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고려인 출신 정치인.2. 생애
1909년 5월 7일, 연해주 소코토프군의 빈농집안에서 태어났다. 1922년 한인 소학교 졸업 이후 1923년 러시아 소학교 4학년에 편입되어 1923년에 졸업했다. 러시아 초중을 거쳐 1930년 러시아 고중을 졸업했다. 군인이 되고 싶어했으나 가난한 집안에서 반대했으며 극동 지역에는 사관학교도 없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학교 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옴스크 시로 이동하여 노동자로 일해서 돈을 버는 한편 추천서를 받아서 1932년에 옴스크 육군사관학교에 졸업, 페르미 항공학교로 전과하는데 성공했고 1934년에 졸업, 소련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배치되었다.194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소련군 지원병으로 파견되어 1937년까지 스페인 전선에서 복무했다. 고희만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프랑코군의 전투기를 5기나 격추시켰다나? 하지만 공화국 쪽의 전세가 기울면서 프랑스 국경을 통해 소련으로 귀환했으나 강제 예편을 당했다. 고희만의 상관인 이바노프 대좌가 고희만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게 해달라고 상부에 추천서를 썼으나 적기훈장만 받고 제대당했다. 그나마도 일본 스파이로 몰려서 처형당할 뻔한 것을 곱게 제대시켜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협박에 고희만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1937년 12월에 고려인 강제 이주가 시작되면서 타슈켄트로 이주당했다.
타슈켄트 이주 이후 전직 조종사로 1년에 600원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으며 타슈켄트 비행기 84호 공장에 배치되었으나 스스로를 소련인으로 여겼던 고희만은 스탈린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겨 상심이 컸다고 한다. 이후 휴가를 내고 1938년 새해를 모스크바에서 맞이한 다음에 한달간 친척들과 만나며 휴식을 취했고, 배우자 김영선을 만나서 결혼했다. 조선인들은 차별을 많이 당하였으나 그래도 고희만은 조종사 출신이라서 당 간부부의 신분보증을 받았기 때문에 대접이 좋았으며 비행기 공장 생산 공정기사로 1년간 일하다가 이후 생산 공정기술 통제기사로 승진하여 2년간 일했다. 1943년, 직장장으로 승진했고 중앙 휴양소에서 쉴 권리도 몇차례 얻었다.
1945년 4월, 모스크바에서 고희만을 즉시 모스크바에 보내라는 급전이 내려왔고 고희만은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다. 모스크바 서부의 정찰학교에 배치되어 3개월간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조선어 등을 공부한 고희만은 8월 초에 다시 25군에 배치, 8월 말에 평양에 입성했다. 이후 소련군정에서 산업, 공업계통 통역원을 하였고 1946년 4월에 성진제철소 지배인에 배치, 1947년에는 흥남 화학공장 지배인에 배치되어 1948년까지 일했다. 이후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초대 내각에서 산업성 부상 겸 군수품생산 관리국장을 맡았다. 공업기술연맹부위원장도 역임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 한동안은 근무를 하다가 9월에 유엔군이 북상하면서 아수라장 속에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고히만이 낙오된 간부들의 가족들을 자동차를 보내서 구해주었다. 전쟁 중 중공업성이 설치되자 초대 중공업성 부상을 맡았으며 휴전 이후 중앙위원회 건설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전후복구 계획에 전념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57년에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에 건설부장에서 해임되어 1957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당 산업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8월 종파사건 이후 대규모 종파주의자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소련계인 고희만도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산업부가 중공업부와 경공업부로 분리되면서 산업부장에서 해임, 1958년 4월에 림업성이 신설됨에 따라 9월 11일, 고준택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2대 림업상에 임명되었다.
장학봉의 책에 따르면, 1959년 립업소 소장으로 좌천되었으며 1960년에는 입업소의 일개 노동자로 떨어졌다. 하지만 로동신문 보도를 보면 1960년 4월 30일, 림업성이 폐지되면서 그냥 림업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숙청당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고희만의 아내 김영선이 꾸준히 양강도의 립업소에서 구르고 있던 고희만 면회를 갔으나 고희만은 1961년 9월에 아내에게 자신을 더 이상 찾아오지 말고 소련으로 피하라고 말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영선은 소련 대사관에 요청하여 가까스로 귀국 비자를 얻어냈고 귀국 후 소련 당국으로부터 정착을 도움받았다.
1962년에 김영선은 고희만을 찾으러 다시 북한에 갔지만 양강도 립업소에서는 1962년 2월에 당중앙에서 고희만을 이미 데려갔다고만 할 뿐[1]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쇠였다. 귀국 후 김영선은 소련 국방부, 외무부, 소련공산당 조직지도부, 심지어 김일성에게까지 편지를 써서 남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으나 모르겠다는 대답만 받았고 남편을 찾지 못한 채 1978년에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서울: 경인문화사, 2006).
[1]
행방불명 되었으니 살아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살아있을 가능성은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히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