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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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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러시아 국영방송 로시야 1이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러시아 인구 1억 4,300만 명 중 5천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그러나 투표 과정에서 부정과 방송국 측에 의한 순위 조작 정황으로 인해 러시아 내에서 광범위하게 비판받았다.
1위 2위 3위 4위
알렉산드르 넵스키 표트르 스톨리핀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푸시킨
5위 6위 7위 8위
표트르 대제 블라디미르 레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9위 10위 11위 12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이반 4세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2세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39A5><colcolor=#fff>
파일:1280px-Vasnetsov_Ivan_4.jpg
출생 1530년 11월 3일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콜로멘스코예
사망 1584년 3월 28일 (향년 53세)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묘소 대천사 성당
재위기간 모스크바 대공
1533년 12월 3일 ~ 1547년 1월 16일
루스 차르
1547년 1월 16일 ~ 158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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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9A5><colcolor=#fff> 가문 류리크 가문
이름 이반 바실례비치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아버지 바실리 3세
어머니 옐레나 글린스카야
형제자매 유리
배우자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 (1547년 결혼 / 1560년 사망)
마리야 템류코프나 (1561년 결혼 / 1569년 사망)
마르파 소바키나 (1571년 결혼 / 1571년 사망)
안나 콜톱스카야 (1572년 결혼 / 1572년 이혼)
안나 바실치코바 (1575년 결혼 / 1576년 이혼)
마리야 나가야 (1580년 결혼)
자녀 안나, 마리야, 드미트리, 이반, 예브도키아, 표도르 1세, 바실리, 드미트리
종교 러시아 정교회 }}}}}}}}}

1. 개요2. 생애3. 이반의 살해4. 평가
4.1. 과연 전제군주였나?4.2. 시베리아 개척
5. 기타6. 현대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러시아의 모든 군주들은 전제군주이기 때문에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군주는 하느님으로부터 하사받은 노예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다. 군주가 불의한 일을 저지를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대가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중죄를 범하는 것이 될 뿐이 아니라 그대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그대의 군주를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쿠릅스키 대공에게 보낸 편지.
루스 차르국 차르.

흔히 이반 뇌제(雷帝)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백성들이 그를 부른 칭호이자 별명인 그로즈니(Гро́зный)[1] 의역한 것으로 "두렵다.", "끔찍하다."라는 뜻으로 현대 영어에서 사용되는 "형편 없는~"이란 뜻보다[2] "적을 두렵게 한다."라는 뜻이 있다. 이반 4세 통치 초기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을 때려부수던 동시에 자국 내 보야르들을 찍어누르던 시절에 주어진 별명이라 '강한' 리더라는 뜻이 강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폭정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으므로, terrible이라는 표현은 중의적 의미로 그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별칭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그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뇌제라는 번역은 일본어에서 만들어진 조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단어 자체는 '무서운', '두려운'이라는 뜻이지만, 그 어원이 뇌우를 뜻하는 그로자(Гроза́)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뇌제라고 번역한 것으로 추측된다.[3] 또한, 자에는 우레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모양새를 나타내는 뜻도 있으므로 뇌제 자체가 사나운 황제라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끔 이반 뇌제 대신 폭군 이반이라고 의역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표현에는 폭군 이미지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경외심을 일으킨다."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폭군 이반이라는 표현은 이반 4세의 폭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완전히 합당한 번역어는 아니다.

이반 4세는 스스로를 대공이 아닌 모든 루스인의 차르라는 칭호로 즉위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이기도 하다.차르라는 명칭 자체는 선군인 이반 3세 때부터 쓰였지만 그것은 서유럽 국가들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당시 군주의 정식 명칭은 모든 루스인의 대공(大公)이었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반 4세/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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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이반의 살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반 4세/살해 목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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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의 숙청에는 이유가 없었다. 아들[4]이 이반 4세에게 충성해 보겠다고 아버지[5]를 죽이기도 했고, 이반 4세를 충직하게 따랐던 인물들도 있었다. 고위 성직자는 물론 토사구팽 되는 경우도 허다했으며, 심지어는 오프리치니크 중에서도 살해된 이가 있었다.

