조짐을 보이자 롬바르디아의 겔프당과 치열한 전쟁을 펼친 끝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를 프랑스로 망명시켜버렸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리옹에서 공의회를 열어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파문했고, 주종관계를 말소한다고 선포하여 독일 제후들의 반란을 선동했고,튀링엔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를 대립 독일국왕으로 내세웟다. 이후 몇몇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계속된 파문과 복권에 질린 독일 제후들은 교황권의 신장도 바라지 않았고[5],프랑스 왕 루이 9세도 프리드리히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생각 외로 황권에 위협은 되지 못했다. 1246년 대립왕인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면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으나.홀란트의 백작 빌럼이 라인 강 일대의 영주들에 의해 대립왕으로 선출되면서 반란은 지속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의 포조니를 점령하고자 침공하나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키예프 대공 로스티슬라프 4세와 손을 잡고 대항해 6월 15일 라이타 강둑에서 양측이 격돌했다. 헝가리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전투 중에 전사하면서 수 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1248년엔 파르마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파르마에 있던 정부들을 비롯해 재산들을 잏었고, 1249년에 서자 엔초가 롬바르디아 동맹군에 패배해 볼로냐에 포로로 붙잡히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장기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교황도 황제도 자금이 부족하고 북이탈리아의 제후들도 격파되기 시작하여 (1250년 마르케 전투) 결국 양측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중재로 다시 화해를 하였다. 이후 1250년에 대립왕 빌럼이 콘라트 4세에게 패배했느나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으며 12월 12일, 사냥을 마친 후 고열에 시달리던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의 카스텔 피오렌티노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에 교황과 겔프파는 크게 안도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기벨린파(황제파)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그의 아들인 콘라트 4세가 단독으로 독일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으로 시칠리아 왕국과 독일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교황과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251년 빌럼에게 패배하자 콘라트는 독일에서는 안정된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부유한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다. 1252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와 함께 아풀리아를 침입하여 통치 대리인으로 있던 이복동생 만프레디가 시칠리아에서 영향력을 퍼뜨리는걸 견제했고 국가를 엄격히 통제했다. 1253년 10월 콘라트의 군대는 반란 상태에 있었던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러나 콘라트 4세는 교황의 지원자들을 진압할 수 없었고, 교황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아들 곱추공 에드먼드를 통치자로 지목했고, 1254년에 콘라트 4세를 파문했다. 콘라트 4세는 이에 대처하려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이탈리아 바질리카타의 라벨로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인 콘라딘이 나이가 어리면서 호엔슈타우펜이 독일왕 및 신성 로마 황제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독일 왕위는 곱추공 애드먼드가 그대로 차지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 4세 때의 대립왕이었던 빌럼이 여전리 살아있었기에 사실상 제대로 된 왕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대공위시대로 접어들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또한 콘라딘이 죽었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당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하고 있던 콘라트 4세의 이복 동생인 만프레디가 시칠리아 국왕이 되면서 사실상 가문이 두동강이 나게 되었다.

1256년 빌렘 2세가 프리지아인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자, 카스티야 왕국 알폰소 10세가 피사 공화국의 사절의 제안으로 대립왕(Gegenkönig)이 되길 결심했고, 1257년에 전 유럽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인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어머니인 점을 들며 독일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이탈리아의 기벨린파(친 황제파) 도시들에 외교관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고, 나중에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복종을 받아내려 했다.

이후 독일의 선제후들 중 4명의 지지와 프랑스 국왕인 루이 9세에게도 지지를 받아냈지만 정작 커다란 문제점에 봉착하고 말았다. 카스티야 귀족들은 신성 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군대를 보내라는 왕의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소리아에서는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지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카스티야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까지 겸임한다면 너무 강해진다고 여겼기에 반대했다.

