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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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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 전쟁

러시아 원정() / 조국 전쟁()
러시아어: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
프랑스어: La campagne de Russie, Guerre patriotique de 181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Napoleons_retreat_from_moscow.jpg
시기
1812년 6월 24일 ~ 12월 14일
장소
러시아 제국 서부
원인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프랑스 제국 러시아 제국 사이의 관계 경색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러시아 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국
[[틀:깃발|]][[틀:깃발|]][[나폴리 왕국|]]

[[틀:깃발|]][[틀:깃발|]][[라인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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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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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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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프랑스 제1제국)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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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스페인
[[틀:깃발|]][[틀:깃발|]][[프로이센 왕국|]]
[[틀:깃발|]][[틀:깃발|]][[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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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병력규모의 상세지휘관 참고
병력 198,000명(개전 초)
623,000명
612,000명
피해 21만 명 이상 사망
15만 명 부상 및 동사
5만 명 탈영
20~28만 명 사망
5~10만 명 포로
13만 명 탈영
결과
러시아 제국의 승리 / 나폴레옹군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원인 겸 나폴레옹의 몰락 시작
영향
바르샤바 공국의 멸망
프랑스의 이베리아 반도 상실과 본토 노출
라인 동맹 해체와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의 대프랑스 동맹 합류

1. 개요2. 전쟁 배경3. 전쟁 준비4. 병력 규모5. 전역 경과6. 모스크바 점령7. 대육군의 대몰락8. 기타9. 미디어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원정(French invasion of Russia) 혹은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1812년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인 나폴레옹 1세 러시아 제국을 침략했다가 대패한 전쟁이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전쟁 배경

독일.폴란드 원정에서 나폴레옹에게 깨진 러시아 제국은 1807년 틸지트 조약에 따라 명목상으로는 프랑스의 대등한 동맹국이었다. 나폴레옹은 어느 정도 자유주의 성향이 있었던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과 대적하는 프랑스의 입장에서 대륙 지배의 파트너로 러시아를 구상했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이나 오스트리아 제국과는 달리 명목상 대등한 동맹국 대우를 해 주었다. 나폴레옹은 1809년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다시 굴복시키면서 당분간 유럽 대륙에는 나폴레옹에 맞설 나라가 없었다. 영국은 본토가 침공받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고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다른 나라들은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1세는 죽이 매우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나폴레옹은 1809년 러시아의 스웨덴 침공에 따른 핀란드 병합을 묵인했고 나폴레옹과 황제의 여동생인 안나 황녀의 결혼 얘기가 오가는 등 두 나라 사이는 화기애애해 보였다.

하지만 1810년 러시아와의 혼담은 무산되었고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를 선택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1808년 10월 에어푸르트 회담부터 두 나라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오스만 제국 공격을 저지시켰고 바르샤바 공국 수립으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며 알렉산드르 1세를 화나게 했다. 폴란드 문제와 오스만 문제는 러시아와의 공조가 필요한 민감한 사안이었으나 나폴레옹은 이 문제에 있어서 러시아를 무시했다.

거기에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의 지배 및 영국에 맞서는 대륙 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서 라인강을 넘어 네덜란드 전역과 독일 북해안 및 엘베강 하구까지 발트해의 거의 모든 항구를 점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자동맹 도시와 올덴부르크 공국을 합병한 것이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다. 당시 올덴부르크 공국은 알렉산드르 1세의 넷째 여동생이었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의 남편 페터 프리드리히 게오르크가 법정 상속인인 나라였으며 황제의 모후인 마리야 페도로브나의 외가인 뷔르템베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태자가 된 것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의 군사정책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황제의 곁에는 황태후를 비롯하여 수많은 반 보나파르트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다.

한편 해군력의 미비 때문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말려 죽이겠다는 생각에서 몇 년 전 대륙 봉쇄령을 내렸었다. 오스트리아가 쳐발린 지 한두 해만에 대군을 회복한 것도 영국이 은밀히 지원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바와 같이 유럽 지배를 확고히 하려면 영국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지 않고선 장기적으론 불가능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러시아도 처음에는 여기에 미온적으로나마 참여했지만 교역 감소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당초 예상치를 초과했다. 러시아의 주요 수출 품목인 곡물, , 목재, 수지, 송진, 칼륨, 가죽, 철의 대영국 수출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나 나폴레옹은 정작 러시아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한다거나 남아도는 러시아 물건을 사준다거나 러시아가 필요한 물품을 수출해준다거나 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의 반발이 커졌다. 생필품은 이탈리아나 독일에 파는 것이 이득이었고 따라서 러시아엔 향수, 독주, 도자기, 보석 같은 사치품만 팔렸다.

이에 격노한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12월 프랑스산 사치품에 높은 관세를 적용하고 중립국 선박에게 항구를 개방하며 나폴레옹에 대한 항의를 표시했다. 가장 심했을 때 영국이 한 번에 상선 600척을 발트해 쪽으로 보내서 러시아와 무역을 하곤 했다. 반면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이었고[1]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밀어붙인 대륙 봉쇄령이 실효를 발휘하려면 반드시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거기에 폴란드 문제로 1811년 양국은 충돌하여 전쟁 위기까지 갔으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이 러시아를 지지하길 거부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일단 물러서서 나폴레옹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했고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 봉쇄령이 러시아에 너무나 부당하다며 어려움을 설명하고 봉쇄령의 폐지와 관계 개선을 요구했다.[2]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에 돌입하여, 러시아 최신 지도를 입수하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1811년 8월 15일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 일부를 할양해달라고 요구하자 튈르리 궁전에서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쿠라킨 공작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내가 80만 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동맹국에 기댈 생각인가 본데 동맹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고 러시아는 반발하며 쿠라킨 공작을 소환하는 것으로 항의를 표시했지만 전쟁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러시아 원정에 대해서는 프랑스 내부에서도 외무상 탈레랑, 주러 프랑스 대사 아르망 드 콜랭쿠르가 나서서 모두 만류했다. 콜랭쿠르는 나폴레옹에게 전쟁은 중대한 실수이고 이베리아 원정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나폴레옹은 무시하며 콜랭쿠르를 소환하는 것으로 응대했다. 콜랭쿠르는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알렉산드르 1세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무려 다섯 시간 동안 보고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을 결심한 상태였다.

3. 전쟁 준비

나폴레옹은 1811년 8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러시아 정벌에 대해 재고했다. 콩피에뉴-비메뢰-앙블르퇴즈-칼레-됭케르크-오스텐더-플리싱언-안트베르펜-호린험-위트레흐트-암스테르담을 두루 여행한 그는 헤이그-로테르담-로-네이메헌-아른험-뒤셀도르프-본-리에주-메지에르까지 돌아본 후 생클루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과 전쟁은 제국 운영에서 필수라고 여겼으며 러시아 원정을 단행해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1. 대륙 봉쇄체제의 유지를 위해 러시아를 굴복시켜 제국의 위신을 유지해야 한다.
  2. 러시아는 영국의 유일한 잠재적 대불동맹 파트너이다.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면 겁먹은 영국도 항복한다.
  3. 폴란드를 강하게 하기 위해선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한다. 폴란드를 키우고 러시아를 약화시켜야 제국의 동부가 안정된다.

