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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훈의 프로 입단 전 유소년기를 정리한 문서.
아래의 일대기의 대부분은 1976년 스포츠 잡지인 <주간스포츠>에 수록된 '야구영웅 장훈'(일본판 제목은 배트 외골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1] 그밖에 <일본을 이긴 한국인>(1995년 출간)의 내용과도 같다. 장훈 일대기에 대해 한 번씩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2. 유년기
초등학교 시절. 왼쪽부터 장훈, 어머니 박순분, 작은 누나 장정자, 형 장세열.[2] |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 장상정과 어머니 박순분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장훈의 아버지는 1936년에 먼저 일본에 건너가 고물상을 하던 동생의 권유로 1939년 일본으로 왔고, 이후 장훈의 가족들이 뒤따라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1940년 장훈이 태어났다. 전쟁 중의 식민지 출신으로서 장훈의 가족은 아주 가난하였고, 히로시마 오즈마치의 강가 판자촌(조선인 거주구역)에서 성장한다.
4살 때의 어느 겨울날, 집 근처 강둑에서 동네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으려 하던 중 갑자기 후진한 소형 트럭에 떠밀려 모닥불에 오른손을 데이고 말았다. 이때의 화상으로 오른손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이 심하게 구부러지고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이때 장훈의 아버지는 잠시 고향의 부모님을 뵙고 온다며 창녕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고 글도 모르는 상황이라 트럭 운전사에게 손해배상은 커녕 치료비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3][4] 이후 어려운 형편에도 장훈의 어머니는 3차례에 걸쳐 손가락 복원과 피부이식 수술을 해줬지만, 달라붙은 손가락을 떼는 데도 실패하고 대퇴부 피부를 이식한 손바닥도 제 구실을 못해서 장훈의 오른손 악력은 왼손의 절반 정도로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원래는 오른손잡이였던 장훈은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5]
잠깐 타격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하자면, 좌타자가 스윙을 하면 팔로스루(follow-through)를 할 때 오른손에 힘을 주며 힘있게 배트를 끝까지 뻗어줘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타구가 힘이 붙어 뻗어나가는데, 장애로 인하여 오른손 악력이 왼손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상태에서 팔로스루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왼손만을 이용한 임팩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3,000안타뿐 아니라 홈런도 500개나 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1944년에 조선으로 간 장훈의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장훈과 형제들을 데리고 조선행 배편을 구했지만 정원 초과로 탑승하지 못했는데, 그 배가 바다에서 침몰해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터지면서 장훈의 가족들은 전화위복으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참조
장훈이 5살이던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며 전신에 중화상을 입은 큰누나 점자[6]가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12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는 비극까지 겪어야 했다. 당시 장훈의 집은 원폭 투하지점과 불과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다행히 나머지 가족들은 70여m 높이인 야산 자락에 가려져 있었던 덕분에 큰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이때 장훈과 작은 누나는 원폭이 폭발할 때 어머니가 끌어안아 무사했는데, 당시 어머니의 등 뒤에는 수많은 유리 파편이 박혀서 피가 솟구쳤다고 한다.[7]
그리고 3년 전 잠깐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창녕에 갔다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국교단절로 오도가도 못하던 아버지가 이듬해인 1946년[8] 한국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9] 안 그래도 어려웠던 집안 형편이 더욱 힘들어졌다. 3년간 작은아들(장훈)의 손가락 화상 - 큰딸(점자)의 사망 -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불운이 연달아 터지면서 가정 형편은 극도로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어를 전혀 못하고 글도 모르는 어머니는 3남매를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전쟁보다 치열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10] 그 때부터 장훈은 "돈을 많이 벌어 맛있는 것도 배불리 먹고 어머니와 형, 누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독기를 강하게 품게 되었다.
사실 장훈이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를 열망했던 것은 어릴 적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시 히로시마로 원정 경기를 하러 온 프로야구 구단의 경기를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히로시마 종합구장[11] 울타리를 기어올라가서 관전하기도 했고 여기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들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 선수단이 숙박하던 여관 옆 나무에 올라갔는데[12], 방에서 선수들이 양껏 먹던 두툼한 소고기 스테이크와 계란, 출전 수당으로 오고가는 지폐 다발에 사로잡힌 장훈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야구 선수가 되면 저런 음식을 마음껏 먹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겠지."라는 동경을 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장훈의 어머니 박순분 여사는 아들이 야구를 한다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큰형 장세열[13]과 함께 뒤에서 많은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장훈이 학창시절 입버릇처럼 "야구선수로 성공해서 어머니께 비단 치마 저고리를 많이 사드리겠다"며 얘기하면 "네가 언제 성공해서 비단 저고리를 사주겠느냐."하고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장훈은 그 말을 실천하였다.
