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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04:44:32

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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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
尹心德 | Yoon Simdeok
파일:윤심덕(채색).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출생 1897년 7월 25일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사망 1926년 8월 4일 (향년 29세)
대한해협
학력 평양숭의여자중학교 (졸업)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 졸업)
도쿄음악학교 (갑종사범과 / 수료)[1]
직업 가수, 성악가
장르 서양 고전음악, 대중가요

1. 개요2. 생애3. 죽음에 관한 의혹4. 미디어화

[clearfix]

1. 개요

한반도 최초의 공식 여성 성악가, 소프라노 가수로 대표곡 < 사의 찬미>가 유명하다.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 정사(情死)[2]설로 당시 수많은 억측과 소문이 돌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3] 호(혹은 애칭이라고도)는 수선(). 참고로 김우진의 호는 수산(水山)이다.

2. 생애

조선총독부의 '관비유학생'으로 발탁[4],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5]하였다. 유학생 시절인 1921년에 '동경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우회의 조선순회공연에 참가'하여, <김영일의 사> 등 '연극 공연'에 앞서 '장미화,' '황혼의 시내' 등을 '독창'하였다. 이 시기에 김유진과 처음 만나 '친교를 가진 것'으로 전해[6]진 후 1923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6월, 동아부인상회 3주년 창립 기념으로 열린 음악무도대회에서의 독창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지만 성악가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학교 음악선생, 극단 토월회 배우, 대중가요 활동 등을 하였다.

1926년 여동생의 미국 유학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자 일본에 음반을 취입하기 위하여 갔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사의 찬미를 취입한다. 이 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 왈츠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주선율에 별도의 가사를 덧붙인 번안곡이다. 하지만 <사의 찬미>는 원래 녹음하고자 했던 곡이 아니었다. 노래를 녹음하던 중에 그녀가 갑자기 이 노래를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1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어떻게 보자면, 그녀의 죽음이 판매량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래는 죽음을 찬미하는 우울한 노래이고, 그 가수는 죽었으니까. 아래에서 서술하겠지만 그녀는 이 레코드판이 정식 발매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녀가 취입한 음반은 사의 찬미가 대표작이지만 해당 레코드판이 발매되기 6개월 전에 프란츠 슈베르트의 <들장미>나 <보리수> 등을 <월계꽃>이나 <옛꿈>으로 번안한 곡을 녹음한 적이 있는데 해당 음반은 2022년 4월 말에 발견되었다. #

3. 죽음에 관한 의혹

일본에서 음반취입을 하는 동안 윤심덕은 당시 일본에서 있었던 김우진을 만났다. 당시 그는 독일 유학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둘은 8월 3일 부산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하였으며 1926년 8월 4일 에서 사라졌다. 이는 조선 최초의 정사(情死) 사건이었기 때문에 신문에서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정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당시 분명한 사실은 다음 3가지 뿐이다.
유언장 같은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있다고 보도했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자살했다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 당연히 넓은 바다였기 때문에 시체도 발견될 수 없었다.

그냥 언론이 최초 사건을 접하자마자 ‘유서를 남기고는 두 사람이 껴안고 바다에 뛰어내렸다’며 단정적으로 보도했는데 이게 지금까지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가족들은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정사’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물론 가문의 명예 때문일 수도 있긴 하다. 심지어 자살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당시 김우진은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와 일본에 와 있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8월 1일, 자신의 희곡 <산돼지>를 잡지사에 보낼 때에도 ‘앞으로 나의 작품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원고를 받으면 회답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윤심덕은 여동생의 미국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으며 8월 5일에는 여동생이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여동생은 미국에 도착한 뒤에 언니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있을 당시 도쿄에 있는 친구에게 ‘곧 도쿄에 놀러갈테니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진짜 연인관계였는가?’라는 점이다. 사실 이들이 연인관계라고 언급하는 것은, 당시 정사 이후 신문에서 보도한 것뿐이다.

김우진이 윤심덕을 사랑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냥 그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이게 윤심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김우진의 친구인 조명희는 이를 두고 “풍문에 불과하다. 그 사실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설령 연인관계였다고 하더라도, 이혼하고 재혼했어도 될 터였다. 김우진이든 윤심덕이든 굳이 정사할 이유가 없다. 정사도 정사지만 어째서 두 사람이 갑자기 조선행 배를 탔는가는 의문이다. 남겨놓은 유서도 없고, 조선에 가는 것과 관련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도 않았던 터였다. 그래서 죽음을 가장했다는 생존설, 실족 등에 의한 사고설, 나아가서 타살설까지 제기되었다.

