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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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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원소를 따르기 전까지2.2. 원소 휘하에서2.3. 관도대전2.4. 죽음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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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원호(元皓)로 기주 거록군 출신, 일설에는 발해군 출신.

원소를 섬긴 호족 출신[1]의 모사. 원소의 세력 확대에 크게 기여해 원소군의 대표적인 모사가 되었으며, 조조군의 순욱과 비견될 만큼 뛰어난 재사로 평가받았다.

2. 생애

2.1. 원소를 따르기 전까지

전풍은 성장하면서 재주가 뛰어났고, 웅대한 계략은 다수의 눈을 집중시켰다. 젊었을 때 아버지를 잃어 상중에 매우 슬퍼했으며, 세월이 지나도 이가 드러날 정도로 웃지 않았다. 박학다식하여 주(州)의 사람들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처음엔 태위(太尉)의 처소에 초빙되어 무재(茂才)로 추천되었고, 이후 시어사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환관이 조정에서 득세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전풍은 심배와 더불어 기주 한복을 섬겼는데, 두 사람은 정직했기 때문에 한복에게 소외되었다. 191년, 원소는 한복의 세력을 흡수한 후 좋은 말로 전풍을 초빙하였다. 전풍은 황실이 곤란에 처했고, 난세를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소에게 갔다.

2.2. 원소 휘하에서

원소는 전풍을 별가, 심배를 치중에 임명하여 중용하였다. 훗날 원소의 명령으로 한복을 섬겼던 경무 민순을 죽였다.

그 해 겨울 공손찬 계교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이기고 있던 원소가 방심하고 적은 수의 병사만 이끌고 쉬던 도중 공손찬군에게 공격받아 위기에 쳐했다. 이 때 전풍은 원소에게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소는 투구를 내팽개치면서[2] 도망치는 대신 비장하게 싸우고자 했다. 이에 병사들이 화살을 마구 쏴대서 공손찬군이 그 기세에 주춤했고, 그 와중에 국의가 이끄는 주병력이 오자 마침내 달아났다.

196년, 조조가 헌제를 허도로 맞이하였는데, 그 해 전에 전풍이 먼저 헌제를 맞이할 것을 원소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원소는 헌제를 견성으로 모셔올 것을 조조에게 권유했다. 조조가 이를 거절하자 전풍은 원소에게 허도를 습격해 헌제를 데려올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조조가 장수를 포위하고 있을 때 전풍은 다시 한 번 원소에게 허도를 습격해 헌제를 맞이할 것을 진언했지만, 원소군 휘하의 탈주병이 이 계획을 조조에게 전했기에 조조는 포위망을 풀고 급히 돌아왔다.[3]

정사 <원소전>에 주석으로 달린 <전풍전>에 따르면 원소는 전풍의 모책을 이용하여 공손찬을 평정했다. 원소는 전풍 덕분에 숙적을 물리치고 하북의 패자가 된 것이다.

2.3. 관도대전

원소는 허도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는데, 심배· 봉기에게 군사를 통괄하게 하고 전풍· 순심· 허유를 참모장으로, 안량· 문추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여기서 전풍은 저수와 함께 지구전 전략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심배· 곽도가 주장한 단기결전 전략을 채용하였다.

원소의 군대 동원 소식을 접한 공융 조조에게 전풍과 허유라는 지혜로운 자가 참모가 되었으니, 승리하기가 어렵겠다고 걱정하자, 순욱은 전풍이 억센 인물로, 필히 윗사람을 거스를 것이라고 평했다.