3. 학창 시절
중학교 시절. 맨 윗줄 왼쪽이 장훈. 또래에 비해 체격이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
고등학교 시절 |
초등학교 시절 장훈은 가정형편은 어려웠지만 활발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듯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우람한 체격 덕분에 감히 장훈의 면전에서 조센징이라고 놀리거나 괴롭히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동네 조선인 동포 학생이 괴롭힘을 당했을 때[14] 한 명도 빠짐없이 때려눕혔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재일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의협심은 대단하였던 모양.
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들을 따라 동네야구를 하며 야구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15] 한편 장훈은 사고로 장애가 생긴 오른손을 다루기 힘들었디만 좋은 운동 실력을 가졌고, 특히 수영에 능숙해서 여름엔 집 부근의 오타강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유형, 배영, 평영을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다. 수영은 오른손의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종목이고, 야구에 비해 돈이 덜 드는 스포츠라 수영선수가 되려고 했는데 장훈이 다니던 단바라(段原) 중학교에는 수영부가 없었다. 장훈이 형 장세열에게 무언가 운동을 하고 싶다고 충고를 구하자 장세열은 "학교에 야구부도 있는데 야구를 해보는 것이 어때?"라고 권유하여 야구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야구부에 들어간 장훈은 중학교 시절 남들보다 우월한 체격과 실력을 앞세워 에이스와 4번 타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16]
단바로 중학교를 졸업한 후 히로시마 상업 고등학교, 코료 고등학교 등 히로시마 야구 명문 고등학교들의 스카웃을 기다렸지만, 행실불량 등의 여러 이유로 악동으로 찍혀 전부 입학을 거부당했다. 당시 모교의 운동장은 한 개 뿐이었고 운동부는 야구, 축구, 배구부 3개나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 사용권을 놓고 서로 주먹다짐을 벌이기 일쑤였는데, 승자는 항상 주먹 하면 히로시마 중학생 전체 탑 클래스이던 장훈을 앞세운 야구부였다.[17] 그러던 중 어느 날 축구부 주장이 장훈과 말싸움을 벌이다 장훈에게 "조선인 주제에 어디 감히. 입 다물고 꺼져라, 조선인!"이라고 장훈을 모욕하자, 장훈이 격분하여 야구 배트로 축구부 주장의 머리를 가격하여 부상을 입힌 사건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18] 장훈은 히로시마 상업 고등학교가 현립이라 학비도 싸고 야구부 성적도 좋아 진학하고 싶어했고, 야구부 감독에게도 테스트 합격 사인까지 받았지만 상술한 폭력사건의 소문으로 교장이 입학을 거절했다. 장훈은 대신 현립이 아닌 사립학교로 응시만 하면 누구나 들어가던 학교인 코료 고등학교로 진학하려 했는데, 입시 면접 때 "히로시마 상고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했는데 코료 관계자가 응시만 하면 무조건 뽑아주겠다고 해서 응시했다."라고 너무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면접관에게 호통만 듣고 쫓겨났다고 한다.
