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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관련 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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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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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크루이프에 대한 언사를 정리한 문서.

2. 목록

''유럽의 왕''
라디오 타임스 #
" 디 스테파노 펠레처럼."
프랑스 풋볼, 1971년 유럽 최고의 선수 1위 선정 코멘트[1]
요한 크루이프는 월드클래스 플레이어 그 이상이다.
FIFA 기술위원회, 1974년 월드컵 기술 리포트 보고서에서.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입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지는 못했지만[2], 그는 네덜란드와 세계 축구를 변화시킨 매우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당신이 크루이프를 경기장 밖에서 보면 그는 마치 마른 소년 같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그는 다른 행성에서 왔다.
크루이프 너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 담배를 끊고 나를 따라라. 제대로 훈련을 해! 내가 널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마! 당대 최고가 아니라 그 이상, 펠레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크루이프가 없다면 내겐 팀이 없는 것이다.
리누스 미헬스
요한 크루이프, 마라도나, 펠레, 에우제비우 모두 환상적인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역사상 최고였다.
요한은 완전한 1인자였다. 마치 현재의 메시와 같이 매우 특출한 선수였다. 나는 한밤중에도 메시를 보기 위해 일어난다. 심지어 그가 경기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3]
스야크 스바르트
사람들은 마라도나, 펠레, 베켄바워와 같이 여러 대단한 선수들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크루이프가 최고였다. 그는 세계 최고였다.[4]
하인츠 스투이[5]
선수로서 그는 축구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크루이프는 바르사에 와서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오늘날의 바르사는 그와 함께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탄생시켰다.
주안 라포르타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1960년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고, 1970년대는 크루이프, 1980년대는 마라도나였다. 그리고 1990년대의 최고는 미카엘 라우드럽이다.
크루이프는 유럽이 낳은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잔니 인판티노
그가 역대 최고의 유럽 선수였냐고? 미드필드에서 그는 최고였다. 수비로서도 최고였다. 공격수로서도 최고였다. 그는 최고였다.
테리 베너블스
내 생각에 그는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항상 이름이 오르내릴 그런 전설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나머지 우리들은 그저 인간일 뿐이고,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일뿐이다.
조르디 크루이프
그는 처음에는 선수로서, 그리고 다음에는 감독으로서 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축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만났던 모든 감독들이 중요했지만 그 중에서도 크루이프가 가장 중요했다. 그의 훈련과 전술은 똑같지 않았고, 경기의 승패가 갈리는 200만가지 디테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요한 크루이프는 그림을 그렸다. 이후의 바르셀로나 감독들은 단지 그 그림을 회복시키거나 향상시켜왔을 뿐이다.
그는 천재이자 바르셀로나를 변화시킨 레전드
펩 과르디올라
요한 크루이프는 내가 본 선수들을 통틀어 최고로 손꼽힌다. 월드컵 우승이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프랑크 르뵈프도 최고의 선수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려야 한다.
로비 제임스
내가 존경하는 요한 크루이프 선수를 처음으로 본 것은 98년이다. 그의 월드컵 경기 장면을 분석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정말로 축구를 잘하는 선수였다. 단지 공을 잘 차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팀의 리더로서 든든한 리더십을 갖췄고 골을 넣을 때나 어시스트를 할 때, 그리고 팀의 분위기를 반전시기키는 능력까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정말로 내가 생각하기에 토탈 사커라는 이름에 걸맞은 완벽한 선수'였던 것이다. 나는 골만 잘 넣는 선수도 싫고, 어시스트만 잘하는 선수도 싫다.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나 스스로도 모든 면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 크루이프 선수는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했다. 아마 그가 브라질의 축구 영웅 펠레가 활약할 당시에 선수 생활을 했다면 펠레를 능가하는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펠레는 골을 많이 넣기는 하지만 기동력 면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요한 크루이프의 경우 빠른 스피드를 갖췄다는 점에서 현대 축구에 가장 걸맞은 선수일 것이다.