4. 평가

4.1. 과연 전제군주였나?

러시아사 전반에 걸쳐 황제들은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고 두루둥실하게 묘사하지만 애당초 무제한적 전제권력이라는 것은 해석하기 나름인 모호한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 무제한적이라는 것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며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쉽사리 왕권이 견제받는다는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의 역사를 보면 귀족들에게 선출된 차르들, 귀족, 농민, 상인, 카자크들 회담에서 선출된 차르에다가 러시아 제국 성립 이후에도 아예 귀족들 쿠데타로 제위에 오르거나 희생된 황제만 9명이다.

마찬가지로 "이반 4세가 실제로 강력한 전제권력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차르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독살을 당했으며 본인이 보야르들에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 잔인하게 복수했다는 단편적인 일화들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묻히지만 이것들 상당수는 불분명한 야사거나 귀족들이 차르를 비난할 때 썼던 구실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는 이반 4세의 정적들 상당수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거나 외국으로 망명했다. 1547년에 모스크바에서 대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은 이반 4세가 머물고 있던 근교의 마을로 갔고 거기서 차르는 자신이 보야르들과 같은 편이 아니라고 힘들여 설득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6] 본격적으로 통치에 들어간 후에도 국가의 중대사는 일종의 의회에 해당되는 보야르 두마와 젬스키 소보르에서 논의되어야만 했다. 안드레이 쿠릅스키는 차르와 척을 지다가 외국으로 망명했고 다른 대귀족들도 그를 따라하거나 할 거라는 의심을 받았다.[7]

왕권신수설에 대한 견해도 이를 잘 보여준다. 바실리 3세 시절부터 모스크바 대공들은 교회와 불편한 동맹 관계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군주의 절대권력이 신이 내려준 것이라 주장했지만 동시에 군주가 그걸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신이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이중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반 4세 초기 조언자 중의 성직자 실베스트르는 차르의 어린 시절부터 직접 이런 주장을 표방했다. 이 같은 배경을 알고 보면 이반 4세에 대한 왕권신수설에 대한 확신과 강조는 오히려 약하고 불안정한 왕권에 대한 콤플렉스였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본 문서 맨 위에 게시된 안드레이 쿠릅스키에게 보낸 편지도 차르가 외국으로 망명한 배신자 귀족에게 자신의 왕권 정당화하기 위해 쓴 것이다. 군주가 반역자에게 직접 자신이 전제군주임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전제군주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의 러시아는 군약신강 봉건제 국가였으며 이반 4세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집권화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과 싸운 것에 가깝지 무소불위한 전제권력을 휘두른 절대군주는 아니었다. 결국 러시아 국가 내부에서 봉건제 전제군주제라는 두 체제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도기[8]였고, 이반 4세의 전제권력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표현, 당대 러시아인 관점에서도 기이하거나 잔인한 행동들은 오히려 약하고 열세에 놓인 군주의 최후의 발악으로 해석될 여지가 더 크다.

4.2. 시베리아 개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Russian_Tsardom_1500_to_1700.png
1500년 ~ 1700년 사이의 러시아 영토의 확대. 진한 순서대로 각각 1500년, 1600년, 1700년의 러시아 영토.
특히 이반 4세가 러시아에 남긴 또 다른 큰 유산은 바로 광대한 러시아의 영토다. 러시아는 1550년에서 1700년까지 매년 무려 35000㎢씩 영토가 확장되었다. 이것이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 정복 이후 시베리아 진출 때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이반 4세가 없었더라면 러시아의 팽창이 가능했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이반 4세의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며, 이런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이후에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표트르 대제처럼 러시아를 근대화시켰던 인물이나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러시아를 산업화시킨 인물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들 모두는 이반 4세에 의해서 마련된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와 인구가 아니었더라면 그 과업을 달성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9]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반 4세는 현재의 러시아를 만든 군주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이반 4세에 대한 이해 없이는 러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이반 4세를 진시황과 비교한다.[10]