일부에선 나폴레옹의 도박사 기질과 불안해진 정치적 기반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르본 백작은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로스 3세를 따라 오리엔트 진출에 환장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버린 죄책감에 스스로에게 벌을 주기 위해 원정을 계획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1812년 1월 13일 나폴레옹은 장 라퀴에 육군장관에게 400,000명이 50일간 먹을 식량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위해 빵과 쌀[3]로 만든 군용 휴대식량 2,000만 개가 필요했으며 200,000명이 2개월간 먹을 밀가루와 이를 수송할 마차 6,000대, 말의 사료로 쓸 귀리 7,200만 리터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봄에 맞춰 어디서 구해 오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부의 1군단, 우디노의 2군단, 네의 3군단과 근위대, 뮈라의 기병대를 합쳐 250,000명 규모로 1군을 편성하고 150,000명으로 2군을, 165,000명으로 3군을 편성해 각각 국경 보호와 증원군 제공을 명령했다. 외젠이 4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에스파냐 연대를 지휘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5군단과 폴란드 군대를, 레니에르과 7군단과 작센 군대를, 구비옹 생시르가 6군단을 지휘했다. 프랑스, 독일, 폴란드가 섞인 빅토르의 9군단과 오주로의 혼성 11군단, 방담의 8군단과 베스트팔렌 및 헤센 군대도 준비되었다. 거기에 제롬과 뮈라가 각각 2개의 기병부대를 더 지휘했고 나폴레옹이 직접 50,000명의 청년근위대와 선임근위대를 지휘했다.

1812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의 특사인 첸체프에게 협박 메시지를 주어 러시아로 보냈는데 이때 프랑스 경찰이 습격한 첸체프의 아파트에선 러시아 원정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던 프랑스 군대에 관한 정보가 모조리 있어 프랑스의 정보가 숭숭 뚫렸음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은 콜랭쿠르의 타협론을 더욱 비난하며 강경하게 나갔다. 알렉산드르 1세는 4월 27일 프랑스의 프로이센 철수, 올덴부르크 공국의 독립과 완충지대 설정을 요구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무시하고 대러시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 즈음에는 알렉산드르 1세조차도 대프랑스 전쟁에 마음을 굳힌 후였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군대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프로이센에게서 요르크의 병력 20,000명과 많은 군수품을, 오스트리아에게서 슈바르첸베르크의 병력 30,000명을 뜯어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자신들이 강압에 끌려왔다고 러시아에 비밀리에 통지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으로 영국에 강화를 제시했다.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를 복고시키고 시칠리아 섬도 보르본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포르투갈과 시칠리아가 이미 영국 손아귀에 있는데[4] 이를 조건으로 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나폴리 왕국에서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전왕 페르난도 7세의 복위를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는 당연히 씹었으며 러시아의 외교전이 잇달았다. 스웨덴의 베르나도트는 신하들의 압박에 따라 1812년 4월 러시아에게 노르웨이 정복 지원을 약속받고 러시아에 붙었고 1812년 5월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휴전했다.[5]

4. 병력 규모

교전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1제국
대육군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군
총사령관 총사령관 겸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1세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명목상)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 원수
편제 북집단군
┗10군단 원수 자크 마크도날

중앙집단군
┗황제 나폴레옹 1세 / 참모장 원수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
┗황제근위대 원수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제1군단 원수 루이니콜라 다부
┗제2군단 원수 니콜라 우디노
┗제3군단 원수 미셸 네
┗제1기병군단 중장 에티엔 밀레 앙투안 샹피옹 드 낭수티
┗제2기병군단 중장 루이피에르 몽드롱

좌측집단군
이탈리아 왕국 부왕 외젠 로제 드 보아르네
┗제4군단 중장 장앙도슈 쥐노
┗제6군단 중장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제3기병군단 중장 에마뉘엘 드 그루시

우측집단군
베스트팔렌 국왕 제롬 보나파르트
┗제5군단 중장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제7군단 중장 장 루이 에벤에셀 레니에르
┗제8군단 중장 도미니크조제프 르네 방담
┗제4기병군단 중장 빅토르 니콜라 라투르모부르그

남집단군
┗오스트리아 예비군단 기병대장 카를 필리프 추 슈바르첸베르크

후방예비군
┗제9군단 원수 클로드빅토르 페랭
┗제11군단 원수 샤를 피에르 프랑수아 오주로
제1서부군 대장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
┗제1보병군단 중장 표트르 비트겐슈타인
┗제2보병군단 중장 카를 바고부트, 중장 예브게니 뷔템베르스키
┗제3보병군단 중장 파벨 스트로가노프, 중장 페테르 코노보니친, 중장 니콜라이 투치코프
┗제4보병군단 중장 파벨 슈발로프, 중장 알렉산드르 오스테르만톨스토이
┗제(근위)5보병군단 대공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중장 니콜라이 라브로프
┗제6보병군단 중장 드미트리 독투로프
┗제1기병군단 중장 표도르 우바로프
┗제2기병군단 중장 표도르 코르프
┗제3기병군단 소장 파벨 팔렌
┗카자크군단 기병대장 마트베이 플라토프

제2서부군 대장 표트르 바그라티온
┗제7보병군단 중장 니콜라이 라에프스키
┗제8보병군단 중장 미하일 보로진
┗제4기병군단 중장 카를 시블스

제3서부군 대장 알렉산드르 토르마소프
┗군단 중장 세르게이 카민스키
┗군단 중장 예브게니 마르코프
┗군단 중장 파비안 오르텐작센
┗군단 소장 카를 람베트

두나이스카야군 제독 파벨 치차코프
┗제1군단 중장 알렉산드르 랑제론
┗제2군단 중장 표트르 에센
┗제3군단 중장 알렉산드르 보이노프
┗제4군단 중장 안드레이 자스

이에 나폴레옹은 유럽 역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꾸리게 되었다. 원정군 규모에 대해서는 450,000명에서 700,000명까지 여러 설이 난립하는데 다수의 서적에서 취하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6]의 기록에 따르면 총 병력은 11개 군단 61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군단부터 9군단까지는 프랑스와 프랑스의 동맹국에서 차출했고 10군단은 자크 마크도날이 맡았지만 총 30,000명의 병력에 프로이센군 20,000명이 차출되었고 11군단은 온전히 오스트리아군으로 이루어졌으며 33,000명의 병력에 지휘권은 슈바르첸베르크 장군에게 위임되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대우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 이유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의 장인인 데다 명목상은 대등한 동맹국이었지만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프로이센은 그런 거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60만 대군의 이동로로 사용되며 물자를 대느라고 프로이센이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이 중 국경을 넘어간 건 420,000명 정도였다. 기록에 따라 45~50만 명 설도 있다. 스웨덴과 영국의 상륙에 대비하여 발트해에 병력을 남겨야 했고 미덥지 않은 동맹(?)이었던 프로이센 점령용 병력도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대적할 러시아 제국군의 육군 전력은 전역 초기에 카자크는 제외하고 370,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주력은 1전선군의 바클라이 드 톨리(바실리 데 톨리)와, 2전선군의 표트르 바그라티온이었다.

여기에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도 크림반도의 흑해 함대 사령관 치차코프 제독 해군 육전대 30,000명을 편성해 북상하여 나폴레옹 추격시 합류하고 스웨덴과 강화하여 핀란드에서 40,000명을 충원했으며 스웨덴은 전쟁 말기에 동맹군 20,000명을 리가로 파견했다. 그래서 러시아군도 프랑스의 대육군에 맞서기 위해 총력전으로 나갔는데 카자크를 합치면 전역 초기 나폴레옹의 침공 병력과 비슷한 450,000명선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보유했다. 별 도움은 안되었으나 인구 1,000명당 신병 서너 명이 징집되어 전역 후반엔 민병까지 합쳐 숫자상으론 무려 900,000명까지 충원되었다.

5. 전역 경과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은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속전속결로 러시아군 주력을 일시에 섬멸시키고 빠른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1세는 이렇게 통보했다.
러시아 국경 내에 프랑스군 무장 병력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강화는 없다.
물론 자신과 장군들 및 궁정 신하들에게도 못을 박아 놨으며 총사령부에서 따로 나폴레옹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도 차단하고 감시했다. 쿠투조프가 후에 나폴레옹이 보낸 사절과 대화만 한 것도 크게 질책할 정도였다.

