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신일중학교 야구부 감독
신일중학교 야구부 감독[1]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학교 교사가 감독을 맡고 양승호는 야구부장을 맡았으며 1988년부터 1990년까지 46연승을 올리면서 유능한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이 당시 제자들이 설종진, 강혁, 김재현과 조인성 등인데, 이 당시 조인성에게 앉아쏴를 가르쳤다고 한다.[2] 야구부장 시절 라인업을 양승호가 직접 짰으나 감독이 자꾸 라인업을 바꿔서 갈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양승호는 학년 구분 없이 실력 위주의 라인업을 내세운 반면, 감독은 대학 진학을 고려하여 3학년 위주로 라인업을 짰기 때문이다.
2. 두산 코치 시절
두산 베어스 No.73 |
양승호(梁承虎) |
신일중 감독으로서 보여준 게 있던지라, 1991년부터 3년간 OB에서 전력분석요원과 스카우트로 일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LG는 과장 직급, OB는 대리 직급을 제시했으나 해외 연수 기회 보장 등의 조건을 내세워 OB를 택했다고 한다. 그 후 스카우트로 일하면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했다. 류택현 대신 유지현 지명을 주장하고, 신일고 제자 김재현의 프로 직행을 추천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때 발탁한 선수들이 심정수, 진필중 등이 있다.[3] 이후 1995년부터 코치가 되어, 두산 베어스에서 수석코치와 수비코치를 지냈다. 이 당시 일화로는 타이론 우즈가 병살타를 치고 덕아웃에 들어와서 배트와 글러브를 집어던지며 화풀이를 하자, 의자를 우즈에게 집어던지면서 이른바 참교육을 시켰다고 한다.[4] 2003 시즌이 끝나고 선동열 감독 영입설로 인하여 김인식 감독이 사퇴하자[5] 김경문 당시 배터리 코치와 함께 두산의 새 감독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감독직은 최종적으로 김경문 감독에게 돌아갔다. 당시로서는 양승호 감독의 선임을 예상하는 의견이 좀 더 많았고, 김경문은 땜빵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했다.
2005년 3월 전지훈련장에서 김경문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수석코치에서 해임되고 2군 수비코치로 2005 시즌을 보냈다.[6] 어찌보면, 말 잘못해서 잘린 셈.
3. LG 감독대행, 고려대 감독 시절
LG 트윈스 No.80 |
양승호(梁承虎) |
2006년 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의 1군 수석코치로 합류했다. 그러다가 6월 6일 이순철 감독이 사퇴한 이후 1군 감독대행으로 선임되면서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이 시절에도 양승호의 평가는 꽤나 좋았다. 비록 감독대행 선임 후 2006년 LG는 최하위로[7] 시즌을 마쳤으나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감독대행을 맡았다는 점이 어느 정도 참작됐고, 더불어 전임자였던 이순철의 행각에 질린 LG 팬들에게 무난한 감독으로서 인정받았다. 전임 감독들이 선수들에게 취했던 태도와는 다르게 괜찮은 인화를 보여주었고, 선수 육성 면에서도 감독대행이라는 신분 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평. 이처럼 무난하게 팀을 수습해 자신의 역할을 했다 보니 실제로 시즌 막판에는 정식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LG 구단의 선택은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었던 김재박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하면서 정식 감독 자리에는 앉지 못했다.[8] 대신 LG는 양승호에게 2군 감독 자리를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고려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팀을 떠났다.[9] 이를 아쉬워한 LG 팬들도 있었을 정도로 LG 감독대행 시절 양승호에 대한 평가가 꽤나 좋았다.
어쨌든 이러한 실적 덕분인지 2009년 시즌 후 김재박 감독의 후임 감독을 선임할 때도 LG 감독 후보로 검토된 적이 있었다. # 다만 LG는 김재박의 후임으로 박종훈을 선임했고, 이 때는 그냥 감독 후보군 중 하나로 잠시 거론됐을 뿐이지 그렇게 유력한 정도는 아니었다.
