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0:32:54

빔 키프트

빔 키프트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에레디비시 로고.svg
1981-82 · 1987-88
파일:European_Golden_shoe_Trophy.png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88
}}} ||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wim kieft NNT.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빔 키프트
Wim Kieft
본명 빌럼 코르넬리스 니콜라스 키프트
Willem Cornelis Nicolaas Kieft
출생 1962년 11월 12일 ([age(1962-11-12)]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90cm, 86kg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AFC 아약스 (1975~1979 / 유스)
AFC 아약스 (1979~1983)
AC 피사 (1983~1986)
토리노 FC (1986~1987)
PSV 에인트호번 (1987~1990)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90~1991)
PSV 에인트호번 (1991~1994)
국가대표 43경기 11골 ( 네덜란드 / 1981~1993)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출신 방송인 겸 축구 평론가이다.

선수 시절 19세의 어린 나이에 에레디비시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유러피언 골든슈 역대 최연소 수상을 하면서[1] 일약 스타덤에 올라 1980년대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 차세대 스타로 주목 받았던 선수였다. 그러나 자국 리그를 평정하고 떠난 해외 무대에서 부진과 부상에 시달리며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동시대 마르코 판바스턴, 뤼트 휠릿의 존재로 인해 대표팀에서도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절치부심으로 다시 자국 리그로 돌아온 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1987-88시즌 트레블의 주역이 되었고, 그외에 다수의 우승컵과 에레디비시 득점왕, 도움왕을 거머쥐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AFC 아약스

13세의 나이에 고향인 암스테르담을 연고로 하는 AFC 아약스 유소년팀에 입단하여 그곳에 몸 담은 지 5년차 되었을 무렵, 당시 아약스를 지휘하던 레오 베인하커르 감독의 부름을 받아 1군에 콜업되었고, 1980년 5월 4일 17세의 나이에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불과 17세의 어린 선수였지만 엄청난 재능을 가진 키프트에게 별다른 적응기는 필요없었고, 1980-81 시즌 34경기에 나서 17골을 넣으며 16골을 넣은 프랑크 아르네센과 함께 에레디비시를 폭격해 팀을 리그 2위에 안착시켰다. 또한 KNVB 베이커에서는 조별리그 3골, 16강 3골 1도움, 8강 2골, 준결승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준우승으로 이끔과 동시에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이 시즌 리그와 모든 대회를 통틀어 총 44경기 26골 7도움을 기록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1-82 시즌에는 무서운 기세를 이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량이 완전히 만개하며 리그 34경기에서 32골 2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으로 팀을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고, 리그 득점왕 타이틀은 물론 유럽 각국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가운데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유러피언 골든슈까지 손에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다. 참고로 키프트를 전후로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이 상을 수상했지만 10대의 나이로 이 상을 수상한 선수는 키프트가 유일하다. 즉, 유러피언 골든슈 역대 최연소 수상자인 셈이다.

1982-83 시즌에는 이전 시즌 만큼은 아니지만 29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넣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리그 득점 순위 4위에 이름을 올렸고, 헤랄트 파넨뷔르흐, 프랑크 레이카르트, 요한 크루이프 등과 함께 팀을 다시 한 번 리그 정상으로 이끌었다.[2]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구단과 크루이프는 마르코 판바스턴이 키프트보다 잠재력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뛰어나다고 판단하여 그를 밀어주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에 키프트는 등 떠밀리 듯 이적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세계 최고의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CF와 연결되었지만 구단 간의 협상 결렬로 무산되었고, 1980년대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로 꼽히던 세리에 A의 명문 구단들과도 연결되었지만 당시 세리에는 외국인 선수를 2명으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던 터라 대부분의 클럽들은 세계 정상급 용병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빅클럽으로의 이적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키프트의 에이전트였던 코르 코스터[3]는 키프트가 많은 출전 기회를 보장 받을 수 있도록 중위권 이하의 팀들을 위주로 물색했고 결국 세리에 B에서 세리에 A로 막 승격한 승격팀 AC 피사로 이적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키프트는 전유럽의 동나잇대 선수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초특급 유망주 중 하나로서 고평가를 받았다.