이곳에는 러시아의 제1서부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병력도 100,000명에 달했지만 사령관인 바클라이 드 톨리는 나폴레옹의 병력이 생각보다 엄청난 군세임을 알고 나서는 신속히 퇴각하고 나폴레옹이 의도한 결전을 피했다.

리투아니아의 빌나에 있었던 알렉산드르 1세도 후퇴하면서 바지사장 드 톨리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준 뒤 모스크바를 거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드 톨리는 30,000명에 달하는 바그라티온의 제2서부군과의 합류를 요구했다. 드리사도 나폴레옹을 막는 데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드 톨리는 드리사도 버리고 계속 내륙으로 후퇴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 저항 없이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그런데 드 톨리가 신속히 퇴각함으로써 나폴레옹 대군은 강행군을 하게 되어 비전투 손실이 극심해졌다. 강행군이 시작된지 며칠만에 폭우가 내려서 길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불어난 강물에 폴란드 기병대 병사들 상당수가 익사했다. 군마의 먹이인 건초 귀리가 부족했는데 농가의 초가 지붕을 벗겨 말에게 먹였다가 메멜을 거친 지 며칠 만에 군마 20,000마리가 병들거나 굶어죽거나 탈진했다.[8] 식수도 부족해서[9] 비상용 증류주는 금방 바닥이 났으며 목이 말라 길가의 고인 물을 마신 병사들은 수인성 질병인 발진티푸스(typhus fever)에 걸려서 첫 2주 만에 병력 135,000명을 비전투 손실로 잃었다. 나폴레옹도 이런 상황을 예견하여 폴란드 지역에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쟁여뒀으나, 당시 기술로는 이걸 러시아로 제대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했다.[10]

특히 구급약품 수송마차들은 전투부대 뒤로 쳐져서 아무런 치료도 못 받았고 일선에선 약품을 대체할 대용품조차 없었다고 한다. 러시아 원정 당시 군의관으로 활약한 도미니크장 라레(1766~1842)의 기록에 따르면 붕대 대신 속옷을 감아주다가 나중엔 종이, 또 나중엔 지푸라기를 감아주었다고 한다.

도로도 잘 닦이기는커녕 개판이라서 마차의 수레바퀴가 틈만 나면 부서져 포병대가 매우 고생을 했다. 많은 경우 군대가 행군할만한 도로가 단 하나여서 마차 수리를 위해서든 휴식을 위해서든 한 번 행군대열에서 나오면 다시 합류하는 게 매우 어려웠다. 만약 어거지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부대[11]와 마찰을 빚었고 주먹다짐까지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런 열악한 복무 여건 속에서 탈영자와 자살자가 속출하여 독일 지역 동맹군(?) 병사들에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본국으로의 편지 보내기를 금지할 정도였다. 이후 나폴레옹의 본대 주력군은 스몰렌스크 전투 직전 175,000명으로 감소했다.

한편 바클라이 드 톨리는 비텝스크에서 나폴레옹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바그라티온의 2군이 모길레프에서 격파당하고 비텝스크로 가는 도로가 차단된 탓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2군과 스몰렌스크에서 합류했다.

사실 드 톨리의 작전을 청야전술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프랑스군에게 맞서려고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적이 와 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부랴부랴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강하다. 특히 《 전쟁과 평화》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러시아군의 청야전술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거점이 함락될 때마다 총사령부에 직접 신하를 파견해 드 톨리를 질책했고, 스몰렌스크가 함락되자 화가 나 드 톨리를 잘라버렸으며 모스크바 함락시에도 쿠투조프에게 해명을 요구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러시아 측은 병력을 최대한 보존한 반면[12] 공세 측인 프랑스는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었는데 특히 보급선이 점점 길어지는 문제를 겪었다. 나폴레옹의 고속 행군은 당시 전문가들은 물론,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인 역사가들 사이에서조차 무리한 공세였다는 게 중론이다.

8월에 접어들어서 스몰렌스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스몰렌스크 전투) 나폴레옹은 여태까지 잡힐만 하면 도망치는 러시아군의 전술에 몇 번이나 당하며 초조했고 화가 나 있었다. 마침 스몰렌스크는 러시아군의 서유럽 전진 보급기지였고 군수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일시에 장악하려 했지만 선발대가 공성용 대포를 못 챙겨 와서 시간을 놓쳤다. 그 사이 드 톨리가 스몰렌스크 기지창의 파괴를 명령했고 목조 건물이 많은 스몰렌스크는 불바다가 되었다.

양측의 교전이 있긴 했지만 큰 교전은 아니었고 사상자 수는 20,000명 이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스몰렌스크를 지키라는 명령도 못 지키고 도시를 시원하게 태워먹은 드 톨리를 크게 질책하면서 청야전술에 부정적이었던 미하일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했다. 애초에 쿠투조프를 기용하지 않은 것은 드 톨리를 바지사장으로 세워놓고 일일이 전술에 간섭질을 하기 편하도록 주전파이며 러시아 전통파를 대표하는 바그라티온 대신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출신인 드 톨리를 기용한 것이었다.

애초에 주전파와 드 톨리를 비롯한 반대파를 모두 아우를 만한 대장감은 쿠투조프밖에 없었다. 쿠투조프는 취임 조건으로 통수권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향해 간섭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고 대신 황태제인 콘스탄틴 대공[13]을 기용하여 명령권에 간섭하지 말 것을 황제에게 직접 요구했다. 이에 황제는 화가 났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14]

쿠투조프도 막상 실무를 떠맡고 보니 그동안 열심히 깠던 드 톨리의 전술을 채용해야 했지만 옛 수도를 절대 사수하라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령도 있었고 "한 번도 싸워보지 않고 모스크바를 내줄 순 없다."는 드립을 황제 앞에서 쳐놨기 때문에 모스크바 앞에서 전투를 벌일 구상은 하고 있었으며 바그라티온 같은 주전파들의 반발이 심한 데다 군의 사기상 계속 싸우지 않고 도망치면 지휘도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보로디노에서 우주방어를 치고 있었던 러시아군을 나폴레옹이 까부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사실 보로디노는 쿠투조프가 선택한 곳은 아니었다. 쿠투조프는 멀리 있어서 보로디노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전날 열심히 지형을 답사하다가 감기에 걸려 후방에서 명령만 내렸다고 한다.

레프 톨스토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로디노 전투는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군이 스몰렌스크-모스크바 사이 160여 km 중에 방어에 더 적합한 지형을 내팽겨치고 보로디노에서 붙은 점, 전투에서 가장 극심한 격전지인 러시아군 좌익의 보루 공사를 고작 하루에서 사흘 정도밖에 하지 않은 점, 좌익에 진을 친 이점을 이용 하려면 프랑스군의 좌익과 러시아군 우익이 맞붙는 칼라차 강에서 프랑스군의 도강을 저지했어야 하는데 이미 따라잡혀서 아무 간섭 없이 도강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나폴레옹의 추격에 러시아군이 보로디노에서 따라잡혔고 그로 인해 보로디노에서 격전이 이뤄졌다는 설을 펴고 있다.