LG에서 나온 후 2007년부터 모교인 고려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을 맡았다. 고려대 감독 시절에도 인품이 후덕하고 주변이 깨끗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
그가 감독으로 부임한 후 가장 먼저 고려대 야구부의 문화를 바꾼 게 선후배간 구타를 없애고, 연습이나 훈련과는 별개로 학부 수업을 꼬박꼬박 듣게끔 했다. 그가 오기 전에 고려대 야구부의 구타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이상훈은 선배의 구타가 무서워 자주 숙소를 이탈해 도망갔을 정도였으며, 박진만 역시 구타가 무서워서 고려대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10] 또한 구타로 인한 부상 때문에 선수 생활을 접은 경우도 있고,[11] 구타로 인해 자살한 야구부 새내기도 있었을 정도로[12] 고려대 야구부는 엄격한 군기와 구타로 악명높았다. 이런 악습을 철폐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굳이 문제점을 들자면 거의 매 경기 이어진 출첵 야구를 들 수 있겠지만, 이는 고려대 투수층이 두터웠던 덕분에 오히려 각 투수들의 누적 투구수 자체는 적게 운영되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대는 양승호 감독 재임 아래 특정 투수가 60이닝 이상 소화한 바가 없었고, 각 투수들이 40~50이닝 정도를 고르게 소화하며 경험이 풍부한 고학번 투수들과 상대적으로 어린 저학년 투수들 모두에게 고르게 공을 던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고학번의 프로 지명을 대비하면서도 저학번의 성장에 기여하는 방향의 운영을 했던 것이다. 프로라면 확실한 에이스 하나에 의존하여서라도 승리를 챙기는 데 주력하는 것이 옳겠지만 학생 야구는 교육이다. 오히려 학생 야구에서 성적에만 목매는 게 이상하다. 특정 에이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은 상당수 대학야구 지도자와는 분명 달랐던 모습. 거기다 출첵야구가 어디 한두 군데 이야기는 아니다.
프로선수, 구단 프런트, 중-고-대 감독, 프로 코치, 프로 감독대행을 거치면서 어디에서도 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대 감독 당시 억대에 달하는 금품을 받고 부정입시에 협력한 것 때문에 위의 좋은 평가는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선수들의 인생을 가를지도 모르는 대학 입시에서 부정을 저질렀단 것은 야구 지도자로서도, 나아가 인간으로서도 상당히 비겁한 짓이기 때문이다. 롯데 팬들은 양승호를 빨리 보내버린 롯데 프런트를 찬양했다. 만일 양승호가 사임하지 않고 계속 감독직에 있었다면 롯데 자이언츠의 2013년은 LG 트윈스의 2012년과 맞먹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사실 양승호의 죄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비단 양승호만의 잘못은 아니고 원래 대학 야구팀 감독이라는 자리 자체가 워낙 꼬인 악습이 많았다. 특히 명문대로 알려진 연세대 및 고려대는 더더욱 그랬고. 같이 구속된 정진호 전 연세대학교 감독도 마찬가지다. 한대화도 동국대학교 감독 시절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그 쪽 사정을 아는 사람 이야기로는 이 당시까지 명문대 대학감독 거친 사람 중에 구속 안 될 사람이 없다고.
이러다보니 2014년 롯데 팬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져, 이 감독 대신 김시진이 복역해야 한다[13]라는 소리가 나왔다.
일단 양승호가 고려대 감독을 하던 시기는 고려대 야구부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감독일 때의 학생들은 08[14]~14년 드래프트 자원이었는데, 먼저 양승호가 감독을 하기 전에 이미 입학한 2007년 기준 2~4학년들의 기록이다.
