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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근세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처형되거나, 투옥되거나, 사회적인 불이익을 받았다.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이다. 그는 로마 군인 파비우스 빅토르(Fabius Victor)의 아들로, 274년에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295년 그가 21살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할 나이가 되자, 그는 북아프리카 총독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의 앞에서 로마 군인으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군에 복무할 수 없다고 대답했고, 이로 인해 그는 참수형을 당했다. 훗날 그는 기독교의 성인으로 추대받게 된다. 막시밀리아누스 이외에도 로마 제국 치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병역을 거부하다 사형당했다. 3세기 경 기록된 사도전승에 따르면 당시 기독교인들은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며,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에도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권력 하에 있는 군인[원주6]은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이다. 만일 (그런) 명령을 받으면 이를 이행하지 말 것이며, 선서도 하지 말 것이다. 만일 그가 (이런 조건을) 거부하면 돌려보낼 것이다. 만일 칼의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원주8]이나 자주빛 옷을 입을 정도의 지역 통치자이면, 이를 그만둘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돌려보낼 것이다.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예비자나 신자는 내쫓을 것이니, 이는 하느님을 경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히폴리투스, 『사도 전승』, 분도출판사, 2017, 117p[3]
히폴리투스, 『사도 전승』, 분도출판사, 2017, 117p[3]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비슷한 사례로 로마 제국 치하의 유대인들 역시 유대교의 율법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했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시민들은 1년에 한번 화톳불에 소금을 뿌려 불꽃을 만드는 의식을 통해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의무가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야훼 이외의 다른 것을 섬길 수는 없다며 이 간단한 의식조차도 거부했다. 속주 주민들이 세금만 잘 낸다면 되도록 식민지의 문화, 종교, 전통에 간섭하지 않는다는게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이었기에, 굳이 유대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또한 전성기 당시 로마군은 직업 군인 제도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굳이 병역거부자를 처벌할 이유가 없었다. 유대인들의 병역거부를 허용하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인들의 병역거부는 용납하지 않았던 이유는, 민족 종교의 성격이 강한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민족을 초월한 확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 확산되었던 3세기 말에는 군대에 지원하는 인원이 수요에 비해 부족해지면서 지원자 외에도 징병으로 병력을 충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침이 적용될 수 밖에 없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최초로 합법화된 기록으로는, 1575년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작 빌럼 1세 판 오라녀가 메노나이트 신도들이 세금으로 군복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웃한 프로이센 왕국 역시 메노나이트 신도들의 병역 거부를 인정해주되 대신 이들이 새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는데[4] 이 때문에 메노나이트들은 인구가 늘어남에도 불구 새로 농토를 구입하지 못하여 심각한 빈곤 문제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 중 상당수는 18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으로 이주하거나 아니면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1757년 영국은 퀘이커 신도들의 군복무를 면제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럼에도 영국 사회 내에서도 퀘이커들의 입지는 불안정했고 상당수의 퀘이커들이 병역 거부로 인한 사회적 알력을 피하기 위해서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하여 오늘날 펜실베이니아 주의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연유로 미국 역시 독립 초기부터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논란이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많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미국의 독립을 위해 자원 입대했다. 그러나 퀘이커, 재침례파 신도들은 교리에 따라 입대를 거부했다. 이러한 연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우는 주 마다 달랐는데, 상술한 펜실베이니아 주는 주 자체가 퀘이커 교도들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대하였다.
1863년 3월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한창일 시기에, 미국 의회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적인 징병법을 통과시킨다. 최초의 법안에서는 자신을 대신해 복무할 사람을 데려오거나, 300달러를 낸다면 누구든지 군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64년 2월 징병법이 개정되면서, 오직 종교집단에 속해있는 사람만 군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남부연합은 1862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했다. 자신을 대신해 복무할 사람을 데려오거나, 500달러를 내면 군복무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다.
