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인지당 景福宮 麟趾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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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세종로) | |
건축시기 |
1449년 (창건 추정) 1554년 (중건) 1868년 (중건) 1875년 (이건) 1888년 (중건) 1907년 이전 (철훼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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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의 건물 중 하나로 교태전의 동쪽, 대전의 생물방인 복희당의 서쪽에 있었다.2. 역사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세종때 지어진 걸로 추정된다.이 때의 위치는 교태전을 중심으로 함원전과 대칭을 이루었고 동편에 자미당이 있었다.
인지당에 대한 첫 기록인 《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임영대군의 집으로 이어하면서 동궁인 문종이 법궁인 경복궁 경내에 어디에 머물고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세종의 직접적인 지시사항에 관한 내용이다.
"강녕전(康寧殿)·만춘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 같은 것은 이른 바 정궁(正宮)이고, 함원전(咸元殿)·교태전(交泰殿)·자미당(紫薇堂)·종회당(宗會堂)·송백당(松栢堂)·인지당(麟趾堂)·청연루(淸燕樓)는 내가 세운 자그마한 집인데 정궁(正宮)이 아니니"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6월 18일자 첫 번째 기사
이를 보면
세종이 거주할 곳으로 지은걸로 보인다.《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6월 18일자 첫 번째 기사
그 이후 세조가 역대 국왕이 만든 개인 문집과 시문들을 모아 인지당의 동쪽 별실에 보관했고 세조 사후에 성종이 정리하여 열성어제를 발행한다. 명종때 화재를 입어서 1554년( 명종 9년)에 재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사라지고 270년 이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자미당은 인지당의 북쪽에 지어지는 등 조선 전기와는 건물 배치가 약간 달라졌다.
지어진 이후로는 고종이 신하들과 경연을 하거나 접견하던 곳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873년( 고종 10년)에 화재로 전소된 북쪽의 자경전, 자미당과는 달리 멀쩡했으나 1875년( 고종 12년)의 재건 과정 중 인지당을 동쪽으로 약간 이건했고 1876년( 고종 13년)에는 인지당도 화재를 입어서 1888년( 고종 25년)에야 겨우 재건했지만 1907년( 광무 11년) 이전에 자미당과 함께 철거되어서 1907년( 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문의 위치를 제외한 본채와 행각이 '현재는 없음' 이라는 '금무(今無)'로 표시하고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아마도 인지당은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할 곳으로 경운궁(현 덕수궁)을 택하여 경운궁을 제대로 된 궁궐로 만드는 공사를 시행했을 때 사실상 경운궁은 건물 2채만 있던 곳이여서 궁궐을 하나 세우는 수준의 대공사였고 국가 재정 상황 때문에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온 것도 많아서 이때 이건되었거나 아니면 1904년( 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재건으로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되고 나서는 어떤 건물이 되었는지는 불명이다.[1]
현재는 빈 터로만 남아있다.
원래의 경복궁 2차 복원 계획에선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복원계획 축소로 취소되었다.
아마도 건물의 고증 자료가 부실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3. 구조
※ 현재는 없는 건물이기 때문에 《북궐도형》의 모습을 토대로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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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인지당 및 행각 내부 구성도 |
- 정면 6칸, 측면 4칸의 총 24칸으로 1907년( 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문의 위치를 제외한 본채와 행각이 '현재는 없음' 이라는 '금무(今無)'로 표시하고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 동쪽과 남쪽은 행각과 담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행각에는 북쪽부터 회선당(會善堂), 인후문(仁厚門), 찬인당(贊仁堂)이, 그리고 남행각에는 동쪽부터 저응문(雎應門), 가서문(嘉瑞門), 송인당(頌仁堂)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