장훈은 간신히 형 장세열의 주선으로 빈민가 주변에 있던 히로시마 최악의 불량 학생들이 가는 마츠모토 상업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나마 이 학교에서도 1년간 착실히 야간부 생활을 잘하면 2학년부터 주간부에 편입시켜 주겠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런 조건이다 보니 당연히 야구부도 엉망진창일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실망해 제대로 된 야구부 활동을 못한다는 절망감을 느낀 장훈은 밤마다 거리에 나가 폭력배들과 어울려 주먹을 휘두르며 울분을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훈이 이발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집어든 야구잡지에서 야구 명문 쿄토 헤이안 고등학교와 오사카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에 대한 기사를 보고 헤이안이나 나니와로 전학가고 싶다고 어머니와 형을 조르기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는 집의 부엌을 개조하여 밤에 직접 담근 밀주와 암시장에서 받아온 곱창 등을 파는 작고 허름한 호르몬야키 가게[19]를 당국 몰래 운영하고 있었지만 가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20] 형 장세열은 택시 운전을 하던 어려운 상황이라 장훈의 애원을 외면하려 했지만, 절망한 동생이 야쿠자가 되어 엇나가버릴까 걱정한 끝에 마음을 바꿔 어머니를 설득하였다.[21]
결국 장세열은 장훈이 전학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고, 헤이안 고등학교는 학기 중엔 전학생을 받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에 가서 전학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야구부장 나카지마 하루오[22]는 처음엔 돌아가라며 거절했으나 장세열이 "동생은 망나니지만 야구 하나만큼은 잘한다. 테스트만이라도 받게 해 달라"고 통사정하여 장훈은 타격과 투구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고, 장훈의 테스트를 본 나카지마는 장훈의 실력을 알아보고 "전학시험을 통과하면 받아주겠다."라는 조건을 붙였다. 밤마다 주먹패들과 어울려 지내던 와중에도 장훈은 의외로 학교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전학시험을 쉽게 합격했고, 나니와 상고로 전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고향인 히로시마에서 멀리 떨어진 오사카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장훈에게 장세열은 월급의 거의 절반인 1만엔[23]을 매달 하숙비와 식비로 보내주며 뒷바라지를 해줬고, 뒷날 장훈은 프로에 들어간 후 올스타전 MVP 부상으로 받은 오토바이[24]를 형님에게 선물하고 집까지 장만해 주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며 보살핀 형에게 보답하며 늘 감사했다.
일단 형의 지원을 받고도 빈곤한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나니와 상고 시절 장훈에게 밥을 지어주곤 했다던 옆집 누나의 증언에 따르면 장훈은 하루에 정확히 쌀 한 말을 먹으며 운동을 했다고 하며[25], 매월 형이 보내주는 1만엔 중 하숙비 6천엔을 내고 남은 4천엔을 계속 아껴 쓰면서도 월말에는 항상 돈이 떨어져 50엔짜리 한 장을 들고 빵을 사먹을지 목욕을 갈지 고민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26] 학교 절친인 부잣집 아들 타니모토 이사오[27]가 단무지 조각에 오징어 조림이 고작이던 장훈의 부실한 도시락을 마음 아파해 장훈을 위해 한 개 더 싸준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어쨌든 정식으로 나니와 상고의 멤버가 된 장훈은 4번 타자 겸 투수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 무렵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던 미즈하라 시게루가 직접 학교로 찾아와서는[28] 장훈에게 "팀에 쓸만한 좌완투수가 없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요미우리에 오지 않겠니?"라고 제의한 적도 있었다. 장훈은 뛸 듯이 기뻐하며 장세열에게 미즈하라의 제안이 담긴 편지를 쓰자 장세열은 "고마운 일이지만 학교는 꼭 마쳐야 한다. 프로는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배움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란 답장을 보내며 학교 중퇴를 만류했고, 답장을 받고 마음을 바꾼 장훈이 미즈하라에게 형님의 답장을 보여주며 제의를 사양하겠다고 하자 미즈하라는 "훌륭한 형님이시구나.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같이 뛰자"라고 장훈을 격려했다.