20세기 이전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대부분 종교적 맥락에 의해 행해졌다. 종교가 아닌, 정치적, 평화적 신념에 의한 양심적 병역거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평화주의를 자처하던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이 전쟁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노동계급의 이득이 아닌, 제국의 지배자들과 자본가들의 이득을 위한 전쟁임을 간파하여 반전운동과 그의 연장선상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나키스트, 반전운동가들이 합류했다. 그 중에는 수학자,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하다가 영국 국토 방위령(Defence of the Realm Act)에 의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원래 100파운드의 벌금형이 전부였으나, 버트런드 러셀은 저항의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벌금을 내지 않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1916년 영국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민간적 성향의 대체복무 또는 비전투병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병역법을 개정하였다. 다만 그 이전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가석방 없는 3년형을 살아야 했고 소급적용 따윈 없었다. 이 때문에 저널리스트 톰 스티븐슨 같이 1916년에 수감돼서 1919년 만기출소한 경우도 존재. 이 사람은 다니던 대학에서도 쫓겨나 고졸로 평생 살아야 했다... 다행히 사망 직전에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은 치머만 전보사건을 계기로 1917년 4월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럼에도 군에 자원입대한 청년들의 숫자는 6주간 7만 3천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쟁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100만명의 병사가 필요했다. 필요한 병력을 얻기 위해 미국 의회는 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통과시켰다. 또한 방첩법(Espionage Act)도 통과시켜,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인을 최대 20년간 투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급격하게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워블리(Wobblie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과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가 이끄는 미국 사회당(Socialist Party of America)은 제1차세계대전은 자본가들을 위한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의회가 선전포고를 하자 사회당은 이 선전포고를 “미국 국민에 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이들은 반전 집회, 징병 거부, 선전 활동, 파업 등을 통해 전쟁 반대 활동을 했고 대부분이 방첩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18년에 11,500여명이 정부나 전쟁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그 중 다수가 워블리와 사회당원이었다. 1917년 8월에는 필라델피아의 사회당원 찰스 셴크(Charles Schenck)가 징병법이 헌법에 위배되며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인류를 상대로 저지르는 잔인무도한 행위”이므로 청년들이 징병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단 15,000장을 뿌렸다. 대법원은 셴크에게 6개월 형을 선고했는데, 이는 방첩법 위반 사건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량 선고였다. 작가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이 편집자였던 사회주의계 잡지 『대중(The Masses)』은 징병에 반대하는 논평을 게재했다가 법정 공방 후 폐간되었다.
오클라호마에서 가난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노동계급연맹(Working Class Union)’에서도 워블리들과 사회당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입대 저지를 위해 철도와 전신선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전국의 징병 거부자들을 위한 워싱턴 행진도 계획했다. 계획들이 실행도 되기 전에 회원들은 체포되었고 450명이 기소되었다. 지도자들에게는 3~10년형이, 다른 사람들에겐 60일~2년형이 선고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1921년 네덜란드 빌토번(Bilthoven)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은 국제 전쟁 거부자 모임( War Resisters’ International)을 창설한다. 이들은 2019년 현재에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은 서구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캐나다의 경우 러시아계 캐나다인 중에서 두호보르파라는 소수 종파가 1차대전 당시 병역거부를 한 바 있는데, 이들은 세속 교육 완전 거부[5] 교리까지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캐나다 사회 전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캐나다 정부에서는 재사회화를 명분으로 두호보르파 자녀들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시켰고, 이후 두호보르파는 계속 교세를 잃어 오늘날에는 사멸 위기에 봉착한 상태이다.( 출처)
미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병역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한 재침례파들은 미국에서도 병역을 거부하였고, 경제적 빈곤 때문에 대체복무 비용을 내지 못해 수감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상무적인 개척 정신이 남아있던 미국 사회에서 이들의 병역 거부는 사회적 차별로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의 건국 이념 중 하나가 종교의 자유였고, 이 때문에 미국 내 진보 지식인 상당수는 종교적 병역 거부자들을 국가에 배신당한(미국의 건국 이념과 모순되는 처벌을 받는) 순진한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이미지가 바닥인 것과는 그 배경 및 상황이 대조적인 경우이다.
