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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03:21:56

오웬 하트

파일:Owen-Hart-death-FI.jpg
OWEN HART

1. 프로필2. 개요3. 생애4. 사망5. 그 외6. 둘러보기

1. 프로필

파일:오웬하트프로필.png
본명 Owen James Hart
링네임 Owen Hart
The Blue Blazer
"The Rocket" Owen Hart
Owen James
The Blue Angel
출생지 캐나다 자치령 앨버타 주 캘거리
생년월일 1965년 5월 7일
사망일 1999년 5월 23일 (향년 34세)
신장 178 cm
체중 103 kg
피니시 무브 베어 허그 + 탑 로프 드롭킥[1]
탑 로프 스플래시[2]
샤프슈터
파일드라이버
유형 테크니션 + 올라운더
가족 관계 배우자 마샤 하트[3], 슬하 2명
브렛 하트
주요 커리어 IWGP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Stampede 브리티쉬 커먼윌스 미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Stampede 레슬링 인터내셔널 태그팀 챔피언 1회
Stampede 북부 아메리칸 헤비웨이트 챔피언 2회
Stampede 레슬링 명예의 전당 (1995)
USWA 통합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2회
WWF 태그팀 챔피언 4회
WWF 유로피언 챔피언 1회
WWF 킹 오브 더 링 우승 (1994)

2. 개요

파일:external/www.g-pop.net/owen_pink.jpg

캐나다 프로레슬러.

3. 생애

아버지는 스탬피드 레슬링을 설립하고 수많은 레슬러를 키워낸 스튜 하트, 슬하의 12남매 모두 프로레슬러로 활동하거나, 레슬링사업에 종사했거나, 프로레슬러와 결혼했다. 역시 가장 유명한 가족은 여덟째인 브렛 하트.

막내로 태어난 오웬은 고등학교때 아마추어 레슬링을 했으며 이때 아내가 될 마사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 오웬은 프로레슬러의 길로 나서기보다는 다른 직업을 찾아보려 하였으나[4] 실패하고 가업인 프로레슬링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던전'으로 유명한 집 지하실에서 아버지의 혹독한 수련을 받고 스탬피드 레슬링에서 데뷔했으며 신일본 레슬링으로 원정을 가 수신 선더 라이거와 히로시 하세 등과 시합을 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이후 1991년에 2개월 정도 WCW로 갔다가 WWF로 이적했다.

WWF 초기에는 가면쓴 수퍼히어로 기믹인 '블루 블레이저'로 잠깐 등장하였으며 이후 레슬매니아 6 전후에 정식으로 싱글 데뷔하였다. 하지만 큰 반향은 없었고[5], 이후로 코코 B. 웨어와 잠시 '하이 에너지'라는 팀을 만들어 활동했으나 코코가 WWF에서 짤리면서 팀도 해체된다. 이후 형 브렛이 하트 파운데이션에서 싱글로 독립한 후 남겨진 파트너 짐 앤빌 나이드하트와 '뉴 파운데이션'이라는 태그팀을 결성하게 되면서 서서히 이름을 떨치게 된다.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형인 브렛 하트와의 대립. 형제들과 출전한 WWF 서바이버 시리즈(1993)에서 실수로 인한 브렛과의 충돌로 오웬 자신이 제거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이를 달래기 위한 브렛과 오웬의 태그팀 타이틀도전이 실패하면서 오웬은 브렛 하트를 '앞길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형'이라 비난하며 악역으로 독립한다. WWF 레슬매니아 X에서 벌어진 형제간의 첫 대결에서 오웬이 브렛을 핀폴로 잡아내지만, 이후에 벌어진 요코주나와의 챔피언전에서 브렛 하트가 승리하면서 형이 WWF 챔피언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6]

이후 오웬 하트는 WWF 킹 오브 더 링(1994) 토너먼트를 짐 나이드하트의 도움으로 승리한 후 자신을 '킹 오브 하트'라 부르며 브렛과 자존심과 챔피언 벨트를 걸고 대립하게 된다. WWF 섬머슬램(1994)에서 브렛 하트와 철장 매치에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나 브렛이 먼저 탈출하면서 패했고[7], 8월의 럼버잭 경기에서도 외부 개입으로 판정이 번복되면서 챔피언 벨트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이에 오웬은 WWF 서바이버 시리즈(1994)의 브렛 하트와 밥 백클런드와의 경기에서 어머니 헬렌이 타월을 던지도록 강요하였고 결국 보다못한 헬렌이 타월을 던짐으로써 브렛은 타이틀을 잃게 되었고 오웬은 복수에 성공한다.