그렇게 학업과 야구에 매진하던 장훈은 뜻밖에 투수를 포기하게 되는 부상을 당했다. 2학년 때였던 1957년 6월의 어느 날, 학교 선배였던 릿쿄대학 야구부의 포수 카타오카 히로오[29]가 모교를 방문하여 장훈을 불러서는 "내가 받아줄 테니 한번 던져봐라"라고 제의했다. 이날 장훈은 이미 연습 투구로 300개나 던진 상태였으나, 선배가 직접 공을 포구해주겠다 하니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또 다시 300개의 공을 던졌고, 카타오카에게 좋은 투수라고 칭찬을 들었으나 600개나 공을 던지며 무리한 탓에 다음날 어깨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팔을 머리 위로 들 수 없을 정도였는데, 한 달이 지나 타격은 가능해졌지만 투구는커녕 공을 10미터 이상 던지기도 힘든 지경에 놓였다.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훈은 어깨가 완전히 망가진 것에 대해 어쩌면 좋겠냐고 나카지마에게 조언을 구하자 대뜸 "차라리 잘 됐다. 너는 애초에 투수로써의 소질이 부족했으니까 이참에 타자로 전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30]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밑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로 성공하려는 꿈이 있었던 장훈은 실의에 빠져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나카지마는 이런 장훈을 "바보 같은 녀석! 겨우 어깨 좀 고장난 것 때문에 야구 그만두려고 타지까지 와서 찬물에 목욕까지 해가며 고생했느냐?"며 따끔하게 타일렀고, 장타력을 살려 타자로 뛰어보라는 나카지마의 권유를 받아들여 결국 타자로 완전히 전향했다.[31]
타자로 전향한 장훈은 계속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나날이 늘어나는 장훈의 타구 비거리 때문에 인근 주택의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늘어나자 학교에서는 외야 담장의 그물망 높이를 계속 높이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렇게 장훈이 타자로서 대성하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장훈은 중학교 시절부터 집 근처 강둑에 타이어를 세워놓고[32] 손바닥의 물집이 터져 피가 흐를 때까지 매일 타이어를 배트로 쳤는데[33], 손바닥의 피 때문에 배트가 미끄러지자 아예 손에 붕대를 감고 치기도 했고 피범벅인 손바닥에 말라붙은 붕대를 물로 적셔가며 벗겨내야만 했다. 물론 그때의 통증은 말도 못했을 정도고 특히 오른손은 화상으로 약해졌기에 더 심하게 아팠지만, 반드시 야구선수로 대성하여 가족들을 가난에서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아픔을 견디고 연습을 이어갔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나니와 상고가 다른 학교와의 싸움으로 받은 2년 동안의 출장정지가 풀린 3학년 때, 장훈은 코시엔 대회 킨키 예선 11경기에서 5할 타율에 홈런 11개를 뽑아내는 맹타를 휘두르며 나니와 상고를 코시엔 진출로 이끌며 프로 스카우터들을 놀라게 했는데, 예선대회 종료 후 어이없게도 장훈은 야구부 내의 폭력사건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휴부 처분을 받았다.[34] 야구부 감독 타케우치와 나카지마와는 다른 야구부장[35]이 한국인 장훈을 고깝게 보고 친 장난질이었다. 이 사건으로 장훈은 타케우치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극단적인 결단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살인자가 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어머니께 이만저만 불효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타케우치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접었다고 한다.
재일동포 야구단 방문 시
그렇게 억울하게 휴부 처분을 받으며 코시엔에 출장하지도 못하게 된 장훈은 화풀이로 배트만 휘두르던 중 민단 관계자의 권유로 재일 한국인 고교야구 대표로 선발되어 한국에서 고교팀들을 상대로 원정 순회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에피소드로, 장훈의 어머니가 장훈이 한국으로 원정 간다는 얘기를 듣자 "한국에선 재일교포 청년들을 전부 군대로 끌고 간다더라"라고 하며 한국행을 결사반대했는데, 장훈이 민단에 확인하여 그것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어머니를 안심시킨 후에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아무튼 한국 원정에서도 장훈은 4번타자 중견수로 출장하여 변함없는 맹타를 휘두르며 상대전적 12승 1무 1패로 한국 고교선수들을 초토화했고, 대회 도중 아버지의 고향 경상남도 창녕군을 찾아 조부모님과 감격적으로 해후했고 무덤 속의 아버지께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조부모와는 말이 하나도 안 통했지만[36] 손주의 얼굴을 계속 쓰다듬으며 흘린 눈물 만큼은 이해했다고 말했다. 하긴 아들을 어이없이 보낸 후 나타난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손주라고 하니 참으로 대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장훈은 한국인들의 환대에 감격하며 처음으로 조국의 소중함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37] 선수단 환영식 때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장훈에게 악수를 청하며 "일본 놈들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 되네" 라는 덕담을 했다고 한다.
[1]
일본야구 전문가 박성호가 운영하던 홈페이지(www.npb.co.kr)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2]
뒷줄 가운데는 형의 친구다.
[3]
그나마 일본어가 조금 되는 작은 아버지가 파출소 등을 찾아가 트럭 운전수를 잡아달라 했지만, 조선인이 어디 와서 행패를 부리느냐고 쫓아내며 경찰은 수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4]
어머니가 다친 장훈을 업고 병원에 갔지만, 한복을 입고 일본어도 못하는 장훈의 어머니를 보고 일본 의사는 응급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조선인 차별로 볼 수도 있고, 행색이 워낙 궁핍하니 치료비를 못 받을까 의심이 되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장훈의 화상이 초기치료가 잘 되었다면 조금 더 좋은 예후를 보았을 수도 있었으니 의사의 냉대가 화를 부른 셈. 그나마 다행히도 치료를 거부당한 후 마음씨 착한 간호사가 붕대와 약을 챙겨줬다고 한다.