3. 제2차 세계 대전
일본 제국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군국주의적인 내부 분위기 때문에 전쟁 반대자들이나 병역 거부자들은 엄격하게 처벌 받았으며, 비국민 취급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신성 불가침의 영역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거나 군대를 반대하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또한 어쨌든 "동포를 구한다"는 민족주의적 시각도 굉장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평화주의자들이나 퀘이커 교도들은 위생병에 지원한다든가, 후방의 공장에 지원 하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활로를 찾았다.[6]일본 제국이 본격적으로 만주침탈을 시작하면서 한반도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39년 1월 일본에서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여 투옥됐다. 1939년 6월 일본 제국은 일본, 대만에 이어 조선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단행했다(일명 등대사 사건). 조선에서 체포된 여호와의 증인은 38명이었는데, 당시 교세가 미약했던 여호와의 증인 거의 전원이 체포됐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중 5명은 옥사했고, 해방이 되어서야 옥문을 나선 사람은 33명이었다. # 한가지 역설적인 것은,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을 항일운동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일제강점기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나 다를 바가 없다. 당시의 등대사 사건 관련자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을 반대하면서, 1938년부터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에 저항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의 좀 더 본격적인 양심적 병역거부는 1944년 조선징병령이 시행되고 난 뒤, 여호와의 증인이나 퀘이커, 재림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나치 독일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프란츠 예거슈테터 |
나치 독일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탈영병으로 취급되었다. 대부분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국방력 파괴(Wehrkraftzersetzung)'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구금되고, 처형되었다. 나치 독일 치하의 유명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프란츠 예거슈테터(Franz Jägerstätter)라는 사람이 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940년 33살의 나이로 군에 불려가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1941년 그는 집에 돌아와 전쟁의 윤리적 문제에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의 고민을 주교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주교가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여러 차례 병역을 연기했지만, 결국 1943년 2월 23일 징병되었다. 당시 그에게는 아내와 3명의 딸이 있었다. 그의 첫번째 딸은 아직 6살도 되지 않았다. 그는 독일 국방군에서 복무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대신 의무병으로 복무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군은 이를 거절하였다. 구금된 그에게 신부가 찾아와 독일군에 복무할 것을 설득하려 했으나, 그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군의 사기를 저하시킨 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1943년 8월 9일 36살의 나이에, 그는 단두대에서 참수당했다. 2007년 6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를 시복하였다.
나치 독일 치하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고, 이로 인해 많은 탄압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여호와의 증인/역사 문서 참고.
미국의 경우,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해 제1차세계대전 당시 보다는 좀더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국에서 3,450만 명의 징병대상자들이 있었다. 그 중 72,354명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 그 중 25,000명이 비전투병으로 복무했으며 27,000명은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6,000명은 모든 형태의 대체복무를 거부했으며, 이들은 감옥에 갔다. 12,000명은 대체복무를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였으나, 의무병으로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을 한 데스먼드 도스(Desmond Doss)의 사례는 21세기에 들어와 핵소 고지라는 영화로 다루어지기도 했다.[7]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독일은 나치 독일 시절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탄압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병역을 거부할 권리를 아예 헌법에 명시해 놓았다. 종전 이후의 독일은 서독, 동독으로 분단되어 서로간에 군사적으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 했다. 동독의 경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집총훈련을 면제받았으며, 건설노동으로 군복무를 대신 할 수 있었다. 유럽의 국가들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양심의 자유의 중요성을 깨닫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제도적으로 합법화한다.
4. 베트남 전쟁
미국의
징병영장 화형식과 병역거부 포스터. 병역거부 포스터에는 " Fuck The Draft"[8]라고 써져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동원할 병력을 얻기위해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병역거부운동이 극심하게 벌어졌던 시기이다. 수많은 청년들이 미국 전역에서 반전집회를 펼쳤으며, 이들은 집회에서 자신의 입영통지서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이며 공공연하게 병역거부를 선언하였다. 대체복무제도가 존재하여, 신청만 하면 군대를 안갈수 있음에도 말이다.
