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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키타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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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19><colcolor=#fff> 쟈니 키타가와
ジャニー[ruby(喜多川, ruby=きたがわ)] | Johnny H. Kitagawa
본명 [ruby(喜多川, ruby=きたがわ)][ruby(擴, ruby=ひろむ)] (키타가와 히로무, Hiromu Kitagawa)
다른 이름 John Hiromu Kitagawa (존 히로무 키타가와)
출생 1931년 10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사망 2019년 7월 9일 (향년 87세)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1]
가족 아버지 키타가와 타이도
누나 후지시마 메리 야스코(1926–2021), 형
조카 후지시마 쥬리 케이코
학력 로스앤젤레스 시티 대학 (졸업)
조치대학 (국제학 / 학사) [2]
종교 불교
소속 쟈니스 사무소 (초대 사장)
직업 프로듀서, 기업인
활동 1962~2019년
1. 개요2. 생애3. 사망4. 논란 및 사건 사고5. 여담

[clearfix]

1. 개요

Show Must Go On.
생전 좌우명
일본의 기업인, 프로듀서. 일본 연예계 최대 기획사 중 하나인 쟈니스 사무소의 설립자이자 초대 사장으로 31세였던 1962년에 쟈니스 사무소를 설립한 후 2019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소속 연예인 발탁, 육성, 데뷔 후 활동 및 공연 부분까지 관여한 일본 연예계를 대표하는 프로듀서로 활동해 왔으며 그가 설립한 쟈니스 사무소는 수십 년 동안 일본 보이밴드 시장을 독점해올 정도로 막강한 위치에 있었던 기획사였다.[3] 생전 쟈니 키타가와는 소속 연예인들과 팬들에게 일명 쟈니상(ジャニーさん)으로 불렸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후에는 생전에 수십 년간 남자 연습생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파문이 일었고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생전의 명예가 모두 흑역사화됨은 물론 자신이 세웠던 쟈니스 사무소도 사명이 바뀌고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2. 생애

20~30대 시절.

1931년 10월 2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두 살이었던 1933년 귀국해 오사카에서 지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사망했다. 그의 실체가 밝혀진 후 쟈니스 사무소에서 진행된 자체 조사에 따르면 어렸을 적에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고 하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면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와카야마현으로 피난해 있었다고 하며 1947년 고향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 현지 고등학교와 LA 시티 대학에 진학했다. 1950년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미국 공연이 아버지가 주지로 근무하던 에서 이루어졌는데[4] 이때 미소라 히바리와 쌓은 인연이 일본 연예계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6.25 전쟁 때인 1952년에는 미군을 따라 한국에 들어와 약 1년 간 전쟁 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5] 전쟁 이후 조치대에 진학했다.

1960년대 초에 주일미군 시설 워싱턴 하이츠(현 요요기 공원)[6]에서 '쟈니스 소년 야구단'이라는 야구단을 결성하고 코치를 맡았는데 어느 날 비가 내려 야구 연습을 할 수 없게 되자 이 야구단 멤버 중 요요기 중학교에 다니던 학생 4명과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러 갔는데 이 영화에 굉장히 감명을 받아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그는 당시 영화관에 함께했던 학생 4명으로 쟈니스 사무소의 첫 연예인인 초대 쟈니스를 결성하고 1962년 정식으로 쟈니스 사무소를 창업했다. 당초에는 와타나베 프로덕션과 업무 제휴하는 형식으로 도움을 받았지만 1965년 자립했으며 1972년 정식 주식회사로 발단했다.

초반에는 다른 대형 사무소들에 비해 독보적인 위치를 갖추지 못했으나 포 리브스, 고 히로미 등을 키워내면서 입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고 히로미의 이적 등으로 부침을 겪었지만 80년대 콘도 마사히코, 소년대, 히카루GENJI 등을 키워내면서 현재 쟈니스 사무소의 위상을 갖춰 가게 되었다.