드래프트연도 | 지명 선수 | 기타 |
2008 | 김용의, 김준, 오현근 |
이성호, 김수형 신고선수로 프로 진출 졸업생 7명 중 5명이 프로 진출, 1명은 프로 입단 좌절 후 고려대 코치를 맡음. |
2009 | 박성호, 여건욱 | |
2010 | 신정락, 임진우, 홍재호 | 이 해에 지명받은 고졸 선수 중 문상철, 조윤성, 김경도, 김건효, 이정윤 5명이 입단을 거부하고 고려대로 진학. |
2011 | 김재율, 강석훈 | 이천웅 신고선수로 프로 진출 |
2012 | 윤명준, 문승원, 임치영, 황정립, 박세혁, 김상호 |
김민, 이철우, 정상원, 김영훈 신고선수로 프로 진출 고졸이 대세가 된 이후 고려대 최대 전성기[15] |
2013 | 라준성, 윤민섭 | 김준완, 김진영, 이명진 신고선수로 프로 진출 |
2014 | 문상철, 조윤성 |
이희웅, 김건효, 김경도,
조우형, 최현철, 황석호 신고선수로 프로 진출 2년 후 이들과 동기였던 이정윤 또한 드래프트에서 지명 |
양승호가 마지막으로 뽑은 학생인 10학번 이후인 고려대 학생 중 김주한을 제외하면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없으며, 이전에는 육성선수까지 합치면 대부분 프로를 밟아보기라도 했는데 가장 최근인 14학번과 군필 12학번의 경우 이승헌 한 명을 제외하면 육성선수조차 되지 못했다.[16]
4. 롯데 자이언츠 감독 선임
롯데 자이언츠 No.80 |
양승호(梁承虎) |
2010년 시즌을 끝으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해임되자 차기 롯데 자이언츠 감독에 대해 여러 무수한 인물들이 하마평에 오르내렸다. '20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것'이 로이스터의 해임 사유였기에 감독으로서의 우승 경력이 있는 인물들인 김재박, 김인식을 비롯하여 당시 계약 기간이 남아있던 김경문 두산 감독[17]의 이름까지 거론되었지만, 막상 구단 수뇌부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사람은 프로 감독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양승호 고려대 감독와 이만수 SK 와이번스 수석코치였다. 이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양승호 고려대 감독이 2010년 10월 21일,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정식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 계약금은 2억원에 연봉 2억원이었다.
이로서 2011년 프로야구에 베어스 출신 감독만 6명[18]에 고려대 출신 감독만 3명[19]이 되었다. 이 두 집합 중 어느 한 쪽에도 발담그고 있지 않은 감독은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과 삼성 라이온즈의 류중일 단 둘 뿐인데, 이 둘은 공교롭게도 한양대학교 - 삼성 라이온즈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2012년 부로 SK 와이번스 감독이 된 이만수도 포함. 그래서 한양대 - 삼성 출신 감독은 2012년 기준으로 총 3명이 되었다.
롯데의 공식적인 양승호 선임 사유는 '젊고 패기에 찬 구단을 이끌어 나갈 새 사령탑으로 그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이다. 하지만 이는 로이스터를 해임할 당시의 사유였던 우승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행보라는 점에서 좀 의아함을 낳고 있다. 사실 실질적 이유는 연봉이 싸다는 게 이유다(...). 롯데 구단은 옛날부터 흑자 구단이면서 정작 가장 필요한 곳에는 돈 안 쓰다가 말아먹는 일이 일상이었고, 이번 인사도 '로이스터 감독이 6억을 받는데[20] 1/3 가격으로 처리할 수 있어서'라는 말이 신빙성을 얻고 있으며, 양승호 본인이 인품이 좋다는 이미지는 있지만, 성적을 잘 뽑아낸 실적도 없고 프로 무대에서는 아직 덜 검증된 인사인지라 여론은 그냥 로이스터에게 돈 주기 싫어서 뽑았다는 쪽으로 점점 굳어가고 있다(...).
2010년 10월 22일 취임식을 했는데... '스몰야구도 시도하겠다.'[21], '로이스터는 선수들과 대화가 부족했다.', '전력분석 아직 잘 모르겠다.', ' 카림 가르시아만한 타자 많다.'[22] 같은 발언들을 폭풍처럼 쏟아내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크보의 흔한 용병타자는 2011년동안 72경기에 출전, 18홈런 61타점을 기록했다.