2.1.2. 세리에 시절

첫 시즌인 1983-84 시즌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세리에의 수비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잦은 부상에 시달리는 불운까지 겹치며 리그에서 3골을 넣는 데 그쳤고, 팀 또한 리그 최하위로 시즌을 마쳐 승격 1시즌 만에 강등을 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 시즌인 1984-85시즌에는 세리에 B에서 15골을 터뜨리면서 팀의 리그 우승과 승격을 이끌었고, 세 번째 시즌인 1985-86시즌에는 세리에 A에서 30경기 전경기에 출전해 7골을 넣으며 나쁘지 않은 스탯을 기록했지만 팀의 강등을 막을 순 없었다.[4]

85-86시즌에 보여준 경쟁력을 인정받아 1986-87시즌 세리에 A의 명문 토리노 FC로 이적하였으나 무릎 부상으로 시즌 절반 가량을 날려버리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나올 때마다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리그 8골로 득점 순위 7위에 이름을 올렸고, UEFA컵에서는 5골을 넣으며 팀의 8강행을 이끔과 동시에 대회 득점왕에 등극했다.

시즌 종료 후 토리노의 루이지 라디체 감독은 시즌 중에 당한 무릎 부상이 앞으로도 선수 생활에 큰 지장을 줄 고질적인 부상이라고 판단을 했고 키프트에게 방출 통보를 한다.

이탈리아 무대 도전을 실패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2.1.3. PSV 에인트호번

1987-88 시즌 PSV 에인트호번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고 PSV 에인트호번과 계약을 맺으면서 4년 간의 이탈리아 무대 도전을 마치고 자국 리그로 복귀했다.

자국 리그로 복귀한 첫 시즌부터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에레디비시의 수비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며 리그 32경기 29골 10도움을 기록했고, 모든 대회를 통틀어 총 44경기 33골 10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로날트 쿠만, 에릭 헤러츠, 한스 힐하우스, 쇠렌 레르비 등과 함께 트레블( 유러피언컵, 에레디비시, KNVB 베이커 우승)을 일궈냈다.

여담으로 이 시즌 그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전유럽을 통틀어 4명 밖에 되지 않는다.

1988-89 시즌에는 주로 힐하우스, 바넨뷔르흐와 함께 3-5-2의 투톱으로 출전하였으며 시즌 도중 5개월 장기 부상을 당했지만, 시즌 후반기에 영입된 호마리우가 키프트의 공백을 잘 메워준 덕분에 팀에 큰 타격은 없었다. 장기 부상에서 복귀한 후에는 호마리우와 투톱을 이뤘고 20경기 6골 4도움을 기록했다.

1989-90 시즌에도 호마리우와 투톱을 이뤄 에레디비시를 폭격했고 30경기에 나서 21골 13도움을 기록하며 득점왕인 호마리우(23골)에 이어 리그 득점 순위 2위에 이름을 올림과 동시에 리그 도움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KNVB 베이커에서도 4골을 넣으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이 시즌 총 39경기 26골 16도움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프랑스의 FC 지롱댕 드 보르도로 이적하면서 다시 한 번 해외 무대에 진출했지만 부상에 시달리면서 18경기 2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1시즌 만에 다시 에인트호번으로 리턴하게 된다.

1991-92 시즌 바비 롭슨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호마리우와 함께 4-4-2의 투톱으로 출전했고 33경기 19골 11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으로 팀을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득점왕인 데니스 베르캄프(22골)에 이어 득점 공동 2위에 이름을 올렸고, 커리어 통산 2번째 도움왕을 차지했다.

1992-93 시즌 한스 베스터호프 감독 체제에서 25경기 11골 2도움을, 1993-94 시즌 데 모스 감독 체제에서는 30경기 4골을 기록했으며 93-94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81-82시즌 한껏 물오른 절정의 폼을 보여주자 1981년 8월 성인 대표팀에 소집되었고, 1981년 9월 1일, 스위스와의 친선전에 선발 출전하면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1982년 3월 23일, 스코틀랜드와의 친선전에서 0:2로 끌려가던 31분,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크로스를 헤더로 마무리하며 만회골을 터뜨렸고 A매치 출전 2경기 만에 데뷔골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후 뤼트 헤일스, 판 쿠턴, 유리 쿨호프, 페테르 후트만, 욘 보스만 등과 오렌지 군단의 스트라이커 자리를 두고 경쟁을 펼쳤다.

1986 멕시코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4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터뜨리면서 네덜란드 대표팀 내 최다 득점자로서 네덜란드가 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둔 끝에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되면서 활약이 빛을 바랬다.

