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인제/일생
1. 개요
[1]
이인제는 정계 입문 후 수차례 당적을 변경해왔으며, 심지어 여야 간 혹은 진영 간 이동을 서슴지 않고 해왔다.[2] 이 정도로 당적 변경을 하면 보통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고,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잃어서 정치권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이인제는 굴하지 않고 정치권에서 칠순이 다 될 때까지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그래서 불사조를 의미하는 피닉스에 이름을 붙여 '피닉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2. 당적 변경과 사유
순번 | 당적 변경 | 시기 | 사유 |
1 | 통일민주당 → 민주자유당 | 1990.01.22. | 3당합당에 따른 소속 변경 |
2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1995.12.06. | 당명 변경 |
3 | 신한국당 → 국민신당 | 1997.10.10. | 대선 경선 불복에 따른 탈당 및 신당 창당, 독자 세력화 |
4 | 국민신당 → 새정치국민회의 | 1998.09.28. | 제2회 지선 패배로 독자 세력화 실패 후 여당 합류 |
5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2000.01.20. | 세력 확장을 위한 합당 |
6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 2002.12.01. | 대선 경선 불복에 따른 탈당 |
7 | 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 2005.12.07. | 자민련-국민중심당 간 합당 합의에 따른 선도 탈당[3] |
8 | 국민중심당 → 민주당 | 2007.05.11. | 대선후보 출마 목적 |
9 | 민주당 → 중도통합민주당 | 2007.06.04. | 중도개혁통합신당( 김한길계)과 합당 |
10 | 중도통합민주당 → 민주당 | 2007.08.13. | 김한길계 집단 탈당 후 당명 변경 |
11 | 민주당 → 통합민주당 | 2008.02.17. |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 |
12 | 통합민주당 → 무소속 | 2008.03.17. | 총선 공천 탈락 불복 |
13 | 무소속 → 자유선진당 | 2011.11.16. | 충청권 정치 세력 결집 |
14 | 자유선진당 → 선진통일당 | 2012.05.29. | 당명 변경 |
15 | 선진통일당 → 새누리당 | 2012.11.16. | 흡수합당 |
16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2017.02.13. | 분당 후 당명 변경 |
17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 2020.02.17. | 합당 후 당명 변경 |
18 | 미래통합당 → 국민의힘 | 2020.09.02. | 당명 변경 |
볼드는 자의적인 당적 변경이다. 같은 합당에 의한 당적 변경이래도 1번이나 9번의 경우 소속 의원이었기에 합당에 끌려가는 종속관계여서 자의적 변경에서 제외했고, 4번, 11번, 15번처럼 자신이 당 대표나 지도자인 상황에서 합당을 결행한 경우에는 자의적 변경에 포함시켰다. 그래도 총 18번의 당적 변경 중 8번이 자의적 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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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에 따른 것으로 초선 의원인 이인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당시는 보스 정치가 심했기에 보스가 결정하면 그냥 따라야했다. 같은 당 동료 의원인
노무현,
김정길처럼 탈당할 수도 있지만 저 둘의 이후 정치 행보는 험난했고[4], 어차피 3당합당에 반대하여 탈당한들 당적 변경 리스트에 올라같다. 사실 3당 합당으로 인한 당적 변경은 당적 변경 횟수에 포함시키지 않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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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계를 숙청한
김영삼 대통령이 당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단순히 당명과 로고를 바꾼 것이다. 이 역시 일반적으로 당적 변경에 카운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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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변명할 수 없는 이인제 탈당 전설의 시작이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경선 불복하고 탈당하여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한 것이다. 다만 후술된 것처럼, 탈당이 이 한 번으로 그쳤다면 오늘날의 전설적인
불사조 이인제의 명성은 없었을 것이다. 6번 사례에서 같은 짓을 또 해서 철새 이미지가 완전히 못박힌 셈. 이인제와 비슷하게 철새라는 평을 들은
김민석(1964)의 사례만 봐도,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행동이 조금씩 잊히고 이인제만큼 철새의 대표주자로 조롱당하고 있지는 않고, 나름 재기의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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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과는 달리 명백히 본인이 당대표인 상황에서 당을 해산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다만, 이인제도 나름대로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독자 세력화를 시도했으나 기초단체장 1명, 그것도 고향인 논산시장 1명 당선시키는 데 그쳐서 절망적인 상황이긴 했다. 친정인 신한국당의 후신
한나라당으로 가자니 당시 당권을 쥔 게 바로 그