200년, 유비 서주 자사 차주를 살해, 패성을 점령하고 조조를 배신하자 조조는 유비를 직접 치기 위해 출정한다.[4] 전풍은 이 때가 조조의 뒤를 칠 호기라고 보고 원소를 설득했지만[5], 원소는 자식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전풍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평생 찾아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겨우 어린 아이 병 때문에 놓치다니 애석하다고 말했고 이에 원소가 분노하며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원소가 조조를 치려 하자, 전풍은 원소에게 지구전을 펼치고 농사를 짓고 기병을 운영해 성동격서로 조조를 지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즉 서서히 말려죽이자는 건데, 앞서 서둘러 조조를 치자고 하던 것과 비교하면 갑자기 말을 바꾼 것 같지만 그저 상황이 달라졌기에 그런 것 뿐이다. 하여튼 그렇지만 원소는 조조와 전면전을 펼쳐 단기결전으로 빠르게 끝내고자 했다. 전풍은 재차 간곡하게 원소에게 진언했는데 결국 원소는 크게 노해서 군기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전풍이 종군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는 원소가 이미 진 것이나 다름 없다며 기뻐했다.

2.4. 죽음

원소군이 조조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오자, 장군들은 모두 울면서 이전에 전풍의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전풍에게 "주공(원소)이 이젠 그대를 중용하실 걸세"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전풍은 고개를 저으며 "주공이 겉으론 관용이 있지만 속으로는 의심이 많아, 만약 승리했다면 기쁜 마음에 나를 사면하겠으나 패배하여 날 볼 면목이 없을 테니 더 이상 살 희망은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소전의 주석 선현행장에 의하면, 원소는 "기주 사람들은 내가 패배한 소식을 듣자 모두 나를 걱정하였소. 다만 전풍만은 나를 꾸짖었기에 다른 이와는 다르오. 나는 이제 전풍의 얼굴을 부끄러워서 볼 수가 없소."라고 말했다. 이때 봉기는 "전풍은 공이 패한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적중한 것에 기뻐한다고 합니다."라고 참언(讒言)을 했다. 원소는 이 말을 듣고 전풍을 해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전풍의 예상대로 패하고 돌아온 원소는 전풍을 죽였다.[6] 이때 원소는 측근들에게 말하길, 자신이 패했으니 전풍에게 조소당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관도대전만 봐도 그는 두 번이나 예리하고 유용한 계책을 냈지만 원소는 묵살했다. 이것을 두고 조조는 "전풍의 계책이 채택되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원소일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재사로서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수준. 심지어는 삼국의 건국세력이 아닌 인물들에겐 평가가 매우 박했던 진수조차도 전풍과 저수의 책략은 장량 진평 한고조에게 헌상한 책략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순욱이 원소 세력을 깔 때도 전풍은 "강인하나 윗사람을 거스르며"라 비판했다. 당시 순욱의 비판들은 소름돋을 정도로 맞아 떨어졌는데, 그가 평한 원소군의 다른 무장들의 단점은 부패와 비리가 심하다는 것 ( 허유), 계획성이 없고 침착하지 못하다는 것 ( 심배), 주변의 말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 봉기), 지혜와 임기응변이 부족하다는 것 ( 안량, 문추) 등등이었다. 반면, 전풍에 대해서는 능력이나 도덕적 측면이 아닌, 너무 강직하여 윗사람과의 대립에서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는 것이 흠이라는 평을 한 것이다. 순욱의 평가는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든 상대의 단점을 강조하며 깎아내리려 했을 터인데, 전풍의 단점을 강조한답시고 이야기한 게 겨우 "지나치게 강직하여 윗사람과 부딪친다" 정도밖에 안되는 것이다. 물론 순욱의 말대로 전풍의 성격이 본인에게 독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주군의 관대함의 크기에 따라서 문제도 아닐 사항이다.

관도대전에서 그가 내놓은 계책이 번번히 무시당한 것에 있어서는 "강직하여 윗사람을 거스른다"라는 순욱의 인물평을 기초로, 다소 독선적인 면이 있던 원소와 사이가 틀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전풍 역시 하북에 나름 세력기반을 갖춘 호족 출신이었던 만큼, 원소 입장에서는 전풍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때문에 원소가 전풍을 무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단 주인하고 입장이 틀어지고 나니 전풍의 대쪽 같은 성격이 더더욱 안 좋게 작용을 한 것. 전풍 입장에서는 원소의 선택이 당장 눈에 보이는 큰 문제가 없고, 어떻게든 성공은 했어도 큰 삽질을 하는 셈이니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소 입장에서는 이런 전풍의 태도가 좋게 보일 리가 없고 이게 더더욱 둘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드는 건 당연하다. 결국 관도대전의 패배 이후 분노한 원소의 분풀이와 봉기의 부추김으로 옥에서 죽고 만다.