유명한 일례로 조지 R.R. 마틴은 대체복무를 신청하여 시카고의 복지시설에서 근무하였다. 베트남전 때 대체복무를 선택한사람들은 무려 57만 명.... 양심적 병역거부를 행한 유명인 중에는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있다. 1967년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병역기피죄로 5년 간의 징역과 10,0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지막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4년간의 재판기간동안 챔피언 벨트를 박탈당했으며 아무런 경기도 할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반전운동에 참여하였다.
나의 적은 백인들이지, 베트콩이나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 아니다. 당신은 나의 자유를 억압한다. 당신은 나의 정의를 억압한다. 당신은 나의 평등을 억압한다. 당신은 미국에서조차 나의 종교적 믿음을 존중하지 않는데, 그런 당신이 내가 다른 곳에 가서 싸우기를 요구하는가? 당신은 여기에서조차 나를 존중하지를 않는데?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
베트남 전쟁 기간 미국의 징병대상자 2만~3만여명이 징병을 피해 캐나다로 이주했다. 캐나다는 이들을 난민이 아닌, 관대하게 정식 이민자로 간주하였다. 미국 정부는 여러 차례 이들을 미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청했지만, 캐나다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징병을 피한 집단 탈주는 미국 본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군 병사들은 베트남에 투입되기 전에, 미군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일본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베헤이렌(베평련.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대")이라는 평화주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테크(JATEC. Japan Technical Committee to Aid Anti War GIs - 반전 탈주 미군 원조 일본 기술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을 운용하고 있었다. 자테크가 하는 일은, 미군 탈영병들이 제3국으로 망명하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이들은 미군 탈영병들을 서유럽이나 북유럽으로 보냈다. 주요 루트는 홋카이도-소련이였다고 한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이들의 수법이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을 캐나다로 탈출시키던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방법을 벤치마킹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징병에서나 전장에서나 온갖 홍역을 치르고는 1973년에 징병제를 폐지해버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원천봉쇄했다. 그리고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지미 카터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병역거부자, 병역기피자, 탈영병들을 사면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1977년 1월 21일 취임식 바로 다음날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신의 약속대로 이들을 사면했다. #
5. 21세기
21세기에 들어와, 많은 국가들이 징병제 자체를 폐지하거나, 징병제를 하더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심각한 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지는 국가로는 하레디의 병역 거부 문제로 악명높은 이스라엘이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정치인 친인척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행한 사례도 있는데, 이스라엘 9대 총리이자 리쿠드의 대표인 베냐민 네타냐후의 친척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행한 사례도 있다.그럼에도 여전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은 나라가 종종 남아 있었으며, 한국이 그 중 하나였다. 2013년 6월 유엔 인권위원회(UNHRC)가 발표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종교와 신념 등을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해 수감 중인 사람은 전세계에서 723명이다. 그 중 669명이 한국인이다. 즉, 지구상에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의 92.5%가량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을 겨냥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2018년 6월에는 한국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제5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에 따라,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통해 구제받을 길이 생겼다. 2018년 11월에는 한국 대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취지로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자 다수를 석방했다. 2019년 12월 27일 이루어진 병역법 개정으로 '대체역'이 신설되어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심사를 통과하면 관련 조항에 따라 대체복무요원으로 근무할 수 있다.
[원주6]
"권력 하에 있는 군인"이란 계급이 낮은 하위급 군인을 뜻한다.
[원주8]
"칼의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앞의 "권력 하에 있는 군인"과 대칭되는 고위급 군인을 말한다. 여기서 "칼"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뜻한다.
[3]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한 이후에도 주교들은 한동안 해당 내용을 근거로 외국 군인들과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바 있다.
[4]
정확히는 군복무를 한 남성만이 토지를 새로 구입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였다.
[5]
오늘날 이스라엘의 하레디와 마찬가지로 성경 외에는 기초적인 산수만 대충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6]
출처: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7]
당장
데스몬드 도스 문서로 들어가서 사진을 보면 별 모양의 훈장 비슷한 걸 달고 있는데, 그거 훈장 맞다. 더군다나 미합중국 군인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명예인
명예 훈장의 약장. 즉 넓은 의미의 양심적 병역거부이긴 하나 그 활약상은 미국에서도 알아줬다는 것.
[8]
"징병제
X까라", "개같은 징병제" 정도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