[5]
두산에서 활약했던 좌완 파이어볼러 투수
이혜천도 이러한 사고로 인해 오른손잡이에서 왼손잡이로 바꾼 경우이다.
[6]
학교에서 근로봉사로 산에 땔감을 주우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7]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피폭자 수첩이 있는 사람은 장훈과 노닌 와타루(前 롯데 감독. 당시에는 전쟁으로 야구를 그만두고 부친의 제재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원폭 투하 때 제재소의 목재에 깔리긴 했지만 다치진 않았다고 한다.) 2명뿐이다. 피폭자 수첩은 없지만 1950년대 히로시마에서 잠시 뛴 하라다 타카시라는 선수도 원폭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8]
위에서 서술한 2008년 장훈의 인터뷰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1944년으로 언급하고 있다. 무엇이 맞는지는 불명.
[9]
밥반찬으로
갈치를 먹다 뼈가 목에 걸렸는데 밥을 씹지도 않은 채 꿀꺽 삼키고 술까지 마시는 등 민간요법으로 뼈를 빼려 했지만 오히려 식도가 파열되어 그 후유증으로 2개월 후 사망했다. 참고로 국교단절로 인해 당시에는 아버지의 정확한 사인도 알지 못했는데, 후에 장훈이 재일교포 야구단 방문으로 귀국해서 창녕의 조부모를 찾아뵌 후에야 아버지의 사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0]
아버지의 사망 후 그나마 도움이 되던 작은 아버지마저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기차에 치이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
[11]
정식 명칭은 '히로시마 종합 그라운드 야구장'이며, '칸논 구장'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1941년 개설된 구장으로 1950년
히로시마 카프가 창단함과 동시에 이곳에서 카프의 홈경기 위주로 프로야구 경기를 개최하였다. 그 후 1957년 시즌 도중 카프가 새로 건설된
히로시마 시민 구장으로 홈구장을 옮기면서 이 이후 프로야구 경기는 개최하지 않게 되었지만 2010년을 끝으로 철거된 시민구장과는 달리 현재까지도 히로시마의 주요 아마추어 야구경기 개최 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12]
특히 요미우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이자 당대 최고의 타자로 손꼽혔던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보러 갔다고 한다. 실제로 장훈은 카와카미를 존경해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던 화상을 입은 오른손을 카와카미에게만 보여줬을 정도였다.
[13]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작은 아버지마저 사고를 당한 장훈에게 8살 연상인 큰형 장세열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14]
입에 슬리퍼를 물리고 네 발로 기게 만들며 놀렸다고 한다.
[15]
장훈의 손 상태를 아는 동네 형들은 장훈에게 별 기대를 안하고 글러브와 배트를 지키게 하는 등 심부름꾼처럼 데리고 다녔는데, 어느날 선수가 모자라서 장훈을 선발로 끼워줬고, (동네 야구이지만)생전 처음 들어선 타석에서 우중간 2루타를 날렸는데 공교롭게도 장훈의 1959년 프로 데뷔 첫 안타도 우중간 2루타였다. 장훈은 이날 "라이파치"로 야구인생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라이파치'는 라이트(
우익수)+하치방(はちばん, 8번 타자)을 합친 은어로 이 2가지 단어의 조합은 팀에서 야구를 제일 못하는 선수를 뜻한다. 동네야구에 가까운
사회인야구 같이 리그 수준이 낮을 경우 수비에서
우익수는
좌익수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나마 좌익수는 우타자가 당겨친 공이 오지만 우익수는 좌타자가 거의 없는데다 우타자는 밀어쳐서 외야로 공을 보낼 힘과 능력이 없으니 그냥 구경꾼이 되는 것. 공격에서도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경우 투수는 9번 타순에 서는 것이 일반적이고, 지명타자가 있을 경우 9번 타자는 '그림자 테이블 세터'라고 해서 타격은 나쁘더라도 발이 빠르고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가 들어가는 경향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8번 타자는 팀내에서 가장 못 치는 타자라는 소리이다.