3.2. 부정적 평가

그러나 당대 인물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사서상에 기록되어 있는 전풍의 계책들은 다른 세력의 특급 참모들이 내놓은 계책에 비해 어딘가 어설픈 측면이 많다. 우선 정사상에 기록된 전풍의 계책과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계교 전투 당시 원소를 포함한 수십명의 병졸들이 2천명의 공손찬군에게 포위되자 당장 후퇴해야 한다고 건의
▶ 원소는 도망을 치는 대신에 투구(혹은 모자)를 벗어던지고 앞장서서 적들을 공격함. 때마침 공손찬군을 추격하던 국의가 원소에게 돌아와 지원을 해주는 덕분에 무사히 탈출

2.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자 조조보다 먼저 협천자를 해야한다고 건의
▶ 원소의 거절로 무산됨

3. 조조를 기습하여 헌제를 빼돌리도록 2번정도 건의(1차는 195년경으로 추정, 2차는 한창 조조가 장수와 결전을 벌이던 198년)
▶ 둘다 원소의 거절로 무산

4. (구체적인 방법은 전해지지 않으나) 공손찬을 무찌를 방도를 건의
▶ 원소는 수락. 이후 공손찬을 평정하고 하북의 패자로 군림하게 됨

5. 조조 유비를 토벌하기 위해 서주로 동진하자, 그 틈을 노려 조조의 배후를 급습해야 한다고 건의
▶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거절 《원소전》 or 군사를 보내긴 했으나 우금에게 격파당함 《우금전》

6. 원소가 본격적으로 조조를 공격할려고 하자 "지금은 싸울때가 아니니 군대를 잠시 쉬게 해야한다" or "정 싸우더라도 지구전을 펼쳐 천천히 조조를 공략해야 한다"고 건의
▶ 원소는 분노하여 전풍을 옥에 가둠

여기서 원소의 안전 때문에 대피할 것을 주장했던 1번 상황과 원소가 적극적으로 전풍의 계책을 수용했던 4번 상황을 제외하면 전풍이 냈던 계책은 원소에 의해 전부 거절 당했으며, 이때문에 원소가 전풍의 말을 듣지않아 결국엔 패망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넘겨 짚어야할 점은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과연 원소가 전풍의 뜻대로 따라갔어도 성공할 수 있었느냐"이다.

먼저 2번 상황에서 원소가 전풍의 의견에 따라 협천자를 하지 않은 이유는 연의에서처럼 단순히 원소가 우유부단하기 때문에 전풍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게 아니라 협천자를 도저히 할 수 없어서였다. 원소(삼국지)/생애 문서의 '협천자 논쟁'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지만, 원소는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탁이 옹립한 헌제의 장안 조정을 괴뢰정권이라 규정[7]하며 그 대안으로 황족 유우 대립황제로 내세우고 있었다.[8] 이렇듯 원소는 뚜렷한 반동탁 노선을 걸은 덕분에 얼자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청류파 인사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하북에서 기반을 쌓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이 헌제를 옹립해버리면 그동안 쌓아왔던 본인의 노선과 지지기반이 한순간에 무너질수가 있다.