4.1. 감독 성향
시즌 시작 전, 그리고 시즌 개막 후 4, 5월을 거치면서 나오는 가장 확실한 면모는 '욕을 먹으면 고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즌 개막 이후 고원준 혹사, 홍성흔 외야수 및 전준우 3루수 기용, 빠른 선발 강판 등 전혀 롯데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자기가 아마추어에서 하던 방식을 고집하면서 언론플레이까지 하다가 욕을 먹고 청문회 위기까지 간 이후 어느 정도 2010시즌 롯데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욕 먹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피드백이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투수 운용에 대해서는 임기 초에 엄청난 혹사로 인해 말이 많았다. KBO 리그에서도 2000년 이후에는 거의 사라진, 중무리 투수 운용으로 대표되는 80년대 투수 잡아먹으며 연명하던 감독들의 마인드를 그대로 가져왔다. 한박자 빠른 투수 교체를 하고 있으나 승리조 불펜 투수들을 상당히 자주 등판시키고 있으며 크게 이기고 있는 경기에도 필승조를 투입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리고 이 필승조들은 그 후유증으로 5월달에 퍼져버리면서 회복하지 못했다. 특히, 고원준과 임경완의 잦은 등판은 비상식적인 수준의 혹사였다. 게다가 불펜뿐만 아니라 선발 투수진도 4월 시즌 개막부터 5선발이 아닌 4선발 체제로 돌리고 있다. KBO에서도 KIA, 삼성 등 여름을 대비하여 가끔 6선발 로테이션을 돌리는 팀도 있는 와중에... 심지어 컨디션이 좋은 브라이언 코리를 원래 로테이션에서 하루 앞당겨(4일 쉬고 등판) 4월 7일 삼성전에 등판시킬 것이라고까지 했다. 다행히 4월 7일 삼성전은 우천으로 취소. 4월에는 고원준을 혹사시켰으며, 8개 구단 팬들의 여론이 워낙 나빠지자 5월에는 외국인 브라이언 코리를 혹사시키고 있다. 그리고 코리가 퍼지자 목표를 이재곤으로 바꿔서 불펜 등판 이틀 후 선발 등판을 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이재곤이 부진에 빠지자 이제는 진명호를 굴리고 있다.
특히 불펜의 경우, 시즌 시작 전에 전임감독을 향해 승리조와 추격조의 구분이 없었다며 디스해놓고는 정작 자기 자신은 불펜진에서 승리조, 추격조 구분 안 하고 오히려 선발까지 불펜진으로 땡겨쓰는 행보를 보였다. 그래놓고는 투수들이 안 좋다고 징징 짜면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선수 디스까지 하는 위대한 막장성을 선보이고 있다.
다만 위에 나열한 악평은 시즌 초에 갈피 못 잡았을 때의 이야기고,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한 2011년 말에는 혹사의 강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초보감독의 한계인지 투수 운용은 여전히 미숙한 면이 있었다. 2012년에도 김성배, 이명우, 최대성과 같은 필승계투조를 많이 굴리는 등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았다. 거론된 이 세 명의 투수는 양승호 감독 재임 기간 동안에 3일 연투, 혹은 심지어 4일 연투도 몇 차례 기록된 적이 있다.[23]
작전 면에서는 2011년 초에 번트를 너무 자주 댔고 히트 앤 런, 런 앤 히트 등의 작전을 너무 자주 거는 편이다. 롯데의 팀 공격력이 강하기 때문에 작전을 자주 걸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작전 구사가 많다는 의견이 중론. 2011년과 별 차이 없었던 2010년 롯데 타선에 대해서 김성근 감독이 '그 정도의 타선이면 굳이 작전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나마 2011년 후반에는 작전성공률이 높아지면서 악평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긴 했다. 다만 양승호의 작전 타이밍을 잡는 능력과는 별개로 롯데에 작전야구의 혼합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알게 모르게 수용되는 형세이다. 이게 다 4년째 포스트시즌에서 지지부진한 탓. 2012년 들어 이대호가 빠지고 나서부터는 밀어치기와 희생 야구를 강조했는데, 덕분에 팀 희생타가 리그 2위에 달할 정도로 많아졌으나 정작 타율에 비해 득점이 최하위권에 머무르며 그리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다.