한편 1257년 애드먼드가 죽자 라인 지방의 영주들과 선제후들 중 세명이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독일왕으로 선출했기에 리처드와 알폰소 10세는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여야 했는데, 상술한대로 제약이 많은 알폰소 10세에 비해 리처드는 재빨리 아헨으로 이동해 1257년 5월 카롤루스 대제의 묘지를 참배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알폰소 10세는 십여 년간 리처드를 꺾고 교황의 마음을 돌리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지원하고자 막대한 돈을 지출했지만 두 명의 외국인 출신 대립왕들은 누구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교황은 이러한 사태를 즐겼고 두 명의 대립왕 중 누구에게도 황제 대관을 하지 않았다. 결국 장기간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했다.

1265~1266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끝장내려고 한 교황 인노첸시오 4세 알렉산데르 4세의 의도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해 만프레디를 전사시키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고, 이에 콘라딘은 외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지원을 받고 시칠리아를 회복하려 했으나 1268년 샤를에게 패배해 붙잡혀 미혼인 상태에서 처형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끊어졌고, 슈바벤 공작령 또한 여러 갈레로 분할된다.

이런 상황에서 강도 기사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라인강 일대에서 불법 통행세를 걷던 군소 영주들로 육상 운송의 효율성이 매우 떨어지던 중세 시대에 라인강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화물 운송로 중 하나였으며, 라인강에서 통행세를 걷으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합병시키는 등 신성 로마 뢍제 자리를 노렸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 때문에 황제의 통제력이 사라지자 라인강 유역의 군소 영주들이 주요 길목마다 성, 탑을 세우고 불법 통행세를 걷기 시작했다. 상술했듯 중세에는 육상 운송의 효율성이 매우 떨어졌고, 강을 틀어막고 있으면 배는 우회할 수도 없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기 때문에 상인들은 뻔히 알면서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큰 피해를 본 도시들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강도 귀족들의 성을 파괴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자 이러한 상황을 즐기던 교황들마저 이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최소한 독일왕을 선출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독일 내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큰 피해를 보고 있던 중립 제후들에게도 다시 황제 내지는 독일왕을 선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 황제들의 통치를 겪은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강력한 황제나 독일·로마왕을 원치 않았기에 그들은 공작 수준의 강력한 제후가 아닌 백작이되 영주들 중에서 가장 미미한 세력을 가진 자를 선출할 생각을 갖기했다.

1273년,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황제 선출을 위해 모인 제후들은 스스로 황제 후보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다른 유력 가문이 제위를 차지하는 것을 견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회의는 한동안 공전으로 흐르다가 힘의 균형을 위해 일부러 한미한 가문 출신을 황제로 선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 오타카르 2세는 그레고리오 10세에게 독일왕 선출에 대해 어떠한 인물이든 간에 인정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나 묵살되었다.

그리고 이에 부합한 인물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백작이었던 루돌프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라는 뒷배경 외에는 혈통으로 같은 스위스 지역에 자리 잡아 교황을 배출한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였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되면서 공중분해된 슈바벤 지역 중 아내의 호엔베르크 영지, 외삼촌의 퀴부르크 영지를 획득하고, 슈트라스부르크 주교령과 바젤 등의 영지를 구입하여 가문의 영지를 확대는 했지만 그래도 강력한 제후들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마인츠 대주교와 뉘른베르크 성백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의 지지를 받고 독일왕에 선출되었고, 리처드와 알폰소 10세는 자동으로 폐위되었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이 왕초로 주름잡고 있던 스위스에서도 루돌프의 독일왕 즉위 소식에 이미 루돌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 전체에 굴복했던 스위스 사람들 중 바젤의 주교는 이사실을 듣고는 그들의 선택이 훗날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독일왕에 선출된 루돌프는 교황으로 부터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와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밝혔으며, 바젤 주교의 우려대로 왕권 강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선거를 통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준 독일 선제후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정략결혼 정책을 도모했고, 두루두루 긴밀한 친족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독일 선제후 회의는 3인의 대주교와 4인의 세속 선제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에는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가, 후자에는 라인 궁중백,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의 왕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권 우호적인 정책을 통해 교권과의 해빙 국면에 접어들자마자, 루돌프 1세는 세속 선제후들과의 화친 정책에 주력했다.