이천수
70년대 네덜란드 팀의 중심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위치했다. 크루이프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동료들의 움직임을 스스로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많은 사람들이 크루이프를 '그라운드의 감독'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한 유명 저널리스트가 남긴 말은 크루이프가 얼마나 영리하고, 축구에 정통한 인물이었는지를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펠레는 볼을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다뤘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러명의 수비수들을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통해 제압했다. 그런 면에서 펠레는 축구공을, 마라도나는 수비수들을 지배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어쩌면 축구 그 자체를 지배했던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이형석
축구를 정말 잘했습니다. 볼 컨트롤, 패스, 시야 등 괜히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저도 그 사건으로 인해 네덜란드 전역에 유명세를 탔습니다. 당시 크루이프는 축구의 神(신)으로 불렸지요. 네덜란드가 개발한 토털 사커의 지휘자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영웅이었고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지금 ' 크루이프 턴'으로 불리는 턴 동작이 기가 막혔다. 굉장히 스피드가 빠른데다 방향전환도 좋아 따라잡기가 힘든 선수였다. 개성이 뚜렷하고 우수한 기량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리더십으로 감독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내가 현역시절에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꼽혔던 프란츠 베켄바워, 디에고 마라도나와도 경기를 해봤는데 경기장에서 흐름을 잡고 동료들을 이끄는 능력은 크루이프가 그 누구보다 최고였다.
허정무
요한 크루이프는 제가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입니다. 단연코 No.1입죠. 펠레, 마라도나보다 낫냐?고 물으실 수 있는데, 펠레와 마라도나는 축구 선수로 보면 안되지요. 저는 역대 최고의 선수를 논할 때 펠레와 마라도나는 뺍니다. 두 사람은 존경 혹은 경외의 대상이지 비교의 대상이 아녜요.
김유석[7]
펠레, 크루이프, 마라도나는 의심의 여지없는 천재다.
엘 문도 데포르티보
그는 비전, 태도, 존재감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매우 융통성이 있어서 상대가 그를 걷어차려고 할 때 그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때맞춰 움직였다. 수비수들은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메인 스트라이커의 제공자였지만 그 자신도 다산적인 골잡이였다.
루드 굴리트
아약스 전력의 50%를 크루이프가 차지한다. 만약 우리 팀에 크루이프가 있었다면 우리가 유러피언컵을 우승했을 것이다.
페렌츠 푸스카스[8]
그는 천재였다. 그는 6번째 혹은 7번째 감각을 가졌다. 경기에서 그는 왼발과 오른발 그리고 슈팅으로 가장 예상치 못했거나 최고의 해결책만 선택했다. 그는 단지 경기만 뛴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수비에도 힘썼다. 나에게 그는 60년대와 70년대 최고의 선수이다. 펠레가 아니다. 펠레는 전형적인 골잡이였다. 공을 가지면 득점을 해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의 심장이자 브레인이었다.
그제고시 라토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는 우주 나머지 위에 존재한다.
Laurent Vergne[9]
크루이프는 스포츠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라파엘 나달
1위 펠레, 2위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 스테파노.
알피오 바실레, 최고의 선수들 뽑으라는 질문에
만약 당시 발롱도르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시상했다면 나는 메시, 호날두보다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요한 크루이프, 메시다. 호날두는 아니다.
디에고 마라도나
나에게 크루이프는 축구의 역사를 바꾼 사람이다. 그는 축구의 신이다.
마라도나, 메시, 펠레, 요한 크루이프, 지단, 디 스테파노는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다. 그들은 차이를 보여준 선수들이다.