사실상 롯데 재임 2년간 꾸준히 지속되고 지적받은 단점은 양떼 야구로 대표되는 불펜진 혹사 뿐이다. 이외의 대부분의 단점을 스스로 고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필승조 굴리기 자체도 부임 초기의 고원준/코리 혹사에 비하면 혹사라 부르기 미안한 수준.[24] 성장형 감독이 실존함을 잘 보여주던 인물이다. 특히 후임 감독인 김시진이 그보다 더 심한 롱릴리프 조지기와 좌우놀이로 2년간 최강 불펜진을 완전히 태워먹었기에 양승호 감독이 더더욱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똑같이 혹사를 했다면 만년 5,6위 감독보다는 2년간, 그것도 2년차에는 4번타자가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에이스는 군대 가고 거기에다 밀어 때리는 타격코치의 저주까지 서린 팀을 추스려 4강 보내준 감독이 훨씬 낫기 때문.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의 만행이 드러나면서 김시진 감독에 대한 새로운 동정론이 부상했지만, 이와 별도로 대다수 롯데 팬들은 김시진보다 양승호 감독이 뛰어난 감독이라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2012 시즌 직후에는 시즌 막판의 대붕괴와 입시비리가 드러나면서 이 정도로 평가받지는 못했지만, 이후 후임 감독이 2년 연속 이와는 비교가 안되는 DTD를 시전하며 투수진의 뿌리까지 뽑아서(...) 사실상 2014 시즌 이후 제리 로이스터 전 감독과 함께 재평가 대열에 합류했고 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25]
롯데그룹 고유의 본질적 특성과 문제점이 매번 거론되며 프론트가 최악의 평을 듣고 있는 가운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끈 강병철을 포함하여 이명성,김용희와 더불어 21세기에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여 가을야구 진출에 성공한 제리 로이스터, 조원우(2017 시즌 한정)와 함께 좋게 재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역대 롯데 감독 승률 1위 기록 및 정규리그 단일시즌 최초 2위를 기록한 것에 이어서 더더욱 높은 평을 받고 있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충분히 검증되었기에 횡령 범죄만 없었다면 롯데 및 타 팀 지도자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기에 아쉬움도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4.2. 2011 시즌
갈피를 못 잡던 양승호구 시절(2011년 초) |
정식 프로 감독 데뷔 시즌으로 초기에는 프로 감독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호구 소리를 들었으나, 이후 자신의 과실을 깨닫고 고쳐 나가며 팀이 상승세를 타게 되었고, 마침내 정규시즌 2위라는 과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이만수가 감독대행[26]을 맡고 있었던 SK 와이번스에게 패배하여 최종 순위는 3위로 마무리했다.
4.3. 2012 시즌
자세한 내용은 양승호/201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시범경기는 봄데가 아닌 꼴데로 마감하였으나,
9월 14일 기아와의 더블헤더를 시작으로 10월 2일 드디어 승리를 얻기까지의 이 기간동안 14경기에서 1승 1무 12패 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 시기 이전까지 2위를 유지하던 당시 순위가 이 시기의 부진 덕에 4위로 급추락하며 준플레이오프 진출조차 아주 위험해졌다. 또한 로이스터 감독 부임 이후부터 굳어져가던 '여름 이후 치고 나가던' 팀 체질이 다시 뒤틀리기 시작한 시기로도 볼 수 있다.
