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ジュリアおたあ(줄리아 오타)[1]조선 출신의 전국 시대, 에도 시대 인물. 줄리아(ジュリア)는 세례명이며[2] 세례명 이외에 지어진 일본어[3] 이름이 오타아(おたあ)이며 장음 표현을 생략한 '오타'로 한국에 알려져 있다.
2. 생애
고니시 유키나가가 임진왜란 당시 입양한 조선 아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일각에선 양녀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 고니시가 오타를 시녀로 쓴 것은 맞지만 양녀로 입양했단 것을 증명할 사료는 없다고 한다. 하여튼 고니시 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처를 모시며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집안이던 고니시가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인이 되어 ' 줄리아(ジュリア)'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 시기에 고니시 가문의 지식인 약학[4]도 함께 배웠다.1580년에 태어났으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배하고 처형당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5]가 이즈 제도의 고즈섬([ruby(神津島, ruby=こうづしま)])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이유는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설도 있고[6] 가톨릭 신앙이 금지되었어도 배교하지 않아서였다는[7] 설도 있다. 후술할 남동생 건을 보면 적어도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유배된 후에는 고니시 가에서 배운 약학 지식을 살려 환자를 간호하는 등 신앙 생활과 봉사를 계속했다고 하며 정확한 년도는 불명이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에야스 사후(1616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일본 각지를 떠돌며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사를 돕는 등 살아서 신앙을 전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619년 나가사키에서 여자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리와 성가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하며 1622년 오사카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산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보아 1622년까진 생존해 있음이 확실하지만, 여전히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불명확하다.
3. 줄리아의 서한
조선에서의 행적, 본명 등은 불명이었는데 2023년 남동생 '운나키(うんなき)'[8]에게 쓴 편지가 공개되면서 일부 사실이 드러났다.편지에 따르면 오타는 한양에 살던 김(金)씨 양반 출신 집의 장녀였다고 한다. # # 1871년에 청나라에서 출판된 「관광일본」[9]을 참조해 조선 왕족 출신이라는 듯한 견해도 있었으나 이 편지가 공개되면서 왕족은 아닌 것[10]으로 밝혀졌다. 해당 편지는 한양에서 살다가 포로로 잡히면서 생이별한 '운나키'(일본명 무라타 야스마사(村田安政))라는 이름의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편지는 오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처인 시즈오카 슨푸성(駿府城)에서 지내던 1609년 8월 19일 쓴 것으로, 수신인은 마찬가지로 일본에 잡혀와 야마구치 하기에 살던 둘째 남동생 '운나키(うんなき)'다. 하기는 조선인 도공이 많이 살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운나키'는 당시 야마구치 일대를 지배하던 모리(毛利) 가문의 가신 히라가(平賀) 가문에서 하층민으로 지내고 있었다. '운나키'는 조선에서 쓰던 이름으로 여겨지며 원형은 '운락(운낙)'이나 '운학', '운악', '응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安政(야스마사)[11]는 나중에 얻은 일본식 이름이다.
편지를 받고 누나의 존재를 알게 되어 슨푸성으로 간 남동생이 누나와 상봉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하사품도 받아 하기로 돌아가자 모리 가문은 그에게 200석 봉토와 함께 '무라타(村田)'라는 성과 '야스마사(安政)'라는 이름을 내려 줬다[12]. 그렇게 조선인 운나키는 일본인 사무라이 무라타 야스마사가 됐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끼는 시녀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조선인 포로인 그가 무사가 될 정도로 든든한 자산이었던 것이다. 이후 대대로 하기에서 사무라이로 살던 무라타 가문은 줄리아의 편지를 보관해 왔고 2021년 하기박물관에 기증했는데 2023년 박물관이 편지를 전시하면서 일련의 사실이 새롭게 세상에 알려졌다. 이에 일각에선 이에야스 사후 일본 각지를 떠돌던 줄리아가 말년에 남동생이 사는 하기에서 지내다 삶을 마쳤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편지에서 리아는 자신을 '타(たあ)'라고 부르는데 남동생의 이름 운나키처럼 조선에서부터 쓰던 것일 가능성이 있다.[13] 줄리아의 속명 '오타'에서 '오'를 귀부인에게 붙이던 일본어 높임말인 '오( 御)'라고 본다면 속명은 사실 '타'였을 것이고 이는 조선식으로는 (그대로) '타'거나 '다' 내지는 단아로서 줄리아는 조선에서 '김타아'와 비슷한 성명을 지녔을 수 있다고 추측된다.
