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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3:39:41

알프레도 포니

알프레도 포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Switzerland SFV 2010.png

18대
클럽
파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로고.svg

24대, 36대
파일:AS 로마 로고.svg

26대, 29대
}}} ||
알프레도 포니의 수상 이력
{{{#!folding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파일:Alfredo Foni.jpg
이름 알프레도 포니
(Alfredo Foni)
출생 1911년 1월 20일
이탈리아 왕국 우디네
사망 1985년 1월 28일 (향년 74세)
스위스 루가노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포지션 풀백
신체조건 172cm | 71kg
소속팀 우디네세 칼초 (1927~1929)
SS 라치오 (1929~1931)
칼초 파도바 (1931~1934)
유벤투스 FC (1934~1947)
국가대표 23경기 ( 이탈리아 / 1936-1942)
감독 베네치아 FC (1947~1948)
FC 키아소 (1948~1949)
카살레 FBC (1949~1950)
FC 파비아 1911 (1950~1951)
UC 삼프도리아 (1951~195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52~1955)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위원회 (1954~1958)
볼로냐 FC 1909 (1958~1959)
AS 로마 (1959~1961)
FC 키아소 (1961)
AS 로마 (1962~1963)
스위스 대표팀 (1964~1967)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68~1969)
AC 벨린초나 (1970~1971)
만토바 1911 (1973)
FC 루가노 (1974~1975)
FC 루가노 (1976~1977)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2.3. 이후
3. 코칭 스타일 & 평가4. 어록5. 뒷이야기6. 수상
6.1. 선수
6.1.1. 클럽6.1.2. 국가대표
6.2. 감독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우디네 출신인 포니는 16살이던 1927년에 고향팀 우디네세 칼초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포니는 SS 라치오 칼초 파도바를 거쳐 1934년에 유벤투스 FC에 입단하게 되었다.

포니가 입단했던 1934년 당시의 유벤투스는 세리에 A 4연패를 차지했던 강팀이었지만 잔피에로 콤비[2],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 루이스 몬티, 라이문도 오르시 등 주전 멤버들의 나이가 30대 초중반이 되던 시점이었다. 포니는 파도바 시절엔 유틸리티 플레이어였지만 칼리가리스와 로세타의 후계자로 유벤투스에 들어왔고 입단 시즌에 유벤투스의 세리에 A 연속우승 기록을 5로 늘렸다. 그리고 로세타가 팀을 떠난 이후로 포니는 피에트로 라바와 함께 당시 유럽 클럽팀들 중 최고 수준의 풀백 듀오를 구축했다.

하지만 유벤투스는 나머지 포지션의 세대 교체에 실패하면서 세리에 A 왕좌의 자리에서 끌려내려갔고 포니를 포함한 유벤투스 선수들은 한동안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포니는 그 와중에도 1942년까지 7시즌간 전경기에 출전을 하면서 유벤투스의 수비진을 지켰다.

1943년, 포니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징집으로 유벤투스를 떠났다가 2년 후에 돌아왔고 1947년에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포니는 1936년 올림픽 1라운드 미국전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에 데뷔했다. 포니는 이탈리아의 남은 모든 경기에도 전부 출전했고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년 후에 열린 월드컵의 이탈리아 대표팀 명단에 포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1라운드 노르웨이전에서는 포니 대신 지난 월드컵 주전 풀백이었던 에랄도 몬첼리오가 선발 명단에 있었다. 하지만 8강 프랑스전부터 포니가 몬첼리오를 대신했고 소속팀 유벤투스에서 3년간 호흡을 맞춰온 피에트로 라바와의 풀백 라인이 재결성되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FIFA 월드컵 2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이로써 포니는 라바, 베르토니, 로카텔리와 더불어 올림픽과 월드컵을 모두 제패한 이탈리아의 4인 중 하나가 되었다.

포니는 1942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득점은 없었다.

2.2. 감독

감독이 된 포니가 처음 맡은 팀은 세리에 B로 막 강등당한 베네치아 FC였다. 베네치아의 목표는 세리에 A로의 재승격. 하지만 포니가 이끌었던 베네치아는 세리에 B 4위에 그쳐 승격에 실패했고 포니는 베네치아를 떠났다.

베네치아에서 나온 포니는 FC 키아소, 카살레 FBC, FC 파비아 1911, UC 삼프도리아를 거쳐 1952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포니는 인테르를 이끌고 2차례 스쿠데티를 차지하며 일약 명장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포니는 1954-55 시즌에 인테르가 8위에 그치자 해임되었다.

포니는 1954년부터 이탈리아 기술위원회 소속으로 대표팀을 맡았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팀 자체가 완전히 박살나있던 상황이었다. 이탈리아는 북아일랜드에 밀려 1958년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고 그 결과는 기술위원회의 전원 사퇴였다.

포니는 볼로냐 로마 등을 거쳐 1964년부터 스위스 대표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스위스의 감독으로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나갔지만 스위스의 성적은 3전 전패. 1967년에 포니는 경질당했다.

잠시 인테르의 감독을 맡고 스위스에 건너간 포니는 1977년 FC 루가노에서 감독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3. 이후

포니는 1985년, 스위스 루가노에서 사망했다.

3. 코칭 스타일 & 평가

포니의 전술 스타일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시절부터 카테나초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포니의 카테나초는 네레오 로코의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는데 수비를 중시하는 것은 비슷했지만 포니의 카테나초는 조금 더 자유로운 공격에 비중을 두었다.

4. 어록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지 않는 것이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감독 재임 시절의 알프레도 포니

5. 뒷이야기

6. 수상

6.1. 선수

6.1.1. 클럽

6.1.2. 국가대표

6.2. 감독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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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콤비는 아예 1934년 월드컵을 끝으로 선수 생활 자체를 그만두었다.