이후 오웬은 요코주나, 브리티쉬 불독과 악역 태그팀으로 활동하며 태그팀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브렛 하트가 악역으로 전환하면서 브렛과 오웬, (매부지간인) 불독과 앤빌, (하트던전 출신이자 친구인) 브라이언 필먼과 함께 반미 악역집단인 뉴 하트 파운데이션을 조직해 활동, WWF 챔피언(브렛) - 인터콘티넨탈(오웬) - 유로피언(불독) - 태그 팀 벨트(오웬과 불독)를 싹쓸이하기도 하였다. 이때 오웬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과 대립 중이었다. 1997년 섬머슬램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매치에서 공방 중 리버스 파일 드라이버로 오스틴의 목을 부러뜨린 것이 바로 이때. 마침 과격한 각본을 이어가던 WWF는 이 사고를 이용, 'Owen 3:16 I Just Broke Your Neck'이라 쓰여진 티셔츠를 만들며 오웬-오스틴 대립을 키우는데 써먹기도 했다.

4. 사망

불독과 앤빌은 브렛 하트를 따라 WCW로 이적[8]하지만 계약조건이 꼬이면서 오웬 하트는 WWF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이후 오웬 하트는 '블랙하트'라는 조금 더 강렬한 기믹을 시도하며 DX의 헌터 허스트 헴즐리와 대립하지만,[9] DX의 타 멤버(주로 차이나)의 방해로 매번 복수에 실패한다. 이에 리더로서 팀에 변화가 필요했던 더 락이 오웬 하트를 자신의 흑인 레슬러 집단 네이션 오브 도미네이션에 가입시킨다.[10] 이후 디 제네레이션 X vs 네이션의 대립이 시작되며 DX가 턴페이스, 오웬은 악역이 된다. 이후 DX vs 네이션이 리더간의 대결인 트리플 H 더 락의 형태로 바뀌고 오웬은 켄 샴락과 대립.[11] 네이션 해체 후[12]에는 제프 제럿과 태그팀을 결성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데뷔초 사용하던 마스크히어로 기믹인 '블루 블레이저'를 다시 꺼내들어 변화를 시도했는데...[13][14]

1999년 5월 23일 캔자스시티 켐퍼 아레나에서 열리는 WWF 오버 디 엣지에서 블루 블레이저와 갓파더의 인터콘티넨탈 챔피언 시합이 치러질 예정이었다.[15] WWF는 '우스꽝스러운 수퍼히어로' 기믹을 위해 블루 블레이저가 공중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링 위에 매달려 버둥대는 것으로 등장신을 만들었다.

오웬은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감지한듯 평소의 위클리 쇼에서 와이어 액션을 취했던 것관 달리 자신이 죽는 오버 디 엣지 당일, 유달리 와이어에 불길함을 느끼며 스턴트 대역을 부탁할 정도로 와이어 액션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짐 로스가 그를 격려하며 설득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으나, 불길한 예감이 제대로 적중하여 사고사를 당한다. 이 때문에 짐은 자신이 오웬을 설득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크게 후회했고 이는 그가 평생토록 짊어지는 마음의 짐이 되었다.

또한, 경기 상대이자 동료인 갓파더도 경기를 준비하던 중 갑작스런 소란과 함께 경기가 중단된 것에 어안이 벙벙하다 오웬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처음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질문했으나 오웬이 추락사당했단 소식을 확실히 듣고 나서 심장이 차갑게 굳는 것 같은 충격에 잠시 멍해지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오웬의 죽음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며 당시 상황을 씁쓸하게 회고했다.