이회창이라 입당시켜 달라 해도 거부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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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과 똑같다.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의도로 확대 개편되어 당명을 변경한 것이니 당적변경이라 하기 힘들다. 사실 여기까진 철새 이미지가 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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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의 철새 이미지를 크게 부각시킨 경우.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하였고, 이에 따라 노무현을 도저히 지지할 수가 없어서 탈당했다고 본인도 스스로 밝혔다. 다만 탈당까진 좋은데 한나라당을 가자니 이때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또 이회창이라 안 받아줄 게 뻔해서 지역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을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이인제 방지법이 통과되기 전이라서 경선 패배 후 탈당해도 대선 출마가 가능했는데, 여론은 이인제가 탈당해서 다른 당 후보로 대선에 나올 것이라는 전망을 했지만 이미 후보 등록이 끝난 12월이 되어서야 탈당하는 바람에 97년 대선의 재현은 하지 못했으며 결국 대선에서는 노무현이 당선이 되었다.[5]
- 탈당이긴 한데 좀 사정이 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겨우 4석 얻고 몰락한 자민련은, 심대평 충남지사 측이 창당한 국민중심당과 지역정당 경쟁에서 압도당하고 있었다. 때문에 최후의 자민련 당대표 김학원은 심대평과의 협의를 통해 국민중심당 주도의 양당 합당을 약속하고, 이를 위해 당 대표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3명을 먼저 탈당시켜 국민중심당에 합류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인제 외에 류근찬, 김낙성 의원도 같이 탈당하여 국민중심당으로 이적한다. 단, 이후 김학원-심대평 합의가 파기되면서 김학원은 자민련을 국민중심당에 합당시키지 않고 자진 해산하여 한나라당에 바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충청지역정당 노선을 고집했던 심대평과의 갈등으로 당시 중도세력 통합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민주당으로 이적한다.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탈당 이후 5년 만에 복당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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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에 이미 입당한 상태에서 민주당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김한길계가 대거 입당하면서 당명이 바뀐 경우로 당적 변경에 카운팅되지 않는다.
-
9번 상황에서 김한길계가 도로 탈당하면서 민주당 지도부가 당명과 로고를 원상복귀시킨 경우로 역시 카운팅되지 않는다. 다만, 이인제는 민주당을 그대로 접수하여 대선에 나선다.
-
제17대 대통령 선거 참패 후
대통합민주신당의 손학규와의 협상을 통해 당을 통합시킨다. 단, 협상 자체는 당 대표인
박상천이 주도했고 이인제는 민주당의 당세가 워낙 기울어졌기에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지라 당적 변경 카운팅에 포함시키긴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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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대선후보였지만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이 공천을 안 줘서 탈당했다. 보통 공천 불복 후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하는 경우도, 이후 당적을 옮기지 않고 복당하는 전제하에 당적 변경 카운팅을 안 하지만 이인제는 민주당에 복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기쯤 오면 이인제의 철새 이미지가 워낙 확고하게 못박힌 탓에 또 철새짓을 했다고 욕먹기보다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웃음거리나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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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회창과 해후했다! 사실 이는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인데, 이인제는 민주당을 탈당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3년여 동안 무소속이어서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이회창은
창조한국당과 연합해 만든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이
문국현 의원직 상실로 해체된 데 이어, 당 운영 과정에 불만을 품은 심대평의 이탈과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2010년 재보궐선거의 참패 이후 당세를 어떻게든 늘리고 충청지역 정치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이 거의 멸망하고 이회창, 심대평이 정계 은퇴를 하면서 마지막 남은 거물 정치인인 그가 당을 떠안게 된다. 이인제는 나름대로 당을 살려보려는 의지에서 당명을 선진통일당으로 바꾼다. 역시 당적 변경 카운팅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
이명수 의원이 당을 탈당하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의 입지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상황에서 전략적 판단으로 새누리당에 당을 흡수 통합시킨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비박계가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바른정당을 창당하자, 새누리당은 당명을 공모하여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이때 이인제는 의외로(?)