그렇기 때문에 해석하기 애매한 여러가지 기행이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이반 4세의 행동과 정책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현대의 러시아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숙청 학살이 전제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의도된 잔인한 숙청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미쳐서 그랬는지, 그리고 리보니아 전쟁은 서방으로의 나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적인 전쟁이였는지 아니면 여기서 질 수 없다는 오기의 결과였는지는 등 쉽게 해석되기는 어려운 부분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리고 이반 4세를 선뜻 러시아의 위대한 차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그 업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상당히 평가가 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5. 기타

6. 현대 매체에서


[1]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도 이 뜻이다. [2] 영화 《 박물관이 살아있다 2》에 등장한 이반 4세는 자신의 별칭이 'Terrible'이 아니라 'Awesome'이라고 주장한다. DVD에 수록된 제작진 인터뷰에서 해당 장면은 개그를 의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말이 맞다고 확인했다. Awesome도 원래는 "두렵다." 같은 뜻이었으나 근래에는 "멋지다." 같은 뜻으로 변질되었다. 반대로 Awesome과 같은 어원인 Awful은 Terrible과 비슷하게 "끔찍하다."나 "형편없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재밌게도 Terrible과 같은 어원인 Terrific은 Awesome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Awesome = Terrific, Awful = Terrible인데, 어원이 같은 단어들끼리 반댓말이 되어버렸다. [3] '뇌우의'라는 뜻의 형용사는 그로조보이(Грозово́й)라는 낱말이 따로 있다. [4] 표도르 알렉세비치 바스마노프(? ~ 1571) [5] 알렉세이 다닐로비치 바스마노프(? ~ 1570) [6] 이것은 차르가 실질적인 통치자가 아니며 ( 인질로 잡거나 협상할 만한) 어떠한 정치적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일반 평민들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7] 키예프 루스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으로 보야르들은 자신의 주군을 선택할 수 있었다. [8] 핵심은 최소한 이반 4세의 통치기 동안은 그 두 체제 중에 어느 한쪽도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9] 또한 표트르 대제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업적은 뛰어나지만 선정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이반 4세와 비슷한 인물이기도 하다. 표트로 대제는 농노제를 강화하고 샹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발을 억누르는 등 선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스탈린도 소련을 세계 2위 경제대국 겸 초강대국으로 만들고 독일군을 패퇴시키다 못해서 동유럽과 중앙유럽 지역을 소련의 위성국들로 채워넣는 업적을 세웠지만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항목에서도 보이듯, 관료로써 재능이 뛰어났고 관료제를 완성시킨 것과는 별개로 인품이 훌륭하거나 선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10] 진시황 이반 뇌제는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진시황의 경우 통일된 중국에 관한 정책들을 상당부분 시행하는데, 이 정책들이 이후 중국의 통일 왕조들의 기본 정책으로 자리 잡았고, 이반 뇌제 역시 광활한 시베리아 개척하면서 이때 개척한 시베리아는 이후의 중흥 군주인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2세의 정책적 자원 역할을 한다. [11] 진짜 유니콘이 아니라 일각고래 상아나 뿔이 있는 동물의 을 당시 그렇게 불렀다. [12] 1부 도입부에서 즉위식 때 대주교가 이반을 요한이라고 부르는데, 이반 요한 러시아어 발음이다. [13] 당시가 스탈린 시대였고, 어지간한 공산당 고위관료들도 대숙청 때 태반이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강제로 삽질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이 배 밖에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다만 스탈린이 볼가노프의 팬이었기 때문에 불가코프는 출간 금지만 당하고 말년을 비교적 편하게 보냈다. [14] 예를 들어 아파트 관리인 이반이 귀족의 아들이라는 설정이었지만 1973년 시점에서는 그 귀족들의 자녀들도 연금받는 노인으로 살고 있었을 때였으니(...) 설정 자체를 갈아엎을 수 밖에 없기는 했다. [15] 나머지는 알 카포네, 나폴레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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