예전에 하던 스턴트에서 중간에 제동장치를 걸어 멈추게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오웬 하트는 줄에 매달린 채 공중에서 로프 위로 곧장 떨어졌으며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34세의 나이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사인은 동맥파열로 인한 내출혈로 밝혀졌다. 운이 매우 나쁘게 탑 로프 바로 위로 떨어져 흉부의 동맥이 파열된 것이 치명적이였다. 오웬은 이 당시 약 21m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약 아파트 6-8층 정도의 높이로 만약 로프 위가 아니라 링 정중앙에 떨어졌다면 (물론 어떻게 떨어졌나에 따라 다르겠지만)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해주는 프로레슬링 링의 특성상 생명만은 잃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병원의 기록에 의하면 팔 쪽에 개방 골절상을 입긴 했지만 그 외의 생명에 치명적일 정도의 외상은 없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onlineworldofwrestling.com/25.jpg
WWE에서 제작한 추모 영상.
캐스터 짐 로스가 방송으로 사고발생과 오웬의 죽음을 알렸지만, 현장의 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PPV는 십여분 간 중단되었다가 그대로 속행되었다. 다음날 치러진 RAW는 'RAW is Owen'이란 이름 아래 선수들의 기믹이 아닌 실제 인터뷰와 각본과 무관하게 자원한 선수들 간의 경기가 치러졌다. 언더테이커는 참석하지 않고 친구 브렛 하트를 직접 찾아가 위로했다. 인터뷰 중 '네이션' 시절 동료였던 마크 헨리는 오웬에게 바치는 시를 써와서 낭독했고, 친하게 지냈던 동료 제프 제럿은 10번의 벨이 울리는 동안 눈물을 펑펑 쏟았다. 쇼의 마지막은 한때의 맞수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이 링에 올라 아무 말없이 오웬을 위해 건배를 하고 맥주 한 캔을 링 위에 올려 놓은 채 내려갔다. 그리고 그 다음주 RAW에서 오웬을 대신해 인터컨티넨탈 타이틀전을 치른 제프 제럿은 승리 후 벨트를 들고 오웬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5. 그 외

흔히 한미 프로레슬링 팬들이 WWE에서 파일 드라이버가 금지된 이유로 오웬 하트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에게 기술을 잘못 시전해 부상을 입힌 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었을 수 있지만 인디단체나 일본의 프로레슬링 단체에서도 간혹 파일 드라이버를 잘못 꽂아서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경우는 왕왕 있었고 결정적인 원인은 몇 년 후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급우들끼리 프로레슬링 놀이를 하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파일 드라이버 기술을 교실바닥에서(!) 쓰다가 그 친구의 목을 부러뜨려서 즉사한 사건이 결정타였다. 이게 당시에 현지에서 뉴스로도 보도된 바 있기도 했고 이런 사건이 계기가 되어 파일 드라이버를 WWE에서 보기 힘들게 된 것이지, 오웬이 원인이 된 건 아니다.

WWF는 '오버 디 에지'를 홈비디오로 발매하지 않았으며,[16] 해당 이름 자체를 폐기하고 사고 당시의 어떠한 영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사고 후 PPV를 강행한 것에 대해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트 가문은 WWF와 안전장비 회사를 고소하였으며, 1천8백만달러의 배상금으로 합의를 보았다. 한동안 브렛 하트는 동생의 죽음의 책임이 빈스 맥마흔에게 있다고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등 불편한 관계였으나 이후 화해하였고 브렛 자신과 아버지 스튜 하트가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러나 부인 마사는 2010년 WWE가 오웬의 사진과 영상을 사용하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허용할 수 없다며 소송을 걸었다. 현재 마사는 '오웬 하트 재단'을 설립하여 저소득층을 위한 장학기금, 주거지원, 자선사업에 힘쓰고 있다.

브렛과 원수지간이던 숀 마이클스와도 원만하게 지낼 정도로 선수들 사이에서의 신망이 좋았으며,[17][18] 늦게 프로레슬링에 뛰어들었음에도 빠른 성장을 보였고, 그라운드 레슬링과 하이플라잉 기술을 겸비하여 레슬링센스로는 최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만,[19] 단 하나 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약간 부족했을 뿐.(게다가 바로 그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은 친형이다.) 운도 따라주지 않아 번번히 메인 이벤터의 문턱에 머물러야만 했고 다시 도약을 노리던 시점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오웬 하트를 브렛의 그림자 아래 머무르게 만든 이유라 하겠다.