출신 배경은 줄리아가 편지에서 자신을 왕의 측근인 '제운대군절도사 김세왕온'과 홍씨 부인의 5자녀 중 장녀라고 말하지만 '제운대군절도사'와 '김세왕온'은 국내 사료엔 없는 이름이라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줄리아는 편지에서 자신이 임진년(1592년) 당시 13살이었으며 이듬해에 11살짜리 동생[14], 그리고 몸종과 잡혀 일본으로 끌려왔다고 말한다.
4. 여담
- 후손은 없으나 상술한 둘째 남동생 무라타 야스마사(운나키)의 직계후손인 무라타 노리오(1941년생)가 생존하고 있다.
- 가톨릭을 믿는 재일교포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는다. 한국의 절두산 성지에는 한때 줄리아가 사망한 곳으로 추정된 고즈섬의 흙을 떠와 만든 가묘가 있었으나 줄리아가 고즈섬에서 죽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철거되었다.
5. 창작물에서의 등장
- 사잔 올 스타즈의 夢に消えたジュリア(꿈으로 사라진 쥬리아)의 가사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원래 사잔 올 스타즈는 오타 쥬리아의 이야기는 전설상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다가 실존인물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오다 쥬리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본래 언년이란 이름의 보잘 것 없는 시골 양반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아사하여 고아가 된 것을 고니시가 주워온다. 작중 그 시점에서 마계의 여러 마수들에 시달려 마음고생을 하던 고니시는 이 여자아이를 돌보며 어느 정도 마음의 평안[15]을 찾았다. 여기서는 오다 쥬리아란 이름이 이미 몰락한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에 느끼는 아쉬움을 담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오타 쥬리아의 오타(おたあ)는 성이 아니라 이름이며 노부나가의 성인 '오다(織田, 발음: おだ)'인 것도 아니라 당시 해당 부분이 다소 잘못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일본어를 한글로 쓸 때 원칙상 장음표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오타'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오타아(おたあ)'다. 무엇보다 '오'는 귀부인에게 붙이던 높임말인 '오( 御)'이다.
- 1973년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쓰>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영화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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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2부 일륜의 데마르카시온 외전으로 2023년 공개된 서한을 바탕으로 그녀의 생애를 다뤘다.
왜란이 터지기 전,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나, 한양 점령으로 가족과 헤어지고, 왜병들에게 발각되어 몹쓸 짓을 당해 충격받은 그녀를 고니시 유키나가에서 거둬져 그의 영지로 간다. 그곳에서 그의 부인 주스타의 시녀로써 조선인 출신인 안나와 헤마를 만나고, 카톨릭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세례를 통해 쥬리아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그러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고 왜란이 끝났단 소식이 오타성까지 돌자 셋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기뻐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형당하고, 이 여파로 가토의 침공으로 우토 성은 함락되고 만다. 쥬리아는 포로로 끌려가던 중 안나와 헤마의 수급[16]을 보게 되고 오열한다. 가토 앞에서 그의 침략과 그와 병력들의 만행을 비판하고 신앙을 빼앗으려는 악마들이라고 일갈하며 어떠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죽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가토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도쿠가의 마음에 들 것 같다며 후시미 성으로 끌고간다.
그 곳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면하게 되고, 쥬리아를 본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을 막지 못해 조선의 백성이 고통에 빠진 것을 사과하고, 조선 및 명과의 교류 재개와 그를 통한 태평성대를 이루고 싶단 소망을 말하면서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청하자 쥬리아는 조국과 안나의 헤마의 최후를 떠올리며 도쿠가와의 청을 받아들인다. 도쿠가와의 시녀가 된 그녀는 통신사의 방일로 통신사와 도쿠가와의 통역사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교류가 재개되었고, 어느날 시종을 통해서 어릴 때, 헤어진 그녀의 동생과 닳은 남자가 모리가의 가신 히라가 가문의 시종으로 살고 있단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해 서신을 보내 만나게 된다.
손에 있는 푸른 멍을 보고 확신한 그녀는 다리의 멍까지 보러 시도하지만, 남자는 그런 그녀를 제지하면서 서신을 받고 왔지만, 시녀인 당신이 누나가 맞나는 의문이 남아있다는 말을 듣자 쥬리아는 조선어로 바보[17]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리자, 남자는 누나라고 부르며 포옹하며 감동의 재회를 하게 된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을 어긴 벌로 섬으로 유배되어 고즈 섬에서 하녀와 함께 신앙생활을 이어나갔고, 이에야스의 죽음으로 유배가 해제되었다. 외전 나레이션은 1622년 선교사의 편지로 쥬리아는 오사카에 있는 우리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편지 이후로 그녀의 존재는 환상이 되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6. 관련 저서 및 기록
- 오타 줄리아 (이른아침, 2018.10.22)
- 일본에 납치된 10대 소녀의 반전…“죽은 줄 알았던 동생 찾았어요" 기사
[1]
일본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때 '바오로 미키(パウロ三木)'와 같이 세례명-속명 순으로 표기한다. 이때 세례명이 마치
미들네임처럼 성과 이름 사이에 들어가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며 제일 앞에 와야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와 같이 속명-세례명 순으로 부른다.