아무튼 현재까지의 설에 의하면 보로디노에서의 양군의 병력은 대포의 화력까지 얼추 비슷했다고 한다.[15] 새벽부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어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가 러시아 우익에 유도 공격을 하는 척하면서 러시아군의 좌익이었던 바그라티온을 프랑스군의 우익이었던 포니아토프스키가 기병을 이끌어 우회하고 중군의 다부가 바그라티온을 협공하면서 시작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좁은 길로 우회하다가 길을 잃고 병력들이 숲속에 갇혀서 러시아 보병대에 저지당했고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좌익은 프랑스군의 집중공격을 받으며 버텨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러시아군의 병력 배치가 잘못되어 좌익에 병력이 적었고, 집중공격을 받자 우익의 드 톨리가 구원을 하러 와 개활지에서 프랑스군의 좌익이었던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측면을 노출당했으며 이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배치 실수로 패배한 전투라고 평가했다. 어쨌든 격렬한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고 양군은 너나 할 것 없이 탈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제국근위대의 투입을 거부했고[16]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개싸움이 되어갔다... 양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채 소강상태에서 더 피해가 큰 러시아군이 후퇴함으로써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보로디노 전투의 피해는 러시아군 사상자 60,000명, 프랑스군 50,000명으로 추산되는데 러시아군에서는 치명상을 입고 며칠 뒤 죽은 바그라티온을 비롯하여 적어도 장군급 6명이 전사했고 프랑스군에선 다부가 말에 떨어져 중상을 입고 실려갔으며 장군 11명이 전사했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양군은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기병 손실이 매우 컸는데 프랑스군의 작센 기병여단 전멸을 포함해 35,000필 이상의 군마를 잃었다고 한다.

비록 패배했지만 러시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대해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러시아 보병은 요새이며, 오로지 포격으로만 파괴할 수 있었다."
라고 높이 평가했다.

여기서 러시아군의 미스가 생기는데 쿠투조프는 전선에서 떨어져 보고를 받는 입장이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승전보를 보내 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 황실 주최의 감사기도회가 열린 건 덤이었다. 러시아는 전투 5일 후에야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고 고도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6. 모스크바 점령

나폴레옹은 보로디노 전투로부터 7일 후인 9월 15일, 유유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5일 후에야 후퇴 명령을 내린 탓에 모스크바 시에는 러시아군 부상자 10,000명이 치료를 받다가 도망도 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포로로 잡혔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이집트 원정 때처럼 마음껏 정복자 행세를 했다. 이집트에서 나환자 병원에 찾아간 것처럼 모스크바에서도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해서 기부했고[17] 정교회 사제들에겐 평소처럼 교회를 열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포고문으로 약탈을 금지하고 모스크바에서 흩어진 상인과 수공인들에게 공정한 통상과 안전을 보장하며 평소처럼 경제활동에 종사할 것을 주문했다. 나폴레옹과 참모들의 계산으론 모스크바엔 대군을 먹여살릴 반 년치 정도의 식량이 확보되어 있었고 이 정도면 모스크바에서 월동을 하며 항복 사절을 기다려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9월 14일~18일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발생 원인으로 프랑스 측에선 러시아인들의 야만적인 애국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폴레옹이 당시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알렉산드르 1세에 보낸 편지에서 비난하길 방화는 당시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직접 임명된 전시 모스크바 총독 로소톱친 백작의 소행이며 이는 프랑스가 방화범 400명을 체포하여 모두에게(?) 자백을 받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방화범을 몽땅 처형하고 나서도 아직 방화범이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화재 진압을 제대로 못했는지 다음날 또 큰 화재가 터져 모스크바의 4분의 3을 태워먹고 한때 나폴레옹이 머문 크렘린 근방까지 번져서 잠시 성밖으로 몸을 피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러시아 측에서는 프랑스군의 약탈 때문에 벌어진 화재였다고 주장하는데 현재는 의도적 방화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18]

나폴레옹의 관대한 정복자 코스프레도 별로 통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인구는 점점 줄어들었고 도시 안의 병력들은 위대한 군대에서 폭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출신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본전이나 뽑자는 생각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고관대작들의 집을 서로 차지하려고 했으며 술을 퍼마시고 멱살을 잡으며 싸웠다. 주민들도 학대했는데 총질은 기본이었다. 유서 깊은 교회들도 약탈당했기 때문에 점령군은 사제들에게 사탄 취급을 받았다.[19] 나폴레옹이 크렘린 경호에 방해가 된다며 성 바실리 성당을 두고
"저 모스크를 빨리 때려 부숴라."
라고 명령한 일이 소문으로 다 퍼졌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예전처럼 극장에서 연극과 오페라를 상영할 것을 지시했지만 병사들이 여배우들은 물론이고 반반한 여자들을 몽땅 약탈했기 때문에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말도 안 들어먹는데 장교들 말은 들을 리가 없었고 약탈 금지령도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장교들은 물론이고 헌병대까지 약탈병들에게 공공연히 살해당했다. 이런 풍조는 근위대에게까지 번져 근위대 병사들이 근무를 거부하고 약탈 대열에 합류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크렘린에서 나폴레옹 침실 앞 복도까지 약탈당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훗날 자신이 승리하지 못한 걸 부정하곤 했던 나폴레옹조차도 모스크바에 너무 오래 머물면서 병사들을 타락시켜버리고 말았다고 후회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맺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3번이나 항복을 권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군부와 황태제 콘스탄틴 대공, 황태후 마리야 페도로브나까지 강화를 권유했으나 알렉산드르 1세는 전투 지휘에선 엑스맨이었으나 정치면에선 굳건했다. 오히려 쿠투조프의 진영에 나폴레옹의 사절이 간 것을 알고 나서는 문전박대를 안 했다고 쿠투조프에게 직접 신하를 보내 질책까지 했다.[20]

약탈은 끝을 보이지 않았고 식량이 모자라자 모스크바 밖까지 병력이 흩어지면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생활은 종지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나폴레옹이고 장수들이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순찰 중에 어느 병사와의 대화에서 병사가
"지금이라도 신속히 후퇴해야 합니다. 황제 폐하."
라고 말해 이를 듣고 이틀 후에 전군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크렘린 궁전이라도 파괴한 후 퇴각하려고 궁 밑에 폭약을 잔뜩 설치했지만 후퇴 당일 비가 내려 탑 3개와 성벽 일부분만 무너지는 정도로 큰 피해를 면했다.

7. 대육군의 대몰락

나폴레옹은 후퇴하기로 한 날에 또 한 번 놀라게 되는데 군대의 어마어마한 짐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의 모든 짐마차를 동원해 (물론 나폴레옹 본인부터가 많이 챙기긴 했지만) 일개 졸병까지 금붙이[21], 사치품, 예술품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왔으니 행군 대열이 아니라 이삿짐 대열이었다. 군기가 이토록 개판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마차가 많으니 부상병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라며 애써 부정했다.[22] 4주 간의 모스크바 생활 동안 병력은 저희끼리 죽이고 이탈하며 약탈하러 나가느라 90,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10월 24일 마로야로슬라베트에서 일어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는 나폴레옹군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쿠투조프는 공격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주전파와 젊은 장교들의 등쌀에 못 이겨 공격한 것이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러시아는 이것으로 나폴레옹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스몰렌스크 방면은 이미 양군의 격전으로 초토화된 후라 현지 보급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해 남쪽의 칼루가와 툴라 방향으로 퇴각하지 않은 게 나폴레옹의 실책이라는 의견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갈린다. 구체적으로 칼루가와 툴라 방향은 빌나-스몰렌스크-모스크바 라인처럼 초토화를 당하지 않아서 식량이 있는 데다가 툴라에는 대포 공장을 비롯해서 러시아군의 기지창이 있었는데, 병력이 더 소모되기 전에 일전을 벌였어야 된다는 의견과 이미 군기와 전투력이 소모된 데다 러시아군이 허수아비도 아니니 무리였다는 의견이 갈린 것이다.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로 우회한 이유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10월 25일에 카자크 연대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가 척탄병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던 것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하술한 대로 나폴레옹이 자살용 독약을 가지고 다녔던 건 25일의 카자크 연대의 공격 이후였다.