사비 에르난데스
역대 TOP 5는 펠레, 마라도나, 메시,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다.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우리는 그와 같은 선수를 한번도 본 적 없다. 그는 빠르고 기술적이며 팀의 리더였다. 거의 그가 팀의 감독인 것 같았다.[10]
단테 미르콜리[11]
크루이프는 남다른 경지에 있었다. 인상적인 퀄리티를 지닌 위대한 축구선수였다. 그는 아주 기술적이었고 경기를 이해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이기적이기도 했지만 그는 패스를 할줄 알았고 그렇게 했다. 그는 수비하기가 힘든 선수였다. 특히 속도변환때문에 말이다. 크루이프를 1대1 상황에서 막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왼쪽 윙으로 가기도 하고 오른쪽 윙으로 가기도 했다. 그는 멈추었다가 드리블하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속력을 변화시킬 줄 알았다. 그는 그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파비오 카펠로[12]
크루이프가 박스 안에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수비수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면, 그는 필드 중앙으로 이동한다. 수비는 그를 당연히 필드 중앙까지 따라가서 마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그의 스피드를 이용한다.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에게 주어진 페널티킥이 크루이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이다. 훌륭한 마크맨인 포그츠가 단단히 마크를 하기에 그는 필드 중앙으로 갔다. 그는 볼을 받고 공격을 만들어 나갔으며 그를 쓰러뜨리려는 모든 수비들을 드리블로 제쳐냈다.
만약 다음 해까지 기다린다면, 그는 40억 리라의 가치가 있다.[13]
자친토 파케티
크루이프는 작은 소년마저도 게임에 관심을 갖게 할 정도로 전술적으로 완벽했다. 그것이 그가 어렸을 때부터 전술에 매우 큰 흥미를 가졌던 이유이다. 그는 항상 경기의 상황들을 매우 명확히 봐서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항상 내 우상이었다. 나는 1970년대에 뤼트 크롤, 요한 네스켄스, 스야크 스바르트 그리고 크루이프와 같은 선수들이 함께 했던 1970년대의 위대한 팀인 아약스의 경기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3연속으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고,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 팀은 분명히 매우 좋은 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크루이프는 항상 내 관심을 끌었다. 요한은 아름답고 우아한 선수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마 내가 15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나는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와 악수하고 싶었고 내 이름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그를 매우 존경했던 것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가 축구계와 네덜란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나와 요한을 비교해서는 안된다. 요한은 확실히 다른 레벨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본보기로 삼았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그와 신체조건도 다르고 시대도 달랐다. 나는 그가 가진 신으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스피드와 폭발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나도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 지능적이고 수비수를 제쳐낼 줄 알며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넘버 10이었다. 그는 경기장 전체를 지배했다.[14]
내게 있어서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이다. 나는 어렸을 때 크루이프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나의 친구였다. 그가 그립다.
마르코 반 바스텐
난 1970년대의 네덜란드를 좋아한다. 그들은 날 흥분시켰고 크루이프는 최고였다. 그런 크루이프는 내 어릴적 영웅이었다. 내 침실 벽에 그의 포스터를 붙여 놓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창시자로 축구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아약스는 크루이프를 필두로 축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가 원한다면 그는 피치 위의 어떤 포지션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에릭 칸토나
사람들은 항상 내게 묻곤 했다. "브라질리언이었으면 했던 선수가 있었는가?" 질문에 답을 한다면, "아무도 없었다. 몇몇 굉장한 선수들이 있고 그들을 보며 감탄도 했지만 브라질리언이길 바랬던 적은 없었다. 그러다 크루이프를 보았다. 나는 그가 브라질리언이길 바랬다. 그를 보는 것은 즐거웠다."
펠레 #
우리는 크루이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절대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브라질에 2-0으로 승리하자 브라질 언론들의 반응[15][16][17]
그는 신체능력과 파워의 측면에서 마치 호날두와 같았다. 재능, 창조성, 예술성에 있어서는 마치 메시와 같았다. 크루이프는 경기장에서 두 사람의 능력을 하나로 결합해 내었다.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미겔 레이나[18]
그가 선수로서 바르사에 있었던 시간은 스페인 축구와 바르셀로나를 바꿔놓았다. 그는 단독으로 스페인에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를 도입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에우제비우
그가 없었다면 이 세계에 사비 이니에스타같은 선수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오리올 도메니크[19]
크루이프는 스페인에서 축구의 개념을 재창조했다. 오늘날의 바르셀로나 스페인은 그가 바르사를 지휘했었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미겔 앙헬 나달
진정한 축구 브레인이다. 그는 최고의 컨트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창조적이었고 공과 함께 본능적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골을 넣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기술적인 선수였지만,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와 함께 하는 선수들의 강력함과 함께 플레이했다.