친박계에 붙어 잔류하였다.[6] 단순한 당명 변경이고 이인제 본인도 낙선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시점부터는 당적 변경에 카운팅되지 않는다. 대신 모시는 인물은 박근혜에서 홍준표로 변경되었다.
-
미래통합당 문서 참조. 사실상 본체(?)인 자유한국당이 당명을 바꾼 것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구 자유한국당계와 구
바른미래당계[7], 그리고 우익 성향의 청년 정치인들이 모여 범보수 통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 11, 14, 16, 17번과 같이 총선 패배 이후 미래통합당에서 국민의힘으로의 단순 당적 변경이다.
이처럼 당적변경 18회 중 단순 당명 변경(2, 5, 9, 10, 14, 16, 18)인 경우와 소속 의원으로서 당 지도부의 통합 결정에 따른 경우(1, 7, 17)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이인제의 당적 변경 횟수는 7~8회라고 할 수 있다. 아래 내용이 있는 TV조선 강적들의 경우 11번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합당을 자의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7회로 정리한 것이고, 양당 합당 과정에서 이인제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쪽에서는 8회로 본다.
이인제의 이미지를 완전히 철새 정치인으로 못박아버린 가장 중요한 당적 변경 이력으로는 3, 4, 6번을 꼽는 경우가 많다. 즉,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한 뒤, 민주당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민주당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함으로써 양대 정당을 모두 적으로 돌려버린 데다 한 번 통수치고 튀어서 들어간 데에서 또 통수치고 튀었다는 배신자 이미지가 완전히 고정되어 버린 셈이었다.
불복으로 인한 탈당만 3번인 것을 보면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 듯하다. 이제는 탈당을 하든, 또 뭔 짓을 하든 간에 또 그러냐는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편이다.
2014년 10월 1일에 방송된 TV조선의 강적들 47회에서 이인제 의원의 당적변경을 전격 분석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당명 변경, 탈당과 입당, 합당 등을 고려하여 그간 13번이라고 알려져 있던 당적 변경을 7회로 정리하였다. 사실, 김한길 전 의원 역시 이인제와 타이 기록이긴 하지만 김한길은 모두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의 이동이라서 이인제보단 이쪽으론 덜 인정받는다.
3. 철새의 대명사가 된 이유
사실 이인제가 한국 정치를 대표하는 철새 캐릭터로 자리잡으면서 그런 이인제를 놀리기 위해 '이인제 당적 변경 세보니 17회. ㅋㅋㅋ' 하고 당적 변경 횟수를 일일이 세주는 것이지, 어떤 정치인이 철새냐 텃새냐를 따지는 데 당적 변경 횟수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정당간의 이합집산이 잦았던 범 민주당계 정당 소속 정치인 중에는 당적이 6~7회 정도 바뀐 정치인도 드물지 않은데, 당적 변경 횟수만 따지면 이인제의 절반에 육박하는 이런 정치인들도 철새 소리는 전혀 안 듣는다.결국 이인제가 철새로 낙인찍힌 것은 당적 변경 자체보다는 범민자당계 정당과 범민주당계 정당 사이를 이동했다는 '정파 변경' 때문이라고 봐야 할 텐데, 사실 한국 정치의 분위기상 이런 정파 변경도 한 번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범민자당계 정당과 범민주당계 정당 모두 그 기원의 중요한 부분을 신민당에 두고 있기에 특히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라면 한 번 정도 정파를 바꿔도 '어차피 저쪽 당도 한때 동지였으니까 자기 노선 따라서 더 잘 맞는 데로 옮겼나 보다' 하고 이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장 노무현만 해도 통민당 출신 = 범민자당계에서 민주당계로 정파를 바꾼 바 있고, 노무현 당선 직후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소위 독수리 5형제라거나 손학규 같은 인물들의 사례도 있으며, 이인제 자신도 범민자당계에서 범민주당계로 처음 이동했을 때에는 철새 취급은커녕 민자당-신한국당 당시 커리어까지 다 인정받아 대선후보급 정치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3당 합당 이후 민정당계와 섞여 민주화 운동 세력의 정체성이 약해진 민자당-신한국당에 비해 민주당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관계로, 민주화 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민자당계에서 민주당계로 넘어오면 '아이구 잘왔어 잘왔어. 