[2]
줄리아/율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성인(聖人) 중에는 대표적으로 5세기경의 인물인 '코르시카의 율리아' 성녀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카르타고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시리아 상인의 노예가 되어 그와 동행하면서 코르시카 섬에 들렀다. 마침 이교도의 축제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교도의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면 자유를 주겠다는 통치자의 제안을 거절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3]
없다, 얻다와 같은 한국어 답변을 듣고 이름으로 생각하여 오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후술되듯 사실 오타의 조선식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4]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가 사카이의 약종상(藥種商)이었다.
[5]
도쿠가와는 꽤 오래 전부터 오타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도쿠가와의 취미 중 하나가
제약으로, 그가
고도비만임에도 불구하고 꽤 장수를 한 비결이 이런 독자적인 건강 요법을 실천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도쿠가와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집안이 원래 약재상이었음을 당연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가 거느린 시녀인 오타 역시 그 독특한 이력(조선인 출신에, 미녀에,
제약에 능통하다는 점)으로 인해 당연히
도쿠가와의 눈에 띠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6]
야사에 따르면 오타가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여서 도쿠가와가 오타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다. 심지어 끝까지 자신의 첩이 되길 거부했음에도 가톨릭이 금지되었을 때 '배교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그러니 제발 배교하겠다고 해서 목숨을 보전해라.'고 부탁했다고도 하는데 사실이라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미녀였던 모양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 당대
센고쿠 시대의 상류층 여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매력을 느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상류층 여인들은 친정가문을 뒷배로 하여 암투를 벌이거나, 내정 등에 간섭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거나, 통야참배를 명목으로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등의 행동들이 만연한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몸가짐을 조심하게 하는 오타의 모습은 다른 상류층 여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없는 행동들이었기에 더
도쿠가와의 눈에 들어왔을 거라는 주장이다.
[7]
이 때 ‘지상의 왕을 위해 천상의 왕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그렇게 유배를 떠나는 길에도
도쿠가와 측에서 가마와 호위병, 십 수 명의 시녀를 붙이는 등, 사실상 외유를 보내는 수준으로 많은 배려를 제공했지만 오타는 이 모두를 물리치고 "
예수의
골고타의 발자취를 나도 따라가겠다."고 하며 시녀 한 명만 데리고서 유배지로 맨발로 걸어갔고 한다. 그렇게 떠나는 오타에게
도쿠가와는 "혹시 변심하거든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언지를 남겼고, 오타가 죽는 순간까지 시기마다 사람을 보내어 구애·회유를 지속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일화들이 상당히 많이 퍼져 있는 점에서라던가, 신앙을 끝까지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처럼 순교하지 않고 최소
도쿠가와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목숨을 유지했다는 점을 보면 오타가
도쿠가와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설화는 꽤 신빙성이 있는 일화이다.
[8]
'운락(운낙)'이나 '운학', '운악' 내지는 '응락'이라는 조선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김씨 집안 출신임을 고려하면 '김운낙' 정도의 성명을 지녔을 것이다.
[9]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하현덕(夏顯德)의 저술로 1871년 중국
상하이의 자모당(慈母堂)에서 상·하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10]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들이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자신이 잡은 포로를 왕족으로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11]
한국식 독음은 '안정'.
[12]
오타가
도쿠가와의 측실이 될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서, 오타의 동생인 운나키에게 지위를 부여한 것
[13]
헤어졌던 동생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정말 동생이 맞는지 묻고자 보내는 편지에서 스스로 '타'라고 칭했기 때문에 없다, 얻다와 같은 한국어 답변을 듣고 일본인이 이를 이름으로 생각하여 '오타'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는 설보다는 애초에 '타아'가 조선에서 쓰던 본명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에 무게가 실릴 수 있다.
[14]
운나키가 아닌 다른 동생. 운나키는 당시 7살.
[15]
작중에서는 오타 쥬리아가 순수하고 정결한 영혼을 가진 데다 미래에 크게 이름을 남길 인물에겐 마수들이 크게 해를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고 설명된다.
[16]
안나와 쥬리아 둘 다 우토 성 내에 있었으나 헤마만 성 아래 마을로 가 있어서 안나는 자신이 마을 지리를 잘 아니 헤마를 찾아 오겠다고 하면서 쥬리아를 성에 남게했다.
[17]
어린 시절 남동생이 손에는 푸른 멍 다리 안쪽에는 갈색 멍이 들었다라며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모양새가 민망한지라 쥬리아는 "이 바보야"라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