이런 급작스런 부진에는, 시즌 초부터 계속 이어진 불펜투수들의 잦은 등판 지시가 하나의 원인이고, 부상 선수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이 시기에 우르르 출몰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후반기 막바지 주전들의 줄부상은 코칭 스태프들의 선수 관리에 큰 문제점이 있다는 방증. 이 시기 팀 타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시즌 내내 이대호 없이도 근근히 한 경기 서너점씩은 내주던 팀 타자들이 후반기들어 전염병 돌듯 침묵하는 기간이 늘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팀득점이 2점 내기도 굉장히 버거웠을 만큼 대침묵. 이는 팀의 투수진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시즌 초부터 양감독의 잦은 출첵 등판 지시로 개고생하던 이명우, 최대성, 김성배 등 불펜 투수들에게 더 큰 심리적 압박감을 주게 되었다. 선발들도 이를 아는지라 최소 실점으로 막아야하는 부담감에 같이 힘겨워했다. 이에 투수진마저 이 시기 전후로 퍼지기 시작하며 팀이 급격한 하향세를 타게 되어 순위가 2위에서 3위로, 3위에서 4위로... 추락하게 된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롯데는 정규 시즌 4위를 겨우 기록하며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진작에 순위를 고정짓고 타 팀 전력을 탐색하면서 포스트시즌을 준비해야할 10월 시즌 막바지까지 4강 싸움을 벌이게 되면서, 선수들의 체력 및 부상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이것이 포스트 시즌 중도 탈락의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를 3승 1패로 꺾고 13년만에 상위 시즌인 플레이오프로 진출했으나, 작년에 이어 또 갓동님의 SK 와이번스와의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배하면서 최종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27] 그러나 팀이 13년만에 가을야구 시리즈 하나를 가져간 것은 인정할 만한 실적이라 할 수 있겠다.
10월 24일, 구단과의 만남에서 최종사의를 표명했고 구단이 10월 30일에 이를 수용하며 언론 보도를 탔다. 2011년 초반을 제외한다면 덕장의 면모를 꽤 보여주었고, 전력 대비 괜찮은 성적을 냈기에 많은 팬들이 현장 복귀를 바랐다. 하지만 입시 비리로 인해 사실상 없던 일이 되었다.
5. 전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6[28] | LG 트윈스 | 80 | 31 | 46 | 3 | 8위 | |
통산 | 80 | 31 | 46 | 3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1 | 롯데 자이언츠 | 133 | 72 | 56 | 5 | 2위 | 3위[29] |
2012 | 133 | 65 | 62 | 6 | 4위 | 4위[30] | |
통산 | 266 | 137 | 118 | 11 | | ||
총계 | 346 | 168 | 164 | 14 | |
[1]
공식적으로는 감독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대한야구협회는 프로야구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갔던 사람들은 아마야구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이 제약이 철폐된
1997년까지 프로 출신 인사들은 인스트럭터 직함 등 다른 명목으로 은밀히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2]
다만, 이는 조인성이
비만이였던지라 어쩔 수 없는 감이 있었다. 그래도 프로에서 성공했으니, 잘 됐다고 볼 수가 있다.
[3]
진필중 문서에 잘 나와 있지만, 눈치 작전으로 스카웃 경쟁에서 승리한다.
[4]
훗날
김태형이 OB 주장 시절 우즈의 군기를 잡은 일화가 있다. 정규시즌 경기에서 우즈는 경기 MVP(최우수선수)에 올라 상금을 받았고 김태형은 “우리는 상금을 다른 선수들과 나눈다. 외국인이지만 너도 그래야 한다”고 말했자 우즈가 반발했다. 팀워크를 해치는 선수를 용서하지 않는 김태형은 라커룸이나 구단 버스에서 커튼을 치고 참교육을 시전했다. 커튼을 치는 날에는 선수들이 벌벌 떨었다. 우즈는 결국 순한 양이 됐다고 한다.
[5]
하지만 결국 선동열 감독 영입이 무산되었는데, 이는 선동열 감독이 감독 취임 조건으로 확실한 투자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6]
김경문 감독의 강훈련에 코치진들이 없는 자리에서 강한 불만을 표하자 달랜다고 예전에 같이 겪었던 일들, 즉, 뒷담화를 했다가 김경문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김경문이 따로 양승호를 불러서 같이 일 못하겠다고 하고 프런트에 자신이냐 양승호냐 둘중에 양자택일하라고 압박했다 한다. 김경문 감독은 대표적인 맹장형 감독이고, 절대 권위에 조금이라도 어긋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는다. 이 내용은
박동희가
일요신문에 기고했던 내용.
[7]
이순철 감독이 사퇴한 6월 시점에서는 7위였다.
[8]
이 때 김재박을 따라 코칭스태프, 트레이너, 프런트 및 스카우트 등 일명 '김재박 사단'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인력이 현대에서 LG로 건너왔다.