크루이프는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그는 아직도 축구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비 찰튼
그는 네덜란드 축구의 대부이다.
프랑크 레이카르트
나는 스웨덴 리그에서 18년, 스웨덴을 위해 17번 뛰었지만 크루이프와의 경기는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공을 확실히 빼앗을 줄 알았는데 그가 나를 속였다. 나는 굴욕적이지 않았다. 나는 기회조차 없었다. 크루이프는 천재였어.
얀 올슨[20]
그는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바르셀로나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지배를 멈추게 한 바르셀로나의 중대한 전환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합류하기 전 그리고 전환이 진행되기 전 2년간, 크루이프는 거대한 정리를 진행했다. 그것은 혁명과도 같았다.
로날드 쿠만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캄 노우에 자신의 철학을 세우지 않았다면, 리오넬 메시는 바르사에 오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 13세의 소년인 채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니에스타 역시 선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레이엄 헌터[21]
크루이프는 그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정말로 항상 옳았다는 것이다.
조니 보스만[22]
나에게 그는 역대 최고이다.
세계 축구는 최고의 선수를, 나는 어린 시절의 우상을 잃었다.
미셸 플라티니
크루이프가 평안히 잠들었다. 그의 유산은 영원할 것이다.
리오넬 메시
축구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 크루이프에게 경의를 표한다.
지네딘 지단
크루이프는 축구를 새롭게 만든 남자이다.
로타어 마테우스
크루이프는 대단한 선수이며 감독이었고 선생이며 사람이었다.
위르겐 클린스만
나는 1963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경력의 후반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을 상대했고 그 후에도 펠레, 에우제비우, 조지 베스트, 바비 찰튼과 같은 멋진 선수들과 계속해서 경기를 할 만큼 운이 좋았다. 하지만 요한 크루이프는 순수한 능력 면에서 내가 만난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축구 측면에서 확실히 진정한 슈퍼스타였고 그와 같은 경기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그 당시 그는 최고는 아니더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되고 있었다. 아약스는 당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 마찬가지로 멋진 팀이었다. 크루이프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돈을 지불하고 가서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를 막으려는 것보다 아이브록스 테라스에서 그를 지켜보는 게 나았을지도.
존 그레이그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그에게 푹 빠져있었고 그와 함께 뛸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다. 크루이프와 함께 플레이하는 것은 마치 잘 보낸 인생과 같다. 크루이프가 돌아왔을 때 경기장은 만원이었고 모두가 그를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우리는 더이상 경기에서 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PSV에 꽤 뒤졌지만 JC가 온 뒤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마지막에 우승을 차지했다.
빔 키프트 #
나에게 있어 크루이프는 소설가 쥘 베른 같은 사람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 간 감독이자 리더였다.
훌리오 살리나스
그는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내가 축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신화이자 따라야 할 아이콘이었다. 그 후 내가 축구 감독이 되었을 때 크루이프는 나의 레퍼런스 중 하나였다. 그는 현대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를 만든 유명한 '오렌지 시계태엽'의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
라파엘 베니테스
크루이프는 놀라운 선수였다. 크루이프와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클럽과 팀이 모두 바뀌었다. 그는 모든 수준에서 관습을 거부했다.
후안 마누엘 아센시[23]
요한 크루이프는 모든 것이다. 크루이프처럼 현대 축구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축구 종교의 수호자가 되었으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그리고 영원히 클럽에 혁명을 일으킨 이 되었다.