좀 더 빨리 오지 왜 이제야 왔어?'라고 우쭈쭈해주는 분위기가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인제의 문제는 당적 변경 횟수가 1번이냐 6번이냐 16번이냐가 아니라 그렇게 넘어온 범민주당계 정당에서 또 통수치고 나가버렸다는 것이 일단 제일 크다. 말하자면 한 번 이적은 나름대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봐 줄 수 있지만 또 이적하면 그건 줏대없고 끈기없는 배신자가 왔다갔다 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는 것. 그리고 다른 원인을 더 찾아보자면 이적 당시의 상황적 배경 역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똑같이 정파를 넘어왔어도 노무현이야 "토론도 없는 회의가 어디 있냐?"고 항의하면서 삼당 야합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민자당(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통민당)에서 나온 것이고, 열린우리당 초기 한나라당 탈당파 5인조 같은 경우도 말이 좋아 여당 합류지 갓 창당한 초미니 정당에 제 발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나름의 진정성을 인정받았고, 손학규 같은 경우 역시 다른 한나라당 내 민주화 운동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 친이 아니면 친박으로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한나라당 내에서 가장 중도적이라는 포지션을 유지하며 나름 끈질기게 버티다가 한계까지 몰리고서야 민주당계로 이적했다는 해명거리가 있는 데 비해 이인제의 경우는 항상 이적 시기가 딱 경선 패배 직후였다. 이러니까 '나름 포기할 수 없는 신념이 있어서 소신껏 버티다가 다른 길을 찾은 게 아니라 걍 당신 후보 안 시켜준다고 삐져서 나온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적 변경사 때문에 대표적인 철새의 표본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게다가 철새 이미지인데도 옮겨다니는 당들에서 국회의원 하나는 꾸준히 해 먹으면서 아예 불사조 취급받고 있다. 통칭 '정당(파티) 브레이커'나 ' 불사조', '피닉제(피닉스 + 이인제)' 등의 별명으로 불린다. 관련기사 1, 2, 3
4.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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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었을 당시 개표 방송 영상. 당선자치고는 득표율이 상당히 낮다.[8] |
정당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그 정당의 기를 빨아먹어 대한민국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는 평가가 많다. 좋게 말하면 자체 지지율이 상당하거나 진영에 관련없이 높으신 분들 전반에게 인식이 좋다는 말이 되겠지만, 현실은 싸늘하다. 그 외에도 대선 경선 불복 때문에 대선용 정당을 창설한 사례도 있다. 그가 몸담았던 새누리당 역시 선거에서 참패하여 정당브레이커로서의 징크스도 이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새누리당은 여러 의미로 지지기반이 튼튼한 당이라, 문자 그대로의 정당 브레이킹은 피닉제라고 해도 무리라는 게 일반적인 중론이었지만 새누리당 비박계가 탈당하여 바른정당을 만들게 되었는데, 새누리당이 정치적으로 분당된 것이라서 이인제는 정당 브레이커로서의 업적을 하나 더 쌓게 되었다. 또한 새누리당도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여 당적변경 기록도 갱신이었다.
이인제의 선거포스터 목록 목록을 보면 3번의 민자당 소속 출마 말고는 전부 소속당이 다르다.
