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천바크 차관과 대치 중인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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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allace in the Schoolhouse Door1963년 6월 11일 미국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가 흑인 학생 2명[1]의 수업 등록을 막기 위해 대학 강당의 문을 막아선 사건. 결과적으로 주지사의 방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명령으로 금방 끝났으며 두 학생의 등록은 가능해졌다.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 관련 사건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미국 남부의 흑인 차별 분위기를 보여주는 해프닝이다.
2. 배경
이 사건은 미국 대법원의 대표적인 인권 관련 판례인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판결은 교육 시설은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이에 따라 선고가 이루어진 1954년 이후 미국에서 교육기관의 흑백 분리는 철폐되었으며 서서히 흑인 학생들의 교육권이 보장되기 시작했다. 앨라배마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1956년에는 첫 번째 흑인 학생이 입학했지만 금방 중퇴했다. 1957년엔 이 사건과 비슷한 리틀록 사건이 일어나면서 흑인들의 교육권은 탄력을 받게 된다.3. 내용
그렇게 또다시 단 한 명의 흑인 학생도 없이 시간이 흐르다가 1963년 흑인 학생 비비언 멀론과 제임스 후드가 앨라배마 대학교에 등록을 신청했다. 그들의 등록 소식은 미리 알려져 있었고 흑인에 대해 특히 배타적이었던 앨라배마에서 일어날 예정이었기에 백악관에선 두 학생을 위해 당시 미 법무차관 니콜라스 캐천바크(Nicholas Katzenbach)를 파견했다.[2]두 학생은 등록 서류와 함께 학교의 허가를 위해 앨라배마 대학교의 강당에 도착했는데 미리 소식을 들었던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3]가 건물의 문앞을 연단과 앨라배마 주경찰과 함께 막아서 진입이 거부되었다. 이는 흑인 학생의 등록을 막고 아울러 불러모은 기자들 앞에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캐천바크는 월리스에게 물러서라고 했지만 월리스는 무시하고 계속 버텼다. 캐천바크는 바로 백악관에 이를 보고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케네디는 행정명령 11111호를 발동하였다.
Providing Assistance for the Removal of Obstructions of Justice and Suppression of Unlawful Combinations within the State of Alabama.
앨라배마 주의 정의에 대한 방해물을 제거하고 불법 조직을 제압할 것을 지원함.
앨라배마 주의 정의에 대한 방해물을 제거하고 불법 조직을 제압할 것을 지원함.
이에 따라 앨라배마의 주방위군은 연방화되어 주지사에게서 통수권을 빼앗았고[4] 몇 시간 후 주방위군 사령관 헨리 그레이엄(Henry Graham)이 앨라배마 대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는 주지사에게 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입구로부터 물러설 것을 요청하였고 결국 주지사는 길을 터주었다.
4. 기타
- 이 사건은 모여든 수많은 기자들로부터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포레스트가 당시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합성되어 나타난다.[5] 그리고 또한 해당영화에서는 조지 월리스의 암살 미수 사건도 잠깐 나온다.
- 조지 월리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약 딥 사우스 최고의 스타 정치인이 되어, 연임이 불가능했던 앨라배마 주지사의 임기가 끝난뒤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964년 린든 B. 존슨과 상대했으며 1968년에는 제3당인 미국독립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등 정치적 황금기를 걸었다.
- 상술한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후 자신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안 월리스는 충격을 받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
5. 둘러보기
[1]
비비언 멀론(Vivian Malone)과 제임스 후드(James Hood)
[2]
참고로 당시 법무장관은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F. 케네디였다.
[3]
주지사 취임 연설에서 "인종분리는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진짜 인종주의자라기보다는 정치 초기엔 온건한 입장이었으나 낙선한 뒤 인종주의자인 척하고 다닌 것에 가깝다. 인종차별 분위기가 만연한 앨라배마 지역선거에선 인종분리를 외치고 전국 단위인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때는 자기는 항상 인종 문제에 온건파였다고 외치는 등 여론에 편승해서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서 수시로 말을 바꾸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정치인생 말기에는 흑인들의 정치적인 세력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을 감지하고는 앨라마바 주지사 선거에서 흑인들을 과감하게 고위직에 임명해서 적극적인 인종차별 철폐 정책을 펼치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서 당선되고 실제로 실천했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인종차별과 인종차별 반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정치생명을 이어간 인물이다.
[4]
리틀록 사건 때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칸소 주방위군을 연방화한 적이 있었다.
[5]
https://www.youtube.com/watch?v=v9lLVCymf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