이후 제대로 포텐이 터진 마르코 판바스턴, 뤼트 휠릿에게 밀려 2년 반 가까운 시간 동안 대표팀과는 거의 인연이 없다시피 했지만 UEFA 유로 1988을 앞둔 시점에서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부름을 받아 백업 공격수로 유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유로 1988 조별리그 2라운드 잉글랜드전에서 62분 교체 출전하여 경기 막판 코너킥 세트피스 상황에서 백헤더로 볼을 뒤에 있는 판바스턴 앞에 떨궈주면서 스코어를 3:1로 벌리는 쐐기골을 어시스트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아일랜드전에서는 0:0으로 팽팽히 맞서던 50분에 교체 투입되어 82분 헤더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의 1:0 승리와 4강 토너먼트 진출을 이끌었다.[5]

4강 토너먼트 독일전에서도 교체로 출전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로날트 쿠만과 판바스턴의 골에 힘입어 2:1 역전승을 거둬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승 소련전에서는 벤치를 지켰지만, 휠릿과 판바스턴의 골로 2:0 승리를 거둬 유로 우승 멤버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지난 유로와 마찬가지로 백업 공격수로 참가하게 되었으며 조별리그 1라운드 이집트전에서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 투입되어 58분, 선제골을 기록했다.

조별리그 3라운드 아일랜드전에서는 5-4-1의 우측 윙어로 선발 출전했고, 11분, 휠릿과 환상적인 2:1 패스 앤 무브 연계 플레이를 펼치며 선제골을 어시스트했다.

16강 독일전에서는 66분 교체 출전하였지만 2:1 패배를 막을 수 없었다.

UEFA 유로 1992에도 참가했지만 8강전까지 벤치를 달궜고, 결선 토너먼트 덴마크전에서야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 투입되면서 첫 경기를 치렀다. 결국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승부차기에 돌입했고 판바스턴의 실축으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한 동안 대표팀에 소집되지 않다가 1993년 9월 22일 산마리노와의 UEFA 유로 1996 예선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잠시 축구행정가의 길을 걸었지만 이내 알코올 중독 코카인 중독에 빠져 십수 년간 폐인 생활을 했다. 중독 및 금단 현상 치료와 재활 훈련을 받은 뒤 다시 축구계로 돌아와 PSV 에인트호번의 유소년 코치로 일했으며, 이후 스포르트1, RTL, 부트발 인사이드, 탈파 TV의 베로니카 인사이드 등 다수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축구 전문가 및 해설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4. 플레이 스타일

190cm의 큰 신장과 강력한 피지컬을 이용한 제공권 장악력과 탁월한 헤딩 능력, 최전방에서 끊임없이 수비와 싸우고 버티는 몸싸움 능력, 빼어난 연계 능력 등 포스트 플레이와 골문 앞에서의 원샷원킬 마무리 능력은 당대 일류 수준이었다. 볼 터치도 준수했으며 그외 기술적인면에서도 최전방 스트라이커 치고는 뛰어난 편에 속했다. 단점으로는 느린 스피드를 꼽을 수 있는데, 그러한 단점 때문에 네덜란드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술을 들고나올 때에는 벤치를 지키는 일이 잦았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정통 타겟형 스트라이커였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1] 이 기록은 40년이 넘게 흐른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2] 참고로 동명이인이 아닌 그 요한 크루이프가 맞다. 다만 선수 말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터라 본 포지션인 중앙 공격수와는 다른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며 중원의 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3] 크루이프의 장인으로 크루이프의 에이전트이기도 했다. [4] 당시 세리에는 수비가 강세였던 터라 많은 골이 나오는 리그가 아니었다. 15골 내외로만 넣어도 충분히 득점왕 경쟁을 펼칠 수 있었을 정도. 이 시즌 7골을 넣은 키프트는 득점 순위 Top 15에 이름을 올렸는데, 3위인 미셸 플라티니와는 불과 5골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5] 조별리그 2라운드를 기준으로 아일랜드와 소련은 각각 1승 1무를 거둬 조 1, 2위에 랭크되어 있었고, 네덜란드는 1승 1패로 조 3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로서는 소련이 패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아일랜드를 꺾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소련이 잉글랜드를 3:1로 격파하고 2승 1무 조 1위의 성적으로 4강 토너먼트에 진출했기 때문에 키프트의 골이 없었다면 네덜란드는 1승 1무 1패 조 3위의 성적으로 조별리그 탈락했을 것이다. [6] 공동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