2012년에는 딴지일보에서 기네스북에 '당적 변경 횟수 세계 신기록' 부분에 이인제를 등록시켜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기네스북 측에서 그런 기록은 취급 안 하는 데다가 하더라도 본인이 신청해야 한다면서 반려시켰다. 그나마 당적 변경의 '원칙'(?)이 있다면 진보정당과 친노가 주류를 이루는 민주당계 정당에는 간 적이 없다[9]는 것이다. 사실 이인제가 당적을 부지런히 옮기긴 했지만 의외로 비교적 확고한 보수 우익· 반공주의[10] 이념을 유지[11]해온 점을 감안하면 그들과는 도저히 성향이 맞지 않아서 줄곧 피해왔던 것으로 보인다.[12]
2016년 4월 13일 SBS 선거방송인 2016 국민의 선택의 바이폰 중 '절대뱃지를 찾아서'에서는 불을 뿜는 불사조의 모습을 보였다. 지상파 개표 방송에서 온라인상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 gif
하여간 이러한 잦은 당적 변경으로 인해 이인제는 한나라당에 소속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인제는 1997년 10월 10일에 신한국당을 탈당했고,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개칭된 건 대한민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동년 11월 21일이다. 또한 이인제가 보수 빅텐트 정당에 복귀한 시기 또한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개칭한 이후인 동년 11월 16일이다. 정치 OX퀴즈 같은 이벤트가 있으면 낚시 문제로 출제하기 딱 좋은 보기라고 할 수 있다.
충청도 간판 정치인 중 하나라서 그런지 같은 충청도 출신인 굽시니스트[13]의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준주인공급으로 나온다.
이인제의 선배격 철새 정치인으로는 안동선이 있는데, 당적 변경 횟수가 어마하다. 역대 정치인들 중 2번째로 많은 당적을 가졌다. 가장 많은 당적을 가진 정치인은 잦은 낙선으로 유명한 김두섭이다. 3번째로 많은 당적을 가진 정치인은 보수정당, 민주당계 정당, 제3지대 정당, 진보정당을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장기표다.
JTBC에서 정관용 앵커가 불사조라는 별명에 대해 이인제에게 직접 물었는데 과분한 별명이라고 한다.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불사조라는 별명이 마음에 드는지 블로그 이름이 불사조 이인제와 함께이며, 위 포스터와 같이 자유한국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불사조 단어를 사용했다.
5. 이인제 방지법
② 정당이 당내경선[14]을 실시하는 경우 경선후보자로서 당해 정당의 후보자로 선출되지 아니한 자는 당해 선거의 같은 선거구[15]에서는 후보자로 등록될 수 없다. 다만, 후보자로 선출된 자가 사퇴ㆍ사망ㆍ피선거권 상실 또는 당적의 이탈ㆍ변경 등으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공직선거법 57조의2
공직선거법 57조의2
이인제의 경선 불복 후 출마로 인해 공직선거법 57조의2 2항, 일명 "이인제 방지법"이 추가되었다. 말 그대로 경선에 탈락한 사람은 출마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16]
후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이인제 방지법이 주목받았는데, 윤석열의 각종 실책으로 인해 홍준표 지지자들에게 "이인제 때문에 홍준표가 대선 후보로 못 나온다"라며 이인제를 비난한 적이 있다.[17][18] 또한 재외국민 선거 이후 안철수가 사퇴하면서 이인제를 예시로 들며 안철수 방지법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1]
2014년에 만들어진 거라 이미지에는 14회가 끝이다.
[2]
물론
장기표나
허경영 등 이인제 못지않게 당적 변경 횟수가 잦은 정치인들이 존재하나, 적어도 정치판에서 메이저에 올라온 인물 중 이 정도로 당적을 많이 바꾼 인물은 이인제가 거의 유일하다.
[3]
다만, 이인제 포함 3인의 선도 탈당 후 양측의 합의가 파기되어 자유민주연합은 마지막 대표
김학원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흡수된다.