당시 그들의 드라마틱한 죽음으로 인하여 ‘사실은 어디 외국에서 살고 있다 카더라’는 설이 유행했다. 특히 김우진과의 불륜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죽음을 가장하고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한편 ‘ 사의 찬미의 음반 판매를 위해 레코드사와 짜고 죽음을 가장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투신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배를 탄 사람이 김우진과 윤심덕이 맞는지 확인한 사람이 없다.[7] 그냥 ‘명부상 김수산과 윤수선이라는 남녀가 탔고, 이 사람이 김우진과 윤심덕이더라’라는 사실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실 두 사람은 죽지 않았고, 유럽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신빙성있게 돌았다. 즉, 당시 배에 탔던 선원을 매수하여서 자살했다고 꾸민 것이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유럽에 갔다는 것이다. 사의 찬미가 꾸준히 팔리는 것만큼 소문도 꾸준히 늘어만 났다. 1931년 이탈리아에서 잡화점을 하는 동양인 부부가 있는데, 이들이 김우진과 윤심덕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간판명부터 구체적인 지명 등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김우진의 동생은 당시 총독부를 통하여 주이탈리아 일본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로마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으며, 앞으로도 찾아보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1934년 자칭 김옥균의 손자라고 칭하는 이가 나타나서 “내가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 로마에서 악기상을 하는 김우진과 윤심덕 부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다시 김우진의 동생은 총독부에 확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이 김옥균 손자를 자칭하는 이가 거짓말을 했음이 밝혀졌다. (관련 내용은 김옥균 항목 참고) 사실 이 소문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자살을 꾸미기 위함이었으면 본명을 쓰는 것이 더 좋을 텐데 굳이 가명을 쓸 이유가 없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양승국 교수는 김우진을 연구하면서, 여러 정황상 정사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대신 그냥 자살설[8] 내지는 사고설에 더 무게를 두었다. 최근에 나오는 문학계 연구들 역시 김우진에 대해 자살 혹은 사고사로 보고 있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윤심덕에 대해서 타살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그러면서 당시 윤심덕의 음반을 취입한 닛토(日東) 레코드사를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했다. 이 레코드사는 당시 일본 국영축음기회사인 닛지쿠의 자회사로, 1926년에 생긴 당시로써는 듣보잡 회사였다.[9] 더욱이 당시 레코드 메인곡으로 내놓았던 사의 찬미는 원래 그녀가 부를 예정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신문에서는 그녀가 녹음을 요청하였다고 하지만, 녹음 당시 피아노 반주를 하였던 그녀의 동생은 “갑자기 추가된 곡이고, 왜 그 곡이 타이틀곡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부정했다. 이에 대해서 일본국영기업이 조선 시장에 레코드와 축음기를 대량으로 팔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죽인 것이 아닌가(기획살인)라는 것이다.

어쨋든 분명한 것은 1926년 8월 4일 이후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라졌다. 여담이지만 윤심덕과 절친한 사이였던 극작가 이서구(1899~1982)의 회고에 의하면, 이서구는 윤심덕이 일본으로 음반을 취입하러 갈 때 경성역으로 배웅을 나왔었는데 이 때 나누었던 대화가 참 의미심장하다.
윤심덕: 선물로 뭘 사다드릴까요?
이서구: 취입 잘하고, 돌아올 때 넥타이나 하나 사서 보내줘요.
윤심덕: 죽어도 사와요?
이서구: 그래.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사서 부치고 죽어요.

물론 이서구가 마지막에 한 말은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실제 이 대화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한 대화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서구가 사달라고 했던 넥타이는 윤심덕이 죽었다는 비보가 들려온 지 며칠 후에 이서구에게 도착했고, 이서구는 그 넥타이를 매고 다니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4. 미디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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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이쇼 15년( 1926년)에 작성된 도쿄음악학교졸업생씨명록에 윤심덕은 다이쇼 12년( 1923년) 3월에 갑종사범과를 수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동반자살하는 것을 이르는 말. 情事가 아니라 情死. 일본의 신쥬(心中)와 유사한 문화다. [3] 배에서 실종되어 뛰어내려 동반자살했거나 사고사를 당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4] 도쿄예술대학 재학생명부에는에는 ‘특별유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5] 다만 원래 특기인 성악과가 아닌 갑종사범과(甲種師範科)에 재학( 도쿄음악학교 재학생명부에 기록)했다. 아무래도 음악과목 교사를 염두에 두고 사범과를 전공한 듯 하다. 여담으로 여동생 윤성덕(1903~1968)도 언니와 비슷한 길을 걸어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 [6] 동반 실종된 후 김우진과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문으로 발전했다. 후술하겠지만, 김우진과 윤심덕의 주변인들 모두 이들이 연인관계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7] 다만 탑승인 명부에 적혀있는 거주지가 윤심덕과 김우진의 실제 거주지였고, 나이도 29살로 동일했기에 김우진과 윤심덕이 배에 탄 것은 사실이다. [8] 자살에 대해서 윤심덕이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충동적으로 벌어졌으리라 추정한다. [9] 당시 콜롬비아, 폴리도어(Polydor) 등 유명 메이커 음반회사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이 회사는 1928년 사라진다. [10] 6부작 단막극. 하루에 2회씩 3일간 방영했으므로 3부작이 아니라 6부작이다. 11월 27일, 12월 3일, 12월 4일에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