1273년 10월, 그는 장녀 마틸데를 라인 궁중백이자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루트비히 2세와, 셋째 딸 게르투르트는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인 알브레히트 2세와 결혼시키면서 세속 선제후들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는 것으로 왕권 강화 정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왕권 강화 정책은 추후 완성될 세속 선제후들과의 인척 관계를 맺는 것 외에는 성공한 것이 거의 없었다. 1274년부터 도시에 대한 군주의 과세권을 거듭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는 바이에른과 구슈바벤과 프랑켄 세 지역에 대한 평화를 위한 법을 만들어 후에 독일 전체로 확대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루돌프는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 위해 이전 신성 로마 황제 자리를 두고 대립각을 세운 정적 오타카르 2세와 해결을 봐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274년 11월, 루돌프 1세의 주최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프리드리히 2세 사망 이후 바뀐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경계를 원상복구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 조치로 오타카르 2세는 케른텐, 크라인, 빈트 변경주, 프리울리를 모두 상실했다.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를 더욱 압박하여 이듬해 오타카르 2세에게 제국 추방령을 선언했고, 빈에 있던 그의 거처인 호프부르크를 포위했다. 그 사이에 보헤미아에서 팔켄슈타인의 자비시(Záviš z Falkenštejna 1250~1290)가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1276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에 대한 권리까지 포기하고 보헤미아와 모라바만 유지하며 아들 바츨라프와 루돌프 1세의 여섯째 딸 유타(Jutta von Habsburg 1271~1297)를 결혼시키는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오타카르 2세는 자신의 야망을 꺽지 않았고, 이에 루돌프 1세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무력을 이용하기로 결정한 오타카르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마이센 변경백국, 소폴란드 공국에서 용병을 빌려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루돌프 1세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와 동맹을 맺고 빈으로 진군했다. 1278년 8월 26일, 빈 북쪽 뒤른크루트(Dürnkrut)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오타카르 2세는 전사하면서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 궁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보헤미아와는 더이상 충돌을 원치않았기에 이전의 약조에 따라 1279년 2월, 넷째 딸 헤트비히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4세와 결혼시키는 등 이런 교묘한 정략결혼을 통해 그는 세속 선제후 4인과 모두 친인척의 관계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독일 선제후 회의와의 심각한 대립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1282년 12월 27일, 루돌프 1세는 알브레히트와 루돌프 두 아들들에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크라인, 케른텐 등을 봉토로 하사해도 좋다는 독일 제국회의의 승인을 받았지만 그러나 두 아들에게 봉토에 대한 전권을 넘겨준다는 결정은 여러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1283년 6월 1일, 라인펠덴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협약에 따라 장남 알브레히트가 그 지역에 관한 단독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장자 상속권을 보장한 라인펠덴 협약은 합스부르크 왕실이 성장하는 데 확고한 토대가 되었다.

1283년 서부 변경지대에서 프랑스의 팽창주의 정책을 막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의 딸 이자벨과 재혼하고 이후 프라슈콩테의 궁중백 오토 4세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루도프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는 무산되고 만다. 바로 교황령에 대한 프랑스의 압력에 영향을 받은 마르티노 4세가 이전 교황인 그레고리오와 니콜라오 3세가 약조한 황제 대관식을 죽을 때까지 미뤘다. 1287년 새 교황 호노리오 4세가 2월 2일에 대관식 날짜를 잡았지만 루돌프 1세가 도착하기 전 호노리오 4세가 선종하면서 대관식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이후 뷔르츠부르크에서 대관식에 대한 회의를 열지만 제국 사절단이 루돌프에게 로마해 경비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루돌프 1세의 황제 즉위는 무산되었다. 1289년 튀빙겐에 출물하는 강도기사를 진압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하나 험준한 산성에서 수성을 했기에 실패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왕권 강화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그의 세력 확대에 바지사장으로만 있을 것이라 착각한 독일 내의 제후들은 당황하여 그가 독일왕 자리를 아들에게 넘기는 것을 끊임 없이 방해했고, 1291년 루돌프는 끝내 장남 알브레히트의 왕위 승계를 이루지 못한 채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죽자 129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를 견제하기 위한 선제후들이 모여 새로운 독일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고, 이때 나사우 가문의 백작이었던 아돌프를 선출했다.