한편 러시아군의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추격에 있어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첫째는 나폴레옹 군대 10명을 잡고자 러시아군 한 명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 둘째는 나폴레옹을 러시아 국경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공명심에 부풀었던 젊은 장교들은 쿠투조프를 겁 많은 노인이라고 욕하며 불만을 가졌다.

신중한 정도가 지나쳐서 쿠투조프가 나폴레옹을 전멸시킬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비판도 있으나 나폴레옹을 뒤쫓는 병력도 고생을 하며 손실이 심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나폴레옹군도 신속하게 후퇴했어야 하는데 앞선 짐들이 너무 많아 퇴각 속도가 느려져서 러시아군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이를 견제해야 할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이미 극심하게 소모된 데다[23] 지독한 식량난으로 말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 게다가 말이 없는 탓에 다량의 대포와 수송차들이 버려졌다. 이는 나폴레옹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포병대의 붕괴로 이어져 나폴레옹 몰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네 장군의 3군단 기병 병력은 사실상 전멸했고 뮈라의 병력도 겨우 수천 명으로 감소했다.[24]

극심한 식량난으로 탈주병들이 급증했지만 탈주병들은 잡혀서 포로가 되도 사는 걸 장담하기 어려웠다. 잔뜩 뿔이 나 있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거나,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 걸려 죽거나, 운 좋게 포로로 잡히더라도 러시아군은 포로들을 먹여살릴 의도도 능력도 없었다. 관대하게 봐주어도 포로 중에 절반 이하만 생존했다고 전해진다.[25] 프랑스군의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어 11월 8일 스몰렌스크에 겨우 도착했을 때는 생존자는 60,000명까지 줄어들었고 무장한 병력은 40,000명에 불과했다. 쿠투조프의 판단대로 공격하지 않아도 나폴레옹군은 알아서 무너지고 있었으며, 바짝 뒤쫓기만 해도 말고기에 화약을 뿌려먹다가 알아서 병들거나[26], 굶어 죽든가, 농가를 약탈하며 흩어지든가, 카자크에게 목과 약탈품을 조공으로 바치든가의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를 묘사한 참전 생존자들의 회고록들을 보면 ...와 같은 전우애는커녕 인간성마저 다 내다버린 듯한 광경이 벌어졌다.[27]

그래도 상당수의 병사들, 특히 네나 다부 같은 명장들이 지휘하는 군단은 어느 정도 군율을 유지하고 군대답게 행군을 했다. 특히 각자 살아남으려는 병사들은 얼마 못가 죽었지만 작은 빵조각이라도 나눠먹는 전우애를 가진 병사들은 꽁꽁 뭉쳐서 생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11월 6일, 나폴레옹은 본토에서 클로드 프랑수아 드 말레 장군이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사실 뒈졌음"이란 명분으로 10월 23일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받았다. 11월 28일, 드네프르 강의 지류인 베레지나 강을 건너기 위해 나폴레옹군이 배다리를 놓자 쿠투조프는 이때가 결정타를 먹일 때라 판단하고 미리 도하시킨 별동대와 협공하여 나폴레옹군을 급습했다(베레지나 강 전투). 이 전투에서 후위를 맡은 클로드 빅토르는 가능한 많은 병력을 도하시키려고 동분서주하며 사력을 다했으나 모든 병력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먼저 도하한 장군들과 병사들은, 강 건너편에 남겨진 수많은 전우들이 구원을 애걸하다가 끝내 도륙당하는 처참한 광경과 끔찍한 비명을 모두 생생하게 보고 들어야만 했다.[28] 이 전투로 인해 러시아 원정에서의 나폴레옹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조아킴 뮈라에게 뒷일을 맡기고 본국으로 서둘러 돌아갔지만 뮈라는 자신의 영지인 나폴리 왕국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잔존 부대를 떠넘기고 탈주해 버렸다(...). 12월 7일부터 9일까지는 영하 39도의 강추위가 찾아왔고 들판에서 노숙하던 병력들은 상당수 얼어죽었다.[29] 12월 7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 도착한 대육군 병력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릴 수 있었지만 카자크 척후병들이 나타나자 이틀 뒤인 12월 9일, 다시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빌뉴스 정도의 도시였다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지만 지휘관이 사라진 대육군은 사실상 통제되지 않는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병력들은 리투아니아와 프로이센의 국경인 네만 강(Neman River)에 도달했다. 이때 대육군의 최후미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미셸 네 원수였다.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내뺀 뮈라와 달리 네는 책임감 있게 후위대 역할을 수행하며 한명의 아군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코브노에서 최대한 지연전을 펼쳤다. 기병대는 진즉에 전멸했으므로 미셸 네 원수조차 머스킷을 들고 방진에 섞여 사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2월 14일, 마침내 모든 병사들이 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확신하자 네 원수는 머스킷을 마지막으로 한 발 사격한 뒤 강에 집어 던지고 유유히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넜다. 이 일화로 인해 네 원수는 '러시아를 떠난 마지막 프랑스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30]

나폴레옹이
"우리를 파멸시킨 것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날씨의 희생양이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러시아에 다녀온 프랑스 병사들이 "러시아의 추위는 혹독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의심없이 믿어 왔지만 1960년대 핀란드의 기상학자였던 J. M. Angervo 박사가 1812년 러시아의 초겨울은 평소보다 따뜻했다며 대략 화씨 35도에서 45도, 즉 영상 1.5도에서 7도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뉴욕대 교수였던 Leo Gershoy에게 즉각 반박을 받았다. 왜냐하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수기에서 10월 27일 영하 5도로 떨어지는 등 양쪽에서 강추위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교차 검증되기 때문이며 12월의 추위는 양측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론도 없었다. 또 다른 의견은 프랑스군이 패퇴한 것은 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이지, 기후적 요인이 아니다라는 의견이다. 왜냐하면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이 양쪽에서 얼어죽으면서도 군기를 유지하고 전투를 잘 벌였다는 근거에 기반해서이다.

11월 3일 쯤 첫 눈이 내리며 기온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영하 10도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정도의 온도에서는 여름옷을 입고 행군하며 노숙을 하는 병사들에게는 눈이 몸에 내리면 신발과 옷이 그대로 얼고 녹고 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폐렴등으로 죽어나갔다고 한다. 당시 종군했던 프랑스군의 군의관 Louis Vivant Lagneau에 의하면 11월 9일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15도까지 떨어졌다.. 11월 14일에는 영하 28도를 찍었는데 이미 이정도면 보급도 끊어지면서 대량으로 낙오와 동사가 발생했다. 나폴레옹이 11월 30일에 플레슈체니체에 도착했을 때 -30도 , 12월 5일 나폴레옹의 마차의 와인 병이 얼어터질 때는 -35도, 다음날 12월 6일 -37.5도를 찍고 12월 9일 빌뉴스에 도착할 때 쯤 -35도로 약간 따듯해졌다고 한다.

애초에 프랑스군 측에서는 추위의 원인을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고 러시아군에서는 자기들이 군사적으로 잘 싸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날씨에 의한 원인을 평가 절하하는 면이 있다는 점이 있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현재 날씨 추정이나 당시 수기에서도 양군에서 날씨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겪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의 참패는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었는데 모스크바 원정 병력은 본대 병력은 거의 전멸했고 말 200,000마리와 대포 1,000여 문을 잃었으며 아주 소중한 기병대와 포병대는 괴멸했다. 나폴레옹은 이후 신기에 가까운 행정능력과 카리스마로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병력을 복구(400,000명 이상)했지만 어떻게든 머릿수를 채울 수 있었던 보병 및 포병과 달리 잘 훈련된 말과 숙련된 기수가 핵심인 기병 전력은 나폴레옹 전쟁 끝까지 예전의 전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 손실은 꼼꼼하고 빠른 정찰과 재빠른 예비대 투입을 장기로 삼았던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마이너스가 되어 이후의 모든 전역, 특히 마지막의 워털루 전투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게 된다.