설령 원소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헌제를 옹립한다 하더라도 그 후가 더 문제다. 앞서 언급했듯 원소는 청류파들의 지지 덕분에 당대의 군웅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이는 반대로 청류파를 제외하고는 원소에겐 믿고 맡길 수 있는 확실한 세력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말해 원소의 세력은 원소 개인의 카리스마로 모이게 된 각지의 청류파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한(漢)나라 황제라는 그야말로 거대한 변수가 난입하게 된다면 순식간에 원소의 카리스마는 묻혀버리게 되고, 원소가 모았던 청류파 세력이 언제 어디서 황실의 친위세력으로 돌변해 자기를 숙청해버릴지 모를 상황이였다. 실제로 조씨, 하후씨 같은 친족 군벌과 순욱을 필두로 한 영천 순씨 계열의 지방 호족이라는 확고한 기반이 있었던 조조나, 사세삼공 원씨 가문의 적통이라는 간판 덕분에 상당한 원씨 규중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원술같이 자신을 뒷받침 해줄 든든한 친족 세력이 있는 군웅들이나 협천자를 적극적으로 시도할려고 했었지, 그 외 세력은 군웅할거 당시 한창 본인의 세력을 다지거나 주위의 지역을 평정하는데만 급급할 뿐이였다.[9] 당장 그 조조도 협천자 기간 내내 황실 친위세력( 동승, 유비, 복완, 경기 위황 등)에게 끊임없이 쿠데타 시도를 당했었는데, 만약 이러한 친족 중심의 군사 세력이 없었으면 조조도 동탁처럼 황실의 친위세력에게 숙청을 당했을 것이다.[10]

만약 전풍이 이러한 전후사정을 알고도 협천자를 건의했다면 '(조조 세력의 순욱처럼) 진정으로 원소에게 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고, 모르고 그랬다면 '식견이 부족하다'는 의미밖에 안된다.

3번 상황에서 낸 두번의 헌책 역시 앞서 언급했던 협천자 논쟁을 배제하더라도 군사적으로 도저히 실현 불가능했다. 이 당시 군웅들의 세력구도는 '원소, 조조, 유표[11] vs 공손찬, 원술, 도겸'이였는데, 만약 원소가 협천자에 눈이 멀어 조조를 급습했다면 조조는 당연히 원소의 동맹에서 이탈하여 공손찬 편에 붙게되고, 결국 남는 것은 '원소, 유표 vs 공손찬, 조조, 원술, 도겸'이라는 불균형한 구도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원소는 북으로는 공손찬을, 남으로는 조조를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엄청난 위기에 처하게 된다.[12] 얻는 것은 고작 협천자 뿐인데(그마저도 동맹을 기습했기 때문에 명분마저 없다), 잃는 것은 후방의 동맹이고 그 결과가 양면에서의 전선 형성이다? 이러한 계책을 낸 책사를 당대 최고의 모사 중 한명으로 인정해야할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5번 상황은 그나마 북쪽의 공손찬이 멸망한 시점이였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절호의 찬스였음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때의 상황을 묘사하는 정사의 기록들이 서로 상충되는데, 《원소전》에 의하면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전풍의 계책을 물리쳤지만, 반대로 《우금전》에서는 원소가 군사를 보내긴 했으나 우금에게 격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두 기록 모두 진짜라고 가정한다면 원소는 전초전을 목적으로 조조의 군세를 시험해볼겸 소수의 별동대를 보냈으나 우금이 이를 격파해버렸고, 이 때문에 사기가 꺾인 원소는 전면전을 주장하는 전풍의 의견을 아들의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이렇게 되면 전풍이 잘못했다기보단 소극적으로 행동한 원소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6번 상황은 결과적으로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전풍의 지구전 주장이 그럴듯해 보일 뿐이지, 관도대전의 패인은 원소가 전풍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먼저 《원소전》에 주석으로 달린 《헌제전》에 기록된 전풍(+저수)이 주장했던 지구전의 내용을 하나하나씩 뜯어보면 '① (그동안 공손찬을 상대하느라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니) 농사에 힘쓰고 백성들을 쉬게 하면서 천자에게 헌상품을 진상함으로써 조정 내 조조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② 만약 이게 통하지 않으면 여양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하남에 주둔한 뒤, 정예 기병을 따로 파견하여 조조를 공격하면 3년 이내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중 ①번 내용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이 당시 원소의 세력보다 조조의 세력이 더 피폐했기 때문이다. 관도대전 이전까지 원소가 상대했던 주적은 공손찬 장연정도였는데, 이중 공손찬은 195년부터 역경루에 틀어 박혀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고, 장연은 간간히 원소의 본거지였던 업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도적떼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후 원소에게 큰 위협을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세력이였던 기주, 유주, 청주는 비교적 큰 피해를 입지 않았었다.