무대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노령에 접어든 2010년대까지 무대 연출에 간접적이나마 관여했으며 이 때문에 쟈니스 소속 그룹의 모든 콘서트에는 '종합연출 쟈니 키타가와'라는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2011년에는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콘서트를 프로듀스한 사람', '가장 많은 1위 싱글을 프로듀스한 사람'으로 등재되었으며 2012년에는 '가장 많은 차트 1위 아티스트를 만들어낸 프로듀서'로 등재되었다가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전부 말소되었다. #

3. 사망

2019년 7월 1일 아라시가 아라시의 전시회 오픈식 기념 기자간담회를 통해 쟈니 사장이 현재 해리성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지주막하출혈로 입원 중이라고 발표했다. 6월 18일에 의식이 없는 채로 병원에 실려왔고 ICU에서 치료받았으나 의식이 없다고 한다. 기사

결국 병원 이송으로부터 약 한 달 후인 7월 9일 오후 4시 47분 숨을 거두었으며 쟈니스 사무소는 당일 저녁 사망 소식을 언론사에 배포했다. 기사 일평생 결혼을 하지 않아 배우자 및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 발굴하고 육성한 친자식과도 같았던 쟈니스 소속 아티스트들이 뭉쳐 가족장[7] 형태로 장례식을 진행했다. 사무소 팩스, 소속 연예인들의 코멘트, 장례식

2019년 9월 4일 오전 11시 도쿄 돔에서 고별회를 가졌다. # 쟈니스 소속 아티스트들이 전부 참여했으며 아베 신조 총리가 조전(弔電)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 조전 오전 11시에는 소속 연예인 154명, 과거 쟈니스 소속 연예인[8], 일반 연예인[9], 기타 관계자들이 고별회에 참석했고 오후 2시부터는 일반인들이 참석했다. 고별회 재단 및 쟈니상과 쟈니스 그룹 일러스트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17시 30분 입장열의 접수를 중단했다. 주최측에 의하면 오전 11시부터 행해진 관계자부 추모식에는 3,500명이 참석했고 오후 2시부터 행해진 일반인들의 추모식은 오후 6시까지 무려 88,000명이 참석했다고 발표했다. #

유해는 고야산 오쿠노인에 묻혔다.

4. 논란 및 사건 사고

4.1. 연습생 상습 성착취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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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1] 복수국적(일본, 미국)이었으나 2014년 말에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2] 6.25 전쟁 중이던 1952년에 한국 미군을 따라와 영어를 가르치고 전쟁 후에 조치대에 입학했다. [3] 2020년대에도 일본 아이돌 업계는 남자는 쟈니스 사단, 여자는 AKB48 등을 만든 아키모토 야스시 사단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K-POP이나 LDH 사단 등이 나머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4] 쟈니 키타가와의 아버지(키타가와 타이도)는 고야산을 본거지로 하는 일본 불교 종파 고야산 진언종의 미국 지부 주지였다. [5]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1달 만에 한국어를 마스터했다고 한다. 한국어를 11달 만에 익히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지만 나카지마 켄토가 밝힌 일화로는 한국어를 마스터한 건 참인 듯 하다. 일반인 시절에는 이렇듯 평범하고 훌륭한 선생님이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자 희대의 인간 말종으로 흑화된게 어째 폴 포트와 흡사하다. [6] 당시 여기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7] 다만 쟈니 키타가와 연습생 성착취 파문 문서의 내용을 감안하면, 순수하게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라기보다 다른 의미였을 것으로 보인다. [8] 고 히로미, 카와사키 마요, 히카루GENJI, 닌자, 오토코구미의 일부 멤버들, 이마이 츠바사, 원오크락의 타카, KAT-TUN의 前 멤버 다나카 코키 등 [9] 쿠로야나기 테츠코, 와다 아키코, 타케다 테츠야 [10] 물론 공개된 쟈니의 사진이 이 한 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단 링크의 젊었을 적 사진들도 그렇고 구글에 쟈니의 이름을 검색하면 맨얼굴이 나온 사진이 몇 장 나오긴 한다. [11]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국민 MC로 이름을 날렸던 지미 새빌은 유명세를 얻은 후 쟈니 못지 않은 성범죄를 일삼고 다니다가, 사후에 본인의 추악한 범행들이 밝혀져 본국에서 욕이란 욕은 다 먹은 것은 물론 부관참시까지 당했지만, 쟈니처럼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거나 했던 적은 전혀 없이 죽을 때까지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공식 활동을 잘만 했다. 반대로 홍콩의 배우 겸 영화감독인 주성치는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사람이지만, 그는 여지껏 이렇다할 구설수도 없이 멀쩡하게 영화계에서 활동 중이다. [12] 이는 한국에서 여러 연예인들이 앙드레 김의 말투를 따라했던 것과도 비슷하다. 다만 앙드레 김은 입양한 외아들을 성심성의껏 키웠고 소외 계층들 대상으로 기부도 자주 했던 등 사생활은 쟈니와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건전하고 깔끔했다. [13] 예외도 있는데 SUPER EIGHT 요코야마 유를 부를 때는 '요코'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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