즉, 나폴레옹이 1808~15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250,000명을 잃긴 했지만 진짜 전력을 임팩트있게 제대로 날려먹은 건 러시아 원정이었던 것이며 이는 나폴레옹에게 당한 동맹국에게는 둘도 없는 큰 기회가 되었다.

다만 60만 대군 중에서 앞서 국경을 건넌 건 420,000명이고 본대와 모스크바로 향한 병력은 350,000명 정도이다. 러시아 국경을 넘어 도망친 병력은 9~120,000명 정도로 추산한다. 여기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병력 4~50,000여 명이 포함되고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살아난 병력을 감안하면 몽땅 러시아에서 죽은 건 아니다. 물론 본대 중에 80% 이상 집에 못 돌아간 건 맞다.

겨울철이 겹치고 기후가 혹독했기 때문에 특히 비전투 손실이 양군 모두 컸는데 러시아군도 주력인 1전선군이 120,000명에서 30,000명 또는 50,000명까지 감소했고 결국 1, 2전선군을 합쳐버렸다.[31] 벨로루시에 짱박혀서 산책만 하다 돌아간 오스트리아군마저 33,000명 중 20,000명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지경이었다. 러시아군 총 손실은 모두 합쳐 21~25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8. 기타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힐 때 러시아 정규군에게 잡혔다면 정말 천운 그 자체였다. 대열에서 낙오했다가 으슥한 러시아의 시골에서 분노한 현지 농부에게 잡혀 끌려간다고 하면 말 그대로 척추가 으스러질 때까지 인간 도르래가 되어 버리거나, 산 채로 불태워지거나, 사지가 찢겨진다던가 뜨겁게 끓는 물이 가득 찬 냄비 안에 강제로 얼굴을 처박게 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 이것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프랑스 병사들은 포로로 잡히느니 차라리 자살하려고 했다.[32] 패주하는 와중에 나폴레옹이 따로 사람을 보내 이런 행위를 중지하게 하라고 요구했고 나폴레옹 본인도 만약을 대비해서 자살용 독약을 가지고 다녔다.[33]

다만, 러시아 제국 정부는 최대한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으려고 애썼다. 알렉산드르 1세의 조카인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던 시점까지 문해율이 6%도 안 되던 러시아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가졌으며 신체 조건까지 훌륭한 프랑스 군인들은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보물들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포로들을 사로잡아 후방으로 이송하고 이들을 정착시킬 계획을 수립했으며 실제로도 러시아 정규군은 많은 수의 포로들을 잡아들였지만 패주하는 프랑스 군인들이 서쪽으로 무질서하게 도주하면서 각지의 농민 민병대들에게 사로잡혀 조각나 버리거나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등 사태가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프랑스군에게 완전히 적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상당수의 낙오병들이 러시아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 현지에 정착해 살아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 5인조인 세자르 큐이의 아버지, 앙투안 큐이다.

안타깝게도 프랑스 군인뿐만 아니라 러시아 귀족 가문에 있었던 많은 프랑스인 가정교사[34]들도 제노포비아 때문에 같이 후퇴하다가 많이 죽었다.[35]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독일인과 영국인들도 의사나 엔지니어로 러시아에 많이 와 있었는데 1812년 6월부터 외국인을 상대로 한 폭행과 약탈이 급증해서 순수 러시아인에 귀족이어도 외국어를 쓰면 거리에서 린치를 당하고 외국인들은 아예 첩자 취급했기 때문에 같이 퇴각했다.

그러나 조국전쟁 당시에나 이랬지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외국어와 외국 문화 애호 경향이 다시 살아나서 19세기 내내 대다수의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할 줄 알아도 러시아어는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는데 거의 5~6개 국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 외교관이 모국어를 해보라고 하면 겨우 몇 문장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전후 세대인 푸시킨과 조국전쟁을 다룬 소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조차 부모의 교육방침에 따라 어릴 적부터 프랑스어를 가까이 해야 했다.

조국전쟁의 영향을 받아 표트르 대제 이래 러시아 문화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서유럽주의를 비판하고 러시아의 전통문화를 회생시키려는 슬라브주의가 생명을 얻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로 가서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들이 데카브리스트가 되어 조국 러시아의 개혁을 꿈꾸었다.

러시아에서는 이후 이 전쟁을 1812년 조국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줄여서 조국전쟁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훗날 러시아는 또다른 조국전쟁을 훨씬 스케일이 커진 버전으로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이 바로 대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으로 잘 알다시피 20세기에 나치 독일 소련에서 나폴레옹과 비슷한 꼴을 당한 그 전쟁이다. 실제로 나치 독일과 소련의 대결인 독소전쟁이 이 전쟁과 비슷한 국제 구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36]

흥미롭게도 이들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한 날은 6월 22일로 프랑스군이 침략한 날인 6월 24일과 비슷했으며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날도 8월 10일경으로 양쪽이 모두 같았고 둘 다 수도를 못 공략한 것도 같았다.[37] 단, 다른 점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비록 수도는 아니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의 상징적인 도시[38]였던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위해 그 길목에 있는 거점 도시들만 점령한 반면 히틀러는 유럽 러시아 지역을 모두 점령해서 레벤스라움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진군하는 지역마다 소도시든 대도시든 상관없이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물론 그 덕분에 나폴레옹보다 3개월을 더 쓰고도 모스크바의 지척에서 후퇴했지만... 한겨울인 12월 2일까지도 진격했으며 당시 모스크바에서 30km 지점인 힘키 부근에 다다랐다. 당시 힘키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던 노선표 중 하나의 종점이 붉은 광장이었고 얼어붙은 망원경으로 겨우겨우 크렘린궁의 첨탑이 보였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이케아가 들어가 있다. #

2021년 2월 나폴레옹 전쟁 당시 죽은 후 러시아에 묻혀 오랜 세월이 지나 발굴된 양측 병사들의 몇몇 유해가 200년만에 프랑스로 송환되거나 제대로 다시 묻혔는데 양국의 대표단은 당시 군복을 입고 짤막한 행사를 가졌다. #, #

단순히 군사력의 손실을 떠나 이 원정은 프랑스군 수뇌부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나폴레옹에게 '용자 중의 용자'라고 불릴 만큼 전략적인 식견은 부족해도 전술적인 면모는 뛰어났던 미셸 네는 러시아 원정 이후 급격하게 사람이 망가졌다. 이전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책이 계속 이어졌으며 결국은 나폴레옹을 배신하고야 말았다. 그러더니 백일천하 때는 나폴레옹에게 낼름 달라붙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으며 끝내 워털루 전투에서 대실책을 저지르고 나폴레옹과 자신의 몰락에 종지부를 찍으며 총살당했다. 현대의 연구가 중에는 미셸 네가 러시아 원정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보고 있는 이들도 꽤 있다.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뻘짓만 반복하다가 나폴레옹에게 결국 거부당하고 끝내 총살당한 뮈라도 비슷한 케이스다.