반면 조조의 경우 여포에게 뒷통수를 털려 연주를 빼앗긴 것을 시작으로 서주에서는 대학살을 일으켰고, 한때는 메뚜기 떼들에 의해 연주와 예주의 국토가 황폐화 된것도 모자라 회남지역은 원술의 폭정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만약 ①번의 내용대로 한동한 전쟁을 쉬게 된다면 이득이 되는 쪽은 원소가 아니라 바로 조조다. 특히나 조조에게는 천자까지 있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것은 원소밖에 없게된다.

②번의 내용은 관도대전 문서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여양에 군대를 진군시켜 하남에 주둔한 다음, 정예 기병을 따로 보내 조조의 진영을 흔든다'는 전략은 원소가 관도대전 내내 실제로 고수했던 전략이다. 그러니까 '전풍이나 저수가 따로 언급하지 않았어도 원소는 이미 조조를 공략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관도대전은 어디까지나 허유의 배신원소의 명장병때문에 진것이였지, 전풍이 말하는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전풍이 남긴 행적들을 따지고 봤을때 분명 전풍의 계책이 옳았을때가 분명히 있었고 원소도 그게 옳다고 생각할때는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원소에게 거절당한 전풍의 의견 상당수는 원소가 바보라서 그걸 거절한 게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볼 수 있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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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가를 지냈는데, 이 벼슬이 지방 유력 호족에게 주는, 지방관의 제1보좌역이다. [2]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모자였다는 말도 있다. 원소는 평소 투구를 쓰지 않고 모자를 써서 과시하는 성격이었다고 하며, 기록에도 '두무'라고 되어있는데 관이나 두건에도 쓰이는 단어라고 한다. [3] 다만 아직 북쪽에서 공손찬과 대치중인 상황인지라 전선을 두개로 늘려지게되는 위험부담이 있다. [4] 연의에서는 유비가 손건을 보내 원소에게 구원을 청한다. [5] 첫 번째 두 번째 상황과 다르게 북쪽의 근심거리인 공손찬을 완전히 토벌한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회였었다. [6] 연의에서는 자결을 명하여 죽게 한다. [7] 이게 어느정도였나면, 단지 헌제를 알현해서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한복을 공략하는데 상당한 공이 있었던 장도라는 수하를 가차없이 처형해버릴 정도였다. 그만큼 원소에게 있어서 반동탁(반헌제)이라 기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였다. [8] 물론 이는 유우가 원소를 강하게 질책하고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실행되지 못하였다. [9] 가령 유표는 (본인의 우유부단함이 더 크겠지만) 채씨와 괴씨 같은 일부 형주 호족들의 지지 덕분에 간신히 형주를 평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협천자를 시도하지도 못하고 그저 형주 안방에서 황제 놀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언- 유장 부자도 마찬가지로 서촉에서 웅거하며 자기 세력 관리만 할뿐, 그 이상으로 나아갈 의지가 없었다. 그나마 도겸이나 손책이 협천자를 시도할려고 했지만, 도겸은 조조와 다투다가 병사했고 손책은 한창 강동에서 기반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뒤늦게 허창을 급습할려다가 허공의 잔당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10] 원소가 자신을 뒷받침 해줄 친족 세력을 형성하고 싶어도 얼자 출신이라는 한계점 때문에 원씨 가문의 힘을 기대긴 어려웠다. 그나마 형성한 친족 세력도 원담, 원희, 고간처럼 자신의 직계 친족들이였고, 그마저도 이러한 직계 친족 위주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저수가 경고했던 것처럼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극심한 내란을 초래할 뿐이였다. [11] 엄밀히 말해 유표는 완전히 원소편에 붙은 것은 아니였다. 193년까지만 하더라도 유표는 조조를 도와 남양에 있던 원술의 후방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동맹을 위해 싸웠지만, 정작 그 원술이 남양에서 회남으로 도망가자 완성에 장수를 주둔시켜 조조를 견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12] 특히나 이때는 원소군에서 승승장구 하던 국의마저 역경루에서 공손찬에게 패배를 하는 등 원소군이 전반적으로 열세에 몰려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