[4]
다만 당장은 가시밭길이어도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따라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자산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은 당시 3당 합당에 불복하여 탈당한 뒤
꼬마민주당 시기를 거쳐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민주당으로 들어가 일종의 곁방살이를 하면서 부산에서 낙선 낙선 낙선의 고통스러운 시기를 거치다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올라갔다. 사실, 당시
통일민주당의
상도동계 정치인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인물이 노무현이고, 노무현의 정치적 성공에 있어서 3당 합당 불복을 통해 보여준 정치적 선명성에 대한 호감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다. 즉, 보스 정치 상황에서 보스의 결정에 불복한다는 것은 곧 속해있던 정치적 세력을 떠난다는 의미였고, 초선 의원이었던 이인제가 이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딱히 비판받을 만한 일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전자는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었던 데 비해 후자의 선택은 하이 리스크 초 하이 리턴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탈당이 꼭 성공이나 실패로 향하는 건 아니며 그 정치인이 활동하기 나름이다.
[5]
이인제는 자민련에 입당한 뒤 이회창에 대한 지지 의사를 언론을 통해 여러차례 밝혔지만, JP는 당의인 대선 중립에 반한다며 자제시켰다.
[6]
여담이지만 이회창은 이때 바른정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2018년 초중반까지
바른미래당 소속이었었으나 현재는 당적이 없는 상태다.
[7]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 그리고 바른미래당에 잔류했던 일부
친안 의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8]
저렇게 되려면 최소 4명 이상의 후보가 경합인 상태여야 한다. 예로 들자면 27-26-24-23(4명인 경우), 이때 후보가 무려 10명이 넘었다. 사실 이것보다 더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 사례도 있는데, 바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남 공주/연기 지역구의
정진석 후보가 25.2% 득표율로 당선이 됐다. 후보가 무려 10명이 나오는 바람에 낮은 득표율로 당선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22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임병헌 후보가 22.39%의 득표율을 올리면서 1987년 이후로 국회의원 최소 득표율로 당선된 사례가 되었다.
[9]
통합민주당에 있을 때는
참여정부가 당시 역대 최대 격차의 대선참패로 인해 침몰하면서, 친노의 발언권이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고, 당시 당의 수장도
친노와 관련이 없는
손학규였다.
[10]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 당시
노무현에게 토론회에서
이념적으로 너무 왼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 아니냐며 공격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냐", "
장인이
남로당 선전부장으로서 중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전향한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사망하지 않았냐"(
#)라는 등 색깔론으로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런 전적 탓에
친노-
친문 성향 네티즌들은 아직도 이인제를 거진
태극기 부대 취급한다.
[11]
이인제는 비록 민정계와 민주계를 오락가락 하긴 했지만 이념만큼은 한결같은 보수주의자였다.
[12]
친노 주류 정당을 제외한 모든 계열의 정당에 몸담아본 인물도 있다. 바로
장기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선거 때마다 늘 낙선했다. 당적 변경 횟수는 비교적 적지만
안영근도 모든 계열에 정당에 몸담은 바 있다. 심지어 안영근은 제3지대 정당이나 친노 주류 정당에도 몸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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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출신이다.
[14]
당내경선(여성이나 장애인 등에 대하여 당헌ㆍ당규에 따라 가산점 등을 부여하여 실시하는 경우를 포함한다)의 후보자로 등재된 자(이하 "경선후보자"라 한다)를 대상으로 정당의 당헌ㆍ당규 또는 경선후보자간의 서면합의에 따라 실시한 당내경선을 대체하는 여론조사를 포함한다
[15]
즉, 다른 선거구에는 얼마든지 출마할 수 있다.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
한병도 후보는 원래
익산시 갑에서 경선을 했으나 현역 의원이었던
이춘석에게 패배한 이후 옆 지역구인
익산시 을에 전략공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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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컷오프는 이에 해당하지 않아서, 컷오프된 경우는 얼마든지 탈당 후 무소속 출마 내지는 다른 당 출마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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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이인제는 홍준표랑 사이가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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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잘잘못을 굳이 따지자면 이런 법을 제정하도록 앞장선 한나라당의 탓 또한 결코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