나폴레옹 본인도 큰 충격을 받았던지, 전황을 듣고 협상하러 온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에게 "러시아 원정에서 죽은 병사 대부분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다!"(=너희 독일인들이 제대로 못 싸워서 우리가 졌다)는 아연실색할 망언을 퍼붓는 바람에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에게 "그걸 지금 독일인에게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외치기까지 했다.[39] 이후로도 둘은 서로 폭언을 내세우며 싸웠는데 나폴레옹은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는지 그 동안 보여준 외교력은 어디로 갔는지 인내심을 잃고 폭주하는 모습을 보였고 협상은 결렬된다. 나폴레옹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현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갈 언사는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걸 생각해보면 러시아 원정 이후의 나폴레옹은 확실히 이상해진 것이 맞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나폴레옹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태였다. 러시아 원정으로 병력을 대량으로 상실해서 소년병, 경찰, 향토 방위대, 기타 등등 잡스러운 인력으로 병력을 채워야만 했고[40] 그 병사들이 먹고 마실 식량도, 들려줄 무기도 부족했다. 사실 식량은 나폴레옹 전쟁 언제나 부족했다

9. 미디어

레프 톨스토이의 《 전쟁과 평화》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41] 《전쟁과 평화》에서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은 사실적이고 냉철하게 쓰였다. 톨스토이[42]는 보로디노 전투 현장을 여러 차례 직접 방문하고 전투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당시 러시아 원정 기간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전투 보고서와 내부 문서들을 문서고에서 발견하여 냉정하게 분석했다. 이를 기반으로 톨스토이는 역덕후, 밀덕후, 프빠, 나폴레옹빠들이 부르짖는 '이랬으면 나폴레옹이 이겼다'는 If 떡밥들을 분쇄하며
"나폴레옹은 전술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고, 매 상황 최선을 다했다. 러시아 원정은 애초에 무리였으며 나폴레옹은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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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원작으로 1956년에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전쟁과 평화>는 당시로서는 대작이고 소련에서조차 환영받으며 흥행했지만 스토리가 약한 게 흠이었다. 분량상 7년에 걸친 수천 페이지의 소설을 3시간 정도에 담으려니 내용 연결이 안되었고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50세나 먹은 헨리 폰다가 소설상 20대 극초반의 주인공역에 캐스팅된 것이 큰 흠이었다... 나타샤 역의 오드리 햅번 캐스팅은 모두가 입을 모아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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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장 러시아(당연히 당시에는 소련)에서는 우리나라 작품을 저렇게 망쳐놓았다고 일부 불만도 있어서 제대로 만든다며 마음을 먹고 나중에 <워털루>를 감독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가 감독을 맡아서 1966년부터 1967년까지 4부작으로 나눠 제대로 만들었다. 상영시간은 431분에 달하며[43] 아직도 깨어지지 않아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은 영화상 최다 동원 엑스트라로 《 기네스북》에 오른 750,000명이라는 가공할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우라돌격을 그야말로 실감나게 묘사하며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830만 루블이라는 당시 가공할 제작비로 만들었는데 소련 내 흥행만으로 5,800만 루블을 벌어들였고[44] 해외로 많이 수출되어 원작을 가장 잘 그렸다는 호평을 받았다. 영상 4분 15초부터 보면 된다... 저 가공할 병력이 죄다 실제 사람이다. 이때의 스텝들을 활용한 서구-소련 합작 영화가 일종의 후속작 격인 < 워털루>. 그러나 너무 길어서(총 405분, 약7시간!) 개봉은 고사하고 TV 미니시리즈로 봐야 한다. 한국에서 방영할 때도 미니시리즈로 방영해 줬다. 문제는 미니시리즈로 하면 김이 샌다는 점이다. 역시 대륙의 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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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1972년에 모두 15시간에 이르는 20부작 드라마로 만들기도 했다.

< 혼블로워> 시리즈의 결전! 발트해 부분도 러시아 원정을 그리고 있다. 약간 대체역사적인 상황인데 나폴레옹의 분견대가 발트해를 통해서 상트페테르스부르크를 기습하여 러시아 황제를 잡으려고 하고 그것을 혼블로워의 원정군이 막는 스토리.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작품 < 1812년 서곡>은 바로 이 대전쟁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인데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가 각각 포함되어 있다.

2012년에 러시아에서 조국전쟁 200주년 기념으로 보로디노 전투를 재현하는 대규모 리인액트먼트 행사를 치렀다. # 더해서 새로운 박물관도 개장했다.