믹 폴리는 자서전에서 오웬에 대해 레슬링 업계에서 약물과 술 둘 다를 지독하게 멀리하는 드문 사람이었으나[20], 사람들에게 친절해서 누구와도 원만하게 지내던 사람이라 표현했다. 다만, 이런 믹 폴리의 의견과는 달리 유일하게 브렛과 숀의 관계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로 끝까지 남았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상술한 자신이 직접 목을 부러뜨린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

오스틴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전부터 서로를 못마땅해하면서도 적당히 으르렁거렸으나 두어번이나 설득했음에도 오웬이 고집으로 밀어붙여 일으킨 파일 드라이버 사건 이후로 관계가 상당히 험악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오웬의 경우 오스틴의 목이 부러진 건 자신과 경기하기 이전부터 경기를 한 몸의 반동 때문이라고 오스틴을 탓하며 자기합리화를 했고 이 때문에 제대로 열받은 오스틴은 오웬의 죽음 당시 그의 사망에 충격은 먹을 지언정 장례식 방문은 일절 하지 않을 정도[21]로 그를 완전히 등한시함과 동시에 그를 절대로 평생 용서하지 않았고 설령 살아돌아온다해도 사과는 안할 거라고 선을 긋기까지 한다. 오스틴은 사고 자체는 업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쿨하게 넘어가려 했으나, 그 후의 각본에 대해서는 불쾌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고 이후 오웬과 깊게 대화한 적이 없고, 무엇보다 오웬이 얼마 후 요절한 탓에 마지막에 킥아웃을 해서 본인의 부상을 더 악화시킨 이유도, 진심어린 사과도 듣지 못했다고 자서전에 기술되어 있다. 다만, 오스틴의 절친인 짐 로스를 통해 '오웬이 그 때 사고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이야기는 전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스틴은 아직까지 오웬을 용서한 적은 없다. 관련 내용 자서전1 자서전2

브렛은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이 WWE에 남아있었다면 오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오웬은 자주 브렛에게 의견을 물었기 때문에 브렛이 WWE에 있었다면 오웬에게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담이지만 브렛과 사이가 안 좋았던[22] 숀과 릭 플레어 둘과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숀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원만하게 지냈으며, 릭 플레어의 경우는 헐크 호건의 15분 정도밖에 경기를 못하는 실력을 디스하며 "오웬 하트같은 선수들은 30분 넘게 경기를 할 수 있고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낸다"고 하며 호건과는 다른, 훌륭한 레슬러의 예로 오웬을 들었다.

2015년 WWE의 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캐나다 출신 레슬러 케빈 오웬스(케빈 스틴)가 오웬 하트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인디 시절에는 그를 따라 샤프 슈터를 사용했었다고 하며, WWE로 이적하면서부터는 링네임에도 오웬 하트의 이름을 딴 케빈 오웬스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아들의 이름마저 오웬 스틴이다.[23]

2015년 5월 7일, 브렛이 인스타그램에 형제가 포옹하는 사진과 함께 50세 생일 축하한다는 글을 적었다. #

2022년 올 엘리트 레슬링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오웬하트 재단과 함께 오웬하트 컵 토너먼트를 진행하며, 남성 우승자에게는 검은색, 여성 우승자에게는 분홍색 벨트를 수여하였다.

오웬이 아직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로 다름 아닌 오웬의 죽음으로 미망인이 되어버린 마사의 거부 의사 때문이다. 오웬의 죽음 이후 마사는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24] WWE와 엮이는 걸 거부하고 있으며 WWE 뿐만 아니라 남편의 형이 되는 브렛과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고 알려졌다. 다만 WWE 외의 단체의 경우 일정 부분 허용 해주고 있다.[25] 대표적인 예로 위에서 언급된 AEW 오웬하트 컵 토너먼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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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W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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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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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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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오웬 하트
(1987, 1988)
수신 선더 라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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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 29일
WWF
섬머슬램
WWF 월드 챔피언십 스틸 케이지 매치
브렛 하트(C) vs 오웬 하트
파일:external/www.steelchairmag.com/KingoftheRing2015.jpg
1994년 WWF 킹 오브 더 링 우승자
브렛 하트 오웬 하트 메이블