[16]
장훈이 프로야구에서 성공한 후 가족들과 식사하던 중에 형님은 장훈에게 "그 때 단바라에 수영부가 있었다면 네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17]
장훈의 인터뷰에 따르면 대여섯 명과 싸우면서 맞은 적도 있지만, 서너 명 정도는 진 적이 없다고. 필살기는 박치기였다고 한다.
[18]
당시 장훈은 머릴 쥐고 고통스러워 하는 축구부 주장을 일으키고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거기서 조센징이 왜 나오냐? 넌 말이 너무 많아!”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19]
장훈의 인터뷰를 보면 귤상자 3개에 흰 천을 덮어 테이블 삼아 장사하는 그야말로 노점 수준의 가게였다고 한다.
[20]
장훈의 어머니는 일본어도 못하고 글도 모르는 분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장훈의 어머니가 고기를 받아오던 암시장은 버스로 20여 분 거리였는데, 어머니는 버스비 30엔이 아까워 걸어서 다니며 물건을 떼어오셨다고 한다.
[21]
어머니는 장훈이 체격이 좋으니 형에게 운전을 배워서 덤프트럭 운전을 하라고 했다 한다.
[22]
지난해까지 야구부 감독이었지만 다른 학교와의 폭력 사태가 터진 것에 대한 책임으로 감독을 그만두고 야구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23]
당시 장세열의 택시기사 월급은 2만~2만 3천엔 정도였다고 한다.
[24]
당시 자가용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이라 오토바이는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장세열은 그 오토바이를 출퇴근용으로 10년 가까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25]
물론 일본인이고 재일교포고 전쟁의 폐허를 완전히 재건하지 못한 당시 시대상 대부분 가난에 시달리던 옛날인 만큼 제대로 된 반찬이 없어서 밥만 죽어라 먹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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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에겐 먹는 게 무조건 중요했던 만큼 장훈의 선택은 항상 빵이었다. 대신 목욕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수돗가에서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닦는 것으로 퉁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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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같아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장훈은 타니모토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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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하라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카지마 야구부장과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였고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같이 고초를 겪은
전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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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학 동기인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주력선수로 뛰고 있었다. 1959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으나 프로에선 성공하지 못하고 4년 만의 은퇴한 이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스카우터로 뛰어난 선수들을 여렷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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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장훈 본인도 자서전에서 자신의 팔 혈관은 다른 투수들에 비해 두꺼워서 투구 시 팔이 쉽게 피곤해지고 경기 후에도 팔의 피로가 늦게 풀리는 편이었지만,
토에이 플라이어즈 시절 선배이자 팀의 에이스였던
도바시 마사유키는 반대로 팔의 혈관이 가늘었던 투수라고 서술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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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투수를 꿈꾸다가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해서 성공한 케이스로
추신수,
이승엽,
이대호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역시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전향한 것은 아니었고, 피나는 노력 끝에 장훈처럼 한국 야구에서 손꼽히는 타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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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운전사인 형 장세열 덕분에 회사에 남아도는 폐타이어를 마음껏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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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거인의 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식의 훈련법은 지금으로서는 절대로 좋은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훈련법이 일반적이었고, 실제로 타이어 치기의 효과를 보았다는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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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폭력사건 당시 장훈은 부실에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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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증언에 따르면 이 야구부장은 굉장한
혐한이었고, 타케우치 감독은 장훈이 야구는 물론 매사 감독인 자신이 아닌 전임 감독이었던 나카지마에게 조언을 구하고 의지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아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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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장훈은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 따로 배워서 지금처럼 하게 된 것. 영상으로 남은 장훈의 한국어 실력은 어느정도 대화는 가능하나 썩 유창하지는 못한 정도의
재일 한국어를 구사하는것을 알수 있는데
#, 당시에 그 정도로 한국어를 했다 해도 지금보다도 방언의 정도가 훨씬 심한 50년대 경상도 시골 깡촌의 사투리를 알아듣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서울말이 완벽한 현대의 손자 손녀들도 명절에 오랜만에 보는 조부모들의 사투리 섞인 말을 잘 못알아 듣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대의 사투리화자들은 과거보다도 훨씬 순화된 방언을 구사하는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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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부 재일교포 선수들은 "반쪽발이"라는 야유를 듣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