[1] 실제로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의 실질 임금이 3분의 1로 감소했고 미국이 프랑스에 붙어서 대미 수출이 10분의 1로 감소한 데다 네드 러드 같은 기계 파괴 노동자 폭동 때문에 영국에선 전시도 아닌데 수도 런던에 병력 50,000명을 배치해야 했다.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의 웰링턴의 병력과 맞먹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잘 싸우고 있었던 웰링턴으로부터 4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급히 차출해서 국내에 배치해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해안 항구 도시들의 피해가 더 막심했다. [2] 직전 러시아 수출량의 30%가 영국 대상이었다. [3] 당시 유럽에서 쌀은 주식이 아닌 건조야채로 대체될 수 있는 부식으로 취급되었다. [4] 당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을 뿐더러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는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 브라질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도 나폴리 왕국은 조아킴 뮈라에게 넘어갔지만 시칠리아는 여전히 보르본 왕조의 손에 있었고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시칠리아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5] 여담으로 이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 공국 프루트강 동쪽 영토를 할양했고 이는 오늘날 루마니아 몰도바가 분단되는 원인이 되었다. [6] 전쟁론》의 저자로 프로이센 군인이었으며 러시아 원정 때 러시아군 장군 바클라이 드 톨리의 진영에서 참모를 지냈다. 1830년의 유고집이 러시아 원정의 사료로 많이 쓰인다. [7] 1809년 쇤브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게서 빼앗은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괴르츠 백국, 옛 베네치아 공화국 달마티아를 합병해 만든 속주. 나폴레옹 전쟁 종전 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반환되어 일리리아 왕국이 되었다가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행정 개편에 따라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트 제국도시, 달마티아 왕국으로 다시 나뉘었다. [8] 말은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동물이라서 아무 먹이나 줘선 안 된다. 특히 힘을 많이 쓰는 군마는 곡물을 먹여야 덩치와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데, 풀은 칼로리와 영양소가 적어서 군마에게 풀만 먹이면 오히려 살이 빠진다. 거기다가 하루 종일 행군해야 할 판에 여유롭게 풀 뜯도록 놔둘 수도 없었거니와 들판의 잡초를 마구 뜯어먹다가 독초를 먹어서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초가 지붕 같은 묵은 잡풀을 먹이면 내장에 가스가 가득 차 터져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보로디노 전투쯤까지 살아남은 군마들은 대부분 비쩍 말라서 돌격하는 속도가 원래라면 빠르게 걷는 정도의 속도였다고 한다. [9] 너무 많은 병력이 밀집된 탓에 우물이 차오르는 속도보다 마시는 속도가 더 빨랐다. [10] 러시아의 악명높은 라스푸티차와 보급선을 중간에서 털어먹는 카자크 기병들 말고도 기술 자체가 그랬다. 지반이 약하다 보니 무거운 4두 마차보다는 가벼운 2두 마차를 써야 하는데 이러면 효율이 떨어지고... [11] 위에서 말했듯이 대육군은 다국적군이라서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12] 적군과는 반대로 보급선이 점점 짧아졌고 현지 사정에 밝았기 때문이지만 러시아군에서도 급속하고 무리한 후퇴 속도 탓에 탈영과 탈주, 이탈자가 많이 발생하여 뭉쳐 다니며 농촌을 약탈하고 다녔다. [13] 알렉산드르 1세의 2살 연하 동생이었다.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황태제가 되었으나 알렉산드르 1세 사후 귀천상혼을 이유로 제위에 오르지 않고 막내동생 니콜라이에게 제위를 넘겼다. [14] 하지만 훗날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콘스탄틴 대공도 파견했고 인사권과 실무 전술에까지 간섭을 했으며 참모장 베니히센을 스파이로 활용(?)하여 쿠투조프를 감시했다. 쿠투조프는 콘스탄틴 대공한테는 동문서답하고 베니히센에게는 황제께서 여기가 더 필요하시다는데 하면서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등 능구렁이 같은 실력으로 황제의 간섭을 피해나갔다. 애초에 황제는 쿠투조프를 음흉한 노인네라며 싫어했기 때문에 급한 상황에 몰려서야 계책을 쓴 것이다. [15] 양측 모두 120,000~160,000명 정도. [16] 여러 설이 있지만 나폴레옹은 충성심이나 전력이 미덥지 못한 동맹군 및 프랑스군의 2선급 전투병력의 손실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으나 수도 파리에서 2,000km나 떨어진 타국에서 근위대는 자신의 목숨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아꼈다는 설이 유력하다. [17] 원정에 앞서 현지 조달을 위해 다량으로 위조 지폐를 찍어서 가져갔다. 이 위조지폐가 프랑스 점령지에 뿌려지면서 전후 러시아의 금융, 경제가 휘청거렸고 안 그래도 가치가 불안정했던 러시아의 태환 화폐인 아시그나치야의 가치가 폭락해 버렸다. [18] 로소톱친은 당시 방화 명령을 내렸음을 부인했지만, 결국 나중에 인정했다. [19] 일설에 의하면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은 나폴레옹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며 모스크바 시내에는 사악한 적그리스도인 나폴레옹을 몰아내자는 전단지가 뿌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20] 한 번은 답장을 보내긴 했는데 그 내용이 뭐냐면 '내가 보고 싶으면 베링해까지 쫓아와 봐라.' [21] 러시아 원정시에 위조지폐를 엄청나게 뿌린 탓에 은화 값이 폭락해서 은붙이는 잘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금붙이를 챙겼던 사람들은 나중에 리투아니아로 퇴각한 후 방세를 낼 수 있어 살았고 안 챙겼던 사람들은 밖에서 동사했다. 방세는 무조건 하룻밤에 금화 1닢(2020년 한화로 대략 75,000원)이었다. [22] 실제로 나폴레옹은 부상병들을 차마 버리고 갈 순 없어서 마차에 태우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마차를 담당하는 프랑스군들은 부상병을 태우려면 자신들의 약탈품을 버려야 했으므로 큰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일부러 마차를 거칠게 몰아 부상병들이 떨어져 죽게 하는 등 인간으로서의 도의도 저버리는 행동을 일삼았다. 떨어진 부상병들은 다음 마차 수레바퀴에 깔려죽거나 아니면 길가에서 얼어죽었다. [23] 보로디노 전투 이후 뮈라에게 쿠투조프를 추격하라고 또 기병을 쓴 점도 컸다. [24] 이 때문에 러시아군과 붙으면 보병 대 보병으로는 우위였지만 적을 추격•섬멸할 기병과 화력 지원을 해줄 대포가 없어서 그저 쫒아내는게 전부였다. [25] 근현대사에서 가장 포로 학대가 심한 군대 중 하나였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 사망률이 40.4%였는데 그것을 관대하게 봐주었다는 것임에도 훨씬 뛰어넘었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독일군 포로 사망률은 최대치가 57.5%다. [26] 화약의 질산칼륨 성분 때문에 소금간 대신 쳐서 먹었다고 한다. 물론 이 정도까지 가면 막장이다. 러시아 경기병대의 구호는 '적에게 말고기를 먹이자'였다. [27] 유발 하라리. 《극한의 경험》, 옥당, 2017, 434~7p. [28] 그레고리 프리몬-반즈, 토드 피셔, 《나폴레옹 전쟁 - 근대 유럽의 탄생》, 플래닛 미디어, 2009. [29] 이 1주일간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추위와 강풍이 몰아쳤다. 당시 참전용사들의 회고록에는 공통적으로 '얼음조각이 공기 속에 섞여서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30] 그러나 전술된 극한의 경험들이 네에게 상당히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이후 벌어지는 전역들(대표적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충동적인 실수를 자주 저지르게 된다. [31] 그 덕에 바클라이 드 톨리는 자연스레(?) 경질되어 1813년 러시아군 총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이 삽질로 인해 알렉산드르 1세가 경질하기 전까지 백수 신세였다. [32] 아주 아주 운이 좋은 경우 숨겨주거나 먹을 걸 주는 경우도 있긴 했다. 아예 동네 귀족의 집에 눌러 앉아 프랑스어 교사로 채용된 희귀한 경우도 존재한다. [33] 이 약은 훗날 나폴레옹이 패전하고 엘바 섬에 가기 전에서야 꺼내 먹었는데 그 때는 약이 너무 오래돼서 효과가 없었다. [34] 귀족은 물론 상공업자들도 실용적, 그리고 문화사대주의적인 이유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인 가정교사를 많이 고용했다. 《 전쟁과 평화》에서는 러시아 귀족들이 러시아어에 서툴러서 프랑스어를 쓰면 거리에서 얻어맞을까봐 뒤늦게 러시아어 과외를 받거나(...) 술집에서 서로 프랑스어를 쓰면 벌금을 내기로 하는(이때 자국어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골때리게도 러시아어로 '벌금'이란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벌금'을 프랑스어로 썼을 정도(...)였다.) 장면이 나온다. [35] 러시아 소설 《 대위의 딸》에도 이런 식으로 러시아 귀족 가정에 눌러앉게 된 프랑스인 가정교사가 등장하는데 본명 대신 별명인 '무슈'로 불린다. 다만 작중에서 무슈가 받는 취급은 매우 나빠서 주인공 그리뇨프의 충직한 하인인 사베리치는 무슈를 가리켜 "그 망할 무슈, 저주받은 이교도 놈"이라며 미워하며 또한 무슈는 작품 속에서 매일 술만 찾는 무능한 주정뱅이로 묘사되어 있다. [36] 서유럽을 제패 → 영국 공격이 지지부진 → 러시아에 시비걸러 감 → 러시아의 반격 및 동계 대비와 군수 부족 → 털림 → 망함(…) [37] 사실 러시아 원정 당시의 수도는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바로 그 유명한 레닌그라드다)였다. 즉 나폴레옹은 상징적인 도시는 점령했지만 수도는 공략하지 못한 것이다. [38] 참고로 모스크바는 13세기에 세워진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부터 수도였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도였던 러시아 제국 시절에도 제2의 수도나 마찬가지였다.(심지어 러시아 제국 시절에도 100여 년 동안 모스크바가 수도였다.) [39] 당시만 해도 '독일'이란 지금의 '아랍'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나라의 이름이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의 총칭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계 국가들이 설립한 독일 연방의 의장국도 신성 로마 황제와 로마왕(독일왕)을 배출한 오스트리아였으니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인 정도가 아니라 독일을 대표하는 독일의 리더와도 같은 나라였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괜히 오스트리아부터 공격한 게 아니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은 보오전쟁과 연이은 북독일 연방 성립 이후이며, 정치적인 분리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도 독일인의 정체성이 없어진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 이후부터다. 독일의 대표자였던 오스트리아가 정작 국가로서의 통일된 독일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40]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가 되면 끝나지 않는 전쟁과 그로 인한 계속되는 강제 징집에 환멸을 느낀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늙은 과부와 결혼하거나 어금니를 뽑아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온갖 종류의 징병 회피가 판을 치게 된다. [41] 지금은 소설로 분류하지만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소설도, 서사시도, 비문학 연대기도 아닌 기존의 어느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창작물이라고 분류했으며 지인에게는 《 일리아스》 비슷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42] 톨스토이는 카프카스 전선에서 포병 하사관으로 현지 임관하여 크림전쟁에 참전하고 성 게오르기 훈장까지 받은 베테랑 군인이었다. [43] 소련 영화의 문제점 중 하나인데 예술성을 너무 중시하다 보니 4부작, 5부작 이런 식으로 7시간, 8시간, 10시간짜리 영화가 넘쳐났다. [44] 당시 소련의 영화표 가격이 50코페이카(100코페이카=1루블)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1억 명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