[1] 하이 에너지 시절 합체기. [2] 블루 블레이저 및 뉴 파운데이션 시절 피니시. 뉴 파운데이션 시절에는 앤빌과 합체기였다. [3] 오웬의 사망 이후 오웬 하트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중이다. [4] 스튜 하트는 자신이 아마추어 레슬링 국가 대표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 2번의 올림픽이 연속으로 취소되면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것에 대해, 막내인 오웬이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꿈꾸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5] 사실 이 때는 형 브렛도 하트 파운데이션으로 유명했고 싱글은 아직 뜨지 못한 상황이었다. [6] 이때 모든 선역 선수들이 링 위로 올라와 브렛을 축하해주는 상황에서 오웬만은 링 밖에서 형을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7] 데이브 멜처는 이 경기에 별점 5개를 부여했다. [8] 브렛 하트는 1997년 서바이버 시리즈에서 발생한 몬트리올 스크류잡 이후 WWF를 떠났다. [9] HBK는 WWF 챔피언이 된 후 WWF 로얄럼블(1998)의 우승자인 스티브 오스틴과 대립하게 된다. [10] 오웬이 가입하며 흑인 레슬러 집단의 속성이 깨지게 되고, 나중엔 팀명도 '네이션'으로 바꾸게 된다. [11] 오웬의 DX에 대한 복수는 DX vs 네이션의 제거 경기에서 오웬이 직접 트리플 H를 제거하는 것으로, 매우 어설프게 종료되었다. [12] 더 락과 갓파더는 인기를 얻고 선역화, 오웬은 켄 샴락과의 대립으로 네이션 활동에 불성실, 결국 남은 멤버인 딜로 브라운과 마크 헨리의 태그팀화 되며, 네이션이란 명칭은 사라졌다. 이는 훗날 넥서스가 흐지부지되며 태그팀화 후 이름이 사라지는 모습과 유사하다. [13] 실질적으로는 '정체는 뻔한데 아닌척 하는 어설픈 가면 레슬러'의 개그 기믹에 가까웠다.(정체가 오웬이 아닌 척 속이기 위해서 제프 제럿이나, 심지어는 예전 파트너인 코코 B. 웨어가 임시로 가면을 쓰기도 했다. 참고로 코코 B. 웨어는 흑인이라, 다른 인물인 게 다 티가 났다.) 게다가 당시의 오웬은 HBK가 붙인 별명인 너겟(수세식 변기의 물을 내렸을 때, 안의 대변(=하트 패밀리) 중에서 물에 넘어가지 않고 남은 덩어리(=오웬)를 의미했다.)이라는 치욕적인 닉네임으로 불리던 시기였다. 당시의 관중들은 몬트리올 스크류잡은 잊고 오웬을 까는 것을 즐기고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취급은 최악인 상태였다. [14] 이런 식의 각본은 이후 헐크 호건이 '미스터 아메리카'라는 기믹으로 이어받게 된다. 그래도 명색이 헐크 호건인지라 각본 자체는 그럭저럭 성공하지만 미래가 없고 헐크와의 계약도 실패해서 결국 이 각본은 급히 쫑나게 된다. [15] 정상적으로 경기를 했다면 오웬이 승리해서 챔피언에 오르는 각본이었다. [16] 2014년 WWE 네트워크를 통해 재방영되긴 했으나, 오웬이 사망한 경기 내용은 당연히 편집됐다. [17] 몬트리올 스크류잡 이후에 한껏 쫄아있는 숀 마이클스에게 먼저 다가가 '나는 형이 아니니 딱히 상관 안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숀 마이클스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오웬이 사고로 죽었을 때, 우리는 한 레슬러를 잃은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을 하나 잃은 것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18] 상기한 것처럼 제프 제럿과도 친한 사이였는데, 제프 제럿의 평판이 개판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가 얼마나 대인배였는지 알 수 있다. [19] 1986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어워드에서 '올해의 신인' 부문 2위에 올랐으며, 80년대 말부터 무려 '캘거리의 천재아'라는 수식어를 얻을 정도로 떡잎부터 남다른 테크니션이었다. [20] 형인 브렛 하트가 술을 즐겨마시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21] 그나마 오버 디 엣지가 끝난 뒤의 추모식을 열은 RAW에서 선수로서의 예의를 지키며 추모는 해주긴 했다. [22] 그러나 지금은 화해한 [23] 아이러니하게도 케빈은 오웬과 사이가 나빴던 스티브 오스틴도 존경하고 있다. 레슬매니아 38에서 벌어진 오스틴의 마지막 경기에서 잡해준 것도 그 때문. [24] WWE 게임, WWE Shop 상품, 생전 오웬의 경기 영상 방영, 업로드 등 [25] 사실 이건 서로 인식 차이 탓이 큰데, 브렛은 WWE와의 관계가 최악임에도 계약문제로 남았던 오웬에게 불이익을 전혀 주지 않았고, 동생의 사고 또한 멋진 등장씬을 만들어 주려다 발생한 불의의 사고로 생각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오웬의 아내의 입장에선 납편을 놔두고 WCW에 간 브렛에게 감정이 좋을리 없는데, 오웬의 사고 후 브렛과 WWE의 관계가 회복되고 명예의 전당까지 오르자 사이가 더욱더 벌어진 듯 하다. [★]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