치키 베히리스타인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인이다. 세계는 크루이프를 통해 네덜란드를 알게 되었다.
마르크 뤼터[24]
축구가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축구를 만들어낸 인물을 잃었다.
게리 리네커
크루이프는 축구를 현대화시킨 모더나이저였으며 바르셀로나에선 개척자,건축가로서의 면모도 선보였다.
텔레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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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1년은 크루이프가 처음 발롱도르를 수상한 해인데 이미 이때부터 디 스테파노, 펠레가 거론될 정도였다. # [2]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더불어 현재까지 FIFA 월드컵 우승이 없는 유이한 유럽 축구 강국이다. 다만 현재 네덜란드는 예전의 명성에서 내려와 있는 상태. [3] 출처 19분에 등장. [4] 출처 19분 14초에 발언 등장 [5]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 크루이프 팀 동료. 포지션은 골키퍼. [6]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에서 요한 크루이프를 언급하며. 영상(3분 18초부터) [7] 과거 후추닷컴에서 활동하던 기자. [8] 1970-71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 이후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9] 유로스포르트 기자 [10] 영상 7분 35초. [11] 197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CA 인데펜디엔테에서 1965부터 1973년까지 뛰었던 선수이다. 1972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크루이프를 대인마킹했다. [12] 영상 28분 32초. [13] 1976년 감독과의 불화로 크루이프가 이적한다는 소문이 돌아 기자가 만약 내년에 이탈리아 팀으로 이적한다면 이적료가 얼마일지 예상해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14] 출처 9분 56초 [15] 출처 30분 12초 [16] 1974 월드컵은 지금과 달리 1차 조별리그를 하고 8강을 토너먼트 대신 2차 조별리그를 치른 뒤 각조 1위가 결승전, 2위가 3·4위전을 치르는 형식으로 치렀다. 당시 브라질은 직전 대회인 1970 FIFA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우승하였으며 펠레, 제르송, 토스탕이 은퇴, 카를로스 아우베르투가 부상으로 소집되지 못하긴 했으나 전 대회에서 활약했던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등이 있었다. 이 대회에서도 2차 조별리그에서 앞선 두 경기를 모두 이겼기에 마지막 경기인 네덜란드전만 이기면 두 대회 연속 결승 진출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경기에 들어가자 네덜란드의 경기력에 완전히 압도당하며 패했다. 보통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이기는 경우는 브라질의 전력이 매우 약한 시기이거나 상대가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통해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때는 네덜란드가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을 누구보다 공격적인 방식과 혁신적인 스타일을 통해 압도했고 특히나 크루이프 한 선수에게 1골 1도움을 허용하는 등 농락당하며 무너졌다. 브라질이 공격적인 축구에 무너진 경우는 이 경기가 유일했고 그 스타일이 처음보는 스타일의 축구였으며 이를 경기장 위에서 한 선수의 지휘 하에 펼쳐진다는 사실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열풍을 일으켰다. 당시 사람들은 이 경기를 근거로 결승에서 서독을 이기고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1966 월드컵부터 월드컵 관련 스탯을 정리한 옵타와 소파 스코어 모두 1974 월드컵의 메모러블 매치(Memorable Match)로 이 경기를 선정했다. [17] 다만 당시 브라질은 펠레와 제르송의 은퇴, 결정적으로 넥스트 펠레라고 평가받던 토스탕의 부상으로 인한 이른 은퇴로 인해 공격전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철저한 수비축구로 일관하고 있었다. [1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골키퍼. 크루이프가 1974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득점한 일명 팬텀 골로 회자되는 전설의 득점이 바로 미겔 레이나를 상대로 한 득점이다. [19] 저널리스트. [20] 스웨덴의 수비수이자 크루이프 턴을 처음으로 당한 것으로 유명한 수비수. [21] 저널리스트. [22] 아약스 선수. [23] 바르셀로나 선수. [24] 네덜란드 제50대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