같은해인 5월 5일에 즉위한 아돌프는 2년뒤인 1294년 6월 24일에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러 정식으로 독일 왕이 되었다. 하지만 제위 초부터 선제후들의 무리한 요구와 즉각 오스트리아 공작으로서 막대한 재정자원과 영토를 지니고 있었던 알브레히트의 즉각적인 반격과 도전에 직면했다. 이에 아돌프는 마이센을 점유하고 있던 베틴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로부터 튀링겐의 상속권을 사들였고 1294년, 프랑스 왕국에 대항해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어 현금 보조를 받아 그것을 상속권을 빼앗긴 알브레히트 2세의 두 아들인 프리드리히 투타와 디트리히를 물리치는데 사용하는등 점차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의 움직임을 즉각 경계하기 시작한 선제후들은 자신들과 협상중이었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1298년 6월 23일, 알브레히트의 대군이 마인츠에 주둔한 가운데 아돌프의 폐위가 선고되는 동시에 알브레히트를 독일왕으로 선출하였고 이에 아돌프는 자신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같은해인 7월 2일 보름스 근처 괼하임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알브레히트와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8월 24일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왕이 된 알브레히트 1세는 제후들이 우려한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도시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냈으며 영주들간의 이유없는 사전(私戰)을 막는 등 독일 왕국을 안정화시켰으며 1299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맞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브란데부르크 변경백 오토 6세, 매부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와 동맹 협약을 채결해 입지를 다졌다.


[1] 일반적으로는 편의상 위그 카페가 왕위에 선출된 987년 시기부터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카운트하지만,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 서프랑크 왕국과 동일한 정치체였으며 존엄왕 필리프 2세 재위인 1190년에 비로소 국명을 '프랑크'의 발음이 변화된 '프랑스'로 칭해지게 된다. [2] 종주권 행사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당대 최고 정적인 노르망디 공작, 앙주와 멘 및 투렌 백작 앙리 플랜태저넷이 필리프 2세의 부친 루이 7세의 첫 왕비였으나 이혼했던 아키텐과 가스코뉴 여공작, 푸아티에 여백작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과 결혼한 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로 즉위하여 강대한 남프랑스의 넓은 영지를 차지하고 서부 브르타뉴까지 잠식하여, 프랑스 문화권 영토의 절반을 넘게 독식하고 있었다. 파일:1154.png [3] 비옥한 도시인 쌩토메흐, 에흐, 아하스, 보켄, 비에이 에스당, 바뽐므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백작령, 자작령에 대한 상위 주군의 권한을 행사케 했던 영지였다. 당시 북프랑스 일대는 물론이고 잉글랜드마저 경악하게 한 결정이었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영역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이 종주권을 행사한 이중 봉신이라는 형국에서 여타 군벌들처럼 독자적인 권한을 확립하려는 지속적인 정책을 견지해왔는데 이러한 합의안은 당시의 시대상의 흐름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당연지사 "플랑드르 백작이 플랑드르를 팔아 치운다, 미치지 않았다면 뭔가 우리는 모르는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필시 소년왕을 좌지우지 할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고도의 교란일 것이다"라는 말들이 광범위하게 돌았고, 당시 필리프 2세와의 관계를 따져도 너무 많은 것을 퍼줬던지라 필리프 1세의 의도에 대해 현재도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4] 처음에는 황실 묘지가 아닌 인근 예배당에 석관을 보관했다가, 1111년 파문이 해제된 후에야 비로소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5]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황제권과 제후(영주)권, 교황권의 균형 위에 서 있는 나라였고 제후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의 봉권적 권력을 억압하는 황제에 맞서기 위해 교황과 협력하였으나, 그렇다고 제후들이 덮어놓고 교황 편을 든 것은 아니다. 제후들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 역시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파문이 지나치게 남발된 것 자체가 교황과 교회가 지나치게 세속 군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 요소가 되었다. 그렇게 하고도 황제를 제압하지 못하고 번번히 교황이 역으로 털린 상황이었기에, 당시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등 돌리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