[9]
이후 기사에 따르면 LG와 양승호 수석코치는 다년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10]
다만
박진만은 공식적으로 체육특기생 수능 최저점수 미달로 인해 대학 진학에 실패한 걸로 알려져 있고, 이후 프로 진출로 방향을 틀어 계약금 3억을 받고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다. 홈런타자 이승엽도 한양대 입학을 앞두고 숙소에 합류했으나 한양대 특유의 군기문화 탓에 수능점수 미달 사유를 들어 삼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11]
90학번 박정혁으로, 휘문고 재학 시절 고교야구 대표 강타자였으나 고려대 재학 중 선배의 구타로 인해 허리 부상을 당했고 결국 야구를 그만둔 비운의 선수였다. 이후 스포츠 에이전시로 전업해 관련 업계에 종사하다가 1999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2]
2003년 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에 지명받고 고려대에 진학한 안산공고 졸업생 구본원. 입학식 전에 합숙을 위해 야구부 숙소에 들어갔다가 입학식도 못 가고 자살했다.
[13]
비슷한 사례로 롯데가 국가라면
백골퍼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사형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2014 시즌 후
진실이 드러나면서 복역해야 하는 인물은 김시진에서
최하진 롯데 사장으로 바뀌었다.
[14]
사실 08~10년 드래프트까지의 학생들은 양승호가 직접 뽑은 것은 아니라 좀 애매하긴 하다.
[15]
08학번 12명 중 윤석, 강윤중을 뺀 10명이 프로 진출에 성공했고, 6명이나 드래프트되었다. 2018년 기준 4명이 현역이다.
[16]
고려대 야구부 14학번은 유급한 임양섭을 제외하면 전원 졸업. 김규남같이 독립 리그로 진출한 사례도 있긴 하다.
[17]
리그에선 우승한 적 없지만
올림픽에선 있으니까...
[18]
김성근(
감독 출신), 김경문(OB 선수 출신), 한대화(OB 선수 출신), 박종훈(OB 선수 출신),
조범현(OB 선수 출신), 양승호(OB 선수 출신).
[19]
김경문(두산), 박종훈(LG), 양승호(롯데). 만일 2010 시즌이 끝나고 해임되지 않았으면 선동열 역시 여기에 들었겠지만, 짤린 탓에...
[20]
사실 로이스터 몸값은 3억 6천만원선. 리그 중간 정도 밖에 안 된다. 6억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재계약 당시 사이닝 보너스가 3억 추가되었는데 연봉과 보너스를 합치면 7억 정도를 받게 되어서인 듯. 물론 통역비나 기타 부가 비용까지 다 들어가면 4억원선이 되긴 한다.
여기에 정확한 연봉 액수에 대해 나온다.
[21]
정확히는 스몰야구만 하겠다는 것이 아닌 선이 굵으면서 스몰야구도 하겠다는 것으로 기사 내용으로 보면 롯데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22]
가르시아의 경우는 좀 미묘해서 통산 성적을 보면 높지만 연도별 성적을 따지면 해가 갈수록 낮아지는 성향을 보인다.
[23]
사실 프로야구 초창기나 지금이나 혹사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감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24]
그러나 2년차에도 김성배, 이명우를 중심으로 김사율, 강영식, 최대성 등 불펜진에 가해진 부하는 상당했다. 문제는 김사율을 제외한 선수들은 후임인 김시진이 더 확실하게 조졌다는 것(...)
[25]
실제 입시 비리로 인하여 이미지는 좋지 못한다 할지언정 2019년 시즌을 앞두고 롯데에서 양승호에게 다시 한번 감독 제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양승호 측에서 거절했고 롯데는
양상문을 새 감독으로 선임한다.
[26]
이만수의 감독 정식 계약은 2012년부터였다. 2011년 당시는 2군 감독에서 1군 감독대행으로 바뀌었던 상황.
[27]
중계 도중 한 팬의 판넬 응원이 화제가 되기도.
[28]
시즌 도중 자진사퇴한 이순철 감독대행
[29]
플레이오프 敗
[30]
플레이오프 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